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6년 선조 9년 새해가 시작되면서 토정은 엉뚱한 일을 계획하였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아산 지방에 득실거리는 거지와 빈민을 없애느냐는 것이었다.
그해 2월 어느 날 이방 호방 형방 등 관속들을 모두 모아 놓고 토정은 이렇게 입을 열었다.
"며칠 전 이율곡은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조정을 떠났다. 정말 안된 일이로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율곡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노라.그래서 나도 지금부터
하려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미관 말직이나마 미련없이 떠날 생각이야."
라고 토정이 이처럼 '사퇴'를 배수진으로 치고 말을 하자 관속들은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로들 무슨 말을 꺼낼까 눈치를 보고 있는데 토정이
"자!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을 도와주어야겠다. 그것은........"
하고 입을 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전에 한 가지 이야기를 하지. 내가 어려서 이곳 아산으로 장가를
왔었으니 그러니까, 아산은 내 처가의 고을이다. 그런데 첫날밤을 겪고 이튿날 아침
산책을 나갔었는데 아주 추운 겨울이었느니라. 그 때 들샘말 입구 다리 밑을 지나는데
다리 밑에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겠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걸인들이
너무 추워서 그렇게 떨며 신음하는 것이었지.그래서 나는 그만 입고 있던 솜못을
모두 벗어주고 돌아왔는데 내의바람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처가집에선 깜짝 놀라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느니라. 그런데 며칠 전 나는 우연히 그 다리 밑을 지나다
또 걸인들을 보게 되었으니 이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벌써 수십 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 다리 밑에 걸이 있다니......."
토정의 이야기를 듣던 형방이
"사또, 걸인쯤 없애는 거야 문제겠습니까? 지난 번 기생들도 쫓아냈는데.....,
그까짓 일이라면 저에게 맡기십시요. 열흘도 안 걸려서 말끔히 쫓아낼 테니 말입니다."
하고 나섰다. 다른 관속들도 그까짓 걸인을 없애는 것이야 기생들 몰아내기보다
훨씬 쉬운 일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그러나 토정은 "내가 걸인을 없애자는 것은
그들을 기생을 쫓아내듯 아산 밖으로 몰아내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걸인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니라."하고 말했다.
그러자 모두들 또 한번 어안이 벙벙해졌고 어떤 사람은
"아니, 그러면 정말 없애겠다는 것이 아니라,아산을 걸인 마을로
만들겠다는 것이옵니까?"하고 묻기까지 했다.
토정은 "걸인을 없애자는 것은 그들을 모두 잘 살게 하여 평민과 같이 만들자는 것이며,
걸인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영세민들도그와 같게 하여 잘 살게 하자는 것이니
그들이 집을 갖게 하고 농토를 갖게 되면 자연히 아산에는 걸인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는 고을이 되지 않겠느냐?"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우선 현감 직속으로 '걸인청'을 설치할 것이며, '걸인청'을 지휘 관장하는
장령의 임무는 호방이 맡도록 하라. 그리고 형방은 나졸들을 풀어 아산 관아의
모든 걸인들을 새로 생기는 '걸인청'에 수용하도록 조치하라."하고 명령했다.
그러자,"'걸인청'이라뇨? 그것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이옵니까?"
하고 이방이 이의를 제기했다.
"근거는 불쌍한 백성을 따뜻히 보살피는 것이 목민관의 책임이며
또 본분이기 때문에 내 책임과 직분에 근거를 둔 것이니라."고
토정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많은 걸인을 수용할 건물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많은
걸인들을 먹여 살릴 재정도 없습니다.하온데 어찌 걸인청을 설치한단 말입니까?
옛말에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하물며 일개 현에서......"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호방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토정은 "이방의 이야기나 호방의 주장은 다 옳은 말이로다. 하지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우선 '걸인청' 건물은 새로 지을 필요 없이 조세 창고를
깨끗이 치우고 수리하여쓰도록 할 것이니 그 창고는 걸인 2백은 넉넉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금년 1년 동안만 우리가 먹여 살려 준다면
그 다음 문제는 걱정할 것 없다. 우선 관속들이 필요이상으로 가지고 있는
국유지는 즉시 회수하도록 할 것이며회수된 국유지는 모두 걸인청 소유로
하겠노라."하고 선언했다.
이와 같은 결정이 내려진 후에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틈을 타서
현감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있던 하인이 토정 앞에 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사또 어른!"
이렇게 토정 앞에 머리를 숙인 하인은 몹시
격앙된 음성으로
"걸인청을 만드는 게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 '걸인청'을 설치키로 했다.
헌데 네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묻느냐?"
하고 물었다.
토정이 이번에는 반문했다.
"그러면 개인이 경영하고 있는 둔전을
거두어 들인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
토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하인은
"사또 어른! 그래 나라에서 준 귀중한 둔전을
거지들에게 준다니 말도 되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허, 당돌하구나!"
토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하인은 "당돌한 것이 아니옵니다. 제가 벌써 아홉 분의 현감을
모시고 있습니다만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이 지방 돌아가는 것은
저만큼 아는 사람이 없습죠. 그리고 제가 둔전을 좀 가지고 있는데
만약 모든 둔전을 다 거두어 들인다 해도 제 것만은 제외해 주십시오.
사또!"하고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토정이 "네가 나를 위협하는구나!"하고 큰 소리로 말한 후
"그래 나라에서 준 땅을 거지에게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네가
너만은 그런 땅을 가져도 된다는 말이냐?너야말로 도둑의 심보로구나.
그리고 네가 아홉의 현감을 모셨는지 열 명을 모셨는지 내 알 바가 아니지만
네 말의 뜻은 잘못 너를 건드리면 내가 죽는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고 일갈했다.
정말 생각할수록 하인놈의 입에서 그 따위 말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불쾌하기이를데 없고 괘씸한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마음 착한 토정이지만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하인놈은 그대로 배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하인의 신분이면서도 역대 현감을 오래 보필했다는 데서 소위 텃세가
대단했던 것이다. 현감의 갖가지 비밀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현감에게 자금을
조달하는 것도 이 늙은 하인이었다.그래서 현감일망정 함부로 이 하인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어떤 현감은 하인의 비위를 맞추어 축재를 하려고 했다.
그리고 관속들이나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현감과 직접 거래를 할 수 없을 때에는
이 하인을 중개자로 하여 움직였다. 심지어 하급 아전들 사이에선 이 늙은 하인을
움직여 엽관 운동을 하기도 했고 관기들도 이 하인에게 접근하여 현감의 총애를
받고자 했다. 토정은 이런 내막을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약점이 없고 재물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존재를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이 늙은 하인은 그의 텃세와 관록과 신분을 초월한 자만심 때문에 감히
토정에게 이래야 하느니 저래야 하느니 시비를 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토정은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네 이야기가 끝났으면 속히 물러가라!"
고 단호히 명령했다. 그러는 토정의 눈은 인자스러움에서 노기 같은 것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이 말에 하인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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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아산군 영인면 향토지 <영인면 사람들의 문화>에서 옮겨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