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지 여량에서 소금 길을 따라 동해를 바라보면 오십 리를 어름하여 산 마을 임계에 닿는다. 길은 큰너그니, 작은너그니 하는 숨가쁜 고갯길에 걸리고 강물은 길과 헤어져 은밀한 비경를 이루며 그저 해맑은 곳으로 흐른다. 골지천(발원지의 지명을 따르면 창죽천이 옳은 이름이다. 옛 문헌에는 죽현천이다)이 임 계에서 물이 불어 아우라지로 달리는 곳에 아홉의 아름다운 경치가 좋다 하여 구미정(九美亭)이라 부르는 정자가 하나 있다. 비좁은 강언덕에 온갖 모양의 암 벽이 둘러치고 푸른 여울이 협곡을 급하게 치달아 내리는 풍경이 과연 장관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임계를 두고, "고려 때에 이승휴(李承休)가 여기에 숨어 살았고 근래에는 찰방 이자(李 )가 벼슬하지 않고 산 속에 집을 지어 살았다"고 적었다. 앞의 말은 동안거사 이승휴가 두타산(해발 1,353) 자락에 은거하며 『제 왕운기』를 지은 내력이고 나중 말은 숙종 때에 살았던 구미정의 주인을 일컫는 말이다. 『택리지』는 또한 "산간에 평평한 들이 조금 열린데다 논도 있고 시냇가 바위도 아주 훌륭하다. 농사짓기와 고기잡이가 모두 알맞으니 이곳은 별 다른 하나의 동천(洞天)"이라고 임계를 극찬했다. 사실이다.
지금도 정선 쌀농사의 절반은 임계에서 난다. 또한 남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의 금대봉아래 검룡소에서 흘러온 골지천과 임계 동북의 여울을 한데 모아 흘러온 송계천(임계천)이 만나 제법 넓고 깊은 강의 풍모를 갖추는 곳이 바로 임계다. 6년 전, 사방으로 포장길이 열리면서 정선에서 삼척으로 넘는 42 번 국도와 강릉에서 태백으로 달리는 35번 국도가 서로 엇걸리는 임계는 이제 아주 부산한 길목이 되었다.
문명의 뒤안길로 사라진 '임계 장날'
장터의 내력을 아는 이들은 으레 대화, 진부, 임계 장을 먼저 꼽는다. 그 세 곳의 장 가운데 딱히 어느 장 하나를 더 크다 말하면 나머지 두 장은 틀림없이 서운하여 돌아앉는다. 저마다 찾아가 물어보면 으레 모두 제가 더 컸다고 큰소리 땅땅 친다. 임계에 가 물었으니 물론 임계 장이 으뜸으로 컸다. 분명한 것은, 장터에 이력이 난 장돌림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임계 장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부터 꼭 13년 전에 임계 장을 다녀간 신경림 시인은 다음처럼 장터 풍경을 묘사했다.
"임계 장이 무엇으로 유명하냐고 주인에게 물었더니 어물이 싼 것으로 유명하다고 대답한다. 어물을 트럭에 싣고 들어왔다가 더 들어갈 데가 없으니까 여기서 싸구려로 다 팔아 치운다는 것이다. (중략) 목물전에는 걸쿤대, 용수, 소쿠리 등 예스러운 농구도 제법 눈에 띈다. 시장 밖으로도 농기구상은 유난히 많다. (중략) 경운기 보습이며 플라스틱 물조리며 헌 타이어를 이용해 만든 삼태기 따위가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또 잡화 가게에는 스폰지 수세미가 많이 팔리고 있다. (중략) 특히 네모 반듯한 메주를 들고 나온 아낙네들이 여럿 있었는데, 장사치들은 3천원 이상은 어림없다고 다그치고 있었고, 아낙네들은 3천5백원씩은 받아야 한다며 메주덩이를 움켜잡고 내놓지 않고 있었다." 『민요기행1』(한길사) 176쪽
시인 김민형과 함께 영월의 강마을에서 자고 정선을 지나 임계에 닿은 날은 부러 맞추어 간 것도 아닌데 용케 임계 장날이었다. 그러나 그 유명짜했다는 임계 장의 소문은 이미 옛말이 되어 있었다. 파장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도 장터는 그 저 한산하다. 물건파는 사람이 열이면 구경꾼은 하나 정도이고 그나마도 물건 이 거래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어쩌다가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영감님 양말이나 매만지다 그냥 가고, 트럭에 실려 재를 넘어온 유행지난 옷가지는 아예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딴전을 피운다.
