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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년 3 월 3 일
강릉에 위치한 제법 규모가 있는 대학교에서 자그마한 사건이 하나 생겼다. 최근 민족문화유산발굴이라는 트랜드에 맞춰 이 학교의 인문대학 앞에 자그마한 장승을 두개 세워두었는데 세워둔지 사흘을 못 넘기고 그 장승이 베어진 것이다. 밑둥만 썰렁하게 남아있는 장승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민족 문화를 다루는 국문과, 철학과, 사학과 교수들의 분노에 의해 한동안 강의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그 사건을 들은 학생들은 잠시나마 분노 하였고, 그 분노의 배출구는 애석하게도 대학 기독교 학생회 즉 우상 숭배를 반대하는 비교적 행동주의 포교단체인 C.C.C의 짓으로 여겨졌고, 아무런 확증도 없이 잠정적으로 그렇게 결론 지어져버렸다.
그리고 그 사건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버렸다.
장승이라는 것은 수호신이며, 결계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장승을 그저 상징적 우상으로 생각하고, 그 무서운 얼굴로 귀신을 쫒는다라고만 생각하겠지만, 생각보다 깊은 신격이 담겨져 있다. 대부분은 토속 신앙과 결부되지만, 토속 신앙과 민족 신앙을 너무 일관화 시키려는 근대 이후의 미신론적 세계관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크게 박혀 있다. 무속의 체계 역시 깊지만, 정작 그 땅에 사는 사람을 지켜주는 귀신은 그 땅의 귀신밖에 없다. 우리로 치자면 아무리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심기섭 시장이 일을 잘해야 이 동네가 좋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위로 아무리 상제를 떠받들고 칠성을 모시며 삼신을 숭배한다고 한들, 그들은 항상 민초들과 하는 신령은 될 수 없다.
장승에 쓰여져 있는 글귀, 천하대장군 혹은 지하여장군이라는 칭호는 말 그대로 ‘장군’이다. 물론 장군이라는 지위도 결코 낮은 것은 아니지만 백성들은 감히 칭호의 최고 단계인 ‘王’을 감히 꺼내올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지방, 대관령 지방의 경우에는 그 장군으로 대관령 산신을 추대하였고, 그 대관령 산신이란 바로,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된 김유신 장군을 말하는 것이다.
토속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자신들과 가장 가까운 존재를 숭배한다. 그리하여 신격화 시켜서 최대한 인간과 가까운 신을 만들어서 자신들만의 신을 숭배하는 것이 더욱 자신들에게 가까운 영향을 미친다고 믿은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믿은 신은 자신들에게 관련된 것들은 무엇이든 들어 주었고, 언제나 함께 있었던 것이다.
장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장승의 경우는 더욱 포괄적이었다. 지방에 따라 다른 신격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승은 어느 마을에나 있고, 어느 마을에서든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그야 말로 다른 신격이지만 동격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토속 신앙이면서도 민족 신앙, 아니 이 것은 신앙을 넘어선 문화인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장승을 좋아했다. 그 무서운 얼굴은 예술적으로 말하자면 그로테스크이긴 하지만 친밀감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바로 이 나라의 사람들이다. 산의 민족인 이 사람들은 산속에서 장승을 만나면 기뻐하였고, 불순한 사람들은 장승을 보면 피하였다. 이제는 사천만을 넘어서 오천만에 가까운 이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전통 문화가 일부 몰지각한 유일신 사상에 도취되어 실제로 신탁인지 악마탁인지도 모르는 계시를 받은 녀석들이 장승을 베어버린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스크랩북에 자료하나가 추가되었다. 날짜와 사진, 그리고 약간의 나의 감상을 섞어서 노란색 서류철에 가나다 혹은 ABC 순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철은 이 방 구석에 놓인 책꽂이(우리는 이 것을 자료실이라고 부른다.) 다시 더 큰 목차의 ACB 혹은 나가다 순으로 꽂힌다. 원래라면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할 자료이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니까 순서가 약간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 스크랩된 자료는 장승 도난 사건, 나무 밑둥만 남은 사진에 2000 년 3 월 3 일의 날짜가 찍혀 있다. 심히 짜증나는 사건이지만, 그다지 호감이 가는 사건은 아니다. 전혀 신비롭거나 심령 현상같아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회의주의같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느냐 하면, 바로 여기가 초현상 연구회이기 때문이다. 작년 신생 동아리로써 이 주위에 미스테리 연구부가 없다는 것이 눈에 띄어서 한 일이긴 하지만, 실상 이런 웬만해서는 안 일어나는 일에 대한 부서는 솔직히 서로간에 시간 때울 동아리방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솔직히 그 것이 사실이었다. 단순한 흥미 이상으로 귀신이나 초능력, UFO 따위를 쫒는 사람은 없다. 그 것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흥미 거리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니까. 모두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 지금에는 무서운 결과에 맞 닿아 있는 것이다.
“올해 신입회원 없을까?”
“큰일이라고, 신입생이 없으면 이 동아리... 사라진단 말이야.”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흥미 위주로 모였던 사람들, 결국 재미가 없어지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몸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처음 발기인이었던 15 명의 회원들 중 처음 기획한 나와, 나와 함께 이 동아리를 만들려 했던 중국인 유학생 둘만 남아서 한 해를 넘긴 것이었다.
“헤에, 학교 축제같은 거야 인터넷이나 심령 잡지 몇 장 갖다 놓으면 관심이야 끌겠지만, 이런 걸 연구한다고 하면 왜인지 덜 떨어진 애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걸까?”
“그 것보다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다들 심령이라고 하면 뭔가 악마를 소환한다든지, 타로점이라도 봐주는 줄 알잖아.”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우리는 신비를 밝히는 연구를 하는 집단이지 신비를 행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런 프로급의 기술 따위 우리가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악마 쪽이라고 한다면 소환한다기 보다는 숭배하는 쪽이 더 우리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한 쪽도 아니고 우리는 그저 단순히 이 방이 필요했기에 모인 가짜인 셈이다.
지금 마지막까지 남아서 나와 함께 초현상 연구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이 사람은 리샤오륭이라는 중국 유학생이다. 처음에 만났을 때 자신을 리샤오륭이라고 해서 그저 이쁜 이름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녀가 자기 이름을 입회원서에 李小龍이라고 썼을 때. 그 것이 이소룡이라고 쓰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한동안 멍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반응이 처음은 아니었는지 한국식 한문 읽기를 알고 있긴 하지만 소룡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놀라서 그냥 샤오륭이라고 소개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면서 반격을 당한 것은 내 이름에 대해서이다. 이 것은 외국인이나 내국인이나 모두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었는데 바로 김동해(金東海)라는 이름이었다. 내가 소룡이라는 이름이 무슨 용이냐? 부르스 리냐? 라고 딴지를 걸자 녀석은 보통 한국사람은 지명을 이름으로 붙이지 않지 않아? 무슨 일본인도 아니고. 라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그런 것보다 최근에 회의주의자의 사전 들어가봤어?”
