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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16세기 잉글랜드의 국왕이다. 헨리 8세의 적차녀로 어머니는 앤 불린.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이자 메리 1세의 이복 여동생으로, 언니인 메리 여왕의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헨리 8세의 자식 중 마지막 생존자인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튜더 왕가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고, 그녀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이후로 스튜어트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녀의 재위 기간은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an era)라 불리며 엘리자베스 시대를 가리키는 영단어 Elizabethan은 엘리자베스 1세 재위기의 건축, 의복, 문화 양식 등을 나타내는 고유한 용어가 되었다. 재위 당시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던 펠리페 2세의 스페인 제국 무적함대를 칼레 해전에서 완전히 격파하고, 동인도회사를 세우는 등, 수많은 치적을 남겨, 전통적으로는 잉글랜드가 강대국으로 부상한 기틀을 마련한 여왕으로 평가되어왔다. 2차 대전 이후의 영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평가에 큰 수정이 가해져서 과거만큼은 미화되고 있지는 않으나, 아무튼 초기 근대 잉글랜드의 강대국화를 상징하는데다가 여왕 본인의 업적도 큰 거대한 인물임은 분명하고, 대중적으로는 평가가 여전히 높다. 그 때문에 영국은 여왕이 통치해야 강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사실 영국이 여왕으로 유명한 이유가 이웃인 프랑스와 독일은 살리카법 때문에 여왕을 배출하지 못해서 돋보이는 것도 있다.
현대 기준으로도 여성으로서 큰 키인 170cm대 중반에 달해,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키가 컸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에서 헨리 8세와 그의 제1계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간통죄로 고발하자 그녀는 생존 자체가 위험했다. 앤 불린은 3주 만에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남아 공주의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다.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 뒤 엘리자베스는 궁중에서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기만 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복 언니 메리 공주가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하였으며, 부왕인 헨리 8세마저 그녀를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대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엔 첫 아이이자, 무사히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라 총애받았던 언니 메리 1세와 고대하던 아들로 태어나 사랑받았던 남동생 에드워드 6세처럼 엘리자베스는 한동안 귀여움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나 믿었던 앤 불린이 아들을 낳지 못한단 사실에 헨리 8세가 나중에 크게 실망해서 점점 아버지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다. 그녀 자신은 아버지에 대해 가족으로서의 애정은 없었지만 군주로서의 롤 모델로는 존경했던 듯하다고.
거기다 생모 앤 불린은 백성들의 지지도 별로 받지 못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앤 불린이 참수형에 처해지는 슬픔을 겪게 되고, 과거 자신의 입지를 위해 이복언니 메리 1세가 공주작위와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사생아로 전락했던 것처럼 자신도 작위와 계승권을 잃고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불우한 환경에서도 엘리자베스는 총명하며 공부를 좋아했고, 교양인이었던 헨리 8세의 6번째 왕비이자 의붓 어머니인 캐서린 파 아래에서 열심히 교양을 습득했다. 당시에는 귀족들 사이에서 여아들도 남자 못지 않게 교육시키는 풍토가 있어 엘리자베스 역시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사사해 각종 학문을 배웠다.
