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선, 면, 색.... 예술가들의 혼이 담긴 손놀림에 그 모든 것들은 온전히 살아 숨쉰다. 평면 속에서도 심오한 깊이를 창조하는 화가들은 이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최상의 영혼을 화폭에 담아 내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곳곳에서 우리는 러시아 예술가들의 독창적이며 고고한 예술혼과 교감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펼쳐 낸 러시아 미술의 다면적인 얼굴을 감지할 수 있다.
러시아 미술계는 때로는 다른 나라의 예술 세계와 상호 교류하기도 하며 그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러시아 미술 세계에는 독립적으로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다양한 예술가들도 있었지만, 역사적 발전 과정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민중의 정신적 양상을 반영하는 예술가들도 많았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러시아 미술, 그 미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러시아 미술의 기원
러시아 미술의 기원은 동슬라브족의 미술 작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드네프르강 동부 지역의 동슬라브족은 4-5세기에 이미 건축재료로서 나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시대의 목조 건축과 농촌의 목제구 등은 그후 러시아 미술의 토대가 될 수 있었다.
동슬라브 민족의 초기 미술 작품에 표현된 형상은 신비적이고 주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의 동슬라브 제민족의 미술에는 인간의 몸체나 머리가 새, 짐승, 뱀, 식물 등의 형상과 서로 얽혀 괴기한 모습으로 나타나있다. 10세기에 이르러 슬라브 미술계에서 긴 머리의 소녀, 새를 쫓는 수렵인 등 사실적인 인간의 형상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동슬라브족의 미술 세계에 있어서 의미있다.
11-17세기의 러시아 미술
10세기 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러시아가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인 후, 그곳에는 그리스도교와 더불어 그에 따른 그리스도교 미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12, 13세기의 러시아 미술은 비잔틴 전통과 동방 그리스도교 문화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중세 화가나 건축가의 작품에는 고대 그리스와 비잔틴의 예술 유산의 특징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비잔틴계 화가가 그린 12세기 블라디미르 수즈달 공국의 이콘 <블라디미르의 성모>에는 고대적, 헬레니즘적 기법이 반영되어 있다. 이 이콘은 수세기에 걸쳐 러시아 화가들의 최고의 모델이 되었고 그 기법이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통용되었다.
14세기 노브고로드의 이콘에는 깊은 비장감이 짙은 색채와 강렬한 리듬으로 표현되었다. 이 시기의 러시아 미술은 개개의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서 인간의 육체적 미보다도 정신 세계의 표현을 중시하는 특징을 보였다.
14-15세기의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새로운 국가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4세기 모스크바의 이콘은 당시의 노브고로드의 이콘과 마찬가지로 정서적이고 극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유명한 화가 루블료프가 등장하였는데, 그의 예술은 중세 러시아 이콘의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중세 러시아 미술에서 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루블료프의 <삼위일체>는 단순한 구도 속에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루블료프는 탁자를 둘러 싸고 앉은 삼위일체의 성상들의 모습을 화가의 입장에서 본 것이 아니라, 신의 입장에서 본 것처럼 역삼각형, 즉 역원근법으로 그렸다. 그의 작품에는 아름답고 진실된 생활에 대한 동경과 행복한 러시아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15세기 노브고로드의 이콘은 매우 세속적이었는데, 화가들은 교회 이콘의 규범을 표면적으로는 지키면서도 그리스도의 신비주의를 점차 버리는 경향으로 가고 있었다.
16세기 러시아의 이콘 미술에는 두 가지의 경향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한 가지 경향으로는 역사적 또는 애국주의적 테마의 작품들을 들 수 있다. 그 작품들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아직 있었지만, 조국 통일의 사상이 예술적으로 표현되었고 풍속의 세부 묘사 등의 사실적인 표현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 <축복받은 군대>는 카잔을 정복한 이반 뇌제의 개선을 상징하고 있다. 또 다른 경향으로는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피안의 세계, 종교적이고 소박한 환상의 세계를 테마로 한 작품들을 들 수 있다. 또한 16세기의 모스크바 회화에서는 중세적인 역사주의의 사상이 관철되어 있는데 <블라디미르, 보리스와 글레프>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17세기의 러시아 미술에서는 영웅적인 전쟁의 주제가 다루어졌다. 17세기 중엽에는 다음 시대의 러시아 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두 개의 벽화가 제작되었는데, 그 하나는 칼랴진스키 수도원 내의 트로이츠키 성당의 프레스코로 풍부한 장식성이 특징적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의 니키토니키에 있는 트로이츠아 교회당의 벽화로 거기에는 전통적 이콘 화법에서 보이는 경직된 인물 묘사가 없다.
