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末의 문학관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글이 「四十八詠跋」이다. 道보다 유교적 實踐倫理로서의 道가 더 강조되었다. 그가 48詠과 함께 長文의 跋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 48詠詩로서는 할 수 없었던 말을 산문의 형식을 빌어 피력하고 싶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道를 수호하고 道를 실천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탁영은 문학에 있어서도 철저히 道本文末의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문학관은 「四十八詠跋」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道에 근거하지 않은 문학, 道와 배치되는 문학은 참다운 문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변함 없는 文學觀이었다.
탁영은 忠․孝․義 등의 유교적 실천윤리를 가장 긴요한 과제로 생각했다. 忠은 신하가 지녀야 할 마땅한 도리이고 義는 君臣間에 지켜야 할 절대적 命題이다. 점필제의 「弔義帝文」을 史草에 올린 일은 바로 이 忠․義를 실천하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死後14 中宗7년. 7년 후에 文集이 간행. 많지 않은 詩에서나마 그의 문학적 지향을 비교적 분명하게 밝힐 수 있었다. 忠․義를 주 내용으로 하는 道의 문학적 형상화였다. 일생을 道의 실천에 바친 실제 생활과 그의 詩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文學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 文學史的 位相과 學問目標
문학사적 위상으로 보면 15세기후반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참예한 대립을 이룬 시기이다.
徐居正과 成俔 등을 중심으로 한 館閣文人, 金宗을直 필두로 한 신진관료의 處土文人, 金時習과 南孝溫 등을 중심으로 한 方外文人의 상호 대립과 갈등이 그것이다.
탁영은 선비를 訓詁儒, 詞章儒, 文學儒, 眞儒 등 네 가지로 나누고, 訓詁의 유자는 고루하고 詞章하는 유자는 부화하고 文學하는 유자는 과장되며 眞儒는 진실하다고 하였다. 眞儒의 입장에서 탁영은 작품활동을 하였다. 탁영은 문학 맥락 하에 일정한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
첫째, 문학의 정치적 기능을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사림파 지식인들은 문학을 통해 훈구파가 주도하는 정치를 견제세력의 중심에 바로 탁영이 있었다.
둘째, 풍속 교화의 道學的 실천의지를 문학으로 드러냈다는 점이다. 점필재 문인들은 특히『小學』의 교육을 중시하였다. 濯纓과 寒暄堂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셋째, 현실비판의 한 요소로 풍자적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 점이다.
부조리한 정치현실을 개혁하는데 앞장섰는데, 특히 풍자의 기법을 활용하며 자신의 뜻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탁영의 이 같은 문학적 행위는 16세기 다양하게 일어났던 비판적 문인들에게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문학에 대한 재도론을 본격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재도론은 周敦頤의 「文辭」에서 글은 도를 싣는 그릇으로 보고 문장이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으로 ‘實’과 ‘藝’를 함께 내세우며 출발하였다.
탁영의 학문목표는 도학적 수양과 실천으로 眞儒의 학문을 지향하였다. 도학만 한다면서 시문을 전혀 방해만 될 뿐이라는 생각을 가졌는데 탁영은 이 양자를 심도 있게 관찰하면서 도학자의 문학을 본격적으로 정립하여 이후 문인들이 펼칠 수 있게 한다는 데 중요한 학문목표의 의의가 있다.
탁영이 대표적으로 내세운 예술론은 書畵․詩文의 情緖表現論과 古今音樂의 獨自論이다.
글씨와 그림, 그리고 시에는 작가의 情緖가 오묘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셋을 ‘三絶’이라고 하면서 모두 마음속에 있는 작가의 정신이라 하였던 것이다. 탁영은 王羲之의 글씨를 좋아하였는데, 그를 생각하면서 글을 짓기도 했다. 형식위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내용을 중시하는 學問의 目標를 가졌다. 탁영 문학에는 현실주의적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먼저 신비주의적 사고를 배격했다. 선비는 마땅히 실학하는 선비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같은 입장에서 적극적인 治道의 방안도 모색했다.
문학에 나타난 現實主義的 性格은 여러 면에서 남다른 학문적 의의를 가늠할 수 있다. 문학이 政治에 봉사할 수 있는 기능을 인식하였다는 점, 풍속 교화의 道學的 實踐意志를 문학으로 드러냈다는 점, 현실비판의 한 요소로 諷刺的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5. 結論
濯纓의 문집에 수록된 詩의 양으로는 그의 詩 世界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어렵다. 그러나 많지 않은 詩에서나마 그의 문학적 지향을 비교적 분명하게 밝힐 수 있었다. 그것은 忠 ․ 義를 주 내용으로 하는 道의 문학적 형상화였다. 그리고 일생을 道의 실천에 바친 실제 생활과 그의 詩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일되어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탁영의 詞는 4편뿐이지만 그 성격이 다양하여 탁영문학 전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문집 扁題와 실제 작품의 성격과 대비해 볼 때 同質性과 異質性을 아울러 내포하고 있으며 ‘詞’와 ‘樂府’란 두 가지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
「朴希仁哀辭」는 서문과 본문으로 구분하여 구성했는데, 29세로 조몰한 희인에 대한 슬픔을 情感的으로 나타냈다. 「趙伯玉哀辭」도 서문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덕과 재주가 있으면서도 오래살지 못한 조백옥의 早歿을 哀悼한 사이다.
「秋懷賦」는 4․6언의 장단을 잘 살린 137구의 중편으로 一韻到底格의 운법으로 다양한 형식을 지녔다. 「疾風知勁草賦」도 자유로운 형식과 표현으로 된 106구의 장편이다. 세찬 바람에 꼿꼿이 서 있는 勁草를 보며 周公, 張巡, 許遠, 文天祥, 謝枋得, 陶潛, 張綱, 許由를 연상하며 자신의 절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탁영의 현실인식의 태도도 辭 ․ 賦에 강하게 나타나 있다. 정치 사회 현실인식 태도는 「遊月宮賦」「疾風知勁草賦」「秋懷賦」에 더욱 강하게 나타나 있다. 당시의 정치 사회를 암흑의 현실로 인식하여 군주의 鑑戒와 權奸의 축출을 실천하려 했으며, 개혁의 실천이 이루어지지 못한 현실에 대한 고독과 슬픔의 心懷가 잘 나타나 있다.
