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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7호선 장암역에서 수락산(水落山)을 들어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조선 후기 명문가 반남 박씨의 종택과 선산 묘역이다.
고택 뒤로 수락산이 날개를 펴고 있다. 앞의 한옥은 사랑채이고
뒤는 영당이다. 사랑채 앞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여년이다.
고택 뒤 능선에 서계 박세당과 첫째 아들 박태유 둘째 아들 정재 박태보의
무덤이 있다. 수락산의 동쪽은 옥류동천(玉流洞天)으로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곳이다.서쪽은 박세당의 저택이 있는 수락동천(水落洞天)이다.
수락동천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전국의 명당 첫 번째로 소개되고 있는
누원촌(樓院村)이었며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가게와 객사가 줄지어있었고
샘물과 바위가 어우러져 경치 또한 빼어난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수락산(水落山), 그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옛날 한 사냥꾼이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 아들 이름이 수락 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냥꾼은 아들과 함께 지금의 수락산으로 호랑이 사냥을 나갔다.
한참 사낭꾼과 아들은 호랑이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심하게 요동치면서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졌다.
사냥꾼과 아들은 비를 피해서 이리 저리 헤메다가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바위 안으로 들어가서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깜박 잠이 들었다.
그 때 어디선가 어마 어마한 황소만한 호랑이가 한마리 나타나서 피로에 깊은 잠에
빠진 아들을 물어가 버렸다. 이미 깊은 잠에 빠져버린 사냥꾼은 그것도 모르고 게속해서 잠만 잤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냥꾼은 아들을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아들은 찾을 수 없었다.
이에 정신까지 혼미한 사냥꾼은 아들을 찾아 해매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그 바위 아래로 떨어져
한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로 수락산엔 비만 오게 되면 산에서 흐르는 물줄기 소리가
"수락아~ 수락아~ " 하는 소리로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때 부터 사람들이 산 이름을
수락산이라 하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야간에는 수락산에 오르면 수락아!! 수락아!! 하며
소리치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밤에는 산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설이 전한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고택이다.
집 바로 뒤는 수락산이고 마루에 앉아 바라보면 도봉산 산줄기가 멀리 눈에 들어온다.
풍수를 잘 모르는 눈으로 보아도 명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수락산이 뒤에서 든든하게 지켜주고(背山) 그 앞 중랑천이 감싸고 흐르고 있으니(臨水)
가히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라고 할만한 곳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계 박세당이 은거했던 사랑채다.
건물의 구조는 앞면 5칸, 옆면 2칸반으로 누마루가 덧붙어“을(乙)”자형이다.
세월의 떼(때)가 묻어 있지만 바로 그런 풍취 때문에 오히려 옛 선비의 처소로서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
서계 박세당(1629-1703)은 17세기 후반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의 한 사람이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정계를 움직이던 양반사대부들은 숭명배청,복수설치를 내세우며
주자학으로 중무장하여 다른 사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맨 앞에 우암 송시열이 있었다.
이때 송시열과 같은 서인계 중진으로 명망이 높았던 박세당이 나섰다.
그는 비록 주자의 해석이라 해도 모두 옳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학”과“중용”을 새롭게 편집하고 해석을 붙인“사변록”을 펴냈다.
또한“남화경주해”를 저술하여 유학에서 이단으로 취급했던 장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박세당은 조선 사상계의 지평을 넓혔던 인물이다.
박세당은 1668년 나이 마흔에 벼슬을 버리고 수락산 석천동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호를“서계(西溪)”라 하였다. 서계라는 그의 호에는 자신보다
먼저 이곳에 살았던 메월당(매월당) 김시습을 흠모하는 정과 수락산을 사랑하는
마음이 오롯이 들어 있다. 그가 매월당 김시습을 그리며 지은 칠언율시 마지막에
“동봉 달빛 서계의 물을 비추네東峯月照西溪水)”라는 구절이 있다.
짐작하듯이 “서계”라는 박세당의 아호는 김시습의 아호“동봉(東峯)”의 대어이다.
이는 세월을 극복한 의기(意氣)의 합일(合一)이며,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옛사람과 벗을 삼자(尙友千古)”는 의지의 실천이었다.
박세당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찾아오는 젊은 선비들을 가르치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농사를 지은 경험을 바탕으로 “색경”을 지었다.
1703년 75세의 일기로 별세하기까지 이곳 석천에서 살았던 박세당은
진정으로 수락산을 사랑한 선비였다.
그러나 당시의 주류였던 노론계 인사들은 그에게“사문난적(斯文亂賊)”
이라는 붉은 딱지를 붙여 주었다. 그런 송시열도 인정한 소론 출신의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박세당의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이다.
1689년 숙종이 후궁 장희빈이 왕자를 낳자 세자로 세우고 계비인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노론을 실각시키고 소론으로 바꾸었다.
이때 소론의 핵심 인물인 박태보가 이를 반대하는 여론을 주도하고 목숨을 건
상소를 올렸다. 결국 박태보는 숙종의 분노를 사 벌겋게 달군 인두로 온몸을
지지는 국문을 당한 뒤 초주검이 되어 유배에 올랐으나 노량진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재 박태보의 묘이다. 수락산에서 한 줄기 뻗어내린 용맥에 둥지를 틀었다.