1547년에 부왕인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의붓어머니인 캐서린 파와 잠시 함께 살았다. 파는 헨리 8세와 사별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그의 3번째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의 오빠 토마스 시모어와 재혼했기에 엘리자베스는 시모어와도 함께 살게 됐다. 그런데 야심만만한 시모어가 왕위계승권을 가진 엘리자베스에게 추근대는 일이 생겼다. 이를 곧 눈치 챈 파는 그 즉시 엘리자베스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자칫하면 왕위계승권자로서의 명예를 크게 훼손당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추문이었으나 그때 엘리자베스는 고작 14세의 소녀에 불과했으며, 캐서린 파가 엘리자베스를 진심으로 걱정해 조언해 주었기에 엘리자베스가 시모어와 절연함으로써 이 추문은 한때의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
4살 차이가 나는 이복 남동생 에드워드 6세와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고 이복언니 메리 1세와도 어린 시절에는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앤 불린의 딸임에도 동생에게 애정을 쏟았지만 점차 정치적 입장과 종교의 차이로 인해 사이가 벌어졌다. 메리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모반 혐의로 런던 탑에 감금당하며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혐의를 적극적으로 부인한데다 다행히 증거가 없어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메리 1세는 엘리자베스와 애증어린 줄다리기를 했으나 결국 죽음을 눈 앞에 두자 할 수 없이 헨리 8세의 마지막 남은 후손인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할 당시 잉글랜드는 여러 모로 불안한 상태였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어머니 앤 불린과 결혼하면서 세운 수장령에 의해 잉글랜드는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의 전신)로 독립했으나, 언니 메리 1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로마 교회로 복귀하여 가톨릭 국가로 되돌아선 바 있었다.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펠리페 2세는 가톨릭교회의 맏딸로 불릴만큼 골수 가톨릭인 에스파냐의 왕이었고, 프랑스 또한 종교적으로 분열되긴 했으나 왕가가 있는 파리중심은 골수 가톨릭 신앙으로 역시 개신교인 위그노들을 탄압했기에 종교적으로 긴장관계였다.
전통적으로 프랑스는 공통의 적을 가진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어왔는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는 프랑스왕의 장자 도팽(왕세자를 이르는 말)인 프랑수아 2세와 결혼하여 동군연합이 될 예정이라 잉글랜드를 적대 하고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외가가 프랑스 왕가에서도 한수 접어주는 골수 가톨릭 기즈 가문으로 이들 역시 가톨릭 신자였기때문에 가톨릭계는 헨리 8세의 이혼을 무효로, 앤 불린은 그의 첩이며 그사이에서 낳은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라고 주장해서 엘리자베스를 인정하지 않고, 메리 스튜어트야말로 진정한 잉글랜드의 여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열강의 틈새에서 정치적 격변에 시달리는 잉글랜드의 지위는 여러 모로 불안정했다. 더군다나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아직도 종교적으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은 메리 여왕이 교황청에 잉글랜드 교회를 조공으로 바친 상황에서 다시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고 대륙의 개혁신앙이 뿌리내리길 바랐고 가톨릭 교도들은 종교적으로 별로 열성적이지 않은 엘리자베스를 가톨릭 가문과 결혼시켜 잉글랜드의 가톨릭의 입장을 약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런 탓에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의 신랑감으로 여러 명문가의 사람을 고려하고 있었고, 또한 엘리자베스에겐 많은 구혼이 들어왔다.
2.3. 혼담을 거절하다
맨 처음에 들어온 건 펠리페 2세와의 혼담이었는데, 이건 그가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것과 잉글랜드에서의 그의 평판이 나쁘다는 2가지 이유로 인해 바로 깨졌다. 하지만 그 후에 들어온 혼담의 경우 당시 잉글랜드의 상황 때문에 바로 깨지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들어온 대표적인 혼담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막내아들 카를 대공,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신교도 귀족 로버트 더들리 경, 신교도 국가의 국왕 스웨덴의 에리크 14세 등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혼담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이유로 질질 끌다가 흐지부지되었다.
혼담 가운데에선 같은 시대를 살던 러시아의 뇌제 이반 4세도 있었다. 물론 그의 악명을 잘 알던 그녀는 러시아 사신에게 한마디로 거부했다. 사신은 돌아가면 죽는 거 아닌가 걱정했지만 이반 4세는 기분 나쁜 얼굴을 했어도 사신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인지 여왕의 시녀였던 레이디 메리 헤이스팅스에게 청혼을 했다. 잉글랜드와의 교류를 강화하기 위함이었지만 레이디 메리는 '미개한 야만인의 나라 러시아에 가고 싶지 않다'고 떨었다. 여왕도 이를 허락하지 않아서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으나, 레이디 메리에게는 '러시아의 차리나(차르의 황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녀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들이 붙여준 별명은 버진 퀸.(The Virgin Queen, 처녀 여왕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야사나 설이 존재한다. 성적으로 흥분하면 강력한 질 협착증이 찾아와 남성의 검열삭제를 박살내버린다든가, 생식기가 기형이라거나 하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것은 주로 가톨릭 국가들의 악의에 찬 소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녀가 생식이 불가능하다=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소문이 있어 에스파냐 대사가 특별히 조사를 해 보았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녀의 생식 능력에는 별 이상이 없다는 결론만 나왔다.