탁영의 문학에는 현실주의적 경향이 뚜렷하다. 훈구파와 일정한 문학적 간극을 두면서 보다 철저한 道學派 문학을 구사하여 나갔다고 하겠다. 정치 현실에 뛰어들어 이같은 그의 생각을 펼쳤다는 점에서 초야에 은거하면서 도를 펴고자 하였던 다른 도학자들과는 또 다른 文體的 特色의 성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濯纓의 文學世界를 요약하면 詩․書․畵는 작가의 정신을 통하여 그 오묘함을 표현할 수 있다는 藝術論과 性理學的 개념인 道本文末의 입장을 견지하는 투철한 文學觀으로 直筆을 생명으로 지켜온 올곧은 선비였다.
眞儒의 입장에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문학의 정치적 기능을 인식하고 道學的 實踐意志를 文學作品으로 구사했을 뿐 아니라 현실비판을 諷刺的 기법으로 활용하여 文學史的 位相을 세우고, 道學的 修養과 實踐을 학문의 목표로 하여 짧은 생애에 韓國文學史에 영원히 빛날 불멸의 명작을 남겼다.
濯纓先生의 文學에 대한 논의는 이같은 점을 인식하면서 보다 정치하게 연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參 考 文 獻
Ⅰ. 資 料
『濯纓全集』(景人文化社, 1985)
Ⅱ. 著 書
민족문화연구소, 『濯纓 金馹孫의 문학과 사상』(영남대학교출판부, 1998)
Ⅲ. 論 文
金光淳, 「濯纓의 藝術論과 그의 散文에 나타난 현실주의적 경향」, 『濯纓 金馹孫의 문학과 사상』(민족문화연구소, 1998)
金榮淑, 「탁영 사부의 문체적 성격과 현실인식」, 『濯纓 金馹孫의 문학과 사상』(민족문화연구소, 1998)
金榮淑, 「15 ․ 16세기 淸道의 한문학」, 『大東漢文學』11 (大東漢文學 會, 1999)
金榮淑,「濯纓 金馹孫의 ‘進四十八詠’의 樣相과 그 意味」, 『慶山語文學』3 (慶山語文學會, 2000)
宋載邵, 「濯纓의 詩에 對하여」, 『濯纓 金馹孫의 문학과 사상』(민족문화 연구소, 1998)
조문주, 「濯纓 金馹孫의 記文에 대한 一考察」, 『漢文學論集』16 (槿域漢 文學會, 1998)
曺壽鶴, 「濯纓의 管處士墓誌銘 小考」, 『嶺南語文學』20 (嶺南語文學會, 1991)
탁영 김일손선생 문학비 |
||
|
濯纓 金馹孫先生文學碑
滄波萬頃櫓聲柔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 소리 부드러워 滿袖淸風却似秋 소매에 맑은 바람 가을인 양 서늘하다 回首更看眞面好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워 閒雲無跡過頭流 흰 구름 자취 없이 두류산을 넘어 가네 <선생이 1489년 4월 29일에 섬진강에서 두류산을 읊은 시>
|
|
|
||
김일손(金馹孫 : 1464-1498)선생은 김해김씨로서 자는 계운季雲이시요 호는 탁영濯纓이시다. 조부이신 절효공節孝公 극일克一과 조카인 삼족당三足堂 대유大有와 더불어 삼현으로 추앙되고 도학문장과 충효절의가 뛰어난 분으로서 온 누리에 칭송되었으며 자계서원紫溪書院에 모셔졌다. 17세때 점필제 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에게 배우고 23세 때 생원․진사․전시에 으뜸으로 급제하여 한림원에서 화려한 직책을 두루 지내며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있었고 다음에 질정관과 서장관으로 중국북경에 두 차례나 가서 명사인 정유程愈 주전周銓등과 교유하니 그들은 한결같이 선생의 학문을 한퇴지韓退之와 같다고 칭송하였다. 그때 소학집설小學集說을 얻어와 간행하였다. 27세때 사관史館에 입직하여 직필로 사초史草를 닦고 스승 김종직 선생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기록했으며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과 한훤寒暄 김굉필金宏弼 선생등과 도의로써 사귀었다. 연산군 4년 7월 27일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참화를 당하니 35세의 젊음으로 한 뉘를 마쳤다. 1506년에 이르러 중종반정으로 선생은 억울함을 씻고 관직이 복직되었으며 홍문관 직제학과 승정원 도승지 및 이조판서 등 요직에 증직이 되시었다. 중종 14년(1519) 2월에는 조카인 대유가 선생의 유고를 모아 탁영 선생 문집 3책을 펴내니 그때 관찰사였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이 이를 도왔다. 순조 34년 6월에는 나라에서 “도의와 학문이 넓게 들리고 많이 보았으니 문이요 정충과 직절이 백성들로 하여금 슬프게 하니 민이라”(博聞多見曰文使民悲傷曰愍)고 문민文愍이란 시호를 내리셨다. 뒤에 영 호 양도 유림들이 점필제선생과 탁영선생을 문묘에 올려 함께 제사할 것을 바라는 소장에서 “김일손은 종직의 고제로서 도덕과 인의를 택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행실이야말로 준엄하고 언어가 엄정하며 몸은 위태롭고 도덕은 높아서 이 나라에 영원히 큰 선비의 모습을 보였도다. 이에 전국의 선비들이 정성을 모아 여기에 문학비를 세워 선생의 선비정신을 찬양하고 후학들에게 살아있는 거울이 되게 하고자 한다.
