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극장-
지금은 시골 어디서도 볼 수없는 풍경이지만 저녁밥 짖는라 태우는 나무연기가 초가집 처마에 가득 담길 때 쯤이면 영화상영을 알리는 스피커 소리가 동네를 진동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남해군민 여러분. 오늘 저녁 6시 남해국교의 가설극장에서 눈물과 한숨없이는 볼 수없는 시네마스코푸 '홍도야 우지마'가 절찬리에 상영됩니다'.라 코맹맹이 변사 선전 방송이 마을을 휘젓고 지나가면 선전차를 뒷쫒던 아이들은 달달 외어 흉내를 내었고 처녀총각들 가슴은 설레였으며 나를 비롯한 꼬맹이들은 무료관람을 할 방법모색에 골몰했다.
시골장터나 추수가 끝난 논 또는 학교 운동장에 2m 가량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하는 하얀 광목천을 둘레에 친, 가설극장에서 무성영화를 상영했다. 당시의 가설극장은 시골사람들을 여지껏 경험하지 못했던 신세계로 안내해 주는 문화통로의 역할을 했다. 도시에서 몇 년간 상영된, 한물 간 영화들이 상영되었기에 필름이 닳고 닳아 자막에는 주룩주룩 비가 내렸지만 시골 사람들은 흑백 화면 앞에서 울거나 웃으면서 마음껏 박수를 쳤다.
영사기와 스피커는 도시의 극장들에서 퇴역한지 한참 지난 것들이어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그렁그렁, 쐐 쐐’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변사의 음성도 웅웅거려 듣기가 힘들었지만 의례 그런 것인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영화상영 중에 필름이 끊겨 사방이 칠흙같은 어둠이 되면 사방에서 야유와 휘파람소리와 “요금 물어내라”는 고함 소리가 가설극장 안을 채웠다.
영화가 상영되는 날에는 항상 극장 입구에서 입장객을 확인하는 기도 아저씨가 서 있었지만 나와 친구들은 여녀 묘책을 강구해서 자주 무료입장을 했다. 영화를 보고 싶지만 용돈이 없어 몇가지 묘안이 동원되었다. 요즈음은 가설극장도 없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면 용서받지 못하겠지만 당시에는 용서로 넘어 간 전술이었다. 영화상영 당일, 아이들은 서둘러 저녁밥을 먹고 극장 주위를 맴돌면서 숨어 들어갈 곳을 파악해 두었다 천막 밑으로 숨어 들어가는 '게릴라 입장', 동네 어른들의 기족인 것처럼 손을 잡고 들어기는 '위장입장', 먼저 들어 간 애들이 천막 밑에 잠입구를 개척해 놓으면 그곳을 이용하는 '개구명 입장 ' 등이 동원되었다. 반세기가 휠씬 지난 지금 회상해 보니 실소를 금할 수 없지만 그런 재미와 낭만이 넘치는 세상이 다시 올 수는 없을가를 생각해 본다. 지금은 길가에 열린 감 하나를 따먹어도 동네 사람들이 몰려 와 변상하라고 욱박지르는 세상인데 ..
흰 강목천, 한물 간 영사기와 스피커, 멍석 자리, 기도 아저씨, 개구멍 작전... . 아직도 기억 속에 살아 숨쉬는 아름답고 멋진 추억 거리들이다. 그때의 가설극장, 아무리 잊어려 해도 기억 속에 들어 와 버티고 있는 깨끗하고 순수한 맥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