수분이 달아난 독아지 뚜껑은 한결 가볍고 그 위에 몇 줌 호박씨를 말리는 사이에 산새들이 수없이 다녀가서 여기저기 콩알만큼 비었다
고무신 속엔 봄이 가득 들어와 걸음마다 발바닥이 간지럽다
지나가는 바람보다 이웃 노부부의 두엄 더미가 더 들떠서 구린내가 봄 향기같이 올라온다
《고개 숙인 모든 것》, 푸른 사상, 2017
신라의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老松圖)는 새들이 앉으려다가 부딪쳐 떨어졌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새들이 부딪힌 사연보다 더 놀라운 것은 세월이 지나 단청(丹靑)을 하였더니 날아드는 새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일화는 서양에도 있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Zeuxis)와 파라시우스(Parlasios)가 자존심을 건 그림 대결을 벌였다고 한다. 제욱시스가 포도를 그리자 새들이 쪼아 먹으려 날아들었다고 한다. 우쭐한 제욱시스가 이제 네가 그린 그림을 보여 달라고 하자 파라시우스는 커튼 뒤에 그림이 있으니 직접 보라했다. 커튼을 걷으려 손을 내뻗는 순간 제욱시스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건 커튼이 아니라 커튼을 그린 그림이었다. 사물이나 풍경의 재현(再現)이 치밀하고 뛰어나면 새나 파라시우스처럼 선뜩 대상에 다가서게 되는 것 같다. 그림의 재현과는 다른 차원이겠지만 시의 묘사도 그런 충동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박노식 시인의 시 <봄 향기>는 따스한 봄날 시골집의 고즈넉한 풍경이 시각, 촉각, 후각, 청각을 통해 전달하고 있어 내가 그곳에 서있는 것 같은 아련한 느낌을 전한다. 봄 햇살이 가득한 ‘장독대’의 풍경과 ‘독아지 뚜껑’에 널린 호박씨를 쪼아 먹으려 분주히 날아오고 날아가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눈과 귀에 선연하다. 언어로 묘사된 풍경의 매력은 그림이 주는 느낌과 사뭇 다르다. 시로 묘사된 자연은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내밀함과 친숙함을 더 느끼게 만든다. 그 내밀함의 반경을 박노식 시인은 촉각과 후각을 통해 확대하고 있어 매력적이다. “고무신 속엔 봄이 가득 들어와 걸음마다 발바닥이 간지럽다”는 표현은 정말 놀랍다. 봄이 주는 가벼움과 생명력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한 시는 드물 것이다. 신발 안에 봄이 들어왔다는 기발한 상상력과 그 봄이 발바닥을 간질인다는 시인의 생각이 나의 발바닥까지 간지럽게 만드는 것 같아 몸이 움찔한다. 여기에 ‘두엄 더미’의 친숙한 ‘구린내’가 더해져 봄의 향기가 물씬하게 느껴진다.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이 후각이다. ‘구린내’가 불쾌한 감정을 주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잊고 있던 고향의 냄새를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쟁의 치열함이 생존의 절박이 되어가는 시대에 ‘고향’이라는 단어는 이방인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고향의 소리와 냄새를 잊어간다는 것은 삶의 아늑함을 잊어간다는 것이리라.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일렁여 눈 밑이 아득해지는 3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