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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신고 해설 |
* 가리온님이 정리한 글입니다.
양을 목축하던 동이족 신농이 호북성, 섬서성에서 탄생 성장해 황하하류의 웅족이 사는 산동성 곡부로 장가들어 도읍을 정하게 된 문화인류학적 이유는 무엇인가. 염소와 양을 치던 동이족 신농은 4500여 년 전 지금의 호북성 수현(隨縣) 역산(歷山)에서 태어났다.이제 다음 서술이 바로 낙빈기가 말하는 좆(祖:남근신앙)과 황실을 잇는 혈통의 중심으로 최고의 존칭으로 칭한
자지(自持), 다음 임금자리를 이을 태보(太保:왕자)를 잉태하는 존귀한 여자라는 뜻의 보지(保地)에 대한 결론내용이다.
좀 길지만
상고사의 핵을 이루는 부분이므로 핵심만 간추려 소개한다.
"│"자에서 자지 또는 좆의 'ㅈ'을 뿌리로 하는 음이 나온다.
"│"자는 바로 자지이며 성인 남자의 좆이다. 조상이라는 조(祖)의 어원도 바로 좆이고 조선이라는 조(朝)의 음운도 첫획 "│"에서 나온다.
"│"자는 신(申)자에서 신(神)으로 변해간다.
"│"자가 '자지 신'으로 발전하는 것은 다음단계인 '신(申)'에서 확인된다.
「설문해자」에서 "신(申)은 신(神)이다...'확 구(臼)를 좇아서 스스로 가진 것(자지)이다(從臼 自持也)"라고 하였으며, 또 "환할 신,
아홉째 지지신"이라고 하였다.
즉, 여성의 음물을 표시하는 '절구 구(臼)'가 남자의 양물을 상징하는 절구공이, 즉, '기둥
주(│)를 둘러싸면서 "│"자가 다음 단계인 '신(申)'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확 구를 따르고 스스로 가진 것'이란 말에서
자지(自持)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여자를 쫓아(따라,從臼) 남자(自持)'라는 뜻으로 신(申)은 여자의 음물을 쫓는 남자의 양물이라는 뜻이다.
결국 '신'에서 나온 자지라는 말은 "│"의 순수 조선말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곧 자지가 곧 하나님이며 스스로 사람의 씨를
가진 사람으로 신농이 그 중에서도 으뜸 하나님이다.
「설문해자」에서는 "신(神), 하나님으로 만물을 끄집어낸
사람(天神引出萬物者也)이라 하는데, 신농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세상의 새로운 세상을 연(열 10) 하나님 신(神)으로"│"자는 열 십으로도
읽는다.
조정 또는 나라 '조(朝)'는 '사당 묘(廟), 할아버지 조(祖)'와 음이 같고, 그 뜻 또한 '하나 아비 조, 한 아비
조, 하나님 조(祖)'와 같은데 이는 고조선 문자인 남자의 생식기처럼 생긴 '조(且·남근모양)'자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자지 조(自持且)'의
조(祖)가 그 소릿값이기 때문이다.
현재 섬서성 서안 근교에 있는 황제릉 앞 자료관에는 흙으로 구워만든 남자성기가 진열되어있으며
그 아래 설명문에는 복제품 "도조(陶祖)"라 되어있다.
신농시대의 호미모양의 청동 화폐인 조패( 貝)는 끈으로 꿸 수 있게
윗부분에 동그라미 모양으로 구멍을 파 놓았다. 그리고 그 구멍이 뚫린 동그라미와 연결해서 그 아래로 "│"자가 새겨져 있다. 이 동그라미 구멍이
문자의 시작인 '·'를 도형화시킨 '○'이다.
불꽃 주, 불씨 주, 불핵 주, 불의 알이라고 읽는 글자다. 우리민족은 태양족이며
문자는 바로 태양에서 시작된다. 염제의 후손들이면 '불의 씨'들이고 '불의 알'들이다. 우리가 무심코 말하는 '부랄·불알'도 사실은 '불의 알,
불의 씨', 즉 '염제 신농의 씨알, 신농의 후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락 등 2000년전 시조들이
모두 새알에서 태어난 것도 바로 염제 신농의 씨알이라는 뜻이 숨어있다. 우리를 동이족이라 하고 동이족 중에서도 새족(鳥族)이라 한 이유가
여기있다.