“회의주의자의 사전이라면 다 봤지만, 최근이라니 뭔가 What's New에 올라온 거야?”
회의주의자의 사전, 미국이 중심이 되어서 각 분야의 신비를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회의주의자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능한한 많은 신비에 대한 해설과 그 것의 부정을 파헤치는 인터넷 페이지이다. 상당히 많은 자료와 상호간의 링크가 되어있는데다가 그다지 크게 틀리지 않은 정의들이 다수 있어서 상당히 도움이 되고 있는 사이트다. 하지만 동양인인 나나 샤오륭이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양키 센스들이 많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회의주의자의 사전의 가치는 작성자의 주관보다 그가 참고한 도서들이 함께 보여진다는 것인데, 즉 그런 주장의 원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것이 신뢰도를 얼마나 높여주는가에 대해서는 역시 ‘회의적’이다.
“사도 27 조에 관한 것이 올라왔어.”
“사도 27 조? 그 거 픽션이잖아. 월희에 나온 단순한 설정 아니야?”
“그렇긴 해도 일단 올라온 거니까 뭔가 있지 않을까? 그 중에 뭔가 재미있는 게 있어보여서 인쇄해왔어.”
그러면서 샤오륭도 내가 했던 것처럼 이번에 추가할 파일로 뽑아온 프린트물을 책상 위로 올려 놓았다. 하지만 뭔가 살짝 핀트가 어긋나 보인다. 생각해보면 내가 회의주의자의 사전을 다 봤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다 봤기 때문이다. What's New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회의주의자의 사전 영어 사이트에만 게재되고 정기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지 벌써 일년이 넘어가는 한국어 사이트의 경우에는 최근 자료랄 것이 없다.
“이 게 뭐야? 에인나츠...”
“뭐야, 이 건 독일어라고, 아인낫슈라고 읽어. 한문으로도 쓰여 있는데. 부해림 아인낫슈라고 하네.”
“하아… 난 영어는 못 읽으니까 읽어줘.”
약간의 한숨 속에는 그래 너 잘나셨어요.라는 의미와 동시에 약간의 창피함이 섞여 있었다. 솔직히 이런 미스테리 연구회에는 상당한 두뇌들이 모이기 마련이지만, 나는 그 중 예외다. 어디까지나 놀기 좋아하는 대학생일 뿐.
“This is an ancient tribe of bloodsucker as…"
“됐어! 거기까지!”
도무지 도움이 안되는 군. 끝까지 날 무안 줄 생각이다. 이 녀석은 이런 쪽으로 약간 짖궂은 데가 있다. 솔직히 샤오륭은 장난을 치는 편이 아니다. 유학생으로써의 서먹함이랄까? 중국 유학생들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데 한부류는 타국인이라는 것 덕분에 왜인지 상대와 벽을 두어 타인이라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부류와 또 하나는 그 것을 지나치게 의식하여서 필요 이상으로 친한척하는 부류가 있다. 샤오륭의 경우는 전자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게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다 그녀가 잘나서이다.
“영어 정도는 배워두도록 해.”
“배우고 있다고. 중국처럼 그렇게 크레이지 하지 못해서 그렇지.”
한국인이 배우는 영어라는 것은 그다지 크레이지 하지 못하다. 중국에서는 최근들어서 영어 붐이 불고 있다고 들었지만 샤오륭의 경우는 약간 특이하다. 그녀는 영어는 기본이라고 말하면서도 한국어도 나와 불편함없이 나누고 있고, 일본어도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한 언어를 배우면, 그 언어와 같은 어족의 경우 단어만 외워두면 의사소통에는 문제 없을 정도로 익숙해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말만 쉬운 일이다. 단어를 외워둔다는 것은 이미 머리 속에 사전이 하나 들어가있다는 소리가 아니던가? 그런 걸 이 여자는 잘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음 그럼, 대충 설명을 하자면, 식물이 흡혈귀가 되어버렸다는 거야. 즉 피를 양분으로 삼아 자라는 식물이라는 것이지.”
“흐음... 하지만 식물은 운동능력이 없으니까….”
“운동능력이 없다니. 식물은 줄기를 올리는 힘이 있고, 뿌리를 내리는 힘도 있어.”
“줄기를 올려서 사람의 목을 공격한다고?”
“음…. 여기에 나온 바에 의하면, 아인낫슈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숲 전체라고 하네. 마치 이 건 볼라스의 정원(Volath' garden)과 비슷한데.”
“볼라스의 정원이라면 식인식물 말이야?”
“그렇지. 식충 식물 정도의 운동성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긴 하지만, 식물이 흡혈귀라는 것이 신기한 것은 식물 즉 운동성이 없는 것이 운동성이 있는 것을 잡아먹기 때문에 신기한 것이잖아. 그런 어정쩡한 이유에서라면 일단 흡혈귀라는 근본과 다를바가 없는 정도의 흥미인 걸.”
그런 것이다. 움직이는 식물이라면 애초에 동물이라고 불릴만한 것이고, 그렇다면 식물 흡혈귀에 대한 보고서라기보다는 흡혈귀에 대한 보고서라는 쪽이 더 어울릴만한 것이다. 즉 이 기사는 근본적으로 흡혈귀에 대해서 긍정하고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여튼 이 문서를 작성한 자는 월희의 설정에 상당 수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언급이 되어있고, 그 사이에 살짝 픽션을 끼워 넣었기 때문에 27 이라는 숫자나 그 배열이 상당히 짜임새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교하다는 거야. 뭐 그래서 부해림이 있다는 남미 쪽으로 탐험을 갔다고 하는데, 결국 못 찾았대.”
“…… 그래서….”
“부해림은 픽션이었다라는 결론!”
“……”
뭔가 시간 낭비했군, 그 사람.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인가?
2000 년 3 월 4 일, 강릉
세간의 사람이라면 다들 산골짜기라고 생각하는 강원도의 조금은 큰 도시, 그리고 그 곳의 조금은 규모가 있는 대학교에서 조금은 무시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버렸다.
술에 취한 학생이 비틀비틀 걸어가다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보고 술에 취한 줄 알고 일으켜 세워주려다가 그만 뒤로 자빠져버렸다는 이야기. 그 이유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새하얀 시체였다는 이야기. 어찌보면 상당한 괴담이 될법한 사건이 순식간에 소문을 타고 흘러갔으나 언론사들의 게이트키퍼에 의해서 축소된 단순 살인사건이 이 동네에 일어나 버린 것이다.