1998년 5월 일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 회장 문학박사 이상보 삼가 짓고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모산 심재완 삼가 쓰다 |
||
|
江祜 金 周 坤 博士 略歷
김주곤(金周坤) 1934. 10. 20. 生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지동 동서우방타운 105동 903호
전화 ; 053-793-2997, 019-521-2996
前 大邱韓醫大學校 敎授, 文學博士
建築造型大學長, 大學院長
大邱語文學會 會長
現 韓國禮節硏究會 會長
江祜 詩 硏究會 指導敎授
大邱 時調 聯合會 顧問
著書 : 『韓國詩歌와 忠孝思想』
『韓國歌辭硏究』
『韓國歌辭와 思想硏究』
『韓國佛敎歌辭硏究』 外 論文 70 여편
詩集 : 《시들지 않는 또 하나의 時間》
《머물 수 없는 空間》
《時空의 노래》
《색깔 없는 무지개》
第3節 濯纓 金馹孫선생의 現實意識과 그 對應
(김윤곤)
1. 체포에서 死刑 당하기까지의 경과
탁영선생은 세조10년(1464)에 청도 이서면 서원동에서 아버지 執義公(諱孟)과 어머니 龍仁李氏사이의 3남으로 태어나서 ‘戊午史禍’ 때 ‘史草’ 문제로 말미암은 筆禍로 돌아가셨다. 선생은 “30여의 짧은 일생을 살았지만, 15세기 후반이라는 역사적 시점에 서서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그리고 왕조의 미래가 요청하는 바에 따라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였고, 추호의 망설임 없이 그 현실에 대응한 초기 사림파 중의 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의 이러한 현실대응의식과 자세는 후일 사림파가 점차 성장함에 따라 그 역사적 가치를 조금씩 인정받게 되었고, 더욱 먼 훗날 사림파가 그들의 이념과 이상에 따라 정국을 운영하게 되는 士林政治期에 이르러 역사 속에 뚜렷한 좌표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1)고 한다.
선생은 사림파 중의 한 대표적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나, 당시에 능지처사(凌遲處死)란 가혹한 형벌로 처형된 대역죄인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전후 상황을 되돌아보면 실재로 국법의 위반으로 그처럼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고 보기 보다는 훈구파 집권세력의 정치적 보복으로 죄 없이 형장의 이슬처럼 生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士林政治의 시대’를 열어․발전시키기 위해서 고귀한 희생을 감수하였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선생의 체포에서 처형까지 전체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연산군 4년(1498) 7월 2일(丙申)에2) 선생은 함양군에 있는 동문수학한 일두 鄭汝昌의 댁에 머물고 있다가 체포되었는데, 동석하고 있던 일두가 “士林의 禍는 이로부터 시작일 것이다” 하니, 선생은 “이는 필시 李克墩이 일으키는 ‘사초’에 관한 사건일 것이며, 나는 그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바라건대 일두는道를 위하여 自愛하시오” 하였다. 일두도 “여러 말하지 마오. 나 역시 이 행차에 뒤따르게 될 것이요”라고 하니, 선생은 미소로 不答할 뿐이었다고 한다.
그에 앞서 점필재 金宗直은 세조가 단종을 살해하자「弔義帝文」을 지어 놓았는데, 그 후 성종이 매계 曺偉에게 명하여 점필재의 시문집을 편집하도록 했으며, 여기 첫머리에 그 제문이 수록되어 있었다. 성종 21년(1490) 3월에 선생은 史館에 入直하고 있었으므로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의 ‘사초’에 실었던 것이다. 이 제문은 단종을 살해한 세조의 不義를 빗대어 표현하여 놓은 것인데, 선생이 이를 ‘사초’에 실었던 것은 세조의 왕위찬탈과정에서 저질러졌던 역사의 진실을 후세에 전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선생이 쓴 ‘사초’가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훈구파 집권세력들이 세조의 왕위찬탈과정에서 있었던 전말을 조작하고 숨겨놓으려 하였으나,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채록하여 ‘사초’로 닦아 왕조실록에 남기려는 선생의 역사의식으로 인해 폭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선생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부패 타락한 훈구파 大臣들의 비행과 그들의 秕政을 고발하고 사림파의 이상적인 개혁정치를 실현하려고 고군분투하였는데, 결국 훈구파들은 선생의 ‘사초’를 정치쟁점화 하여 선생을 희생시키는 외에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아래의 논술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의금부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모진 拷問을 겪으며 또 진술서도 제출하였다3)고 한다. 임금은 선생의 ‘사초’를 보면서 심문을 계속하였는데, 그 중에 “어찌 「조의제문」을 수록하여 놓고 그에 찬사를 보낸다고 하면서 忠憤을 덧붙여 놓은 저의가 무엇인가? 고 추궁한 것이 있다. 이에 선생은 “세조 때 사실을 ‘사초’에 기록한 까닭은 임금의 善惡과 신하의 忠奸을 후세에 권장․경계로 삼고자 함이며,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魯山君의 사실을 실재 感知한 그대로이며, 臣이 이를 ‘사초’에 편집한 것은 천년 후세에까지 이를 보여 公論케 하고자 함이다”고 진술하였다. 또 “‘사초’를 같이 의논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이미 실정대로 모두 진술하였다. 본래 같이 의논한 사람은 없다. 홀로 죽기를 바란다.4)고 했다. 선생의 당시 진술하였던 내용이 『연산군일기』에서는 임금의 심문에 대한 대답으로 아래 (ㄱ)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ㄱ) 신이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전해들은 사실을 史官은 모두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 또한 썼을 뿐이다. 所聞處를 下問하시는 것은 부당하다.․․․史官의 들은 곳을 만약 반드시 밝히라고 한다면 사실대로 기록해야 할 實錄이 폐지될까 두렵다.․․․원래 史法에 ‘先是(이에 앞서)’라는 말과 ‘初(처음에)’라는 말이 있으므로 신이 또한 감히 先朝의 사실을 썼다.5)
임금의 권위와 위협으로 대역죄로 날조하고 사건의 연루자를 색출하려고 들자, 선생은 史官의 정당한 직무와 史法에 의거하였던 것임을 밝히며, 국문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사초’를 닦은 연유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특히 심문과정에서 관련인사들을 보호하고 사건의 모든 책임을 혼자 지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선생은 임금의 거듭되는 심문에 대해 의연한 자세로 史官의 막중한 책무에 대해서도 (ㄴ)과 같이 진술하였다.