17세기 후기의 러시아 이콘 미술에는 두 개의 대조적인 주제, 즉 현실적 주제와 신비적 주제의 대립이 더욱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또한 이 시대의 이콘에는 등장인물의 수가 많아졌다. <계시록>이나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하는 이콘에는 특히나 대군중이 등장하였다. 17세기 후기의 성당 벽화에도 신비적 주제와 역사적 주제, 종교적 주제와 세속적 주제, 공상적 주제와 현실적 주제 등의 상호 대립적인 주제가 서로 서로 뒤얽혀 있었다. 게다가 생활과 관습의 사실적인 세부 묘사는 호화롭고 세련된 바로크 양식과 관련되어 있었다. 17세기의 전위적 화가들의 작품에는 점차 새로운 양식인 중세 러시아 바로크 회화의 특징이 형성되어 갔다.
18세기의 러시아 미술
서구화 정책을 주창하던 표트르 대제 시대에 러시아 미술계는 르네상스 이후 세속적 미술이 번성하였던 서구 제국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외국인 미술가가 러시아에 초빙되는가 하면 화가 니키친 형제, 마토베예프, 자하로프 등과 같은 러시아의 미술가들을 외국으로 유학보내기도 하였다. 새로운 러시아 미술계는 르네상스의 미술, 바로크 미술, 고대 미술 등 서구 미술의 유산으로부터 폭넓게 배움으로써 당시 세계 미술의 수준에 근접하고자 하였다. 표트르 대제 시기에는 특히 초상화, 전쟁화, 역사화, 풍경화, 풍속화 등의 기초가 다져지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전의 이콘 회화의 전통과는 별개로 러시아 세속화 학파가 생겨났는데 이 학파의 중심지는 1757년에 세워진 제국예술 아카데미였다. 이 아카데미와는 러시아 최초의 전문 화가들인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 드미트리 레비츠키, 표도르 로코토프 등이 관련되어 있었다.
18세기 후기가 되면서 러시아 미술은 새로운 장을 마련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고전주의라는 휴머니즘과 시민정신을 담은 새로운 미술 양식이 등장하였다. 라디시쳬프, 노비코프, 바졔노프, 이바노프, 우르바노프, 체카레프스키 등의 작가, 미술가, 평론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과 유사한 새로운 시민적 예술을 러시아에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세기 후기에 들어 러시아 진보적 화가들은 애국심과 시민정신으로 가득 찬 역사화를 그렸는데, 아키모프, 소콜로프, 우그류모프가 그 대표자들이다. 이 시기에는 농민을 테마로 한 작품들도 나타났는데 시바노프의 <농민의 점심>, <결혼의 축하>와 예르메뇨프의 <노래하는 맹인들>, <노인과 소년> 등이 그것이다.
18세기의 러시아 미술 인텔리겐치아는 주로 시민들 출신이었고 당시의 뛰어난 모든 작품들은 대부분 서민 출신의 미술가들에 의해서 창작되었다는 것도 특징적인 사항이다.
19세기 전기의 러시아 미술
19세기 초의 러시아 미술은 고전주의를 기초로 발달하였다. 1800년대와 1810년대에도 제국예술 아카데미에서 고전적인 미의 규범이 유지되어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는 초상화가 발전되었는데 키프렌스키와 트로피닌이 이 시기에 활약했다. 키프렌스키의 <시인 쥬코프스키>, <트루베츠코이>, <다비도프의 초상>, <A. S.푸슈킨> 등과 같은 초상화들에는 깊은 명상에 잠겨있는 듯한 고독한 몽상가의 모습을 한 인물들이 그려졌다. 그는 개인의 심리, 모델의 자연스런 몸짓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트로피닌은 자신의 초상화에서 선량하고 목가적인 단순함을 지닌 인물들을 복잡한 심리묘사 없이 표현했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아들의 초상>, <레이스를 뜨는 여자>, <기타를 치는 남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19세기 전기의 러시아 풍경화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방향으로 발전하였으며 자연스러운 미를 추구하였다. 실리베스트르 쉐드린의 <소렌토의 커다란 만>, <해변의 테라스>등과 레베데프의 <아리바노 근교의 길> 등의 풍경화에는 자연스런 자연의 멋이 표현되어 있다.