어물이 싸다는 말도 이미 헛말이 되었는지 어물전에도 파리떼만 날고, 한때 좋았던 시절의 여운인지 그래도 시골 장터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농기구 좌판이나 방물장수가 더러 구색을 갖추었지만 아무래도 흥청대는 장터 풍경은 오래 전에 사라진 모양이다. 장터 한 구석에 토정비결과 만세력 같은 옛 책을 펼쳐놓고 있는 초로의 장꾼에게 '뭘 좀 팔았느냐'고 물으니까 고개만 가로저을 뿐 웃으면서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효자 고을, 열녀 마을
1975년, 임계댐 수몰지구가 고시되면서 임계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치달았다. 구미정 위쪽의 임계천 상류를 막아 고도가 높은 백두대간 서쪽에 거대한 인공 호수를 건설한다는 것이 임계댐의 취지였다. 상수원 확보는 물론 장차 백복령 (해발 780)에 터널을 뚫어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백두대간 동쪽으로 물길을 떨구는 이른바 유역변경식 발전이 그 목표였다.
대부분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형에 설계되었던 그 임계댐은 결국 10년을 미적거리다가 이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10년이 가는 동안, 새집은 물론 서까래 하나 고치는 일마저도 금했던 탓에 임계의 인구는 절반이나 넘게 줄었다. 하기야, 댐이 되었더라면 모든 것이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터이다. 더러는 그 참에 아예 고향을 버리고 더러는 또 돌아왔지만 그래도 그만하기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임계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골지천을 거슬러 오르면 태백에 닿고 북쪽으로 삽당령을 넘으면 강릉이다. 서쪽은 정선이고 동쪽으로 백복령을 넘어서면 바투 동해 와 삼척이 내려다보인다. 사방 어느 곳이든 그저 백리 길을 조금 덜하기도 하고 더러는 조금 웃돌기도 한다. 임계에서 백복령을 향하여 십리 남짓한 곳이 본래 옛날의 임계가 있었다는 관말이다. 관말에서 다시 십리쯤 더 가면 길섶 저편으로 자그마한 효자문이 하나 있는데 지명이 장성거리다. 임진왜란에 백복령을 넘어 쳐들어오는 왜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 나무로 장승을 깎아 세워 군사로 위장했다는 전설을 품은 이름이다.
효자문의 주인공은 박문언(朴文彦, 1786-1833)이다. 『정선군지』에 실려 있는 그의 행장을 살펴보니 본관은 강릉이고 자는 여홍(汝弘)이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농사일로 겨우 부모님을 섬겼는데 어느날 어머니가 독사에 물려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의원의 말이 멧돼지 쓸개가 영험하다 하여 무작정 산중을 헤매 는데 돌연 호랑이가 멧돼지를 물어다 주었다고 한다. 또한 새가 게(川蟹)를 물어다 주었다거나, 학이 산삼을 물어다 주었다거나 하는 대부분 과장된 이야기가 그 효행의 줄거리다.
백복령 구비 외진 마을 '군대'
임계에서 오르는 백복령 고갯길에는 유달리 군사적인 땅이름이 많다. 무엇보다도 임계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석이암산(해발 970) 중턱에 걸린 장찬성(張贊城)이 그 근원이다. 가을 햇살에 잔뜩 독이 올랐을 뱀을 저어하며 길도 없는 풀숲을 헤치고 올라보니 성곽은 찾을 길이 없고 하나같이 도굴의 흔적이 역력한 고분들이 널려 있다. 다음날, 임계 면장을 지냈다는 김대중(73, 임계면 송계리)옹에게 들으니 고분군 아래 더러 온전한 성벽이 남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워낙 우거진 풀숲에 숨어 있어 초행자의 눈에는 띄지 않을 수밖에.
장찬성의 축성 시기는 딱히 알려진 바가 없다. 진용선의 『강원도 산성기행』에는 고구려의 횡혈식 고분이 널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대략 고구려가 죽령 서북 지역으로 진출하던 6세기 말엽으로 어림잡고 있다. 또한 장찬성이란 이름도 영춘의 온달성이나 영월의 왕검성처럼 북방 계통의 사람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어찌 되었든 장찬성을 중심으로 하여 백복령 골짜기에는 '마상골', '형틀 거리', '기추목이', '검무평' 같은 군사와 관련된 이름이 곳곳에 흔하다.
장성거리에서 백복령의 들목에 놓인 갈고개를 넘어 만나는 군대(軍垈) 마을도 그중 하나이다. 장찬 장군의 군대가 머물던 곳이라는 얘기다. 갈고개와 백복령 구비길에 걸린 군대 마을은 배추와 무같은 고랭지 채소와 감자가 주업이다. 비록 모두 하나같이 산비탈 화전밭뿐이지만 꽤 널찍한 이랑마다 감자캐기가 한창 이다. 고갯길에서 부르면 들릴 듯한 거리에 보이는 군대 분교의 식구는 열두 명의 아이들과 두 분의 선생님이 고작이다. 전에는 더없이 궁벽한 산촌이 군대 마을이었지만 이제 고랭지 채소의 벌이가 낙낙하고 마을길도 포장되어 딱히 불편 함은 없어 보인다.