묘역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묘는 참 좋아 보였다. 뒤쪽에서 바라본 잉(孕)이
탐스럽게 생겼다.
묘역 앞에는 도봉산이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
그 앞에는 드넓은 벌판에 논과 밭이 있어 먹거리는 걱정 없다.
중랑천 옆으로 상당히 넓은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어서 농산물 생산에
어려움이 없었다. 여기가 명당으로 거론 된 이유일 것이다.
중랑천 건너 도봉산과 삼각산이 압권의 경관이다.
화성(火星)이라 명당으로서는 결격사유에 해당한다고 풍수지리가는 말한다.
정재 박태보의 묘소 정면의 모습이다.
묘 오른쪽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문 앞면에는 '조선 통훈대부 홍문관
부응교 이조판서 문열공 박태보 지묘,
정부인 전주이씨 부좌'라고 쓰여 있다.
비문 뒷면에는 고인들에 대한
기록이 쓰여져 있다. 이 비문은
박태보의 외삼촌 명재 윤증이 직접 썼다.
명재 윤증은 충남 논산의 '백의정승'으로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과 함께
충청도의 3대 성리학자로 꼽힌다.
아아! 여기는 반남(潘南) 박군(朴君)
태보(泰輔) 사원(士元)의 묘(墓)이다.
세도(世道)가 추락하면서부터 실학(實學)을
하는 선비가 드물고 실재(實才)를
가진 사람이 드무니, 우리 사원 같은 이를
어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만일 천명을 연장시켰다면
학문은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여
고원한 경지까지 이를 수 있었을
것이며, 재주는 크게 성취해서
의혹이 없었을 것인데,
하늘이 이미 이런 재능을
주고서 곧 중도에서 넘어뜨리니,
과연 무슨 의도란 말인가?
과연 무슨 의도란 말인가?
군은 갑오년(甲午年,
1654년 효종 5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보다 총명하고
매우 박식하였다.책을 보면
반드시 그 참뜻을 궁구하여,
비록 완곡한 표현에 깊은 뜻을
담은 글이라도 한번만 보면
분석해서 사람들의 예상 밖에
나왔다. 문장을 지을 때는
이치가 승(勝)한 것에 주안점을
두어한 글자도 군색하지 않았으며,
차분하고 노성해서 스스로 일가
(一家)의 법도가 있었다.
22세에 성균관 생원이 되고,
24세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그러나 아무 죄없이 선천(宣川)으로
귀양 가서 1년이 지나서야 풀려나
돌아왔다.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비로소 옥서
호당(玉署湖堂, 홍문관에서
주관하는사가 독서(賜暇讀書)
를 말함)에 선발되어 들어가니
, 당시의 뛰어난 선비 중에도
그를 앞서는 자가 없었다.
군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과단성 있으며 명쾌하여,
곧장 나아가 일을 처리하고
머뭇거리는 적이 없었으므로,
이 때문에 시대와 맞지 않았다.
군 또한 외직을 청원하여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가 5년 동안이나 오래
있었으며 전랑(銓郞)을 거쳐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는데,
또 부모 봉양을 청원하여
파주(坡州)로 나갔는데
그 이듬해가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이었다.
임금이 중궁(中宮, 인현
왕후(仁顯王后))을 바꾸려
하였는데, 당시 사직하고
집에 있던 군이 여러 공과
함께 상소하여 곧은 일을
간하다가 기휘(忌諱)에
저촉되었다.
상소가 들어가자 형정(刑庭)
을 설치하여 공을 국문하였는데,
공이 앞장서서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고문을 다 받고서
피와 살이 찢겨 문드러져도
사기(辭氣)가 흐트러지지
않았기에, 듣는 자가 장하게
여기면서도 슬퍼하였다.
진도(珎島)로 귀양 가는 길에
노량진(露梁津) 강가에서
졸하니, 그해 5월 5일이었다.
전에 노 소재(盧蘇齋, 노수신
(盧守愼))가 지은 강 주천(康舟川,
강유선(康惟善))의 묘문(墓文)에
‘하늘을 우러러 천번 만번 가슴을
치게 한다.’는 말이 있어 이를
읽을 때마다 표현이 야(野)한 데
가깝다고 혐의스레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 구절이 지극한
아픔에서 나와 스스로 깨닫지
못했음을 알겠다.군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임금이 자못 뉘우쳐
관직을 회복시키기를 명하였으며,
6년이 지난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임금이 크게 깨닫고서
중궁(中宮)의 자리를 회복시키고
군에게는 정경(正卿)의 벼슬을 추
증하였으며,제사를 내리고
정려(旌閭)하여 충혼(忠魂)을
위로하였다.
세월이 바뀌어 은혜가
구천[九原]에 미쳤으나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통하고 애통하도다!
군은 지식과 사려가
심원하여, 논의가 근면
하고 적절하면서도 진실
되고 넉넉하였다.
