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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파괴되기 전의 로베르 우뎅 극장과 ‘사라지는 여인’을 위한 액세서리 |
드방의 가장 유명한 마술 중의 하나는 ‘예술가의 꿈’인데, 거기서는 실물 크기의 여자 초상화가 깜짝 놀라는 관객들 눈앞에 실제 여자로 나타난다. 멜리에스는 ‘강신술사의 초상Le Portrait Spirite’(1903)에서 그림을 진짜 소녀로 대체하는 특수효과를 이용하여 이 마술을 재창조한다. 멜리에스는 1885년 런던을 떠나 빠리로 돌아온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남편이 왜 그토록 에너지와 열정을 발휘하는 지 전혀 이해 못했던 소심하고 신중한 여인 위제니 즈넹과 결혼한다. 하지만 그녀는 능숙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들은 두 아이, 조르제트와 앙드레를 갖게 된다.
1888년 아버지 루이 멜리에스가 가업에서 물러나면서, 조르주는 구두제조업에서 벗어날 기회로 활용한다. 그는 자신 몫을 형제들에게 판다. 그해 로베르 우뎅 미망인은 침체상태이던 이탈리아대로의 유명한 극장을 내놓는다. 멜리에스는 40,000프랑으로 구입하고 극장 내부 장식을 새롭게 하여 1888년 10월에 문을 연다. 멜리에스도 당시 마술사들처럼 로베르 우뎅이 만든 많은 기술과 마술 레퍼토리(기적처럼 가득찬 상자, 공중에 매달린 몸, 꽃에서 나오는 나비 등)를 물려받는다. 1888년과 1097년 사이에 멜리에스는 적어도 30개 이상의 새로운 마술을 만들어 그 중 상당부분을 영화로 옮겼다.
멜리에스가 다시 시작한 옛 극단에서 세 명의 인물은 그의 영화 경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위젠 깔멜은 기술자로 자신의 집 가까운 떼일로 거리의 작업실에서 로베르 우뎅의 자동인형들을 재건하는데 멜리에스와 함께 일했다. 멜리에스가 그곳 소유주였던 기간 동안에 기술책임자였던 그는 1914년까지 책임 영사기사로 일한다. 예명이 마리우스였던 쥘 다비드는 마술 공연에 없어서는 안 될 조연으로 허드렛일을 도맡아했다. 예명이 제안 달시였던 파니 마니외는 멜리에스 주연여배우 중의 한 사람이었고 심복이었다. 특히 그녀의 미모와 작은 몸매는 무대 바닥의 뚜껑문을 통해 출몰하는 프로그램에 적합했다. 그녀는 1925년 멜리에스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멜리에스와 영화
멜리에스가 1895년 12월 28일 빠리의 그랑 까페에서 최초의 시네마토그래프 상영에 참석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 기계를 사려고 여러 번 제안했던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이 기계를 사지 못한 멜리에스는 런던에서 로버트 W 폴이 만든 기계에 관심을 돌린다. 1896년 2월, 그는 폴에게서 아니마토그래프(Animatographe) 영사기들 중에 하나를 1,000프랑에 구입한다. 에디슨이 만든 필름들과 폴이 만든 몇몇 단편 필름들을 산다. 멜리에스는 처음으로 1896년 로베르 우뎅 극장에서 이 필름들을 상영한다.
그는 뤼시앵 코르스탕의 도움으로 뽈 아크르 기계의 원리를 기초로 삼아 잡탕으로 만든 카메라를 제작한다. 이 제작은 몇몇 극장 마술 기계에서 생긴 기계부품들을 이용하여 로베르 우뎅 극장의 작업실에서 실현되었다. 1896년 3월 멜리에스는 로버트 W 폴에게서 이스트맨(Eastman) 영화 필름 상자를 45,000프랑에 산다. 빠리로 돌아와 그는 필름에 구멍이 뚫리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그는 동시에 손으로 필름에 두 개씩 구멍을 뚫는 기계를 만들기 위해 주석 도금공 라삐쁘를 고용한다. 최초의 시네마토그래프 상영 이후 6개월 만에 그는 그의 첫 1분짜리 영화 <카드 놀이La Partie de Cartes>(1896)를 상영한다.
