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 시집 좀 볼래요.
시가 좋아요. 내 친구들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뭔데? 아니, 이거 호승이 시집이잖아.
호승이 시집이 뭐예요.
엄만 나이 많다고 말을 너무 함부로 하네요.
아냐. 니가 몰라서 그래.
엄만 그 정호승 시인을 알아. 아주 오래 전부터.
마르고, 키가 훌쩍 크고,
눈빛이 선하고 맑은 중학생 소년은, 교복차림에
그 당시 우리가 통칭 똥구두라 부르던
워카를 신고 있었습니다. 대구 계성중학교 3학년.
나는 대구 신명여고 1학년.
나 또한 단발머리에 교복차림이
었던 64년이었습니다.
이런 연대가 과연 있기나 했다싶게 세월이 참 많이
흘러 있습니다.
35년도 더 지난 지금,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호승이(경칭은 생략하기로 합니다) 만만찮은
사람이 될 거라는 조짐은 처음부터 보였었지요.
그 선하고 맑은 눈빛은 또한 날카롭더란 말입니다.
{학원}이란 학생잡지가 있었습니다.
우리 또래의 문학도들이 이 잡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그저 이 잡지의 문예란에 글이
실리기 위해 온밤을 책상 앞에 앉아
보낸 일이 어디 한두번이겠습니까.
그 잡지에서 학원학생기자라는 걸 뽑았었는데
대구 지방에선 뽑힌 사람이 세 사람이었습니다.
정호승과 박진숙 외에 경북고등학교 2학년이던 김성태씨
가 있었습니다
(MBC 보도제작국에 오래 있다가
지금은 대구방송국의 전무
로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세 사람을 학원대구지사에서 부른 자리였습니다.
그날 우리 세 사람이 만나 무얼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습니다만
그때 처음 만난 정호승과 나는 곧장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명칭도 그리운 이른바 펜팔이란 게 시작된 셈이었지요.
정호승은 나를 깎듯이 누나라고 불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맘 때의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차이는 엄청난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 정호승을 보고 키가 크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호승은 촛대처럼
휘청 키가 컸던 게 사실입니다. 정호승은 신천동
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수재인 형,
수재인 여동생과 함께 단란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언뜻언뜻 듣기에도 그 효심과 우애가 대단한 집이었습니다.
나는
집이 김천이어서 친척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천성이 말이 없기나 한 듯이
입을 꽉 닫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정호승과 나는 참으로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주로 엽서를 사용했던 것은
사용이 간편한 탓도 있었겠지만
우리의 편지내용이 누가 봐도
괜찮은 것이었던 탓도 있을 겁니다.
정호승의 편지는 들끓는 내면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잦아서 어떤 땐
나조차도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종종 있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시절을 두고 어떤 공개석상에서
정호승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문장력은 그맘 때 상당량 키워진 것이라고요.
그 말을 받아 고원정이란 소설가가 대뜸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형 시가 그거밖에 안 되지.
좌중이 웃음바다가 된 것은 물론입니다.
그 시절 우리는 지방이고 중앙이고 백일장과
문예현상을 휩쓸고(?) 다녔습니다.
정호승이 학원문학상에 특선을 했을 땐
당선소감에 누군가 살고
있는 파란색 대문의 벨을 눌러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겠단 구절이 들어 있었을 겁니다.
사람들은 그게 누군지 몰랐겠지만 그게 바로 납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정호승 시인을 호승아,
하고 부를 수 있는 겁니다.
정호승을 대구 대륜고등학교에 두고
나는 서울의 경희대로 진학했습니다.
경희대 문예현상에서 소설 당선을 했었으므로
이른바 특차, 문예장학생으로 뽑힌 겁니다.
경희대는 아름다운 캠퍼스에 황순원 선생님이 계셔서
아주 선망하던 곳이었지요.
정호승도 경희대로 진학하길 원했습니다.
그러자면 백일장에 장원을 하거나 문예현상에서
당선을 해야했습니다. 아무리
글을 좀 쓴다고 해도 이건 약간의 운이
따라주어야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정호승의 불안감은 컸을 겁니다.
드디어 정호승은 내 대학의 후배가 되었습니다.
경희대 주최 고교생 문예현상에서 당선을 따낸 것이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로 당선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고교문예의 성찰]인가 하는 제목의 평론이었습니다.
정호승은 그걸 마감에 대지 못해
내게 따로 보냈고 나는 그 작품을 재학생이란
특권을 걸고 접수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게 또 나중에 약간 문제가 있었습니다.
작품의 표지를 쓴 것이 정호승이 아니라
정호승의 아버지셨던 겁니다.
그래서 글을 쓴게 정호승이 아니라
어른이 써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샀던 거지요
(지금처럼 컴퓨터를 쓰는 시절 얘기가 아니니
양해를 구합니다).
어쨌거나 정호승은 개나리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회기동 캠퍼스에 군복을 물들인
작업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1968년이었는데 그만 때쯤엔 편지를 주고
받지 않았습니다.
하도 많이 편지를 써제껴서 남아 있는
얘기가 없는 건지도 몰랐고
아니면 이제 각자 넓은 물에서
사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입니다.
그 시절 나는 잘난 척 하느라 누구와
어울리지도 잘 못하고 혼자 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문득문득 캠퍼스 곳곳에서
정호승과 만나지면 내가 그냥 찡
그리듯 씩 웃고 지나가더랍니다.
이건 훗날 정호승이 추억한 것인데, 그게
그렇게 괜찮은 장면이었다고 말해 주어서
내가 흐뭇해 했습니다.
그 시절 정호승은 집안이 기우는 통에
상당히 고생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는데
무심한 나는 그런 것도 몰랐습니다.