사실은 결혼하지 않았을 뿐 이미 수십 명의 남자를 침대로 끌여들였다는 등의 악질적인 소문도 존재했다. 대부분은 정적들이 퍼트린 험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증명됐지만, 이후로도 소문은 종종 살아남아서 몇몇 인물이 여왕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남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와 같은 시대 인물인 셰익스피어마저 그녀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할 지경이었다.
본인이 예전에, 메리 1세가 추진하던 자신의 정략결혼에 반대하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이 위와 같은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일단 헨리 8세가 국교를 성공회로 갈아치운 후에도 왕족들이 정통 기독교 국가의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는 문제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는데, 엘리자베스 1세는 혼인 제의가 들어와도 임하는 척하면서 성사시키지 않는 식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결혼한 여왕"이란 예찬 분위기가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인이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사가들 사이에선 크게 부군과 권력을 나누기 싫어서와 성장하면서 안 좋은 결혼 관계를 많이 봐 왔기 때문에 결혼을 싫어하게 된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사실상 그녀의 결혼은 문제가 많았다. 신교 국가인 북유럽을 포함해서 그녀 자신과 비슷한 신분을 지닌 외국의 왕족은 대부분 가톨릭 교도였기에, 이들 중에서 남편을 택할 경우 잉글랜드 국교회가 흔들릴 것이며 외세의 간섭 또한 심해질 것이었다. 실제로 메리 1세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인기를 잃은 이유 중 하나는 이 때문이었다. 자국의 신하와 결혼하는 것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음이 명백했다.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명백한 예였다. 그러나 당시의 관념상 여성이, 그것도 한 나라의 여왕이 결혼하지 않고 후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혼은 두고 두고 문젯거리가 되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외세로 둘러싸인 잉글랜드에서 미혼이라는 그녀의 신분이 가장 큰 자산이었기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결혼 교섭이 진행될 여지가 있다면 각국에서 침략을 개시할 이유가 없다). 혼담 진행 과정을 보면 혼담이 들어올 때마다 대부분 반가워하며,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 진전이 이뤄지면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종교, 비용, 영토 등) 파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각각 근거가 있는 주장이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분명히 말한 적이 없으므로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않았기에 나중에는 성녀처럼 공경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조차 두지 않은 탓에 국내에서는 계속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여왕이 갑자기 사망하기라도 할 경우 왕위를 둘러싼 혼란은 불 보듯 뻔하거니와 최악의 경우 가톨릭 국가가 지지하는 가톨릭교도가 왕위에 오르게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신하들에겐 골칫거리였고 신하들은 그녀에게 제발 결혼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여왕은 언제나 결혼할 듯 결혼할 듯 하면서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이 40살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신하들도 여왕의 혼담에 대해서 찬성보다 반대 입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노산으로 인한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출산하다 사망하는 여인이 드물지 않은데, 노산이 예상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신하들은 결국 여왕 폐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단 한번 약혼까지 한 적이 있는데 상대는 프랑스의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막내아들인 앙주 공작 프랑수아 왕자였다. 이 때는 여왕의 나이가 이미 46세로 후사를 볼 가능성이 없어 후계가 꼬일 가능성이 없기도 했고, 당시 22세였던 프랑수아가 청혼을 위해 직접 잉글랜드에 찾아오자 아들뻘인 이 젊은이를 매우 마음에 들어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여왕은 신하에게 "앙주 공작이 못생겼다고 들었는데 직접 보니 괜찮다"고 말했고 이내 '나의 개구리'라는 애칭까지 붙여주면서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와의 결혼도 불발되었는데, 네덜란드의 국가원수로 초빙되어 갔던 프랑수아가 안트베르펜에서 반대 세력에게 대패하고 쫓겨나자 자신의 평판에 흠이 갈 것을 염려했던 엘리자베스 여왕 측이 파혼한 것이다. 