2000 년 3 월 5 일
오늘도 동아리방으로 올라와 버리고 말았다. 강릉대학교 학생회관 4 층에 위치한 초현상 연구회는 이 곳에서는 조금 특별한 동아리이다. 학교 동아리의 특성상, 종교 동아리는 마치 무언가에 의해서 밀려나다 밀려나는 듯 한자리에 모여있게 된다. 종교의 특성상 매우 위험한 조치이긴 하지만, 그렇게 되는 쪽이 비종교인에게는 매우 편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종교 동아리가 쫒겨난 곳이 바로 이 4 층이다. 온갖 종교 동아리 사이에 끼어있는 비종교 동아리. 아니 비종교라기보다는 반종교 동아리에 가까운 이 동아리는 뭐랄까. 서로 섞이지 않는 종교들의 공공의 적이 되어있는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원도 둘 밖에 없는 주제에 동아리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데다가, 다른 종교 동아리처럼 봉사활동을 한다든지 나름대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숭고한 의식(이를테면 통곡 기도라든지... 무서워...)도 없고, 단지 노는 것만 생각하는 집단이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그래서 일단은 나도 기를 죽이고 살고 있긴 하다만, 오늘 같은 날. 즉 일요일에는 마음 놓고 4 층에 올라올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 전에 일요일이 되어서도 갈 곳이 없어서 학교에 나와서 동아리 방에 죽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슬픈 현실이다. 나라고 해서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 멀리 다른 동네에 있다는 것이 문제. 결국 학교 근처에 10 만원짜리 자취방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남자 혼자서 산다는 것이 제대로 된 집이 없다면, 밥을 먹는 것도 시원찮고, 어쩌다가 기분을 내게 되면 예산에 트러블이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보니 저렴하고, 설거지 걱정도 없는 학교 구내 식당을 이용하는 것이 더 수지타산에 맞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4 천원에 3 끼를 때울 수 있는 곳은 학교 뿐인 듯 하다. 그러다보니 주말이 되어도 학교에 나오게 되는 것인데, 문제는 밥을 먹고 나면 막상 갈 곳이 없다는 것!
공부에 취미가 있어서 도서관에 간다면 모르겠지만, 시시껄렁한 지식에만 관심이 있는 나로써는 도서관이라고 해봐야 어정쩡한 책만 보고 말 것이다. 최근에 본 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지식 사전, 정도? 그리고 환상 동물 사전도 본 기억이 있고.... 하여튼 이런 식이다. 게다가 가장 인상깊었던 홈페이지 조차도 회의주의자의 사전이었으니 말 다한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4 층에 올라와서 동아리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ㄷ 모양으로 갈라진 길에서 가장 오른쪽 안 쪽으로 들어가면 내가 만든 동아리인 초현상 연구회가 나온다. 시커먼 종이 위에 반짝이는 금색 물감으로 쓴 超現象 硏究會글씨가 멋지다. 진짜 중국사람(샤오륭)이 써준 거다. 그래봐야 테두리를 양면 테이프로 붙인 종이 조각에 지나지 않지만, 문 전체를 검은 페인트로 칠해두어서 다른 동아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미스테리함이 묻어난다. 아니 미스테리함보다는 뭔가 이단스럽다랄까? 글씨 위에 그려져 있는 별모양이 더욱 더 그렇게 보이게 해주었다.☆ 역시 종교 동아리의 공적(共敵)인가?
도둑도 들어오지 않는 이 동아리에 문단속 따위는 없다! 라고 말하고 싶긴 하지만, 솔직히 도둑… 몇 번 들어왔다. 다행히도 녀석들은 지갑에만 관심이 있는지라, 지갑에 돈이 없는 나와 샤오륭으로써는 문단속을 하지 않는 주의다. 그런 문고리를 돌려 열어서 안에 들어오면 커다란 테이블 하나, 구석의 자료실, 그리고 의자가 빙 둘러져 있고 벽에 소파가 붙어 있는 차분한 동아리방이 나온다. 입구에 비해서 내부는 미스테릭하지 않는 것이 사실. 솔직히 그런 것은 정신 사납다는 것이 과거 15 인의 의견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런 거라도 해서 부원을 모으고 싶기도 하다.
“하아~”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자료실에서 임의로 뽑아든 하나의 바인더를 들고 소파에 누웠다. 그저 시간 때우기용 자료를 든 셈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장 많은 자료를 차지하고 있는 V란에 손이 갔다. 솔직히 V라는 문자로 시작하는 명사는 많지 않다. 딱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단어라고는 뱀파이어 정도? 바로 그 것이다. V 란에 자료가 많은 것은 베놈이라든지 빅토리아 따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뱀파이어 단 하나의 단어에 의한 것이었다. 뱀파이어 박쥐, 뱀파이어 가정교사, 뱀파이어의 손길 등등…. 미스테리의 주제로써 흡혈귀 만한 매력이 또 있을까? 내 쪽은 보덴 부르크의 꼬마 흡혈귀 시리즈에서 흡혈귀 소녀 안나를 숭배하는 편이다.
“흡혈귀의 특성, 불로불사에 강한 신체, 역광성과 비윤리성, 피에 대한 굶주림이 광포화의 원인이 된다. 즉 배만 부르면 이성을 되찾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안전하다는 이야기는 아님, 비윤리성의 경우 정말로 윤리가 파괴되어서가 아니라 ‘종의 분리’가 일어나서 전에 자신이 속했던 종에 대해서는 상종이 아닌 포식 혹은 도피 욕구를 가지는 것이 보통.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흡혈귀가 되면 전의 동종 생물보다 우월한 신체를 갖기에 보통은 포식 욕구를 얻는다. 단지 인간의 경우는 예외.”
슬그머니 읽어보다가 마지막 구절이 재미있어서 스크랩했던 내용이었다. 인간의 경우는 예외라고 쓰여있는 부분, 그러나 약간은 모순되게도 흡혈귀를 이토록 깊게 연구할 정도로 인간은 흡혈귀를 두려워했다. 아니 이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며, 또한 유일하게 흡혈귀 사냥을 이성적으로 당한 종족이 바로 인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흡혈종이 있다. 흔히 생각하는 인간 흡혈종인 흡혈귀에서부터 시작하여서, 그 흡혈귀의 이미지를 구축시킨 흡혈 박쥐라든지, 지구상에서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이는 흡혈종인 모기에 이르기까지, 거머리, 빈대, 심지어 지구상의 존재하는 모든 육식 동물은 필수 영양소를 동물의 피에서 얻는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화식을 하여 동물의 피를 마시지 않게 되었고, 필수 영양소를 채소로부터 얻는 기괴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동물들은 이성이 아닌 본성으로 생존을 위해서 피를 빠는 것이다. 일종의 사냥인 것이다. 의식적으로 이권다툼을 위한 살인과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인간 흡혈종인 흡혈귀는 사냥꾼이라고는 하지만 그 것은 살인마에 더 가까운 이미지이다. 그들은 무차별하게 사람을 죽이고, 피를 빨고, 그리고 피식자는 죽음을 맞이하거나 같은 흡혈종이 되어버리며, 이 것은 악순환이 되어서 인간의 사회를 파괴한다. 즉 인간은 흡혈귀가 포식 욕구를 느끼면 사냥당하는 약자인 셈이다.
