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영국과 스페인 해전(1585년~1604년)
1588년에 벌어진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잉글랜드 왕국 함대의 해전. 영국-스페인 전쟁(1585년~1604년)의 주요 전투다. 영국의 해적이자 제독인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활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투자체에서 입은 손실은 별로 크지 않았으나 스페인 함대는 북해에서 만난 두 번의 강한 태풍으로 인해, 퇴각하면서 81여 척의 배가 침몰되는 큰 손실을 보았고, 결과적으로 레판토 해전 이후 승승장구하던 스페인 함대의 영국 침공은 좌절된다.
해양 패권을 장악하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부를 축적하던 스페인과 이를 뺏어먹으려던 잉글랜드는 1585년 충돌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잉글랜드인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사략선이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며 스페인 선박을 공격해 약탈하였으며, 이 30만 파운드가량의 막대한 재화를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쳤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드레이크에게 작위와 훈장을 수여하였다. 스페인은 드레이크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잉글랜드는 이를 무시하였으며, 해군까지 가세해 해적질에 열을 올렸다.
펠리페 2세는 너무 승리를 과신한 나머지 이 작전 계획서를 출판해서 팔았다. 덕분에 잉글랜드는 스페인군의 작전과 물자, 장비, 병력 현황을 미리 알 수 있었고, 심리전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엄연한 최고 기밀인 작전 계획서를 출판해서 팔았다는 것을 최악의 악수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당시 칼레 항구는 수심이 얕아서 흘수가 깊은 대형 선박이 안심하고 정박할 만한 시설이 없었다. 게다가 네덜란드 독립군의 해상 유격대, 일명 ‘바다의 거지단(Watergeuzen)’이 툭하면 소형 선박을 타고 와서 분탕질을 치고 다녔기 때문에 대형 선박은 더더욱 정박시키기가 위험했다.
설상가상으로, 함대 총지휘관 산타크루즈 후작이 1588년 초에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산타크루즈 후작은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전설적인 명성과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에 후임으로 선정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현명한 군인이자 훌륭한 인격자이기는 했지만, 해전에는 문외한이었다. 심지어 배멀미까지 있었다고 한다. 물론,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본인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부하 제독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대체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는 했다.
비록 스페인이 대항해 시대에 손꼽히는 해양강국이기는 했지만, 대규모 상비 함대를 갖출 정도의 재력을 보유하지는 못했고 이미 재정적자가 위험한 상태였다.
1588년 8월 8일, 어쨌든 우에상섬을 돌파한 무적함대와 실리섬에서 발진한 잉글랜드 초계함대의 조우를 시작으로 전쟁이 개시되었다. 곧이어 양측 주력 함대의 전투이 벌어지자 격렬한 함포전을 벌였지만, 서로 피해를 주는 데는 실패하고 이때 입은 유일한 무적함대의 손실은 갤리온 1척과 카락 1척, 그것도 신호 오인과 돌풍으로 인한 충돌에 의한 것뿐이었다.
결국 무적함대는 4일간 4번의 싸움을 모두 물리치고 사소한 흠집만 입은 상태로 도버 해협에 이르렀다. 지상군의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 스페인 함대는 칼레 앞바다에 정박했다. 본래 이 시기는 남풍이 부는 시기라 스페인 측은 화공은 예상했지만 소형 선박들을 외곽에 분산 배치하는 정도로 화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갑자기 바람은 북풍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하워드 제독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판단, 상선값을 후하게 물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대형 상선을 동원해 화공을 펼친다. 이 당시의 화공선은 단순히 불을 붙인 배를 상대 배에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배에 화약을 비롯한 인화성 물질을 가득 실어서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근처에서 폭발만 해도 치명적일 수 있었으며, 스페인군은 이를 매우 우려했다. 따라서 외곽의 소형 선박들은 화공선이 접할 경우, 갈고리를 걸어 함대 바깥쪽으로 예인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만일 이것이 실패하면 전 함대는 닻줄을 끊고 회피기동을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잉글랜드군이 화공을 펼치자 스페인 함대는 계획대로 소형함선으로 이를 예인하려는 시도를 펼쳤다. 몇 척은 이에 성공했으나, 예인 도중 일부 화공선이 폭발해버렸으며, 이로 인해 예인선들이 겁을 먹고 주저하는 사이 나머지 화공선들이 스페인 해군의 외부 저지선을 통과했다. 예인작전이 실패하자 무적함대는 급히 닻을 끊고 진형을 풀어서 넓은 북해로 분산 회피한다.