자신이 다스릴 예정이었던 나라와 결혼하게 될 여왕까지 모두 잃은 프랑수아는 1년 뒤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후계에 대한 말에 몹시 민감해서, 누군가 그에 대한 진언을 올리기라도 하면 몹시 격노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후계에 대해서 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후계를 정하는 순간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여성이었고 당시의 가치관으로써는 여성은 남성의 부속적인 존재로, 왕위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그녀가 걱정한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후계자로 지목한 자가 남성이라면 그를 옹립하기 위해 반란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서 퇴위하라는 압박을 받을 것이었다. 여성이어도 그녀보다 젊은 이상 언제 그녀의 자리를 노릴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왕위 계승권을 지닌 왕가의 여성들(특히 아들이 있는 경우)은 언제나 엘리자베스의 경계를 받았다. 실제로 그녀가 즉위하기 전 제인 그레이의 예도 있었다.
그러나 여왕도 알고 신하들은 더 잘(?)알고 있었지만 후계감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밖에 없다는 건 명확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미혼이라 이미 튜더 왕조가 단절이 예정된 상태에서 헨리 8세의 후손들은 남지 않았다. 결국 헨리 7세의 여계 후손 중에서 후계감을 골라야 했고, 가장 최우선 순위는 헨리 7세의 장녀이며 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의 후손이었다. 마거릿 튜더는 앞서 스코틀랜드로 시집가서 제임스 4세와 결혼했고, 제임스 6세는 헨리 7세의 현손자이며 마거릿의 증손자였기에 혈통면에서도 최우선 순위였고, 엘리자베스의 항렬상 손자뻘인 6촌으로 나이도 적절했다.
스코틀랜드 역시 종교개혁으로 장로회파 개신교 국가가 되었기에, 복음주의 성향 신하들과 로마 가톨릭에 치를 떠는 국교회 교도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후계자감이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는 전임 메리 스튜어트 시절 어그로를 끈 것과 달리, 잉글랜드의 대외 정책과 크게 마찰을 빚지도 않았고 제임스 6세마저 칼뱅파 교리에 따라 교육을 받았었다. 1603년 임종이 가까워졌을때 여왕이 자리에 드러눕자 신하들이 (다 알면서도 혹시나)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냐 물어봤고 여왕은 이렇게 답했다.
"왕의 자리는 왕의 후손이 물려받아야지 농부의 자식이 물려받을 수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대답하니 신하들은 그게 누구인지 잘 생각나지 않아서 힌트를 달라고 청원했다. 그러자 여왕은 벌컥 화를 내면서
"스코틀랜드에 사는 친척밖에 더 있겠느냐!"
라고 일갈했다. 실제론 여왕이 임종 전 비몽사몽할 때 재빠른 신하들은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오는 제임스 왕을 환영하러 나가서 온갖 아부를 떨고 있었다고...
치세 말년에는 충신이었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가 1601년 런던에서 봉기를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처형당하여 고령의 여왕은 심신이 지쳐갔고, 결국 1603년 3월 24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옆자리는 애증의 대상이던 언니 메리 1세가 안장되어 있다. 두 사람의 묘에 가보면, 두 자매의 애증이 드러나면서도 뭔가 초월한 것 같은 비문을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사후에 제임스 1세가 세우도록 한 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권과 무덤을 함께 공유한, 엘리자베스와 메리 두 자매가 여기 부활의 희망 속에 잠들었노라
여담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곳의 지명을 버지니아라고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버지니아로 이주시킨 남자 85명과 여자 17명이 모두 풍토병으로 죽어버려서, 1620년대에나 청교도 106명이 메이플러워호를 타고 메사추세츠 주로 이주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아메리카 대륙 개발이 시작된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유명인
해적으로 유명한 사략선장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주로 에스파냐의 선박을 습격하는 등 많은 재보를 모았고 여왕은 이를 매우 치하하여 기사 작위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훗날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가 침공해 왔을 때도 크게 활약했으며 위대한 잉글랜드의 영웅으로 후세까지 회자되었다. 다만 칼레 해전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사략선 승조원들은 대개 역병으로 육지에서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다.