신생 산업의 미래가 아직 불투명하던 시기에 엄청난 재정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멜리에스는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영구적인’ 건물을 짓기로 결정한다. 1896년 9월과 1897년 3월 사이에 그는 스튜디오를 짓고, 최초의 영화 전용 회사인 스타 필름(Star Film)을 출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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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트뢰유 소유지의 멜리에스 스튜디오와 기계장치 |
1896년과 1900년 사이에 멜리에스는 모든 장르를 성공적으로 시도했고, 마찬가지로 영화감독으로 있는 동안 내내 사용하게 될 기술혁신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처럼 그는 1897년부터 인공조명에서 영화를 찍은 세계 영화감독들 중에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레퍼토리로 노래하는 가수 뽈뤼스(Paulus)를 촬영하기 위해 15개의 아크등과 15개의 수은등을 결합시켰다. 같은 해, 그는 몰리에르의 <상상적 환자> 첫번째 각색을 촬영한다. 1898년 오페라 광장에서 촬영할 때 카메라가 우연히 작동하지 않았는데, 그는 버스와 영구차가 연속적으로 상영되는 것을 보고 놀란다. 이런 의도치 않은 익살스런 장면은 차후에 계속될 것이다. 더욱이 그는 “마술환등의 환상”으로 풍부한 요정극의 주제로 나아간다. 1899년 그가 촬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거의 사실주의적 영화인데, 배경과 인물들은 거의 언론에 출판된 삽화들로 재구성했다.
세기의 데뷔
20세기 초 영화는 서서히 시장터를 포기하면서 고정된 영화관에 자리잡기 시작한다. 멜리에스는 단순한 짧은 시장용 필름과는 반대로 보다 길고 복잡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는 멜리에스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당시에 그는 예술적으로 재정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맛볼 수 있었다. 영화도 다양하다. 스펙타클(Jeanne d'Arc, Le royaume des fées), 재구성된 시사문제(L'éruption du mont pelé, Le sacre d'Edouard VII), 고전의 각색(Les aventures de Robinson Crusoë, La damnation de Faust), 오늘날도 놀라운 L'homme à la tête de caoutchouc 같은 익살극. 그의 무대장치의 재능은 로비도(Robida)나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를 떠올린다. 그의 환타지는 현대 사이언스 픽션의 선구자를 예고한다. 그의 훌륭한 영화들은 여행을 주제로 하고 있다. <달나라 여행Voyage dans la lune>(1902), <불가능을 통한 여행Voyage à travers l'impossible>(1904), <400가지 악마의 소극Les quatre cents farces du diable>(1906), <해저 2만리Deux cent mille lieues sous les mers>(1907).
확장의 일환으로 스타필름은 1903년 멜리에스의 동생 가스똥이 경영하는 뉴욕의 38번가 동쪽 203번지에 지점을 연다. 이 새 사무실은 미국의 저작권 체계 덕택으로 해적행위로부터 스타필름을 보호하기 위해, 부정직한 중개상을 거치지 않은 복사본의 직판을 위해 설립되었다. 1903년 스타필름은 베를린, 바르셀로나, 런던에도 대리점을 두었다.
니켈로디언(Nickelodeon) 망은1905년에 생겨났고 1908년부터 이 간판에서 1만개의 싸구려 영화가 미국을 통해 매일 낮에 상영되었다. 니켈로디언 프로그램은 각각의 장소에 주당 30에서 60개 필름의 수요를 창출하면서 매일 바뀌었다. 이런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스타필름은 생산을 증가시키고 희극에서 사회 사실주의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새로운 장르를 탐색한다. 필름은 주제나 생산의 복잡성에 따라 다양한 가격으로 영화관주인들에게 팔렸다.
흑백 버전과 보다 고급인 칼라 버전 가격의 선택이 가능했다. 멜리에스는 자기 필름들이 경쟁상대의 가격 보다 높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필름이 다른 제품보다 작업과 정성이 더 필요한 만큼 그런 가격을 정당화했다.
1908년 가스똥 멜리에스는 스타필름이 모션 픽처 파텐츠 캄퍼니(Motion Picture Patents Company=MPPC)가 요구한 생산 쿼트를 달성할 수 있도록 영화를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뉴욕을 떠나 시카고에 새로운 생산 회사, 멜리에스 매뉴팩처링 캄퍼니(Méliès Manufacturing Company)을 열었다.
파리에서 멜리에스는 2개의 몽트뢰유(Montreuil) 스튜디오에서 MPPC가 요구한 주당 1000피트(pied, 300m)의 필름을 생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1908년 스타필름은 전년에 비해 3배 이상을 생산했다. 부실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멜리에스는 로베르 우뎅 극장의 상연에 현역에 복귀하여 무대로 되돌아갔다. 연말과 다음해 초에 멜리에스는 <닐의 유령(Le Fantôme du Nil)>이라는 대본으로 촬영했다.