어쨌든 시도니아 제독은 다시 함대를 모아 진형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바람이 제정신을 차려 남풍으로 바뀌었고 바로 곧이어 태풍이 덮쳤다. 닻이 없는 함선들은 속절없이 난파될 수 밖에 없었다. 태풍은 잉글랜드 함선의 공격 역시 중단시켰고 스페인은 태풍속으로, 잉글랜드는 태풍 밖으로 나오는 상황을 맞게 된다. 스페인군은 태풍이라는 전투보다 더 큰 적을 만나버렸다. 다만 잉글랜드 함선들도 이 무렵에는 포탄과 화약이 떨어져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공격을 지속했더라도 결정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더 이상 잉글랜드와 근접한 대륙의 네덜란드 지역의 항구는 안전하지가 않고 하룻밤도 편히 정박할 사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무적함대는 네덜란드의 스페인 육군으로부터 무기, 화약, 군수품을 지원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것이 기약 없는 일이 된 상태에서 맨몸으로 대양으로부터의 공격에 노출된 상태라는 것이다. 중립국이었던 프랑스는 물과 식량의 거래는 허용했으나 포탄이나 화약은 거래대상이 아니었고, 네덜란드에 주둔하던 스페인 원정군은 네덜란드 해군에 의해 봉쇄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건 북해를 잘 몰랐던 무적함대의 심대한 판단착오였다. 무적함대는 북해에 진입하자마자, 지중해나 대서양 연해와는 상대도 안되는, 차갑고 거친 북해 바다 특유의 본좌급 태풍을 두 번이나 만나서 완전히 박살났다. 실제로 영불해협에서 인양된 무적함대 선박은 대포가 단단히 묶여진 상태였다. 이는 즉, 전투 중에 침몰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스페인 해군은 이 전투로 81척의 함대를 잃었고 그 중 전투 중에 침몰한 배는 단 3척에 불과했다.
또한 멕시코 만류 역시 스페인의 귀환과정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귀환루트가 멕시코 만 부근에서 시작되어 북유럽 방향으로 강하게 흐르는 이 해류를 거슬러가야 했기 때문에, 스페인 군의 당초 복귀 계획보다 훨씬 오랜 기간 항해해야 했고, 그 결과로 보급부족과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가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지로나호는 아일랜드 지도자의 지원으로 킬리베그스항에서 수리를 마치고 1300명이 승선한 채로 출항하였지만 포일석호 인근에서 강풍에 휩쓸렸고 결국 안트림 던루스 해안에 좌초 후 침몰하여 1300명 중 6명만이 살아남는 참사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아일랜드에서 도움을 받아 귀환한 스페인 함선이나 상금에 눈이 먼 아일랜드 농민, 어부들에게 살해된 스페인 수병은 많았지만 아일랜드에 고립돼서 뿌리박고 살게 된 스페인 사람들은 없었다.
무적함대를 격파한 다음날인 8월 9일, 엘리자베스 1세는 틸버리 항에 주둔한 영국 육군을 친히 찾아가 그들을 격려했다. 다음 해인 1589년, 잉글랜드는 훗날 ‘잉글리쉬 아르마다(English Armada)’라 불리우는 대규모 원정군을 스페인 갈리시아의 라 코루냐 항에 보내 남은 스페인 함대를 파멸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의 성공적인 방어로 인해 1만 2천에 달하는 병력만 잃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스페인이 칼레해전에서 무적함대를 잃은 것보다 훨씬 큰 피해다. 이 원정의 실패로 잉글랜드 역시 스페인과 전면적인 해상 교전을 벌일 능력을 상실했다.
한편 스페인은 프랑스와도 전쟁을 벌였고, 스페인과 싸우던 잉글랜드는 네덜란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1596년) 그리고 스페인 함대는 재건되어 다시 1596년과 1597년 잉글랜드를 공격했지만 폭풍 등으로 인해 패배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598년에,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에 사망하였으며, 두 나라 모두 전쟁으로 인한 재정 문제는 가중되는데, 그 해결책의 전개는 영 신통치 않았기에 1604년에 평화 협정을 맺는다.(1604년 런던 조약) 잉글랜드는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졌고 종교적 자유를 얻었으며 가톨릭 신앙을 계속 박해할 수 있었다. 스페인도 잉글랜드 해협과 항구들의 개방, 잉글랜드의 사략질 및 네덜란드 독립군에 대한 지원의 전면 중단이라는 결과를 얻는다. 이것이 잉글랜드-스페인 전쟁(1585년~1604년)의 끝이었다. 이후 잉글랜드와 스페인은 1625년까지 평화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