낙빈기는 주(主·柱)의 'ㅈ'자 발음에서 조선이나 조상 등 '조'라는 음이 나온다고 했다. 하나 "일(一)"이나 날
"일(日)" 또는 달 "월(月)"자에서는 '조'라는 음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상고사회신론」의 <28수론>에서
조수(鳥宿)를 풀이하면서 "조(鳥)는 원래 하(夏)나라족 계통의 족칭글자였고 본래가 훌륭한 칭호, 존귀한 칭호였다.
처음에는
악의가 없었고 남자아이의 배설기관을 조(鳥·자지)라고 장난기 섞인 부름으로 하였다. 헌원족 계통의 남자는 순임금의 유신(維新) 이전에 또한
모계제 유풍을 따르고 있었으며 신농족에 데릴사위로 가서 여자쪽과 혼인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고문화가 있는 지역에서 데릴사위
남성은 자연스럽게 족칭을 '조'로 하였고 남자아이를 낳으면 '조'는 곧 뇨(尿:배뇨관, 즉 자지)와 연계되었다. 하나라에 이어 등장한 은과
상나라는 하나라 시조 우임금을 싫어했으므로 이에 본래부터 존귀한 족칭이었던 조를 뇨로 통용해 이에 따라 음 은 '뇨'로 읽혀져 그 소리는 폄하와
배척으로 고정되었다.
중국의 발음은 조와 뇨를 'Niao'로 발음한다. 연대가 오래되자 도리어 그것의 원래의 의미인 임금과 같은
존귀한 족칭의 옛 소리(본래의 음은 수리매 응(鷹)이고 변음은 알릴 고(告)의 소리로 읽으며 비둘기 구(鳩)의 소리가 원류가 되었다)의 뜻을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중국인들은 자지를 '자지(自持)'로 쓰고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풀어 천자나 다음 제위에 오를
왕자의 생식기에 최고의 존칭을 붙여 '자지'라고 했다. 여기에 상반되는 여자의 생식기를 '보지(保持)'라고 했다. 다음 임금자리를 이를
태보(太保:왕자)를 잉태하는 존귀한 여자라는 뜻이다.
낙빈기는 둘째 부인 여영을 순의 형인 오회와의 공동부인인 요임금의 딸로
본다. 그리하여 여영을 낳은 어머니는 요의 모일급부인으로, 전욱고양의 둘째 아들 구축의 딸이라 한다. 낙빈기가 추적하는 문화인류학 속에는 항상
태양신이 들어있다. 여영의 글자인 금문 언(방 속에日아래女))은 도랑 언이지만 금문에서는 기러기( ), 큰 새 안(雁)으로 하나라로 가면 제비
연(燕)으로 격하되고 주나라로 가면 동이족의 봉황마저 제비 을( )로 격하되었다고 말한다. 언( )은 태양의 여자라는 공주를 뜻함과 동시에
새(鳥) 가문의 딸을 의미해 어머니가 동이족 신농 집안의 여자라는 것이다.
낙빈기에 의하면 부계제를 실시하려는 순을 뒤엎은 건
기존 모계제를 고수하려 한 신농계의 여자들 힘이다. 낙빈기에 의하면 우는 큰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8 년 만에 신농계
백익에게 제위를 넘긴다. 그러나 이러한 우가 근검, 검박했으므로 공자 다음 맹자 전에 태어난 묵자로 하여금, 공자의 번요(煩擾)함과 예악의
낭비성을 배격하고 우의 정신을 좇겠다는 기치아래, 묵가(墨家)의 계보를 따로 세우니, 한비자도 세상에 학문을 드러낸 자는 오직 유묵(儒墨)뿐이라
하고, 여씨춘추도 세상에 영광을 드러낸 자를 들면 반드시 이 둘을 든다 한 바 있다. 낙빈기는 이(夷)에 대해 새로운 금문학적 견해를 쏟아낸다.