그러나 이 문서의 작성자는 오히려 재미있는 점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게 사냥당하는 우월한 존재가 흡혈귀라면, 지구상의 순수한 인간의 수는 기하급수 적으로 줄어들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한명의 흡혈귀가 하루에 두 사람을 흡혈귀로 만든다고 한다면 한달이면 몇이나 흡혈귀가 되어 있을까? 대략 5 천만이다. 하루만 더 지나면 일억 오천이고 하로가 더 지나면 거의 오억에 육박한다. 즉, 이 것은 마치 피라미드 판매사업처럼 그 사업이 현재 성공하고 있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할만한 이야기이다. 그 것이 아니라면, 흡혈귀들은 인간을 두려워하고 있다라는 것이 정석일 것이다. 흡혈귀는 인간에게 포식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 아니면 흡혈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만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것들은 과학과 수학으로 풀려고 하면 모두 과학과 수학이 되어버릴 뿐이잖아. 신비라는 것은 신비로 풀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것이 또하나의 나의 지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비이다. 신비의 존재를 포함하고 있는 존재가 신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것이야 말로 모순이 아닌가? 흡혈귀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언가 모티브가 된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흡혈귀의 이미지는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블라드 테페의 전설과 소설 드라큘라의 내용이 뒤범벅이 되어 있다. 아니 드라큘라의 모티브가 된 것이 드라큘라일 뿐, 흡혈귀의 이미지는 드라큘라 혼자서 만들어 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단순한 픽션? 그렇다고 보기에는 흡혈귀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일본의 인어전설이나 중국의 강시, 한국의 식시귀에서부터 유럽의 굴이나 도플갱어 역시, 이종간의 흡혈 혹은 흡혈(혹은 식신)에 의한 종족 번성을 일으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어딘가에 드라큘라의 이미지 이상의 흡혈귀가 존재한다는 것은 신존재 증명만큼이나 어이없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한동안 뱀파이어의 스크랩 내용을 둘러보던 중 동아리 방의 문이 열리면서 나 이외의 유일한 회원인 샤오륭이 들어왔다. 그녀는 나와는 달리 손에 뭔가 전공 도서들을 잔뜩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처럼 할 일이 없어서 학교에 나왔다기 보다는 그녀는 착실히 공부하기 위해서 도서관 갈 작정으로 온 것이다.
“역시, 있었네.”
“잘 됐다. 놀자.”
“놀고있네. 지금 상황이 어떤 줄 알고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야?”
샤오륭의 말이 너무 차가워서 가슴이 다 얼어버렸다. 놀고있네 라니. 이 녀석 한국사람이 다 되어버린 거 아닐까? 그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머리가 어찔하였다.
“상황이라면, 이제 막 개강했고, 이번 주는 수업도 없었으니 레포트도 없고, 그야 말로 한가한 상황 아니야?”
“아무리 여기가 염세적인 동아리라도 세상 돌아가는 것도 좀 알아야지 염세적인 소리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
“설마 정말 모르는 거야? 토요일에 생긴 일이라고 해도 너 여전히 학교 근처에 살고 있으니까 소문 들은 거 있을 거 아니야?”
“기숙사에 사는 사람은 서로 수다 떨 사람이라도 있으니까 소문이라는 것도 듣겠지만 나처럼 외로운 늑대는 그런 거 없어.”
“…….”
이 녀석 틀림없이 ‘늑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놀고있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한국 생활에 익숙하지만, ‘늑대’의 의미가 ‘남자’라는 뜻이라는 것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하긴 중국인들의 늑대에 대한 이미지는 그야 말로 개과의 늑대목의 생물이겠지. 아니면 뭔가 요리 재료라든지.
“그러니까 무슨 소문이야?”
“살인 사건이라고.”
“누가 죽은 거야? 어디서?”
“글세. 전혀 모르는 것이 이상할 정도라니까. 바로 우리학교 후문 쪽에서 스머프 마을 가는 길목에 당구장 옆의 으슥한 곳 있잖아. 그 곳에서 어제 시체가 발견되었대. 으슥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인적이 전혀 없는 곳은 아니니까 금새 발견되었어.”
“헤에~ 갑자기 이 주변이 무서워졌잖아. 바로 옆에서 살인사건이라니. 그래서 범인은 누구래?”
“아직 못잡은 것같아.”
“…….”
이번에는 머리가 얼어붙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그리고 그 범인은 여전히 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보통의 살인사건의 경우 거의 면식범의 소행이며, 우발적 살인인 경우가 대부분, 즉 조용해질 때까지 잠수타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그 다음 이야기였다.
“사인은 언론에 의하면 과다출혈이래.”
“그러면 손목같은 것을 그어서 자살한 거야?”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살인이라잖아. 목격자도 있는 사건이니까 은폐도 여기까진가보지.”
“은폐? 이 게 은폐라고?”
“응. 오늘 아침 사건 현장에 가봤는데. 바닥에는 피 몇방울 정도가 전부였는 걸. 그 걸 가지고 과다출혈에 의한 사망이라니. 웃기잖아. 그래도 부검 결과 체내 혈액은 상당수 없어졌다는 거야.”
“…… 그 이야기 왜인지….”
뭔가 안 좋은 느낌으로 손에 들려있는 파일을 살짝 들어서 샤오륭에게 보여주었다. Vampire 란이었다.
“흡혈귀라고?”
“왜인지 그래 보이지 않아? 시체에서는 피가 없는데 현장에도 피가 없다.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모순이잖아. 어딘가에는 있다겠지. 현장에 없으면 누군가가 가져간 거고.”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그럼 그 피를 누군가가 강제 수혈….”
“이성적인 판단으로 몸 속의 혈액을 거의 모두 가져가려면 뭔가 아이언 메이든같은 거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치들이 사용한 피 드럼(플라스틱 드럼이 아님)이라든지.”
“역시 흡혈귀라는 거야?”
“글세, 흡혈귀의 존재라는 게 모순이잖아. 자기 동료를 늘리는 힘에 의해서.”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유식한 중국 여자는 한번에 알아듣는다.
“그렇다면 뭐겠어. 흡혈귀는 처음부터 동료를 늘리는 힘이 없었다. 이 거라면 충분하지 않아? 단순히 피를 원하는 원령이 아닐까?”
“하지만 흡혈귀의 모티브는 너무나도 명백하게도 동족을 늘리는 힘이야.”
“거기서부터 어긋나 버린 걸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사건, 우리가 맡자!”
“응?”
“우리 동아리, 이대로라면 연말은커녕 이번 학기도 못 넘겨. 동아리 연합에서 이번 분기 모임에서 회원 조사를 한다고 하는데 이번은 어떻게 작년 멤버를 적어 낸다고 해도, 올해 새로 다른 동아리에 들어버린 멤버들의 이름으로 다음 학기에 내지는 못한다고!”
“설마….”
“이번 사건에 우리가 도움이 되면!”
“되면?”
“당연히 스포트라이트 온인데다가 미스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회원들이 몰려올지도 모른다고!”
“…… 뭔가 현명해 보이지는 않지만….”
“너 할 일 없지?”
