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적 세계관 안에서의 이름과 개인주의적 세계관 안에서의 이름에 대해서>
제주대학교 철학과
2017101246 우어진
정명론正名論. 즉 이름을 바로세우는 것을 뜻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갈불음 도천수渴不飮 盜泉水라고 하였다. 목이 말라도, 이름이 ‘도둑의 샘’인 물은 마시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로가 공자에게 정치를 맡게 되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이름을 바로세우는 것을 먼저 하겠다고 대답했다. 또한 제나라의 경공이 이상적인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에는,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 즉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답게 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정치라고 했다.
공자가 보기에, 이름은 단순히 사회적 지위와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름은 단지 대상을 호칭하는 것만의 의미를 담은 게 아니라, 그 이름에 걸맞는 책임을 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지켜야만 올바른 사회가 될 수 있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바른 사회가 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군자라는 이름이 있기 전에 군자다움이 있고, 신하라는 이름이 있기 전에 신하다움이 있으며, 아비라는 이름이 있기 전에 아비다움이 있고, 아들다움이라는 이름이 있기 전에 아들다움이 있는 셈이다. 공자는 그러한 실實을 전제하여, 그것과 맞아떨어지는 이름名이 바로잡혀야만, 말言에 순서가 생기고 일이 수행된다고 보았다. 그것이 정명론에서 이어지는 명실상부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가 가진 이름에 함의된 본질을 자각하여, 사람 사이의 관계성- 즉 사회 안에서의 책임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공자의 정명론은 사회성을 띠고 있다. 이름은 곧 사회 안에서의 직책으로 이해되며, 그 본질을 깨닫고 올바르게 실행하는 것은 옳은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된다. 그렇기에 군자이며, 그렇기에 신하이고, 그렇기에 아버지이며, 그렇기에 아들인 것이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공자의 정명론을 완전히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언어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 그 힘의 근본이 되는 것은 이름에 걸맞게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므로. 하지만 이런 정명론이 현대에 와서도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이론이라고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대와 현대의 결정적인 차이를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맥락 이전에 전제되는 개인의 인격과 자아라는 개념을 중시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차이가 아닐까.
외람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내 이름은 우어진이다. 단양 우씨의 하우씨 우禹라는 성씨에, 한글로 어질게 살라는 뜻의 어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다. 禹라는 성씨는 하나라의 우임금과 관련이 있는 성씨고, 이름은 말 그대로 어질게 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성씨의 뜻에 그다지 의미를 두고 있진 않으며, 동생들의 이름이 한결같이 살아가라는 뜻의 “한결”과 하늘의 은하수라는 말의 줄임말인 “하은”인 걸 보면 부모님도 거기까지 생각하시지는 않으셨겠지만, 하여간 공교롭게도 내 이름은 하나라의 우임금처럼 어질게 살아가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멋있기 그지없는 이름이다. 한때는 이 이름을 본 익명의 윤리교육학과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다 감명하신 나머지 즉석에서 공자의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시며 서재의 이름을 요산재樂山齋라고 지으실 것을 권유하신 적이 있기도 하다. 내 이름은 어진 사람이니까, 나의 서재는 즉 산을 좋아하는 사람의 서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우어진이라는 인간은 그다지 어질지도 않고, 산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그 우임금처럼 나라를 하나 세울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나는 정명론적으로는 못써먹을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좋은 이름을 받아놓고, 왜 그에 걸맞는 존재가 되지 못했는가. 혹자는 언젠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적어도 현재의 나는 명실불부한 존재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의 이름 석 자는, 나의 자아가 생성되기도 전에, 내가 아닌 타인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다. 물론 이름은 나 자신을 나타내는 좋은 표어이지만, 나의 이름에 선행하는 본질적 속성이 존재하고 그것이 내 삶의 가이드라인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사회에 편입되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존재하며, 그렇기에 나의 이름은 나라고 하는 존재의 캐치프레이즈가 될 순 있어도 내가 사회적으로 이뤄야만 할 목적지가 아니다. 물론 그러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부모님의 바람은 담겨있을 것이지만, 나 개인의 인생이 향하는 것은 나의 이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발걸음과 호흡, 그리고 선택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다.
춘추시대에는, 백성들에게 있어서 개인이라는 개념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백성은 길러지는 존재이며, 이끌어지는 자이므로. 개개인으로서의 중요성보다는 전체와 집단에 편입된 사회의 세포로서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으며, 집단의 종속은 전통적 도덕률에 의해 왕과 신하, 백성을 묶어놓는 것으로 국가의 안정이 성립되었다. 공자의 인仁은 이러한 안정된 국가를 만들 수 있는 군자가 되기 위한 실천 법칙으로써 존재했다. 그렇기에 이름이라는 개념은 개인의 자아보다도 사회적 맥락을 가진 역할 규칙으로써 이해되었다. 하지만 현대에는 어떤가. 개체의 독립된 자아를 인정하며, 인간 개개인은 각자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자들이 되었다. 이름으로 표상되는 준거집단 안에서의 역할과 사회성이 완전히 증발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그것만을 위해서 사는 존재는 아니게 되었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기 전에 이미 인간이다. 인간은 이름을 받기 전에 이미 인간이다. 사회 속에 있어야만 인간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사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지 않은가. 이름을 받아야만 인간인 것이 아니라, 태어나고 첫 숨을 쉬고서야 이름을 받은 것이지 않은가.
따라서, 현대에 와서 사람의 이름은 더 이상 역할을 전제하지 않는다. 실체를 전제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사회적 맥락을 차지하는 이름들 또한 존재하지만, 개개인을 호명하는 이름과는 그 차이를 분명히 두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 이름은 도달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우어진이라는 인간이 어질게 사는 것이 우어진다운 것이 아니라, 우어진이라는 인간이 쌓아간 인생이 우어진이라는 인간다움을 만든다. 물론 어질게 살면 좋겠지만, 내 힘으로 얻어내지도 않은 이름에 얽매인다는 무게를 짊어진 채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우어진이라는 이름 위에 존재하는 나의 진실된 자아를 찾고 쌓아올리기 위해, 나는 오늘도 살아가고, 숨쉬고, 걷고 있으니까.
첫댓글 이 고사는 전한의 유향(劉向)이 고대부터 내려온 온갖 지혜와 고사를 모은 설화집 '설원(說苑)' 담총(談叢)편에 실려 있습니다. '하루는 증자가 승모라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때는 이미 해가 져서 사방이 어둡고 배도 고팠지만 머물지 않고 발길을 재촉했다. 공자가 도천이라는 샘을 지나칠 때 몹시 갈증이 났지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모두 그 이름을 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邑名勝母 曾子不入 水名盜泉 孔子不飮 醜其聲也).' 도둑의 샘물이란 뜻을 지닌 도천의 물을 마시는 것은 군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어머니를 이긴다는 승모에서는 유숙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명과 관련된 이야기로 볼 수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