니콜라이 1세의 통치 시기(1825-1855)에 접어들어 그의 반동 정치는 러시아의 자유로운 미술을 억압하고 그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브률로프의 회화에는 이 시대의 모순과 위기의식이 잘 묘사되어 있다. 브률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은 폼페이의 흥망을 그린 역사적인 주제를 다룬 유명한 그림이다.
1840년대 페도토프는 많은 풍속화를 그렸다. 그는 '현실생활'에서 자신의 작품의 제재를 찾았다. 즉 30-40년대의 귀족, 소시민, 관리, 농민, 걸인 등 러시아의 모든 사회층의 대표자들이 그의 화폭 속에 등장하게 된다. <식객>, <피델리카의 죽음>, <약혼 예물 없이 결혼한 화가> 등은 그의 일련의 풍속화이다. 페도토프는 모든 인물과 사물들을 감촉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창조해내어 작품 속에 반영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에는 비애와 절망이 가득 찬 장면이 화폭에 담겨져있다. 그의 작품 속의 어두운 색조는 이러한 작품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19세기 후기의 러시아 미술
19세기 후기에는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가 지배적인 사조로 탄생되었다. 사실주의 화가들은 예술은 미적인 기능이 아니라, 보다 더 사회적인 기능을 맡아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러시아의 민족적인 주제와 장면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따라서 화가들은 현실 생활로부터 자신의 작품의 소재를 찾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주의 동향은 사회의 사상적 고양과는 멀리 떨어진 그 당시의 미술 아카데미에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미술 아카데미는 작품 속에서 전통 고수, 고상한 스타일, 신화, 종교, 역사 등으로부터 가져온 고상한 주제를 고수하고 예술이 현실 생활과 접촉하는 것에 거부감을 표현했기 때문에 사실주의 미술 경향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발표된 당시 미술 작품들은 주로 현실 생활을 테마로 한 풍자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정치적 모티브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가 페로프이다. 그는 농노 해방 직전의 가난한 러시아 농촌의 여러 모습을 소개하고 관리와 성직자를 비난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1870년대에 이르러 사실주의 회화는 더욱더 성숙해져 소재와 기법도 발전된 양상을 보였다. 1870년에는 사실주의 화가들이 최초의 전문적인 독립화가협회인 '이동예술전협회'를 설립했다. 여기에 그람스코이, 페로프, 게, 야코비, 시쉬킨 등이 가담하였는데, 이 협회원과 이곳에 출품한 사람들은 후에 '이동파 화가'로 불려졌다. 그람스코이는 1870년대 이동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작품 <황야의 그리스도>에는 고뇌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한 사색하는 인간의 내면적 비극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람스코이의 초상화에는 인간의 지적인 외모, 탐구심이 강한 인간의 모습이 진지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의 초상화로는 <레프 톨스토이의 초상>, <산지기>, <안토콜리스키의 초상> 등이 있는데 거기에는 절제된 색채의 조화가 잘 나타나있다.
이동파 화가들이 가장 즐겨 그린 소재는 풍경이었다. 사브라소프, 시쉬킨, 바실리예프, 쿠인드쥐 등과 같은 뛰어난 풍경 화가들은 조국의 자연을 서정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표현했다. 또한 이동파 화가들은 민중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사회적으로 의의가 있는 민주적 예술작품도 만들었다. 그들의 작품 속에는 농민의 궁핍한 생활 모습과 고통, 강렬한 정신이 묘사되었고 도시 생활의 노동자의 모습도 나타났다.