“응.”
“……….”
샤오륭의 눈이 나를 노려다 본다. 중국인 답게 곱게 땋은 머리가 뭔가 매니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서구적으로 보이고 싶은지 눈에는 파란색 렌즈를 끼고 있어서 뭔가 호수같은 눈을 하고 있다. 상당히… 압박이다! 이 녀석은 내 입에서 ‘Yes'를 듣기 위해서 그 압박스러운 눈을 내 눈에 맞추고 있다. 점점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긴 하지만 무시하는 것도 이제는 한계다.
“알았어! 하여튼 일이 잘못되면 널 원망할 거야! 재미로 만든 동아리에서 살인사건을 맡게 되다니!”
“오케이! 하지만 있단 말이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미스테릭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런 사람들이 그런 일을 맡아주는 것은 인류에 대한 봉사라고.”
사람 좋은 소리하고 있네. 하지만 이 녀석의 말이 맞다. 구세주라는 것은 항상 손해보는 짓이다.
1999 년 12 월 23 일
“오옷! 이 건 사카모토 류이치의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틀 앞두고, 기말고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동아리 방에 남아있었다. 집에 가서 새해를 맞이한다라는 선택도 있었지만, 집에서는 왜인지 내가 오는 것을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전화를 했더니 ‘차비 쓰지 말고 방세도 아까운데 그냥 강릉에 머물러 있어라! 웬만하면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해보고.’라는 어머니의 말에 가슴 아픈 새해를 맞이할 판이었다.
그래서 추운 동아리 방에 마치 성냥팔이 소녀 모양 어디서 주워온 파랗고 빨간 초를 테이블 위로 헥사그램 모양으로 세워 놓고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SAS 서버이벌 백과사전에 의하면 실내에서 촛불을 켜는 것만으로도 온도를 2 도 정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내복을 입으면 3 도 정도의 체온 상승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지? …… 그래봐야 +5 도. 결국 실외온도는 영하 10 도 이하로 내려가고 있는 판에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라고해도 초가 워낙에나 많아 놓으니 점점 따뜻해지는 느낌도 든다. 문제는 불장난 하면 동아리에서 쫒겨난다는 이야기가 있던 것같기도 하다. 위험하니까 흉내내지 말 것!
그런 내게 위안이 되는 것은 이 추운 날에도 내게 뭔가 선물을 줄거라면서 학교로 찾아온 중국 유학생이 곁에 있다는 것이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어도 그녀는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한국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샤오륭은 중국에 안 돌아가?”
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한다는 말이
“그다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피곤하고, 돈도 들고 하니까 유학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한국에 있을 거야.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해놨고 말이야.”
조금 뜨끔한 대사였다. 그런 그녀가 동아리 방에서 나를 보자마자 꺼낸 것이 사카모토 류이치의 겨울 앨범 메리 크리스마스였던 것이다. 최근 유키 구라모토를 필두로 해서 일본 쪽 뉴에이지가 유행하다시피 하고 있어서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야니나 엔야같은 대중적인 뉴에이지 아티스트보다 왜인지 일본의 카시오페아나 T 스퀘어같은 애시드 재즈 쪽을 더 선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단연 이 계절을 파고든 사람은 바로 사카모토 류이치였다. 최근작 철도원에서 보여준 레인 같은 곡은 너무 유명해져서 쇼 프로그램에서도 쓰이고 있고, 이번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발표한 메리 크리스마스 혹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번 곡은 그야 말로 가슴을 에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음악에서 흥겨움은 자주 느낄 수 있지만 음악에서 눈물을 흘릴만한 곡은 정말이지 템피스트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 거 나 주는 거야? 하지만 CD를 선물해줘도 난 CD 플레이어가 없는 걸.”
“…………. 거지.”
샤오륭은 기분 좋게 선물을 받아든 내게 비수를 꽂아 넣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학교에서 밥을 사먹고, 갈 곳이 없어서 동아리 방에 죽치고 있고, 덤으로 선물을 받아 놓고 CD 플레이어가 없다고 불평을 하고 있다. 거지라는 소리 들어도 싸다.
“미안해. 난 준비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미안 할 거 없어. 너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내려고 노력했잖아.”
그러면서 살짝 시선을 옮긴다. 자료실과 맞은편 벽에 붙어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얼마 전에 뒷산에 올라가서 베어온 것이다. 그리고 재작년에 버려진 발광 다이오드 선을 빙 두른다음에 ‘진짜’ 전구 같은 것을 매달고 색종이로 별을 만들어서 얼추 크리스마스 트리 비슷하게 만들었다. 뭐 누가보면 상당히 정성 들인 거라고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약간은 운동부족이라 산길을 좀 오르다가, 할 일도 없으니 해서 만든 것에 불과하다. 뒷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본격적이었으려나? 대관령 옛길을 가는 길이었으니까.
“크리스마스에 뭐할 거야?”
“나?”
샤오륭이 갑자기 내게 크리스마스 계획을 물어본다. 평소 같았다면 크리스마스는 케빈과 함께라든지, 성룡과 함께 보내는 것이 되겠지만 지금으로써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걸로 낙찰! 혹시 데이트 신청이라도 하려는 거냐? 아앗! 갑자기 그런 식으로 전개가 되어버릴 거라는 기대심리에 얼굴이…
“계획 없는데.”
“그래? 나랑 같네.”
거기에서 말이 끊어져버렸다. 역시… 샤오륭도 여자다. 적극적일 이유따윈 없다는 건가? 하지만 곧 녀석은 부스럭부스럭 하면서 가방에서 CD 플레이어를 꺼내서 내게 선물한 CD를 넣고 스피커로 돌렸다.
역시 아슬아슬한 선율을 타는 듯한 피아노 소리가 울리면서 <메리 크리스마스>가 시작된다. 눈물이 날지도 모르는 애틋한 멜로디, 눈을 감는 것만으로도 슬픈 눈물 같은 눈송이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동해야.”
“응?”
“너 근데 저 나무 어디서 가져왔어?”
“대관령에서…. 왜?”
“응 아니…. 크기는 작은데, 나이는 많이 먹은 것같아서.”
“그럴지도. 대관령의 신목림에서 하나 꺾어 온거니까.”
“…………. 벌 받을지도 몰라.”
“그러라지 뭐.”
서로 맞은편 소파에 누워서 게으른 듯 음악 감상을 하면서 눈을 지긋이 감았다. 하지만 곧…
=틱.... 틱.....=
CD가 튀면서 분위기가 묘해졌다. 그러더니 곧 음악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역시… 메이드 인 차이나 인가?”
나의 빈정거림에 샤오륭은 손바닥으로 살짝 CD 플레이어를 때렸고 그러자 다시 음악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1999 년 12 월 15 일
강릉대학교 인문대 남학생 중, 뜻있는 학생들이 모여서 대관령 옛길로 올라가기로 했다. 뭐 나름대로의 팀웍을 다지자는 의미보다는 강릉 단오제에 쓰일 신목을 베어오기 위해서 신목을 선정하려는 행동이었다. 보통은 제주가 신목을 선택하고 가지고 오지만, 이번에는 약간의 흑심도 섞여있었기에 대학에서도 사람을 보낸 것이었다.