(ㄴ) 나라에서 史官을 설치한 것은 史의 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며, 신이 직임을 다하고자 감히 史草를 닦은 것이므로, 이 같이 중한 일을 어찌 감히 타인과 더불어 의논하였겠는가. 신은 이미 본심을 다 털어놓았으니 바라건대 혼자 죽겠다.6)
선생은「조의제문」을 비롯한 ‘사초’의 일체가 史官으로써 막중한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여 빠짐없이 정확한 역사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책임을 어떤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는 천직의 소산물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어떤 관련인사도 있을 수가 없으며, 오직 자기 자신만의 책임으로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초’가 지닌 의미는 결국 세조의 왕위찬탈과정에서 저질러진 패륜․비리․부도덕한 사실과 세조 측근들의 불법․비행에 관한 것 등을 폭로하여 역사의 증언으로 남겨놓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탁영문집연보』에서 선생은 7월 2일 체포되었다고 했으나 5일7)에 함양의 일두 정여창의 댁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기에 이른 듯하며, 의금부에 구금이 되고 11일부터 본격적인 조사와 심문을 받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는 연산군 4년 7월 1일(乙未)에 의금부경력 홍사호 등이 “명령을 받들고 경상도로 달려갔는데, 외인은 무슨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고 하였으며, 10여일 뒤인 11일(乙巳)에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大內로 들여갔다”하였고 또 12일(丙午)에 “홍사호가 김일손을 국문장으로 끌고 들어왔다”8)고 한 것 등의 자료를 통하여 그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의금부경력 홍사호 등이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서 7월 1일에 경상도 청도로 향하여 출발하였고, 5일에 함양의 일두 댁까지 가서 선생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 구금해 놓고 11일부터 본격적으로 선생의 죄과를 조사 심문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같은 달 26일에 ‘사초’사건 관련자의 刑名을 결정한 가운데 “김일손은 능지처사로 논정하여 보고하였다”9)고 했다. 여기 推官들이 형명을 논의하던 과정에서 노사신은 윤필상․한치형․유자광 등과는 달리김종직이 詩文을 지어서 비난하였으니 그 사정이 切害하므로 대역으로써 논단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나 김일손 등은 단지 종직의 시문만을 찬양하였으니, 종직과 더불어 죄과를 같이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 일은 마땅히 후세에 전해질 것인바 경솔하게 결정지을 수 없사오니, 亂言切害로 논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또는 “일손 등이 詩文을 自作한 것이 아니옵고 단지 김종직만 찬양하였으니 그 죄가 마땅히 가벼워야 하기에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는 등으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부패 타락한 훈구대신들이 이제껏 누려온 독점 권력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비록 정치적으로 날조한 사건일망정 선생을 대역 죄인으로 조작하여 처단하기에 일말의 양심적 가책을 느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汚名이 후세까지 전하여지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 같은 변명을 늘어놓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노사신 등의 반론을 억누르고 전교하기를, 김일손 등을 벨 적에는 百官으로 하여금 가서 보게 하라. 근일 경상도와 제천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무리들 때문에 그런 것이다. 古人은 지진이 임금의 失德에서 이르는 것이라 했으나 이 변괴는 그 무리의 소치가 아닌가 여겨진다. 유생이 혹은 성균관에 있고 혹은 四學에 있으므로 단지 古書만 보고서 조정의 법을 알지 못하여 서로 더불어 조정을 비방하니, 어찌 이와 같은 풍습이 있겠는가. 이 무리가 비록 학문이 있다 할지라도 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도리어 학식이 없는 사람만 못하다”10)고 했다.
역사의 무서움을 망각한 통치자는 자신의 失德, 심지어 자연재해까지도 無辜한 죄인의 허물로 덮어씌우기도 하며, 또 성균관과 사학의 많은 학생들의 비난과 성토, 저항과 투쟁을 억압과 공포분위기로 제압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음을 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윤필상 등 훈구대신들이 刑名을 결정하여 왕에게 보고한 바로 다음날인 7월 27(辛酉)일에 “김일손 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고유하였다”11)고 한 것에서 ‘사초’사건 관련자의 刑이 즉시 집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선생이 함양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의금부에 구금된 것으로부터 겨우 17일 만에, 특히 최종확정 判決의 바로 다음날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탁영선생의 개혁정치 실현의 의지를 ‘사초’로 표현해 놓은 것을 반체제활동의 일환으로, 또 그 ‘사초’는 훈구파 정치세력의 치부와 부패 타락상을 후세만대에 이르기까지 폭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각각 단정하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 野史와 外史의 제도적 樹立提議와 戊午史禍
연산군과 훈구파 집권세력들이 탁영선생의 ‘사초’․「조의제문」을 빌미로 삼아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무오사화’를 일으켰으며, 이것은 부패 타락한 훈구파 집권세력들이 역사를 무서워하지 않고 무모하게 급조한 정치적 사건이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들은 사림파 중에서도 특히 선생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과제였음을 아래에서 밝혀보기로 한다.
선생의 현실인식 및 사상은 그의 역사의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그 개혁안도 그의 현실 대응방식에 기초하여 도출되었다고 본다. 선생이 연산군 1년(1495) 5월 충청도 都事로 있으면서 상소한 ‘利病26事’는 거의 국정전반과 민간의 利病을 26조목으로 나눠서, 그 각 조목별로 개혁안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여기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안에는 선생의 철학과 평소 갖고 있던 정치사회사상 및 時政개혁에 대한 포부가 모두 들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 ‘이병26사’는 “성종 때 李深源과 南孝溫의 개혁안을 이어 받고 그 범위를 時政 전반에 확대시킨 時務策”이며, 이것이 거의 국정전반에 걸칠 수 있었던 배경은 선생이 “평소 經史를 널리 섭렵하고 2회의 賜暇讀書와 派明使臣의 경험, 10년간의 內外관직 및 京鄕과 지리산을 왕래, 등반하면서 국내외 정세와 민간의 利病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2)고 한다.
‘이병26사’의 구체적인 내용과 개혁안의 각 항목별 분석 및 평가에 대해서는 논문형식으로 이미 발표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그 중에서 제9사는 外史와 野史가 內史․正史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에 제도적 수립이 요청된다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이다. 선생의 ‘사초’가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고 또 당시 정치사회의 현실에 따른 개혁사상에는 언제나 역사의식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그 논술에 대해서 먼저 살펴 볼 필요성을 느낀다.
선생은 유교적 도학정치의 실현이라는 강한 명분의식이 체질화된 家風 및 사림파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닌 父祖의 家學과 포은․야은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綱目과 春秋의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역사의식의 소유자로 성장하였고, 또 벼슬길에 들어온 뒤부터 줄곧 史官을 겸임하면서 역사를 편찬하는 문제와 史官 제도의 확대에 대하여 누차 건의한 바가 있었는데, 아래 (ㄷ)은 그 중 하나이다.