1908년 의장이었던 국제영화제작자대회 이후, 그는 감광필름의 천공의 표준화를 수용하고 채택하도록 하는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공한다.
빠떼 시대
멜리에스는 그의 필름이 미국에서 많이 불법복제되었기 때문에 1903년부터 저작권 보호를 위해 ‘페이퍼 프린터’ 형태로 몇몇 제목들을 워싱턴 의회도서관에 등록했다. 하지만 그의 발상은
뻔뻔하게 표절되었다. 그의 필름들은 외국인에게 좌우반대 음화로 복제되었고 완전히 통제를 벗어나 배포되었다. 자신 보다 훨씬 더 견고한 회사들(Gaumont, Pathé)이 그와 경쟁했다. 1911년 빠떼가 필름의 길이와 구조에 관한 편집권을 가지면서 스타 필름(la Star Film)의 독점 배급사가 된다. 빠떼는 멜리에스의 영화제작에 필요한 돈을 제시했음에 틀림없고, 그의 몽트뢰유 스튜디오와 부동산을 담보로 잡는다.
멜리에스의 마지막 필름, <부리숑 가족의 여행Le voyage de la famille Bourrichon>은 사실상 1911년과 1912년의 모든 필름처럼 빠떼의 완전한 통제 아래서 만들어졌다. 마지막 필름들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관객들은 그의 요정이야기에 싫증이 나있었다.
그의 마지막 대형작품(<극지방 정복A la conquête du pôle>, 1912)은 엄청난 상업적 실패로 염가로 팔렸다. 멜리에스는 빠떼에 엄청난 빚을 졌다. 그는 마지막 영화 제작인 라비쉬(Labiche) 희곡에서 각색한 막스 린더(Max Linder) 풍의 코미디에서 배제되었고,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기 위해 빠떼는 필름을 배포하지 않았다.
멜리에스의 몰락은 충분히 개선하지 못한 제작과 마찬가지로 재정 문제에 기인했다. 그의 영화에 대한 개념은 지나치게 연극의 형태에 가까워 마술, 악마, 감금된 공주와 같은 그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멜리에스는 1914년까지 로베르 우뎅 극장에서 자신의 영화들을 계속 틀었다.
매우 힘든 마지막 삶
1차 세계대전 동안 빠리의 영화와 연극은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1915년 가족은 수도로 돌아오고 로베르 우뎅 극장이 다시 열렸다. 1917년 몽트뢰유 스튜디오는 전쟁의 부상자를 위한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반면에 두 번째 스튜디오는 영화관으로 바뀌었다. 많은 필름 복사본들이 군인의 오페라 체류 사무실 점령 때 상실되었다. 필름은 은을 추출하거나 운명의 장난으로 군인들의 구두약으로 바꾸기 위해(그는 아직 웃길 여력이 있었다. “보시오, 사람들이 그 위로 행진했소!”라고 그는 말한다) 녹여졌다.
1920년 멜리에스는 로베르 우뎅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상영했다. 극장은 처음에는 극단을 위해 세를 냈고, 이어서 오스만 가로 이사를 가야했던 그가 파산하던 1923년까지 영화관이 된다. 멜리에스는 35년 동안 이 신화적 장소를 경영할 것이다. 극장에 보존된 복사본들은 아마추어용 저급 필름으로 전문중개인에게 무게를 달아 팔렸다.
1923년은 멜리에스에게는 끔찍한 해였다. 전쟁 중에 시행된 특별법의 기한이 끝나자 빠떼는 몽트뢰유 소유권을 행사했다. 멜리에스와 그의 가족은 1924년까지 거기의 조그만 아파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멜리에스는 분노하여 몽트뢰유 정원에서 가족의 생활공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모든 네거티브 필름통들을 불태워버렸다.
1925년 멜리에스는 재혼한다.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제안 달시도 역시 어려운 생활을 했지만 몽빠르나스 역에 조그만 가게를 살 수 있었다. 그들은 함께 여행객들에게 고자와 장난감을 팔면서 이 작은 가게를 운영한다.