그가 옥당(玉堂, 홍문관)에
있을 때는 문묘(文廟)에
승출(陞黜)하는 의논을
한 건에 ‘겸양하는 덕을
숭상하고 신중하는 도를
지켜 임금의 기질이 치우친
바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 임금을
바로잡는 대의를 깊이
체득했다 할 만하다.
일찍이 암행 어사(暗行御史)가
되어 ‘중외(中外)에서 이익을
취하여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징조가 된다’는 호남(湖南)
일로(一路)의 흥판(興販,
장사)하는 폐단을 돌아와
아뢰었으니, 또한 아성(亞聖,
맹자)이 의리(義理)를 분별
한 것과 합치되었다.
나는 이 두 가지에 대해
항상 마음으로 탄복하여
이런 식견과 의논은
세상에서 그와 비교할
자가 적었기에, 만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성조(聖朝)는
반드시 그의 힘에 의지하였
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어
후세에 군을 아는 자로
하여금 공 원로(孔原魯,
원로는 송 인종(宋仁宗)
때의직신(直臣) 공도보
(孔道輔)의 자(字))와
추 지완(鄒志完, 지완은
송 철종(宋哲宗)때의
직신 추호(鄒浩)의 자임)의
지조로 여기는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니,
아! 군의 천명이요
시운의 불행이로다.
옛사람이 하늘에
죄없음을 호소하려 해도
좇을 수 없는 것이 어찌
다만 송(宋)나라 때의
악 무목(岳武穆, 악비(岳飛))
뿐이겠는가?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년)에 우리 선친
(윤선거(尹宣擧))께서 무함을
당했을 때 여러 문인들이
장계를 올려 변설하려
하였는데, 군이 우리 선친을
위하여 붓을 잡으니, 사림들이
옳게 여겼다.
그 외에도 세도(世道)에
관계된 문자가 매우 많은데,
문집은 약간 권이 있어 세상에
전하여 후세 사람들이 오히려
상고할 수 있을 것이다.
군의 호는 정재(定齋)요,
그 선조는 나주인(羅州人)이다.
고려 말에 문정공 (文正公)
박상충(朴尙衷)이란 분이 계셨고,
우리 조선 중종(中宗) 때에는
사간(司諫)을 지내신 박소(朴紹)
란 분이 계셨다. 두 분은 모두
정학(正學)과 대절(大節)로
당시에 액운을 당하였는데,
공도 그 분들을 닮아서 매우
불행하였다. 증조(曾祖)
휘(諱) 동선(東善)은
참찬(參贊)을 지낸 정헌공
(貞憲公)이요, 할아버지
휘 정(炡)은 참판(參判)을
지낸 충숙공(忠肅公)이며,
아버지 박세당(朴世堂)은
지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요, 어머니는 의령 남씨
(宜寧南氏)로 현령(縣令)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판추공(判樞公, 박세당)의
숙형(叔兄) 휘 세후(世垕)는
일찍 졸하여 군을 그의 후사로
삼았는데, 양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곧 나의 자씨(姊氏)이다.
군은 정성스러운 효성이
지극한 성품에서 나와
양어머니를 섬기는 데
있어 안색과 뜻을 받들고
따라 즐겁게 봉양한 방도가
비록 본인의 소생이라도
어찌 그보다 낫겠는가?
예전에 우리 맏고모는
현숙하고 명철하였으나
일찍 과부가 되어 이민적
(李敏迪)을 얻어 자식을
삼았다. 모자간에 서로
매우 자혜롭고 효성스러워
사람들이 이르기를,
“우리 고모는 덕은
있고 명이 없기에
하늘이 훌륭한 아들을
내려 준 것이다.” 하였다.
일가의 친척들이 우리 자씨도
그렇다고 칭찬들 하지만,
이 사실은 우리 집은 알지만
바깥 사람들은 상세히 모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자씨는 늘그막에
또 군을 곡하게 되어 그 복을
끝까지 누리지 못한 셈이니,
우리 맏고모의 명과 비교해
본다면 더욱 박복하다고 할
것이다. 아! 슬프도다.
군은 상공(相公) 이후원(李厚源)
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고, 단지 딸 아이
하나가 있을 뿐이다.
판추공(判樞公)이 또 군의
형인 지평 박태유(朴泰維)의
어린 아들 박필모(朴弼謨)를
군의 후사로 삼은 다음 또 군의
묘표(墓表)를 만들려고 편지를
보내 와 이르기를, “그가 세상에
나서 비록 빨리 떠났지만 오히려
전할 만한 것이 없지는 않을 것이니,
문자로 기록을 남기어 끝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또 군의 벗 남군(南君)
학명(鶴鳴)이 그가 지은
행장 1통을 보여 주었는데,
나 윤증은 늙고 병들어
혼미해서 오래도록 전할
만한 글을 지을 수 없다.
그러나 군이 확립한 바가
어찌 남의 말에 따라 드러나고
숨겨지는 바가 있겠는가?
다만 그 개략만을 추려서
위와 같이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람의
묘인 줄 알게 할 뿐이다.
슬프도다!"
-명재 윤증이 쓴 박태보의 비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