이 시기에 러시아 미술계에 거장 레핀이 출현한다. 그는 작품 속에 농민 계층을 즐겨 그렸다. 또한 노동과 생활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는 인간의 여러 모습이 나타나는데, 속박된 민중들의 생활, 그들의 힘과 용기에 대한 신뢰,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 <쿠르스크 현의 성행렬>은 밝은 색채와 뛰어난 구도로 마치 군중이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역사화 <투르크 왕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졔 카자크>에서는 혈기왕성한 카자크인들의 용기와 밝고 낙천적인 유머가 독창적인 구도와 정연한 색조 속에 그려졌다. 이 속에서는 자유로운 민중, 그들의 독립과 자유를 추구하는 투쟁 정신이 잘 드러났다.
레핀의 <뜻밖의 귀가>에서는 유형으로부터 귀가한 혁명가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가정을 버리고 민중을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었던 고독한 혁명가의 비극이 사실적으로 그려져있다. 이것은 인물의 예리한 심리묘사, 독창적인 구도와 부드럽고 투명한 색조가 특징적인 작품으로 그후의 러시아 회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진보적 작가, 평론가, 미술가, 음악가의 초상화에서도 레핀의 재능은 발휘되었다. <스타소프의 초상>, <톨스토이의 초상>, <무소르그스키의 초상>, <트레티야코프의 초상>과 같은 초상화에는 인물들의 성격묘사가 생생하고 박진감있게 표현되었다. 그 이후 그의 만년의 작품 <무죄의 죄인을 처형으로부터 구한 니콜라이 밀리키스키>, <결투> 등에서는 혁명적 민중성과 같은 성격은 표현되지 않고 있다.
또 다른 화가 수리코프는 특히 역사화 그리기에 주력하였다. 그의 작품 속에는 강렬한 개성을 지닌 민중들, 그들의 생활 양식이 잘 표현되었다. 그가 묘사한 카자크, 유민, 여자들, 병사들은 목표한 바를 위해 영웅적 행동을 하는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민중들에 대한 애정과 민중들의 역할의 중요성이 반영되어있다. <총병 처형의 아침>에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과 이에 반대하는 서민과 총병의 비극적인 충돌이 그려졌다. 또한 <귀부인 모로조바> 에서는 옛 신앙과 러시아에 대한 애착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항거하는 모로조바 부인의 모습이 민중의 희망과 고통을 대변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군중들의 모습은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포즈로 그려졌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이 두 작품의 화폭 속에는 자신의 신념과 신앙을 끝까지 지키려는 러시아인들의 불굴의 정신과 용기가 진실되게 나타났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리코프의 전쟁화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원정>, <수보로프 장군의 알프스 동정>도 또한 그의 손꼽히는 작품이다.
한편 1880년대 모스크바 이동파와는 달리 마몬토프가 주재한 '아브람체보파'라는 다른 성향의 미술가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 파의 예술가들은 예술 작품 속에 러시아의 소박한 민족성을 표현하며 역사를 회고하고 그 장면을 묘사하는 것을 중요시했는데, 그들은 민족 회화 사상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민족적 미술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아브람체보파의 특징을 잘 표현한 사람으로 바스네초프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작품 속에는 러시아 농민의 모습, 러시아에 대한 애정, 소박한 신앙심이 표현되어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사실주의 미술은 구체제에 대한 증오와 혁명적 정열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기에 이동전에는 카사트킨, 이바노프, 메쉬코프, 아르히포프, 포포프 등의 작품이 나왔다. 이 시기 이동파 화가들 사이에서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관심이 특별했다. 이바노프는 노동자와 빈농, 감옥과 유형, 혁명 등을 묘사한 화가로 그의 작품은 참신한 구도, 아름다운 회화성이 특징적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농촌의 폭동>, <감옥 옆에서>, <메이데이>, <대귀족의 농노들>을 들 수 있다.
오늘날에도 명성있는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이 시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9세기 말 사실적 작품들이 증가하자 그것들을 수집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려는 미술 애호가들이 늘어났는데, 그들 중에는 트레티야코프가 있었다. 그는 1856년부터 러시아 화가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러시아 미술 최대의 수집가가 되었다. 그가 수집한 작품들은 70년대에 들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1892년에는 모스크바 시에 기증되었다. 그의 수집품들을 전시한 미술관은 소비에트 시대에 들어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으로 명명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기에 이르렀다.