최근 강릉 단오제가 세계적으로 시선을 받게 된 것은 다름아닌 강릉 관노 가면극의 부활에 있었다. 국내 가면극 중 유일에 가까운 무언극이며,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예정이므로 강릉에 있어서는 상당히 반가운 일이며 현재 추진중인 계획이기도 했다. 이미 강릉 단오제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될 예정이며 관노 가면극은 무형 유산으로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것을 앞장 서 추진해 온 강릉 지방의 대학 교수들은 그 것을 기리기 위해서 학교 앞에 뭔가 표시를 해두고 싶었는데, 그 것이 바로 ‘장승’인 것이다. 이번에 신목을 점하기 위해서 대관령에 올라가는 길에 장승으로 쓸 나무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던 나는 싸구려 카메라를 들고 따라 올라갔다. ‘무속’이라는 것은 초현상 연구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접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다 못해 작두를 타는 장면만이라도 사진 찍어가면 충분히 소득이 있는 것이지만, 그 날은 그런 것이 없었다. 그저 하루 종일 벌벌벌 떨다가 나무에 끈을 매어두고 단오제 때 가져가겠다는 의식만 치르고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나무 두 그루를 베어왔다. 제주와의 약간의 실랑이가 있긴 했지만,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무속인이 말하는 천벌을 받을 거라는 이야기는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고, 그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대충 200 정도로 타협을 보았다.
하지만 너무 싼 거 아니었을까? 나중에 잘린 나무의 단면을 보니까 나이테가… 빼곡하다. 일이십년이 아니라 백년 단위로 살았을 것같은 나무다. 그 것도 수 백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가 저 정도 밖에 자라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어두워서였겠지. 아쉬운 일이다. 키가 크지 못해서 햇빛을 받지 못하고, 햇빛을 받지 못해서 또 키가 크지 못하는 악순환. 그 것을 이 나무는 자그마치…. 히겍! 500 년! 이 나이테의 개수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0 개는 되어 보인다. 무시무시한 걸.
나도 그냥 오기 뭐해서 옆에 있는 자그마한 나무 한 그루를 꺾어 왔다. 이 정도라면 크리스마스 트리로 쓸만하겠지 싶어서…. 그런데 이번에는…
“헉! 천년송이란 말이야 이 게!?”
2000 년 3 월 6 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근처 편의점으로 가서 신문을 먼저 열어보았다. 역시나, 아무래도 정말로 살인마가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또 한 명의 희생자라고 한다. 그 것도 강릉 대학교 후문의 원룸촌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란다. 이 쯤되면 무시못할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죽은 사람들 사이에 연관성이라고는 보이지도 않는다. 전의 것은 여자, 이번 것은 남자. 사인은 출혈 과다라고 했지만, 역시 핏자국은 거의 없다 싶을 정도인 모양이다. 모래 위로 코피 몇 방울 떨어진 정도의 스케일이라서 발로 차면 쉽게 지워지지만 누구도 무서워서 다가가지 않은 모양이다. 신문을 들고서 대충 사람들이 웅성 거리는 곳으로 가보니 역시 사건 현장이 나왔다.
경찰들은 나와 있지 않았다. 이미 이른 아침에 폴리스 라인을 쳤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재미없네. 싸구려 사진기로 사진을 한 장 찍어 뒀다. 바닥의 핏자국 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목격자 보호 차원이었을까? 이번에는 목격자같은 언급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걸로 확실해진 것이다. 이 살인마. 쉽게 멈추는 녀석이 아니다.
그럼 오늘 먼저 할 일은…. 첫 사건의 목격자 이름이 장석남이라고 했나? 국문과 신입생이구나. 무시무시한 것은 저런 이름으로 성별 D라는 것이…. 일단은 국문학 개론 강의를 듣는 듯하니 오늘 오후에는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군.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 이후로 하고, 지금 당장에는…. 구내 식당에서 아침이나 먹어야겠다.
조금 쑥스러운 일이다. 아침 구내 식당의 1 등이라는 것은, 8 시 반부터 문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처량할 정도지, ‘거지’ 작년 말에 들었던 그 말이 매번 이 상황에서 떠올라 버리는 것은 이제는 생활이 되어버렸다. 풍족하지 못한 생활 같은 거 아무리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그대로 가끔씩은 국밥이 아닌 것을 먹고 싶을 때가 생긴다.
대충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학교 앞을 돌아다니는 길에 학생 신문사에서 이번에 조사한 내용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역시 인문 대학 앞의 장승에 대한 이야기였다. 교내 신문사에서 살인 사건 같은 것을 다룰 정도로 심장이 크다고 생각되지 않는데다가 정기적으로 나오는 신문이기에 이번 사건은 다뤄봐야 다음 호에 포함시키겠지. 이번의 주제는 장승 소실 사건인 모양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잠정적으로 C.C.C의 짓이라고 결론 내려진 일이지만, 신문사에서는 그런 억측을 함부로 실을 수 없었는지 범인에 대한 내용보다는 그 장승의 내력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다.
=장승의 숨겨진 내력=
이라는 헤드라인에서 이 장승이 대관령 부근의 신목림에서 베어온 것이며, 무려 200 만원의 비용을 들였다는 것, 그리고 그 예산을 인문대 예산에서 사용한 것이라는 내용으로 오히려 교수측을 당혹케 할만한 내용이었다. 그 것에 분노한 학생들이 교수진에 대한 불만으로 이런 일을 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내용도 살짝 어필해 놓고 있었다.
그렇지 일반 학생들을 분노케 하는 방법으로는 종교라든지 무속같은 저주성 이야기보다는 이렇게 검은 비리의 세계 그리고 자신과 맞닿아 있는 ‘돈’의 이야기가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마도 그 것은 제대로 적중이려나? 아니면 여전히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학교 신문의 운명이려나? 나는 후자 쪽에 올인 하겠다. 그래도 일단 기자 녀석을 좀 볼까? 에에… 이소룡…… 이소룡? 흐윽! 혹시 이 녀석!!!
=학생회관 4 층 초현상 연구회=
“너 신문사였냐?”
“아니 그냥 독자 투고식이었는데. 왜?”
“아니 그 내용은 내가 너한테 해준 이야기잖아! 왜 남의 이야기를 기사화 시키냔 말이야.”
“그래서 니가 한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거야?”
“그 건 아니지만….”
“사람들에게는 알권리라는 게 있다고 봐. 정보라는 것은 독점 되면 그 것은 정보가 아니게 된단 말이야. 정보가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 것이 공유되는 순간이야. 즉 공유되지 못하는 정보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거지. 팔지 못하는 다이아몬드 따위는 그냥 돌맹이와 같은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뭔가 묘하게 빗나가 있다. 팔지 못하는 다이아몬드는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인데다가. 정보를 돈 한푼 못 받고 팔아버린 내 입장은 뭐가 되는 거냐?