뒤늦은 재평가
연출가 르네 끌레르(René Clair)는 멜리에스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확신했다. 끌레르, 오리올(J.G. Auriol), 뽈 질송(Paul Gilson)은 멜리에스 운명의 계시에서 주역을 맡는다. 그들은 1929년 라 르뷔 뒤 시네마(La Revue du Cinéma)에 멜리에스에 관한 기사를 발행한다. 같은 해 회고전 리셉션 아이디어를 낸다. 1920년 장 모끌레르(Jean Mauclaire)는 뒤파엘(Dufayel) 상점 소유자들의 유언집행자의 소유권 속에서 멜리에스의 몇몇 복사본을 발견했다. 이 복사본들은 대형 가구점에서 고객과 아이들에게 옛날에 상영했던 영화들의 세트 중의 한 부분이었다. 아방가르드에서 전문 극장인 스튜디오 28에서 이 복사본들을 처음으로 상영한 후에, 빠리에서 1929년 12월 16일 쁠레옐 극장(Salle Pleyel)에서 열린 멜리에스 리셉션은 유명해졌다. 살아남은 몇몇 멜리에스의 필름들은 <세실 B 드 밀(Cecil B. de Mille)>과 <반역(Forfaiture, 1915)>을 수반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멜리에스는 로베르 우뎅의 자동인형들을 빠리의 기술과 직업 박물관(Musée des Arts et Métiers de Paris)에 기증했다. 이 박물관은 불행하게도 이 19세기 연극의 중요한 기계들을 되팔거나 파괴해버렸다.
장 모끌레르가 되찾은 영화들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보존되고, 가장 암울한 전쟁이 지속되던 시기인 1940년 빠리에서 뚜르로 옮겼다. 이어 거의 모든 필름들은 나치들에게 몰수되고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1932년 멜리에스는 몽빠르나스역의 매서운 추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옛 영화예술가들을 위해 만든 상호공제조합은 오를리 공항 근처에 방을 얻어주게 된다. 멜리에스와 아내, 손녀 마들렌은 3칸 방의 아파트에 거주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석 달 동안 암에 시달리다 1938년 1월 21일 빠리의 레오뽈드 벨랑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1월 25일 뻬르 라셰즈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의 매장에 참석한 인물들 가운데는 르네 끌레르, 앙리 쇼메뜨, 나디아 시비르스께아, 페르디낭 제까, 알베르또 까발깡띠, 루이 오베르가 있었다. 그의 무덤 위에는 “멜리에스, 영화 스펙터클의 창조자, 1861-1938)”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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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르라셰즈 묘지의 조르주 멜리에스 무덤 |
로버스터에 의한 멜리에스의 부활
멜리에스 필름의 오리지널(네거티브)이 1924년 파산하고 절망한 멜리에스 자신 불태워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복원할 유일한 희망은 1930년대 초 이후에 개인이나 영사실, 시장 또는 우연한 장소에 흩어져있거나 버려진 상영복사본을 되찾는 것이다. 1907년까지 필름들은 팔렸고, 소유자들은 복사가 계속되는 만큼 그의 선택 장소들로 그 필름들을 보낼 수 있었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 등등의 영화관 주인들은 복사본을 구매할 수 있었고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애기도 했다.
전 세계의 시네마테크에서는 75년 이상 그것들을 찾았고, 새로 발견된 것은 무성영화 애호가들의 단체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멜리에스의 가족과 특히 손녀 마들렌 말떼뜨 멜리에스는 여러 해 동안 호소하고 마술공연에서 그의 영화를 상연하면서 망각되지 않도록 애썼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양호한 상태의 멜리에스 영화를 볼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2009년 로버스트가 편집한 5개 DVD 세트에서 173편의 필름을 볼 수 있다. 6번째 DVD는 되찾은 199개의 필름을 담은 2010년 결정판을 완성한다. 그것은 접근가능한 모든 복사본을 회수하기 위해 국제협력과 전 세계에서 탐색한 25년의 결실이다. 그 필름들은 완전하거나 부분적인데, 왜냐하면 수백 번 상연하고 수십 년 동안 잊혀진 후에 부분적으로나 완전히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제목들은 원본 네거티브에서 직접 백업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상영된 필름에 가까운 선명하고 완전하다. 반면에 이미지가 100년 이상된 것(Les merveilleuses cartes vivantes, Le Tripot clandestin, ou la fin du Palais des Mille et une Nuits)이다. 다른 것들은 불행하게도 이런 기회를 가질 못해서 형편없는 이미지로만(Tom whisky ou l’illusionniste toqué) 볼 수 있다.
어떤 필름들은 단편적인 형태로만(Les Infortunes d’un Explorateur, 1900, Lully ou le violon brisé, 1908 ou Pour l’étoile S.V.P., 1908) 존재한다. 상실된 것으로 여겨졌던 다른 필름들이 되찾기도(Le Magicien, 1898, La Danseuse Microscopique, 1898) 했다. 어떤 타이틀들은 시각적으로 보잘 것 없거나 불완전한 버전들 속에서만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거의 완벽한 버전으로 존재한다.