(ㄷ) 史官을 많이 두어 선행과 악행을 빠짐없이 기록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관은 承政院․弘文館․藝文館과 6曹에 각각 1명씩 편제되어 있으니 인원이 적은 것은 아니나, 모두가 중앙에만 있기 때문에 지방의 풍속이 나쁘고 좋음과 인물이 잘나고 못난 점을 기록할 수가 없다. 악행은 기록하지 못하여도 손상될 것이 없겠지만 선행이 혹시 빠진다면 아까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詞章을 익히기는 좋아해도 뜻을 세워 自强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관가의 일을 감독과 책임 지워도 오히려 힘쓰지 아니하며, 반드시 시골에 묻혀 살면서 孫盛과 같이 역사를 쓰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高麗의 역사는 난삽하여 볼만한 것이 없고, 先王의 實錄에도 필경 융성하고 아름다운 사실들이 많이 빠졌을 것이다. 臣이 바라건대 각 道의 幕僚들은 전례대로 春秋館의 벼슬을 겸임하도록 하고, 守令 중에 文才가 있는 사람들도 역시 춘추관을 겸임토록 하여서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도록 책임을 지워 한번 춘추관을 겸임하였으면 비록 파면된 뒤라도 所聞한 것을 다 기록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게 한다면 좋을 것이다.13)
(ㄷ)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史官의 인원을 대폭 증원하여 그 기능을 강화하도록 하자는 것인데, 특히 外史의 제도 강화를 주장한 것이다. 外史 제도는 각 道의 관원과 守令 등으로 춘추관의 직책을 겸임케 하여서 전국 지방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 사고를 비롯하여 역사적 사실들을 빠짐없이 책임지고 기록하도록 하는 것을 제도화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外史를 편찬하기 위한 ‘사초’를 통하여 각 지역의 실정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동시에 중앙에만 있었기 때문에 지방의 풍속이 나쁘고 좋음과 인물의 美惡을 기록하지 못한 승정원․홍문관․예문관과 6曹의 史官에 의하여 이뤄진 內史도 새로 더욱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한번 史官을 역임한 관원은 퇴임이후에도 見聞한 역사적 사실을 모두 ‘사초’로 남겨 놓도록 하자고도 했다. 이것은 史官이 오늘날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의 회고록처럼 재임 중에 있었던 비밀을 대외관계상 숨겨놓았다가 털어놓거나, 당시 직무상으로 구애(拘礙) 혹은 발설할 수 없었던 사건 등을 ‘사초’로 생산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나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달리 생각해보면 孫盛의 역사서 즉 지방에 묻혀 살면서 野史를 편찬하는데, 그 史料로 활용하여 정치적 음모나 조작된 정치사건, 혹은 당시의 은폐된 사실을 역사표면에 폭로하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野史는 正史와 달리 일정한 형식에 의한 구애를 받지 않고 개인적 주관에 의해 편찬되므로, 세조의 왕위찬탈과정에서 조작,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기록으로 남겨 놓거나. 또는 훈구파 집권세력들의 부패타락과 부정행위 및 그들의 秕政을 폭로하기에 좋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선생이 野史의 필요성에 대해서 연산군 때 이르러 비로소 강조하기 시작하였던 것은 아니며, 그 이전에도 野史가 없기 때문에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하기에 이르렀고 또 사회적으로 師表가 될 만한 일들도 매몰되거나 사라지게 된 것이라고 하였음을 (ㄹ)에서 볼 수 있다.
(ㄹ) 우리나라에는 안으로 藝文館과 兼春秋館이 있어 時事를 맡아서 기록하므로, 조정의 정사를 갖추어 기록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野史가 없기 때문에 外吏들의 不法이 비록 獻納 姜參이 보고한 바와 같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나쁜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게 되며, 탁월하거나 奇偉하고 품행이 특이한 자라도 묻혀 없어지고 전해지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지금의 闕典인 것이다. 바라건대 師儒錄과 弘文錄의 규례대로 記注官으로 마땅한 사람을 정밀하게 뽑아서 春秋錄을 만들게 한다면, 비록 지방에 살고 있던 기간이라도 듣고 본 것이 정치와 風化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갖추어 기록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기주관을 확충하소서.14)
성종 22년(1491) 3월에 선생은 司經의 지위에 있으면서, 野史가 없기 때문에 각 지역의 鄕吏들이 불법을 자행하고도 汚名이 후세에 전달됨이 없으며 또 비록 아름다운 선행이라도 묻혀버리고 마는 것이 당시 현실이요, 빠뜨려진 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최적임자를 선발하여 춘추록을 편찬하게 하고, 外職으로 있을 때 見聞하였던 것이 정치와 風化에 관련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기록하여 野史의 저술에 이용하게 하자는 것이다. 임금은 司經의 보고를 좌우에 물어보니, 영사 윤필상등이 반대하자 말하기를, “野史의 법이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새로운 법을 세울 수는 없다.”15)고 하였다. 이 당시 훈구파 집권세력들이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독점하고, 각 지역의 田庄을 廣占하고 있으면서 탈법과 專橫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춘추록과 野史의 편찬을 허용할리 만무하였고 오히려 적극적인 방해공작이 뒤따랐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다시 말하면 선생을 비롯한 사림파들의 外史와 野史의 제도화 주장에 대해서 훈구파 집권세력들은 그들의 專制化에 따른 제재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그들을 제거하기 위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野史의 편찬과 外史의 제도화 등에 따른 요구가 ‘士林政治의 시대’에 이르러 갑자기 태동하기 시작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에 이미 野史의 편찬과 外史의 ‘사초’ 등이 광범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전자는『삼국유사』의 편찬이 그 대표적 사례의 하나이고, 또 후자는 지방행정 단위인 3경․4도호․8목의 界首官에 司祿이 그 직임을 수행하였던 것이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그 언급이 구차하고 새삼스러울 수 있으나, ‘士林政治의 시대’에 이르러 外史제도 요구에 따른 논리전개의 편의상 후자, 즉 고려시대 사록의 기능에 대해서 잠깐 부연설명이 따라야 할 듯하다.