“게다가 네 이야기를 듣고 내가 나름대로 조사해서 작성한 기사니까 신뢰도에는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해.”
“너 그런 것도 일일이 조사하고 다닌 거냐? 인터뷰 같은 것도 한거야?”
“물론 당사자들은 인터뷰인지도 모르고 잘도 떠들어댔겠지.”
그리고 그 떠들어댄 인물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치잇. 뭔가 사건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있어?”
“아니. 생각해보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 아침에도 또 발견되었대.”
“아, 그 건 알고 있어. 아침 신문에 나왔더라고.”
“오늘 밤에 화장 시킬거라고 하더라. 한국사람들은 보통 3 일 장을 지내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약간 수상해 보이기도 하는 군. 역시 3 일 장을 지내는 것이 보통이긴 하다. 하지만 간혹 요절한 사람에 대해서는 아예 이 세상에 없던 사람으로 치는 듯 묘도 만들지 않고, 하루만에 화장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묘를 만들어 봐야 돌봐줄 후손이 없다 이 거겠지. 유족들과 사자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그렇게 하는 쪽이 ‘편리하다’라는 거다. 자기보다 먼저 죽은 자식의 묘를 벌초하는 일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쉬운 일이 아니겠지.
“그런데 왜 오늘 밤이래?”
“되도록 빨리 화장시키고 싶었나봐. 현행법 상으로는 사망 후 24 시간 내에는 화장시킬 수 없대. 사고로 되살아나거나, 범죄 은닉의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러면 더 의심스럽잖아. 마치 되살아나길 원치 않거나 범죄를 은닉시키려는 것같은…. 제길 유족들을 의심해서 어쩌자는건지.”
“응. 오늘 밤에는 거길 가볼 생각인데. 어때 같이 갈거야?”
“칫, 남 죽은 곳에 가서 뭐하라는 거야? 기분 나쁘게 납골당 따위….”
“아아! 그럼 여자 애 혼자서 납골당 따위로 가라는 거야?”
“…… 어째서 네가 여자 ‘애’냐?”
“그럼 내가 ‘남자’ 애야?”
“안 가면 되는 거 아니야?”
“됐네요! 나 혼자서 갈테니까 넌 동아리에 죽치고 있으셔!”
샤오륭은 뭔가에 삐진 듯 동아리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긴… 조금 같이 있어줄 걸 그랬나? 그래도 여자애가 혼자서 가기 무서우니까 나한테 도움의 손길을 뻗은 거 아니겠어? 제기랄, 이런 생각을 진작에 하지 못한 이유가 뭐냐?
일단은 국문학 개론 강의 시간이니까. 나도 나가봐야지.
강의를 듣기 위해서 강의실로 들어갔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맨 뒷자리에 앉아서 수면 모드로 들어갈까 싶었지만 곧 교수가 들어오고 출석을 부르는 통에 눈을 부릅 뜨고 대기하였다. 출석을 부를 때마다 손을 들면서 ‘네’ 소리를 내면서 인원 체크를 한다. 국문과는 인문 대학 중에서도 제 1 과. 학번이 원체 빠르기 때문에 장석남이라는 이름은 금새 나왔다. 그리고 손을 드는 순간에 어떤 녀석인지 체크 해두었다.
세상에나. 사람은 이름따라가는 모양이다. 장석남이라는 이름에서 대충 남자겠거니 생각한 ‘여자’는 실로 장군감이었다. 이러니 쓰러진 여자를 발견한 남자라고 소문이 난 걸까나? 아니지 남자라는 이야기는 없지만 보통 학생이라고 하면 남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대로 수업이 끝나기만 기다리면 된다.
뭔가 꿈을 꾸었다. 장승이 되어버리는 꿈이었다. 그래 멋대로 장승이 되어있기는 했는데. 원체 움직일 수 없으니 좀이 쑤신다. 그렇지만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장승이니까. 무생물이니까. 운동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성을 가지고 무생물로 살아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다. 바로 등이 가려워도 긁지 못하고 오줌이 마려워도 싸지 못한다. 애초에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있다는 것은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래 나는 살아있다. 그래서 주위를 인식하고 있다. 무생물이라기보다는 비동물 즉 식물에 가깝다. 뭐 애초에 나무라는 것이 식물이긴 하지만, 문제는 가공된 상태로도 살아있는 것이다. 몸이 잘리고, 목피가 벗겨지고 깎여 조각되어도 나는 여전히 의사를 가지고 있다. 생명력이 질긴 것도 이 정도면 저주다. 생명력이 질기다라. 그러고보니 장승은 수백년된 신목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죽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누군가가 톱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확실한 적대감이 느껴진다. 나를 해치려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톱이 내 몸에 닿는 순간 싸늘한 공포심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내 몸을 통으로 썰고 있다. 부갹 부갹 엉성한 톱질의 소리를 내면서 내 몸이 깎여나간다. 톱밥이 되어 날리는 피부,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고통, 당연하지! 이 것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인 것이다. 몸이 절단되어간다. 아프다. 그리고 고통과 함께 동반하는 분노는 이 녀석들을 죽이고 싶을 정도다. 아니 순수히 살인 충동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녀석! 나를 해치는 녀석! 대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저항하라고 의식이 소리치지만 몸은 일절 움직이지 못한다. 눈물이 난다. 피 대신 눈물이 난다. 그 것도 눈물이 눈에서 나지 않고 가슴 속, 이성의 깊은 곳에서 나온다.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라는 것이 너무나도 한탄스러워서 눈물이 흐른다.
=우지끈!=
“학!”
악몽을 꾼 덕분에 강의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고개를 벌떡 들어서 깨어나버렸다.
“무서웠다.”
하지만…. 왜인지 내 주위로 시선이 모이는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조금 요란하긴 했지.
“자네는 잠꼬대가 요란하군. 수업에 방해 되겠어.”
하아…. 이런 이 과목 점수 잘받기는 틀렸군. 눈도장 찍혀버렸다. 나쁜 의미로….
강의가 끝난 후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틈새에 끼어서 장석남이라는 이름의 장군 아니 여학생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나가는 길에 풍채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곳하게 걸어가는 모습에 뭔가 귀여울지도 라는 생각을 가졌다.
“저기, 이봐. 너 이름이 장석남 맞지?”
뒤에서 따라가면서 그 몸 좋은 여학생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다보았다. 뒷모습 만이라면 확실히 귀여웠겠지만, 역시 얼굴에서 풍겨져 나오는 장군의 모습이 압박스럽다. 약간은 뚱뚱한 편이긴 하지만 그런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른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살찐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저 짙은 눈썹은 여자 아이에게는 조금 아깝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네 그런데요.”
“아, 다행이다. 궁금한게 있어서 말이야.”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이야기 해줄래?”
“이야기요? 혹시 그 건이라면 경찰에 이미….”