필름들은 당시에 유일하게 사용되었던 흑백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상연되었지만, 가장 소중한 타이틀들은 칼라나 이미지 하나하나 손으로 채색된 것이다. 필름들은 구매자가 채색된 필름을 원하면 상업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남기는 구매자의 선택에 따라 두 가지 버전을 사용했다. 1908년 흑백 필름들은 미터당 1.25프랑(어떤 요정극들은 두 배의 값이 나갔다)에 팔렸다. 채색 필름은 추가로 미터당 1프랑과 1,75프랑 사이에 팔렸다.
어떤 필름들은 DVD 전신인 16mm 가정용으로 소규모 편집자들이 재복사했다. 이렇게 생산된 네거티브와 16mm 복사본들은 칼라에서 종종 흑백(La Damnation du Docteur Faust, 1904)이 되었다.
이런 네거티브들은 종종 그자체가 소실되었지만 해적판으로 나오고 다시 재복사되었다. 그런데 종종 부주의하게 실행된 각 복사본에서 선명도가 흐릿해지고 회색이 사라지고 이미지는 거의 보기 어려울 정도로 회복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주 어려운 이런 원본의 요소들을 복원하기 위해, 최근의 광화학과 디지털방식의 기술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정보와 상실된 선명도는 불행하게도 더 이상 복원이 어려웠다. 이처럼 1980년 이전의 복원기술은 침식과정이 아직 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본의 긁힌 자국을 지울 수 없는 심각한 장애를 갖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원본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우리는 다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에 원본은 종종 분해돼버린다.
가능할 때 우리는 항상 원본 35mm에 가장 가까운 요소들에서 다시 출발한다. 초기에 조르주 멜리에스의 카메라는 당시의 모든 카메라들처럼 네거티브 위에 불안정한 방식으로 필름을 인쇄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카메라의 안내 필름이 매우 단순한 것처럼, 각 이미지는 상영에서 계속 떨리는 인상을 주면서 앞의 이미지와 대략적으로 맞춰져있을 뿐이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 덕택에 각 필름은 가공되고 안정되어 작은 긁힌 자국들과 가벼운 얼룩들은 서서히 지워지고 필름들은 영화 시작에서 절대 존재하지 않았던 빨라지고 괴상한 영화의 인상을 제거하기 위해 원본의 리듬에 다시 맞추어졌다.
출저: Georges Méliès : A Guide to References and Resources par John Frazer (1979), adapté et révisé par David Shepard, traduit par Serge Bromberg pour le coffret Méliès.
달나라 여행(1902)
<달나라 여행>을 구성하고 있는 30개 타블로의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해보자. <달나라 여행>의 줄거리를 30개의 타블로tableau에 의지하여 간략하게 설명해보자. 먼저 타블로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연극에서 ‘장’이라고 번역되는 이 용어는 “한 막 도중에 일어나는 모든 무대장치décor의 변화에 의해 발생되는 새로운 장면”을 의미한다. 예컨대 5막짜리 연극이 20개의 다른 무대장치에서 벌어진다면 5막 20장(타블로)이 되는 것이다. 소위 ‘초기영화cinéma primitif’ 시대에 연극용어를 많이 차용해 사용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초기 프랑스영화에서 타블로라는 용어는 오늘날의 쇼트shot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영화의 내용을 구분할 때는 오늘날 용어로 뉴스영화나 기록영화는 vue, 극영화는 pièce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pièce는 연출을 전제하기 때문에 타블로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타블로라는 용어는 연출의 개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pièce 대신 film à tableaux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실제로 멜리에스는 자신의 주요 작품들을 타블로로 구분하고 각 타블로마다 간략한 해설을 붙여놓았다. 그런데 멜리에스 자신이 ‘pièce à grand spectacle en 30 tableaux’라고 소개한 <달나라 여행>의 타블로는 연극의 ‘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달나라 여행>은 18개의 무대장치와 30개의 타블로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무대장치 안에서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타블로가 펼쳐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하나의 타블로 안에서 무대장치가 바뀌기도 한다는 것이다.