고려시대 지방행정의 단위인 3경․4도호․8목의 계수관에 관원으로서 判官과 사록이 각각 편제되어 있었는데, 그 중 사록은 參軍事․掌書記를 겸직하였다. 전주목의 사록이었던 이규보는 조정의 칙서·교지를 받들어 伐木과 冤獄을 감독하였으며, 水村․沙戶․漁燈․鹽市를 돌아다니며 조사하고 또한 선박의 실태를 조사하기도 하였다16)고 하였다. 고려시대 사록의 ‘사초’로 인하여 거둔 성과에 대해서 세종 때 大司成을 역임한 金泮이 아래 (ㅁ)의 기록을 남겨놓았다
(ㅁ) 옛날 각국마다 史官을 두어 時事를 맡아 기록하였고 지방에는 外史가 있었다. 고려 때는 司錄을 두어 州郡의 治政得失과 풍속의 美惡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행은 본받고 악행은 꺼려할 줄을 알게 되어 정치가 융성하고 풍속이 아름다웠다. 오늘날 모두 그것이 없어지자 守令 중에 탈법행위와 탐학 포악한 노략질을 자행하는 자가 많다. 바라건대 옛날 外史의 법에 의거해서 敎授의 직책을 司錄을 겸임시켜 治政과 풍속의 美惡을 상세히 기술하여 매년 봄·가을에 密封하여 春秋館으로 보내어 임금에게 아뢰는 것이 좋겠다.17)
고려시대는 계수관의 관원―司錄을 두어 지방행정의 得失과 풍속의 美惡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행은 본받고 악행은 꺼려할 줄을 알게 되어 정치가 융성하고 풍속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그 같은 外史의 ‘사초’를 닦도록 하였던 당시의 제도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지만, 이에 앞서 사록이 그 같은 사실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하였던 당시 지방사회의 변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지방사회 특히 무신정권 이후의 변화․발전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당시 중앙의 官人과 문인지식층들은 스스로 歸鄕하여 자기 고장에서 농토개간을 통하여 농장을 확대하였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살벌한 중앙정치사회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농촌사회 환경과 고적․전래풍속 등 문화에 대한 서술을 시․부․기․서와 행장․비문 등을 통하여 남겼다. 요컨대, 官人․文人신분층의 지방이전은 개경의 중앙문화를 지방사회로 보급․이식시킴과 동시에 농촌 환경의 변화를 초래케 하였던 계기를 마련하였을 것이다. 결국 지방사회의 변화와 발전은 신흥사대부가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가 이뤄지고 세종대에 이르자 개국공신을 비롯한 집권세력들은 자연히 현실에 안주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外史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와 같은 전향적 변화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그에 대한 未便한 인식마저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앞에서의 “오늘날 外史와 사록이 모두 없어지자, 守令중에 탈법행위와 탐학 포악한 노략질을 자행하는 자가 많으므로 고려시대 外史의 法―사록의 역할을 교수에게 대행케 하여 각 지방의 治政과 풍속의 美惡을 상세히 기술하도록 하자”고 한 金泮의 제의는 이러한 당시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은 金泮의 제의에 대해 공론에 붙이기는 했으나, 훈구공신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당시의 국정에서 내려지는 결론은 자명한 것이었다. “정부에 내려 이를 의논하게 하니, 여러 사람이 아뢰기를, 좋지 못하다 하므로, 드디어 중지되었다”18)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양반관료들이 사록의 기능을 교수가 대행하는 外史 제도의 부활을 반대한 것은 그 제도자체 뿐만 아니라, 守令의 탈법행위와 탐학 포악한 노략질 등으로 피폐한 지방사회의 현실이 외부로 폭로되어 그들의 이해관계에 심대한 타격을 입기 때문에 그 제도의 부활을 한사코 저지시키려고 하였던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野史와 外史에 대한 논의는 중단되지 않고 그 뒤로도 계속 되었다. 먼저 세조 11년(1465) 3월 上護軍을 역임하였던 金新民의 상소를 아래 (ㅂ)에서 보기로 한다.
(ㅂ) 外史를 제정하여 기록하게 하는 직임은 중책이며, 時事의 기록을 관장하고 후세에 경계를 드리워,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일을 하는데 힘쓰게 하고 감히 그릇된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野史가 있어 지방의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던 것이고, 대개 內와 外가 일체를 이뤄서 장래에 확신을 갖도록 하고자 하는데 있다.․․․(오늘날)중앙은 상밀하되 지방은 소략하며, 內史는 직책상 중앙에 구애되어 지방의 사정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內史도 상밀해야 하겠지만 外史도 소략하게 해서는 안된다.․․․마땅히 野史의 법에 준거하여 신진 기예한 인재를 뽑아 8도에 파견하여 각각 道內의 사무를 맡게 하면 內史의 결함을 보충하는 동시에 관찰사와 守令의 탐학도 경계할 수 있을 것이다.19)
요컨대, 김신민도 外史와 野史의 제도가 확립되면 관찰사와 수령의 탐학을 억제할 수 있으며, 또한 그를 위해서 각 지방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을 통하여 外史와 野史를 위한 조치가 세조 때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예종과 성종의 시기도 세조 때와 마찬가지였음을 아래의 각 일례들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예종 1년(1469)에 대교 楊守泗는 史官이 각 지방사회의 사정에 어두워 수령의 부정행위와 풍속․美惡 등을 모두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하고, 고려시대의 사록을 부활하지는 못할지라도 각 道의 수령관․계수관․교수로 하여금 野史를 찬술하게 하자고 제의하였으나, 고령군 신숙주․영의정 한명회․능성군 구치관․영성군 최항․좌의정 홍윤성․창령군 조석문․좌찬성 김국광․도승지 권감 등의 院相․承旨들이 반대하자, 임금은 그들의 반대의견을 그대로 따랐다20)고 한다. 또 성종 14년(1483)에 검토관 宋軼이 “外史에 비록 기록하여 놓아야 할 사건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기록할 사람이 없으므로 外史에 결함이 생기게 될까 두렵다”하니, 임금은 “전일에도 그 일을 말하는 사람이 있어 대신에게 의논하게 했으나, 좋지 못하다고 말하므로 결국 시행하지 못했던 것이다”하고, “外史官은 더 둘 수가 없다.”21)고 하였다.