20세기의 러시아 미술(1)
20세기의 미술계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파들이 형성되었다. 그 분파들은 크게 사실주의적 경향과 모더니즘적 경향으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의 분파들 간에는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 통하는 부분도 있었다.
20세기의 러시아 사실주의의 대표자로 세로프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이동전에 출품하다가 90년대 말에는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개인적 체험과 감정만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술세계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자성을 주장하는 독립적인 화가로 인정받았으며 초상화, 풍경화, 역사화의 대가로 활약하였다. 그의 명작 <복숭아를 가지고 있는 소녀>와 <햇빛을 흠뻑 받는 소녀>에는 생기발랄한 청춘과 생명력 넘치는 환희가 경쾌하게 표현되어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레핀>, <막심 고리키의 초상>, <체홉>, <예르몰로바의 초상>과 같은 세로프의 일련의 초상화에는 작품 속 인물들의 풍모와 특징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인물의 혼을 잘 포착하여 그것을 깊이 있는 심리 묘사와 함께 잘 표현해내는 세로프의 능력은 뛰어났다. 예술가들의 초상 이외에도 세로프의 초상화에는 황제와 귀족들로부터 인텔리겐치아와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들이 담겨 있다. 세로프는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공상 속에 빠뜨리지 않고 생생하고 날카롭게 묘사하였다.
풍경화가로서 세로프는 <10월>, <마차에 탄 농촌 아낙>, <겨울에> 등과 같은 작품에서 혹독하지만 아름다운 러시아 농촌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가을의 저녁 무렵>, <풀이 무성한 연못>, <아이를 데리고 가는 데르비즈의 초상> 등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세로프는 자연 속에서 관찰되는 여러 가지의 색조를 찾아내어 감각적이고 조화롭게 화폭 속에 담아낼 줄 아는 예술가였다.
한편 이전의 사실주의 경향과는 다른 색깔을 띤 새로운 예술가들이 출현하여 20세기 러시아 미술계에 색다른 장이 펼쳐지게 된다. 19세기 말 사회적 의식보다는 심리적이고 미적인 의식을 더 높이 창조하는 것을 예술의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한 상징주의 화가들은 사실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현실 세계와 피안의 세계를 동시에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또한 회화 스타일에 있어서도 혁신의 과정을 거쳤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영원성으로 이상화된 여성, 신성하고 악마적인 테마를 작품의 모티브로 삼아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모호한 그림을 그렸다. 상징주의 화가들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지만, 화가 브루벨은 그러한 경향의 작품을 그렸던 화가로 유명하다. 브루벨은 레르몬토프의 <악마>에 나오는 주인공을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앉아 있는 악마>는 장미색, 짙은 보라색, 연보라색, 회색, 푸른색 등 신비롭고 다양한 색들이 조화롭게 펼쳐진 작품이다. 악마를 주제로 한 그의 또 다른 작품 <상처 입은 악마>에서는 상처투성이의 악마의 고통스런 얼굴이 표현되어 있다. 브루벨은 자신의 작품 속 악마의 형상을 통해서 개인주의의 공허함, 사회와의 불일치, 도덕적 타락성, 인간의 고뇌를 설파하였다.
상징주의 화가로서 보리소프-무사토프는 자신의 작품에서 고요함과 조화를 추구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연못에서>는 두 부인이 연못가에 서서 그 수면에 비친 구름과 숲의 그림자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주위는 온통 안개에 싸여 있고 꿈과 같은 세계가 펼쳐져 있다.
20세기 초에 쿠즈네초프, 사리얀, 우트킨, 사푸노프 등은 '푸른 장미파'에 가담하였는데, 그들은 미술의 본질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감각을 표현하는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현실 생활보다는 환상과 꿈을 선호하였다. 쿠즈네초프와 상징주의 화가들은 상징주의, 후기 인상파를 후원하는 진보적인 <금빛 양털>지와 연대하기도 하였다. 당대의 다른 나라의 미술가 고갱, 고흐, 마티스 등의 작품들도 이 시기에 러시아인들에게 소개되었다.