각 타블로의 제목(괄호 안)은 멜리에스가 붙인 것이고, 내용은 필자가 2001년 10월에 출시된 DVD[Méliès, le cinémagicien]의 <달나라 여행>을 여러 번 보면서 정리한 것이다. 멜리에스가 제시한 제목과 설명은 영화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타블로1(천문학자 클럽의 학회); 천문학자 학회에서 바르방푸이이Barbenfouillis 회장이 거대한 대포가 쏘는 포탄을 타고 달에 가는 계획을 발표한다. 일부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한 사람은 뛰어나와 회장과 말다툼을 벌인다. 회장은 그에게 서류 등을 집어던지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타블로2(여행 가결. 사환들. 작별인사); 소동이 가라앉은 다음 바르방푸이이는 몇몇 학자들을 설득한다. 5명의 학자들이 망설임 끝에 회장의 무모한 여행에 동행하기로 결심한다. 회장을 포함한 6인은 옷을 갈아입고 다른 학자들의 인사를 받으며 떠난다.
타블로3(포탄 제조공장); 6명의 학자들은 포탄을 제조하고 있는 공장 내부를 방문한 다음 계단을 통해 공장의 발코니로 올라간다.
타블로4(주조공장. 용광로. 대포 주조); 학자들은 발코니 위에서 대포를 주조하는 광경을 지켜본다. 수많은 공장에서 나온 긴 관들을 통해 쇳물이, 중앙에 위치한 우물 모양의 거푸집 속으로 떨어진다. 거푸집과 공장의 굴뚝들에서 엄청난 연기가 솟아오른다.
타블로5(천문학자 탑승); 학자들은 발사대로 올라와서 작별인사를 하고 포탄 안에 탑승한다.
타블로6(대포 장전); 해군복 차림의 여성들이 포탄을 포신 속으로 밀어 넣은 다음, 모자를 벗어 흔든다.
타블로7(엄청난 대포. 해군 포병들의 행진. 발사! 국기에 대한 경례) ; 달을 겨냥한 엄청나게 거대한 대포 앞에 해군복 차림의 여성들이 도열하여 나팔을 불자, 장교가 포병에게 깃발로 발사 명령을 내린다. 포신 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환송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든다.
타블로8(달 접근!); 우주공간의 달이 앞으로 다가오면서 사람 얼굴로 바뀐다. 사람 얼굴 모양의 달은 점점 커지면서 앞으로 다가온다.
타블로9(눈에 정통으로); 갑자기 포탄이 달의 오른쪽 눈에 정통으로 박히고 달은 콧물을 흘린다.
타블로10(포탄이 달로 낙하. 빛나는 지구); 포탄이 달 표면에 착륙하고 6명의 천문학자들이 내린다. 새로운 풍경에 신이 난 학자들은 달의 하늘 위로 빛나는 지구가 떠오르자 손을 흔든다.
타블로11(분화구의 평원. 화산폭발); 달 표면의 분화구 하나가 폭발하여 학자들을 넘어뜨린다.
타블로12(꿈. 유성들. 북두칠성. 포이베. 二重星. 토성); 긴 여행에 지친 학자들은 담요를 덥고 잠을 청한다. 학자들은 똑같은 꿈을 꾼다. 꿈속에서 유성이 하나 지나가고 북두칠성이 나타난다. 일곱 개의 별 각각에서 여인의 얼굴이 나온다. 북두칠성은 사라지고 초승달 위에 앉은 포이베와 토성 등이 출현한다.
타블로13(눈보라); 침입자들이 못 마땅한 포이베는 토성과 함께 눈을 내리게 만든다. 눈이 잠들어 있는 학자들 위로 펑펑 쏟아진다.
타블로14(영하 40도. 분화구 속으로 내려감); 눈과 추위 때문에 잠이 깬 학자들은 일어나서 분화구 속으로 몸을 피한다.
타블로15(달 내부. 거대한 버섯의 동굴); 분화구 밑의 동굴은 거대한 버섯들로 가득 차 있다. 바르방푸이이가 버섯의 키를 재기 위해 우산을 펴서 땅에 꽂자, 우산은 버섯으로 변하여 놀라운 속도로 자란다. 학자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타블로16(달나라 사람과의 조우. 영웅적인 전투); 가재처럼 생긴 달나라 사람이 나타나서 학자들에게 덤벼든다. 바르방푸이이가 우산으로 달나라 사람을 내려치자, 달나라 사람은 폭발하여 연기로 사라져 버린다. 그는 두 번째 달나라 사람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다. 학자들이 피신하려는 순간 많은 달나라 사람이 몰려든다.
타블로17(포로!); 중과부적인 학자들은 포로가 되고 만다.
타블로18(달나라왕국. 달나라 군대); 학자들은 창을 든 군대를 거느린 달나라 왕 앞으로 끌려간다. 왕이 처형을 명령하는 순간, 바르방푸이이가 덤벼들어 왕을 내동댕이쳐서 연기로 사라지게 만든다. 이 틈을 타서 학자들은 달아나고 달나라 군대가 창을 들고 쫓아온다.