듣자니까 학교 강의실에서도
자고 그랬다는데 그때 정호승의 아름다운 동기생인
김정수(방송극작가)는
밥도 잘 사주고 담요도 가져다주고 그랬다고 합니다.
정호승은 한 학년을 마친 후 휴학계를 내고
외가가 있는 경주로 내려갔습니다.
훗날(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는 이 시절 씌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1973년, 지금은 없어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첨성대]란 시도 이런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욕심쟁이 정호승은 소설에도 도전을 해
1982년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당선도 따내는데
제목은 [위령제]로 압니다.
이건 의과대학을 나와 후에 의사가 된 형에게서
영향을 받아 쓰게 된 것이라 또
추측을 해 보는 것이고요.
휴학에 이어 정호승은 입대를 하게 됩니다.
어디어디를 거쳐 춘천에서
복무를 했는데 내가 친구 하나를 데리고
딱 한 번 면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정호승은 군복차림인데도 단아하기만 했습니다.
연도를 맞춰보면 알겠지만 군복무 중에
정호승은 신춘문예라는 관문을
뚫은 만만찮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졸업을 하고 국어선생이 되었습니다.
정호승은 복학을 했고 그 뒤는
한동안 연락없이 지내는 세월이 이어집니다.
각자 결혼을 했고 자식들을 두었으며
어느날 문득 나는 서점에서
정호승의 시집을 사보거나 또는
정호승이 보내주는 시집을 받았고,
정호승은 안방에서 내 드라마를 보았을 것입니다.
만나지 않아도 느낌이 멀어진 건 아니었습니다.
정호승을 다시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건
황순원 선생님을 모시는
선후배 간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사모님도 오시는 그 귀하고 소박한 자리는
1차로 밥을 먹으며 담소를 나눈 뒤
우리끼리의 2차, 3차로 이어지는 것이 통례입니다.
1차에선 점잖기만 하던 선후배들이
2차, 3차에 가선 점점 본성을 드러내
짓궂어지기 시작합니다.
정호승과 나를 두고 놀리기 시작하는 것도 이때입니다.
정호승은 우선 술을 마시는 나를 그렇게 생소하게,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여기에서 나는 깨닫게 됩니다.
정호승의 머릿속에도 단발머리 교복차림인
내가 남아 있다는 것을요. 언제봐도 단정하고
깔끔한 정호승을 두고 후배들이
농담처럼 주고받는 말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호승이 형이 취해서 흐트러지는 걸
볼 수 있을지 몰라.
내 생각엔 없을 거 같습니다.
한 번은 3차에서 폭탄주가 도는 자리였는데
내게 순서가 왔습니다.
정호승은 내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그걸 받아 마시려는 순간 정호승이 말렸습니다.
나는 마시려고 했습니다. 정호승이 말했습니다.
꼭 마시려면 자신이 반을 마시고 주겠다고요.
같이 있던 술꾼 후배들이 왁자하니 웃었습니다.
내 술실력(?)을 아는 일부는 그냥 웃은 게 아니고
비웃은 게 분명합니다.
소설 쓰는 박덕규는 그때부터 정호승이 나타나면
나한테 이럽니다. 박선배, 저기 친정동생 오는데요.
그러면 옆에서 거듭니다. 박선배 술주지 마.
우리 정선배한테 혼나. 술이 오르면
우리는 노래를 부르러 가기도 합니다.
나는 정호승과 노래방엘 같이 가보고 좀 놀랐습니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고 뺄 줄 알았었는데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정호승의
노래엔 남들 다 부리는 기교가 없습니다.
거의 씩씩할 지경으로 담백하게 부르지요.
[바보처럼 울었다]란 진송남의 노래는
정호승이 없으면 우린 감히 번호를 찍지 않습니다.
자신의 시에 곡을 붙인 [이별 노래]도
누가 원하면 부르긴 하지만
[바보처럼 울었다]보단 못합니다.
[맨발로 뛰어라]도 잘 부르고
[빨간 구두 아가씨]도 잘 부릅니다.
정호승이 고상한 노래를 하지 않고
이런 대중가요를 부르면 우린 모두 신나합니다.
어떤 일에나 성실 자체이며,
조용하고 겸손한 정호승은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한 천상 시인입니다.
체력관리를 위해 그는 양재천을 자주 뛴다고 들었습니다.
정호승이 현대문학북스 출판부의
사장을 하고 모교에선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해도
정호승은 그 무엇보다 먼저 가슴이 따뜻한
시인 그 자체입니다.
그의 머릿속은 언제나 가진 거 없으나
영혼이 영롱한 사람들로 그득하며,
그걸 어떻게 시로 만들어내나
오늘밤도 잠을 줄이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정호승에게는 언행이 조용한 참한 아내가 있는데
우리집 애들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정호승은 내겐 누나라 부르고 우리집 애들
아버지에겐 형님이라고 부르니
촌수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저녁모임이 있어 늦어질 게 뻔한 날도
정호승이 섞이는 자리라면 우리집
애들 아버지는 은근히 좋아합니다.
정호승이 내 술잔을 뺏었다는 얘길
다 일러바친 덕분이지요.
후배들이 내게 정호승을 두고 친정동생이 왔으니
행동에 제약을 받겠노라 아무리 놀려도
나는 전혀 제약을 받지도 않을뿐더러,
정호승이 내게 그러는 것이 참 좋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일이 어떤 의미에선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정호승이 갖는
사회적인 역량이나 시의 경지 뭐
이런 건 내가 아니래도 이미 다들 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을 하고 나니 맘이 편해졌습니다.
그러니 나는 단지 그 옛날
내가 보았던 소년이 이제는 중년이 되어,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쓰며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고,
나 또한 한 귀퉁이에서 더불어 한 세상을
살고 있는 일이 아주 소중하고
즐겁다는 얘기나 하고 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