다음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野史의 편찬과 外史의 제도가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선생의 제의를 통하여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다시 말하면, 선생은 “史官이 모두 중앙에만 있기 때문에 지방의 풍속이 나쁘고 좋음과 인물이 잘나고 못난 점을 기록할 수가 없다”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外史의 제도 확립이 요구되며, 또 外史는 각 道 관찰사․수령을 비롯한 지방관들의 부패타락․부정행위를 억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선생 밖에도 사림세력, 그리고 이들과 주의주장을 같이 하였던 신진관료까지 史官제도를 확충하도록 요구하였으나, 훈구파 大臣들은 동의하지 아니하였으며, 특히 윤필상․이극돈 등이 반대하자 임금은 결국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士林派가 外史 또는 野史를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한 의도는 內史에서 잘못되고 누락된 것을 수정보완하고 중앙 못지않게 지방 또는 朝․野 할 것 없이 모든 중요한 사실을 골고루 담아 후세에 勸懲하는 자료로서 전해져야 한다는 데 있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內史의 결함과 누락을 外史에서 보충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웠지만, 그들의 근본적인 의도는 훈구파의 일방적인 집권에 대한 사림파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데 있었다”22)고 한다.
그러나 선생의 현실의식은 단순히 政派的 對立意識에 매몰되어 있지 아니하였고, 항상 爲民的 관점에 基底가 닿아 있는 安民意識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뒤에 다시 좀 더 언급하기로 한다.
그러면 훈구파 집권세력들이 外史․野史의 제도화에 반대하게 된 직접적인 요인은 어디에 있었던가를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관련하여 이미 앞에서 거론한 선생의 ‘이병26사’ 중에는 ‘復昭陵’, 즉 문종의 왕비이며 단종의 母后인 현덕왕후의 소릉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우선 이에 대하여 一言해 두기로 한다. 선생은 성종 말엽부터 소릉의 회복을 누차 주장하여 왔다. 그 같은 주장은 단지 선생만 하였던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성종 9년 4월에 생육신의 한 사람인 南孝溫은 8개조의 疏를 올렸는데 그 속에서 “追復昭陵”23)이라고 한 것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달에 李深源은 10개조의 疏를 올리면서 “勿用世祖朝功舊臣”24)을 건의하자, 소릉의 회복제의와 함께 조야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특히 훈구파 집권세력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훈구파에게 직접 대어놓고 “世祖朝功臣을 등용하지 말 것”을 건의한 것은 그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으려니와 소릉의 회복제의 또한 그에 못지않은 충격과 파장을 몰고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훈구파는 세조의 왕위찬탈과 그 공로로 공신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단종 모후의 릉인 소릉을 회복하자는 제의는 결국 그들의 존재기반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훈구파들의 충격과 그에 따른 격렬한 저항은 쉽게 예견되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그 위에 선생을 비롯한 사림파에서 줄기차게 요구하였던 野史와 外史의 제도 樹立에 따른 제의는 훈구파 집권세력들에게는 “소릉의 복구” 혹은 “世祖朝功臣을 등용하지 말 것” 등 건의 등에 따른 반발보다 오히려 더욱 강한 반발․저항을 초래케 하였을 것이다. 선생을 비롯한 사림파에서 野史의 편찬과 外史의 제도적 수립에 따른 요구는 內史에서 잘못되고 누락된 것을 수정보완하고 중앙 못지않게 지방 또는 官人․士林 사회 할 것 없이 모든 중요한 史實을 골고루 담아 후세에 勸懲하는 자료로서 전해져야 한다는데 있다고 했다. 그러나 훈구파 집권세력들의 현실인식은 달랐다. 즉 그들은 野史가 없기 때문에 지방 관리들이 不法과 부정행위를 자행하더라도 汚名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게 되며, 탁월하거나 奇偉하고 품행이 특이한 자라도 묻혀 없어지고 전해지지 않는다거나, 內史의 결함과 누락을 外史에서 보충해야 한다고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한갓 구실에 불과하며, 결국 사림파의 근본적인 의도가 훈구파의 집권체제를 약화 내지 무력화하려는데 있다고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고, 각 지역의 田庄을 廣占하고 있으면서 탈법과 專橫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사림파의 주장대로 만약 춘추록과 野史의 편찬 및 外史의 제도가 확립된다면 그들의 행동반경은 그만큼 축소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훈구파 집권세력들은 野史와 外史의 제도적 수립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던 선생을 그대로 둘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선생은 국경방어의 중요성과 倭人들의 행위에 대한 대처 방안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 방안에서 제시한 인사권에 대한 문제제기 역시 훈구파 집권세력들이 선생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데 일조하였을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선생의 ‘이병26사’ 중에서 중국과의 국경방어 시설에 관한 문제제기의 내용을 (ㅅ)을 통하여 살펴 볼 수 있다.
(ㅅ) ①檢察官을 적임자로 엄선해서 貿易의 업무가 올바르게 이뤄지도록 하고, 關門의 설치로 西北民을 규제해야 한다.․․․신이 지난날 明의 황실 「祖訓」을 살펴보았더니 我國을 安南․琉球의 아래 등급에 놓아두고, 매양 사신이 와서 상인을 끼고 협잡행위를 많이 한다고 말하므로 매우 수치스러웠다. 신이 생각하여 보니 이것은 헛말이 아니었다. 개인의 불법행위는 검찰에게 책임을 맡기면 되겠으나, 나라의 貿易은 章服(官人의 부녀자 예복)과 藥材를 제외하고 긴요하지 않는 물품은 줄이고, 타국산인 遠物을 보배로 여기지 않게 하는 것이 옳다. ②나라 백성을 封疆안에다 가두어 둘 수는 없지만 역대로 관문에 의한 제한은 엄격히 시행해 왔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국경방비가 매우 허술하오니, 마땅히 압록강 연안에 長城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여서 西北民이 국경을 넘나드는 것을 단속해야 할 것이다. 매양 사신이 北京으로 갈 때마다 특별히 사헌부 관원을 파견하여 관문을 지키게 하고 불법으로 넘나드는 것을 살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중국에 변란이 없으면 그만이겠지만 서쪽지방에서 적의 침입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적군과 부딪치게 될 것이니 衛滿․金始․哈丹․沙劉의 침입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25)
(ㅅ)자료는 조선과 중국의 국경방어를 강화하자는 것이 주 내용이다. 그 중에 ①은 關門을 설치하고 또 엄선한 檢察官으로 하여금 公私貿易에 따른 불법행위를 단속하자는 것이고, ②는 압록강 연안에 長城을 쌓아서 西北民이 불법적으로 왕래하는 것을 방지하게 하고 동시에 外敵의 침략을 방어케 하자는 것이다. 이 국경선을 넘어 고조선부터 고려말엽에 이르기까지 외적이 침입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재화를 불태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역대로 관문에 의한 제재를 엄격히 시행하여 왔다하고 長城을 쌓아 더욱 엄중히 지키자는 주장이기는 하나, ②도 이 당시는 불법적으로 왕래하며 私무역하는 행위를 엄단하자는데 더욱 역점이 주어진 제안이다.