타블로19(도주); 달 표면에서 추격전이 벌어지고, 뒤에 처진 바르방푸이이는 우산으로 2명의 달나라 군인을 내리쳐서 연기로 사라지게 만들고 동료들을 따라간다.
타블로20(광란의 추적); 수많은 달나라 군인이 창을 들고 몰려온다.
타블로21(천문학자들 포탄에 도착. 달 출발); 낭떠러지 끝에 놓인 포탄 안에 탑승한 다른 천문학자들이 바르방푸이이를 부른다. 바르방푸이이가 자기를 따라온 달나라 군인 한 명을 발로 차서 연기로 사라지게 만들고 포탄 앞에 달린 줄을 타고 낭떠러지를 내려가서 포탄을 잡아당겨 밑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포탄이 낙하하려는 순간, 달나라 군인 하나가 포탄을 잡으려다가 뒤에 매달리게 된다. 포탄의 낙하 직후에 달나라 군인들이 몰려와 낭떠러지 밑을 내려다보면서 창으로 위협을 한다.
타블로22(우주로 수직 낙하); 달나라 군인이 달라붙어 있는 포탄은 바르방푸이이가 잡아당기는 줄에 이끌려 허공으로 직하한다.
타블로23(바다 한복판); 포탄은 곧장 바다로 떨어지고 파도가 솟아오른다.
타블로24(대양의 밑바닥); 포탄은 바다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솟아오른다.
타블로25(구조. 귀항); 포탄을 건진 배가 포탄을 끌고 항구로 들어간다. 바르방푸이이는 포탄 위에 올라탄 채 깃발을 흔들어대고, 달나라 사람은 여전히 포탄 뒤에 매달려 있다.
타블로26(개선의 대행진); 영웅들의 귀환을 축하하는 행사가 광장에서 열린다. 시장을 비롯한 인사들과 환영객들 앞으로 악단, 해군 복장의 여성들이 끌고 미는 포탄, 바르방푸이이를 비롯한 영웅들이 행진한다.
타블로27(영웅들 포상과 훈장 수여); 시장이 영웅들에게 화관을 씌워주고 훈장을 수여한다.
타블로28(해군과 소방대 행진. 기념 동상 제막); 대포 발사를 담당했던 포병이 목에 밧줄이 묶인 달나라 사람을 끌고 나와서 춤을 추게 만들자 모두 환호한다.
타블로29(해군과 소방대 행진. 기념 동상 제막); 악단이 바르방푸이이의 개선을 기념하는 동상 앞으로 행진한다. 바르방푸이이의 동상은 아주 과장적인 자세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일그러진 얼굴 표정의 달을 오른쪽 발로 밟고 있다.
타블로30(시민 축제); 사람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동상 주위를 돌며 춤을 춘다.
타블로1; 지구에서 달까지의 1-3장. 소설은 진지한 내용 위주이지만 대포 클럽회원들에 대한 해학적인 풍자15)에 의해 자주 웃음을 자아낸다. 영화는 바르방푸이이와 반대자 사이에 벌어지는 소동 등에서 희극적인 기조를 분명히 드러낸다. 바르방푸이이가 반대자에게 서류를 집어던지는 장면은 익살영화burlesque16)가 애용하는 것이다. 또 몇 명의 학자들이 들고 있던 망원경을 의자로 변하게 만들어 그 위에 앉는 장면 역시, 황당무계한 사건에 의해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영화에 고유한 것이다.
타블로2; 지구에서 달까지의 17-21장. 갑자기 아르당이 출현하여 달 여행 동참이라는 명분으로 앙숙 바비케인과 니콜을 화해시키는 소설이 훨씬 더 극적이다. 영화는 바르방푸이이를 비롯한 6명이 난데없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에 의해 희극영화의 기조를 유지한다.
타블로3; 지구에서 달까지의 22-23장. 발사 초기의 충격을 측정하기 위해 동물실험을 하고 포탄 내부에서의 생존 가능성을 인체실험에 의해 확인하는 진지한 내용이면서도 해학이 돋보이는 소설17)에 비해, 영화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희극적이다. 미크로메가스가 부주의로 넘어져 통속에 빠지는 장면은 익살영화에 반드시 나오는 것이다.
타블로4; 지구에서 달까지의 15장. 소설을 비교적 충실하게 각색하고 있는 영화는 배우들의 수선스러운 몸짓에 의해 계속 웃음을 자아낸다.