1910년대의 러시아 미술계에 표현주의가 나타났다. 그 대표자로서 샤갈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많은 전위 작가들처럼 장르, 색, 형태들을 변형하는 '변형'의 화가였다. 그는 삼차원의 공간을 파괴하고 그것을 시간과 기억의 영역에서 시각적으로 재구축하는 방법을 수용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 속에서는 기발하고 불가사의한 구도가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작품으로는 <결혼>, <이발소에서> 등이 있다.
1910년대 추상주의는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의 작품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추상주의 화가들은 현실세계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를 파괴하고 그것을 추상적인 선과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칸딘스키는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벗어나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여 난해하고 추상적인 표현을 완성했다.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은 복잡한 구도인데 몇 가지 모티브들을 동시에 한 화면에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것은 다양한 설화적 내용을 동일 화면에 특별한 구획없이 배치한 중앙아시아 벽화와 공통점을 보인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푸른 산>, <즉흥 19>, <검은 선들> 등이 있다.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예술의 개척자인 말레비치는 구성미술의 요소를 전부 배제하고 색면 자체가 완전한 객체로 존재하는 새로운 개념을 발표했다. 흰 바탕에 검은 사각형을 그린 그의 작품 <검은 사각형>은 그러한 개념에서 창출된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 검은 사각형은 그 자체 내에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는 독자적인 회화적 존재이다. 이것은 생과 사, 밝음과 어둠, 질서와 혼돈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말레비치는 회화 외적인 사물과 회화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를 거부하는 '비대상 예술'을 절대주의라 칭하며 비대상 형태로 구성된 세계를 작품 속에 반영하였다.
20세기의 러시아 미술(2)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스탈린이 등극하기 전 5년 동안 당은 예술 정책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복수주의를 허용하였으나, 점차 실험적인 아방가르드보다 사실주의적인 양식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시기에 '혁명 러시아 연합'은 예술 단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단체였다. 1928년에 당은 혁명 정신을 되살리려는 문화혁명에 착수하고 예술의 '프롤레타리아화'를 도모하였다.
스탈린 시대에 예술은 당의 통제와 감시하에 있었고 더욱더 획일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공식적인 소비에트 예술 표현 양식인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는 기치 아래 미술 또한 다른 예술 영역과 같이 공산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민중을 교육시키는 기능을 수행해야만 했다. 야블론스카야의 <옥수수>는 사실주의적 사회주의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는 즐겁고 활기찬 노동의 현장이 그려졌다.
또한 이 시기에는 근면한 노동자나 학생, 당에 충성하는 인물 등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영웅적 인물을 담은 회화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새로운 노동자 스타하노프 운동을 이미지로 구현한 사모크발로프의 <압축드릴을 든 여성 지하철 건설자>, 전선탑 위를 올라가는 두 명의 전기공을 묘사한 리안지나의 <높이 더 높이>는 이러한 부류의 작품에 속한다.
레닌의 후계자인 선한 통치자로서의 스탈린의 형상은 이 시기의 많은 회화 작품 속에서 자주 묘사되었다. 게라시모프의 <제16차 공산주의 회의에서 연설하는 스탈린>, <크렘린의 스탈린과 보로쉴로프>가 그 대표적 작품이다.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정권을 잡게 된 이후 문화에 대한 규제가 다소 완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스탈린을 그린 작품들이 파괴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노동자를 영웅으로 상징화하는 그림들은 이 시기에도 여전히 중요했다. 포프코프의 <브라트스크 수력 발전소 건설자들>에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진지한 모습이 표현되었다.
1960-70년대에는 반체제 예술 단체들이 점차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다. 브루스킨의 회화 및 조각 작품들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원칙들을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소련의 공식 문화의 상징과 유형을 시각적으로 나열한 그의 연작 <기초 어휘 사전>에서는 공산주의 미술의 이데올로기적 기호 체계가 폭로되었다.
개방 이후 러시아 미술은 서방 세계의 미술 사조가 혼합되어 다원화의 현상으로 흐르고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현대 미술가로는 마시옌코, 바라노프, 슈리츠, 탈스치코프, 소로킨 등이 있는데 마시옌코, 바라노프와 슈리츠는 유럽과 미국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가들이다. 러시아 현대 미술의 현주소를 알게 해주는 이들의 작품들은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다. 러시아 국립 현대 미술관에는 1990년 말 현재, 30여점의 국외의 아방가르드 작품을 포함한 260여점의 현대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