유명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역시 동시대의 사람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연극을 특히 좋아했으며 청교도 신하들이 런던 내의 극장을 폐쇄하자 불호령을 내려 당장 연극을 재개하도록 했을 정도라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역시 여왕이 무척 좋아했다. 셰익스피어는 여왕의 요청으로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이란 작품을 쓰기도 했다.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쓸 때 무척 허겁지겁 만들었는데 여왕은 몹시 즐거워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젊고 유능한 남자들을 총애하여 곁에 두기로 유명했다. 여왕의 총애를 받은 총아들 중 특히 유명한 사람은 여왕의 평생의 친우이자 연인이었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경, 월터 롤리 경, 뛰어난 시인이자 자처해서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뛰어들어 잉글랜드 원정군을 지휘하다 전장에서 전사한 필립 시드니 경, 유럽 최초로 조직적인 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평 받으며 무적함대의 침략을 비롯한 수많은 외교적, 군사적 위기에서 슬기로운 대처를 한 프랜시스 월싱엄, 해적 출신으로 사실상 엘리자베스 1세의 전투력이자 오른팔인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 당대의 명재상이자 잉글랜드의 위대한 정치가였던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던 마운트조이 남작 찰스 블라운트 경, 레스터 백작의 양자이자 여왕의 말년에 특히 총애받았던 에식스 백작 등 많은 청년들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또한 여왕은 프랑스의 앙주 및 알랑송 공작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이렇게 기나긴 여왕의 남자(...)들의 목록을 늘어 놓으니 은근히 막장 삘이 나기도 하다. 그러나 야사나 아침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부분은 접어두고 이렇게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을 주위에 두고도, 그 권력의 핵심을 항상 쥐고 있었다는게 엘리자베스식 리더쉽의 성공적인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시대 잉글랜드의 정책 결정 과정은 주로 국무재상이자 왕실 내각의 수장이었던 벌리 남작이 큰 외교적 틀을 세우고, 프랜시스 월싱엄 경 휘하의 마드리드에서 모스크바까지 전 유럽에 포진해 있던 정보와 외교 네트워크가 실무를 집행하면, 사적으로 여왕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레스터 백작이 애교스런 연인의 속삭임(...)으로 여왕을 설득하고 이러한 중신들이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확실하게 무게를 실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스템이 그렇게 안정적인 것도 아니다. 이렇게 대신들이 알아서 일 처리를 하고 군왕은 결정적인 대목에서만 개입하는 시스템은 권력의 핵심이 흩어지고, 대신들 몇몇 중심으로 왕실 내 계파가 형성되는 역효과가 있었다. 실제로 이런 시스템의 취약함이 드러난 경우가 파리에 주재한 잉글랜드 대사 에드워드 스테포드가 스페인 정부에게 뇌물을 먹고, 벌리 남작과 프랜시스 월싱엄 사이의 미묘하게 껄끄러운 관계를 이용해 스페인을 위한 이중 첩자질을 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문제와 봉건적 귀족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하루도 왕권이 안정적인 날이 없었던 16~17세기 유럽 왕실에서 이렇게 걸출한 신하들을 밑에 두고 이러한 인재들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신뢰를 주면서도, 또 그 잘난 대신들이 왕권을 날로 먹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런 저런 가십거리와 막연한 낭만주의적 역사관 속에 어느 정도 묻힌 감이 있는 군왕이자 정치가로서 엘리자베스 1세의 역사적 위대함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