타블로5-7; 지구에서 달까지의 26장. 소설은 진지하면서도 해학을 가미하고 있고, 영화의 기조는 여전히 희극적이다.
타블로8-9; 영화의 가장 독창적인 장면이다. 특히 멜리에스의 천재적인 독창성이 번뜩이는 타블로9는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이것을 보고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여기서 오른쪽 눈에 포탄을 정통으로 맞고 콧물을 흘리는 달을, 치고받다가 정말 엉뚱한 가격에 의해 결정타를 맞는 익살영화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타블로10-11; 달세계 최초의 사람의 6-7장. 영화에서 분화구가 갑자기 폭발하는 장면은 달나라 탐험의 17장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18). 웰즈의 소설에는 희극적인 측면이 전혀 없는 반면, 영화는 희극적이다. 폭발로 인해 뒤로 넘어지는 학자들은 영락없이 익살영화의 주인공들이다.
타블로12-13; 어떤 소설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은, 멋진 판타지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의 꿈속에서 여인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여전히 희극적이다. 또 포이베와 토성이 침입자들에게 눈이 쏟아지게 만드는 장면 역시 웃음을 자아낸다. 여기서 눈이 웰즈의 영향이라는 주장19)이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미 달나라 탐험에서 바비케인 일행은 달 주위를 돌면서 표면에 쌓인 눈을 관찰한다(13장과 17장).
타블로14; 달세계 최초의 사람의 12장. 소설에서는 베드포드와 케이버가 버섯을 먹고 중독되어 달나라 사람들에게 잡혀 지하세계로 끌려간다. 영화가 달의 지하세계를 설정한 것은 웰즈의 소설 덕이라고 볼 수 있다.
타블로15; 달세계 최초의 사람의 8-9장. 소설에서는 달 표면에서 버섯을 포함한 식물들이 낮에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식물의 급속한 성장이 긴장감이나 두려움을 자아내는 반면, 영화에서 바르방푸이이가 땅에 꽂은 우산이 버섯으로 변해 놀랍게 자라는 장면 역시 익살영화에 고유한 황당무계함이 돋보인다.
타블로16; 달세계 최초의 사람의 11-15장. 바르방푸이이가 달나라 사람을 해치우는 장면은 웰즈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20) 그러나 소설의 격투는 잔인하고 비극적이기까지 하지만, 영화의 격투는 폭소를 자아낸다. 특히 바르방푸이이가 우산으로 달나라 사람을 때려서 연기로 사라지게 만드는 장면은, 슬랩스틱 그리고 막스 랭데르Linder와 채플린의 지팡이를 예고하는 것21)이라고 생각한다.
타블로17; 달세계 최초의 사람의 12장.
타블로18; 달세계 최초의 사람의 11-17장. 그렇지만 소설과 영화는 격투 장면을 제외하고는 크게 다르다. 소설의 격투 장면에서는 인간의 폭력성이 강조되어 있다. 베드포드가 달나라 사람들을 해치우는 장면은 처참하기까지 하다. 그에 비해 달나라 사람들은 훨씬 덜 폭력적이다. 또 달나라 왕은 베드포드가 지구로 돌아간 후에 케이버가 알현하는 과정(25장)에서 등장하고 조금도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영화에서 바르방푸이이가 달나라 왕을 해치우는 장면은 폭소를 자아낸다.
타블로19-20; 달세계 최초의 사람의 17-18장. 그렇지만 소설과 영화는 희극적이라는 기준에서는 전혀 다르다.
타블로21-22; 어떤 소설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영화 장면 역시 관객에게 즐거운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 주 목적이다. 또 가장 황당무계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타블로23; 달나라 탐험의 20장. 달세계 최초의 사람에서도 베드포드가 탄 우주선은 영국의 한 바닷가에 떨어지는데, 이것은 베른이 웰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타블로24-25; 달나라 탐험의 20-22장. 소설은 해학22)이, 영화는 희극적인 측면이 돋보인다.
타블로26-30; 달나라 탐험의 23장. 소설의 해학은 여전하다. 다른 무엇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미국인답게 우주여행을 위한 회사를 차린 주인공들이 “사업에서는 실패했을 경우까지도 고려하는 것이 미국인의 기질이기 때문에” 유명 법조인들을 파산관재인으로 미리 지정해두었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지구에서 달까지와 달나라 탐험의 기조가 해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필자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영화는 끝까지 익살영화의 기조를 유지한다. 달나라 사람을 구경거리로 삼는 장면은 물론이고 바르방푸이이의 동상 역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