백복령, 그리고 동해 푸른 물결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 길은 충북의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 라와 기껏 영월쯤에 닿아 멈추었고, 정선 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을 의지하여 살았다. 백복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하여는 누구에게 물어도 선뜻 일러주는 이가 없다. 이즈음은 그저 어디든 한결같이 백복령(白伏嶺)이라 쓰는데 아무래도 어딘가 께름직한 느낌이다. 임계 면의 김대중 옹은 주변의 군사적인 이름과 관련하여 실마리를 푸는데 그도 시원한 맛은 없어 보인다. 문헌을 들추어보니 『택리지』에 는 백봉령(白鳳嶺)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는 백복령(百福 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하면서 일명 희복현(希福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만 희복현이란 이름만 보인다.
옛 글이 이미 그랬으니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닌 듯 싶다. 다만 오늘날 느닷없이 등장하여 일사불란하게 쓰이는 백복령(白伏嶺)이란 이름의 출처가 자못 궁금하다. 그 이름을 자꾸 되뇌어 보면서 나는 웬일인지 불쾌한 느낌을 감출 길이 없다. 아무래도 냄새가 수상하다. 제기랄, 나는 언제쯤에나 식민지의 후예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부끄럽게, 아주 부끄럽게 다만 백두대간의 혈맥이 꿈틀대는 백복령 정상에 서서 동해를 본다. 저거였을까? 뼈에 사무치는 해협을 건너와 국토의 해안에 포말로 부서져 안기는 저 동해 바다의 하얀 눈물이었을까.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다시 동해 바다가 운다.
아뿔싸! 백두대간을 끊다니
금강산과 설악산을 지난 백두대간은 오대산 아래 대관령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바투 백복령을 건너 청옥산과 두타산으로 이어진다. 한편으로는 창창한 동해를 거느리고 또 한편으로는 금쪽같은 한강 유역을 품에 안아 무릇 대간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용비봉무(龍飛鳳舞)로 남진하는 곳이다. 거기 아무데나 부지런히 올라 웅혼한 대간의 기상으로 바다를 보고 또 땅을 보라. 우리가 언제부터 이 쟁쟁한 이야기 속에 들어 있었는지, 우리가 얼마나 먼 날로부터 쉬지 않고 숨가쁘게 달려와 또한 이 곳에 이르렀는지.
그런데, 아뿔싸! 백두대간이 끊어져버렸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다시 보고 또 보아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근은 석회석이었다. 국토 개발의 역군, 시멘트라는 문명의 골리앗이 바로 그 범행의 배후였다. 존속에게 참수당한 우리의 백두대간. 끔찍했다. 자병산(해발 873)에서 백복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목덜미는 여지없이 두 동강이 난 채로 만신창이가 되어 살점이 흩날리고 선혈이 낭자하다. 비명도 없이, 몸부림도 없이 저 지경을 당한 백두대간과 더불어 우리는 장차 또 어디로 가려는가. 갈 수 있겠는가?
덮어야 한다. 당장 저 잘려나간 대간의 목을 새 살로 덮고 꺼져가는 대간의 숨결을 되살려 내야 한다. 백두대간이란 그냥 불거진 산천만이 아니다. 백두대간의 온전한 하나됨은 갈라진 조국의 올곧은 화두이며 민족의 애타는 염원이다. 오로지 그 날만을 기다리다가, 오로지 그 날만을 위해 살다가 먼저 간 많은 이들 이 있었다. 자나깨나 그 열망으로 밥을 먹고 그 목마름으로 숨을 쉬는 이들이 지금도 수 없이 많다. 덮어야 한다. 백두대간은 그렇게 함부로 쓰고 버릴 수 있는 천연자원이 아니다. 그깟 조국 산천을 온통 시멘트로 뒤덮는 일쯤이야 좀 늦어도 괜찮다. 백두대간을 되살려라! 부탁이다. 아, 부탁이다.
두고 온 묵호의 추억
대간 동쪽의 백복령 고갯길은 중턱에서 나뉘어 한 줄기는 옥계로 가고 또 한 줄기는 동해와 삼척으로 간다. 옥계 길은 또한 남면치란 이름으로 해안을 향해 떨어지고 삼척 길은 유명한 무릉계곡의 들목을 지나 동해안을 달리는 7번 국도 에서 동해시와 삼척시가 남북으로 갈린다. 삼척은 본래부터 옛 고을이고 동해는 지난 1980년, 묵호읍과 북평읍을 합쳐 새로운 이름으로 시가 되었다.
묵호항에서 해안선을 따라 두어 마장, 횟집이 늘어선 여느 민박집에 여장을 풀 었다. 돌아보니 참으로 먼길을 왔다. '돗제비골'이라 부르는 작은 해안 마을의 밤. 지난 여름 한철의 몸살을 말끔히 털어내고 해풍에 몸을 말리는 오징어가 풍년이다. 아직 여행 길이 많이 남았지만 왠지 적막한 마음이 되어 '부담 없는 집 '이란 허름한 천막을 열고 들어가 오징어 회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산 오징어 세 마리에 만원. 멀리 수평선 너머로 꽃등을 밝힌 오징어잡이 배가 파도에 실려 남실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