이제까지 조선․중국과의 무역이 공정하고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한 것은 ①에 의하면 무역을 위해서 파견한 조선의 사신이 중국의 상인과 협잡하여 高價로 수입품을 반입하였고 또 검찰관이 불법거래를 단속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②西北民이 불법적으로 왕래하는 것을 방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사신과 중국 상인이 협잡하여 公무역이 이뤄지므로 수입품의 값이 비싸질 수밖에 없었으며, 불법거래로 이뤄지는 私무역은 검찰관이 단속을 하지 않아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두 검찰관과 사신의 선발이 적임자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뽑지 않는데서 비롯되었으므로 인사개혁이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선생은 북쪽국경의 방어시설도 난제이지만 남쪽 일본인에 대한 대처가 더욱 긴급을 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래 사료 (ㅇ)과 같이 표현하였다.
(ㅇ) 文官을 등용하여 일본인의 침략행위를 진압하도록 하소서. 사람들은 모두 북쪽을 근심하고 있으나 나는 (요즘)오직 남쪽의 일본인을 근심하고 있다. 臣이 일본인의 근성을 살펴보니,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교만하여져 이미 魚箭을 쟁탈하고 또 熊川을 위협하며, 근래 忠州를 지나면서 宴享을 마련하라고 재촉하기도 하며․․․이렇게 된 것은 애초에 邊將을 잘못 뽑은 데서 연유한 것으로 탐욕스럽고 주책이 없다보니, 혹 뇌물을 받아서 변장의 위엄이 꺾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6)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돌아다니면서 어민들의 魚箭(魚梁)을 빼앗고 또 웅천의 지방민들을 위협하며, 그리고 충주를 지나면서 연회를 베풀어주기를 재촉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애초에 邊將을 잘못 뽑은 데서 연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변장의 인선이 잘못되어 그들이 탐욕스러워 뇌물을 받기 좋아해서 威嚴이 꺾여 일본인의 난동을 제압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국내에 들어와 살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계책을 세우기 참으로 난감하다는 것을 아래 (ㅈ)과 같이 언급하였다.
(ㅈ) 예로부터 匪類 즉 왜구를 국내에 살도록 두고서 禍를 받지 않은 경우란 없었다. 이제 그들을 화급히 몰아대면 亂이 일어날 것이고 느슨하게 다루면 완악한 행위가 날로 심해질 것이니 처리할 방도를 알 수 없다.27)
조선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일본인을 추방하기도 또는 그냥 내버려두기도 모두 어려운 형편에 처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위와 같은 형편에 놓여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南虞漸大’ 남쪽 일본에 대한 근심이 점차 커져가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가 ‘임진왜란’의 발발이 채 100년이 남지 않은 시기이었다.
선생은 조선이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남북의 양방향으로 방어책이 수립되어야 하는데, 그 일환으로 長城과 關門의 설치, 그리고 검찰관과 변장의 엄중한 직무수행 등이 요구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사제도의 개선과 적임자를 엄선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펴오고 있었음을 살펴보게 되었다. 이 같은 인사문제는 당시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파 大臣들과의 마찰을 초래하게 되었을 것이므로, 그들과의 정면 대립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생의 ‘사초’를 쟁점화하고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시킨 저간에는 훈구 집권세력의 전제적 권력을 위협하는 사림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으며, 결국 野史․外史의 제도는 물론 소릉복위와 인사문제의 叱正 등을 끊임없이 제기해 온 선생이 그 주된 공격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무오사화’의 원인이 있다.
3. 역사의식과 ‘道’의 실제
앞에서 살펴본 선생의 현실인식과 대응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이러한 문제제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본 장에서는 지금까지 학계에서의 주목이 조금 소흘하였다고 여겨지는 선생의 역사인식문제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아울러 道에 대한 선생의 개념정리에서 보이는 爲民的 관점에서의 유교적 덕목에 대한 理解 또한 선생의 치열한 현실적 삶의 방향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선생은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詞章을 익히기는 좋아해도 뜻을 세워 自强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관가의 일을 감독과 책임 지워도 오히려 힘쓰지 아니한다”거나, 또는 “반드시 시골에 묻혀 살면서 孫盛과 같이 역사를 쓰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으며, 그리고 한번 史官을 역임하였던 사람은 “비록 파면된 뒤라도 所聞한 것을 다 기록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게 하자”고 임금에게 청원하였던 것을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그 뿐아니라, 선생은 벼슬길에 들어선 뒤로는 늘 史官을 겸임하면서 時政의 得失과 인물의 忠奸에 대해 直筆하기에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로 말미암아 ‘무오사화’의 참변을 당함으로써 30여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外史․野史의 제도화에 따른 제의를 그처럼 줄기차게 요구하다가 정작 본인 스스로는 野史 1책도 남기지 못하였으며, 詩文마져 대부분 散佚되고 잔존하는 것이 별로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다행히 일부 잔존하고 있는 詩文 중에서 선생은 史官을 역임하면서 “史의 일이 지극히 중대하므로 臣은 供職하고자”28) 즉 史官의 임무를 철저히 수행하였고 또 춘추필법에 어긋남이 없는 역사서술을 하여 왔음을 살펴 볼 수 있는데, 그 일례를 아래 사료에서 보기로 한다. 여기서 신라와 백제가 서로 오랫동안 싸움을 하였던 것에 대한 선생의 역사인식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ㅊ) ①지리산의 동남쪽은 옛 신라 구역이요, 산의 서북쪽은 옛 백제 땅이었다. ②모기와 파리 떼들이 서로 엉기어 떠돌아다니고 앵앵 소리 지르는 것 같고, 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가 소멸되었던 것과 같음이다. ③처음부터 헤아려보면 얼마나 많은 호걸들이 이 땅에 뼈를 묻어놓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