족칭인 곰 웅(熊)자가 변한 글자인 우(禹)는 부인과 어머니의 씨칭을 따서 성씨 부(阜)로 쓰고 씨칭을 이(夷)라 하여
부이(阜夷)라고도 불렀는데, 집권과 동시에 그때까지 사직신으로 모시던 신농의 아들 희화를 밀쳐내고 아버지 고신을 (神)보다 격상시킨 귀(鬼)라는
글자로 신농에 버금가는 천자로 모신다. 이때 우는 자신의 이름을 사람 '인(人)'으로 쓰고 있는데, 신농계에서는 인·임·님으로 읽는 인(人)
자를 황제계에서는 큰 사람, 사람중의 사람이라는 뜻의 이(夷), 시(尸)자로 새김을 했다.
지금 산동성 우성(禹城) 지구를
'이방(夷方)'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곳이 우의 봉읍지 때문이다. 우는 장인의 또 다른 이름 화(華)를 성칭(姓稱)으로 썼다. 여기에 장인과
어머니 집안의 족칭인 강(姜)을 따와 강(羌)이라 했다. 강(羌)은 우의 성씨의 하나인 (華)와 통하므로 우는 모계의 족칭인 강(姜)을 성씨로
해서 비슷한 글자를 따 강(羌)이라고 했는데, 현재 중국은 티벳트를 강족(羌族)이라 부르고 있다.
낙빈기는 우는 죽어서 시호에
해당하는 용왕으로 봉해졌다고 단정한다. 물을 다스리는 용왕은 원래 물을 다스리던 우임금이며 복희(宓羲·阜夷)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용은 우의 형
후직과 함께 썼던 이름으로 자신의 부인들이 쓰던 신농계 족휘인 누에( )를 계승하여 칭호를 대신한 것이다. 신농계의 누에 잠이 황제계에서는 용,
융으로 읽혔으나 이를 이름(씨칭)으로 사용한 것은 후직 기와 우가 처음이다.
낙빈기는 춘추전국시대의 묘로 판정난 항주 영은사
용왕묘의 용왕 그림를 예를 들면서 두 다리가 용을 씨(氏)로 한 후직과 우 등 두 비씨(匕氏)라고 단정한다. 두 비씨 중에서 후직은
1000년이나 지나서야 주나라의 시조로 책봉되었으니 당시에는 용왕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는 점을 들어 우리고 결론지었다.
또
용왕이 받들고 있는 규의 모양이 역사인물을 가리키는 특유한 표시인데 「주례(周禮)」<동궁(冬宮)>에 "규의 머리쪽 뾰족한 곳을
종규(終葵)라 부른다" 한 것을 예로 들어 우의 큰 어머니거 종규로 용왕이 두 손으로 종규를 받들고 있는 모습이 두 어머니와 두 부인 등
모계세력에 의해 제위에 오른 우가 큰 어머니 종규의 명을 받들어 천자의 일을 집행한 것으로 보았다. 더불어 용왕이 구슬을 늘어뜨려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가린 면류관은 수렴첨정이나 섭정으로 꼭두각시인 우임금의 표정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우는 8년만에 백익에게 제위를
넘기고 말지만 백익 또한 6년 만에 우임금의 아들 계(啓)에게 도륙당하고 만다. 최근에 은허(殷墟) 안양에서 목인 잘린 채 묻힌 수많은 인골들이
발굴되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을 '노예제사갱(奴隸祭祀坑)' 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런데 낙빈기는 우임금이 제위를 백익에게 넘기고
임금으로 책봉했음을 알려주는 '책대부기(冊大父己)'라고 새겨진 명문이 출토된 것과 목이 잘린 것을 눈여겨보고 이 무덤이 기존의 고고학자들이
제후가 죽으면서 순장된 것이 아니라 아들 계가 백익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일대 참살극이었다고 결론내린다.
계는 백익에게 곡부에서
서쪽으로 200여 리 떨어진 안양(安陽)에 있는 아버지 우임금의 사당에서 벌어지는 두 번째 제사에 참석케 한 후 군사를 매복시켜 제사에 참석한
측근과 호위군사 300여명을 몰살시켜 그대로 매장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제위를 차지한 계는 순이 실패한 부계중심의 세습제를 실현시킨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