이 아이, 내가 경찰인 줄 알고 있다. 벌써 몇 번이고 경찰들에게 시달렸겠지.
“미안. 난 그러니까…”
그냥 미스테리 연구회라고 말해버리면 자신이 흥밋거리로 전락해 버렸다고 생각하겠지.
“… 그 아이의 부모가 고용한 탐정이야.”
“그 아이라면, 미연 …씨 말인가요?”
음 미연이라는 이름이었나? 그 희생자.
“응. 미연이. 뭔가 수상한 점이 많아서 말이야. 경찰들이 기자들에게 흘려준 내용이 어설픈지 아니면 기자들 내부에서 거짓말을 흘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의심가는 점들이 있어서 말이야.”
“…… 네. 그 건 그래요.”
이 아이 뭔가 알고 있다!
“그래서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이야기 해주지 않을래?”
“그 여자… 저주 받은 거예요.”
저주? 얼씨구. 이 거 그야 말로 미스테리 물이 되어버렸네. 현장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건가? 뭔가 더 깊은 사연이 나올 것같다.
“잘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 사건으로 확실해졌어요. 신목을 자른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거라고요!”
“에엣? 신목을 자른 사람?”
“그러니까 전에 장승 세우기 위해서 나무를 잘라간 학 생 들 말이에요!”
수 백년 묵은 나무를… 대관령 산신이 점지한 한 그루 이 외의 나무를 장승을 세우기 위해서 잘라갔다. 그 것이 저주의 대상이 되어버린단 말인가? 사람이 죽을 정도로? 그렇다면 그 건 토속신이라기보다는 악신에 가까운 게 아닌가? 정말 싫은 느낌이다. 나도 그럼 그 리스트에 끼어 있다는 거잖아.
그 소리에 뭔가 해머로 맞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대신 내 전화 번호를 적어 줘서 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연락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자리를 나섰다. 그렇다면 다음에 가야할 곳이 정해져 버렸네. 일반적 사고라면 별로 필요 없는 곳이지만 나는 엄연한 초현상 연구회의 회장, 신목에 관한 비리에 관심이 생겨버렸다.
이대로 동아리 방에서 죽치고 있을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조금 변해버렸다. 뭔가 설득력은 없는 이야기이지만 이대로라면 뒷맛이 그다지 개운치 않다. 신목을 베러 간 사람이 둘이 죽어버렸다.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보였지만, 간신히 잡은 실마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리스트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보호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이 것도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 연관성이라고는 하지만 이제 막 두명 째이다. 우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은 육감에서 시작된다고… 내가 아는 과학자가 말했다.
1996 년 9 월
강릉 정동진 부근에서 괴잠수함이 발견되었다. 남북 사이의 이념 대립이 있는 있는 국가. 한 쪽에서 다른 한쪽에 간첩을 파견한 일이었고, 그 것이 발견되어 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성공했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세간을 뒤집어 엎는 일이 생겼거나. 또 한가지로는 평소와 같이 아무 것도 모르고 밀정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간에 밝혀지길 그들은 무장간첩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은 순순히 자수하였으나, 나머지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단지 ‘폭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있었다고 하였고 그 걸로 해결하는 듯 하였으나, 실제로는 한 명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언론보도였고, 그 것은 은근슬쩍 묻혀지나가며,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은 세월 속에서 잊혀져버렸다.
2000 년 3 월 6 일 오후 정동진
제기랄, 대관령에 신목 베러 갔던 멤버를 이끈 교수는 다름 아닌 우리 학교 철학과의 오조림 교수였다. 딴에는 무속에 관심이 있어뵈는 도사 풍이 나는 교수라고 생각했지만, 그날 제주를 매수할 정도로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역시 학자라는 부류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 교수를 만나서 일단 이야기나 나눠볼까 했는데. 정동진 쪽으로 출장 나갔다는 소리를 들어서 교수에게 전화를 해서 간신히 면담을 허락 받았다. 장소라고는 정동진 근처의 선크루즈 호텔의 커피샾이라는데. 제기랄. 버스를 타고 한시간 가까이 들어가버렸다.
기껏 도착해서 커피 샾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교수는 보이지도 않고, 그냥 물 먹은 거 아니야? 하긴 교수라는 족속들은 거들먹거릴줄만 알았지 실속은 없다니까. 자신도 뭔가 알아채고 잠수 타버린 거 아니야? 안그래도 정동진에는 무장 공비 침투 당시 사용된 잠수함을 꺼내 놔서 관광 상품화 시켜버렸다. 그 걸 타고 도망치는 거… 확실히 바보같다.
“거 참 바보같은 교수로군.”
팔천원이나 하는 커피를 시켜놓고 바람을 맞히게 하다니. 정말로 마음에 안든다. 호텔의 커피샾은 이래서 싫다니까. 양심이 없다. 원두 커피도 아닌 인스턴트 커피를…
“바보같아서 미안하네.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갑자기 뒤통수가 따가워져서 돌아봤더니 오조림 교수다. 이 교수와는 안면이 조금있다. 아니 있을 수 밖에. 우리 동아리의 지도 교수이다. 물론 이름뿐인 지도 교수이긴 하지만 나름대로는 미스테리 분야에 관심이 있는 반쪼가리 무속인이다.
“어떤 여학생을 꼬셔서 이 곳에까지 놀러 오신건가요?”
“하하하 말이 심하네. 꼬시다니. 인연이 닿는다면 가능하겠지.”
“말도 안돼.”
이 사람 별로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는다. 여학생들을 꼬드겨서 사귄다고 하지만 뭐 다 큰 어른들끼리 그러는 일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싫어하면서도 왜 그렇게 넘어가는가 하면, 결국은 좋아하는 편이라는 거 아닌가? 능글맞고 멋지다기보다는 작고 둥글한게 귀엽다 쪽에 가까운 이 사람은 사실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한 제비라기에는 조금 못하니 작업남 정도로 생각해면 되는 것이다. 손금을 봐준다느니 관상을 봐준다느니 하는 고전적인 수법을 사용하는 듯 하다. 학교에서 주역의 이해라는 과목을 가르칠 만큼 도사 풍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아까 말했듯이 어디까지나 흉내이며, 학자일 뿐이다. 진짜는 되지 못한다.
“오조림 교수님 혹시 전에 대관령에 장승 목재 구하러 갔을 때 기억나세요?”
“아, 그렇지. 그 때 너도 갔잖아.”
“네, 기억력 좋으시네요. 저는 한 구석에서 알짱거린 거 밖에 없는데.”
“그렇지 장승목도 들어주지 않고 웬 조그마한 나무 한 그루를 독단적으로 들고 왔지. 오히려 그렇게 비협조적이면 눈에 더 뜨인다고.”
“그런가? 하지만 그 때 참석한 학생들 다 기억하시죠?”
“다 기억하냐고? 지금에 와서 물어보면 자신은 없지만 웬만큼은 다들 아는 친구들이었으니까.”
“리스트, 구할 수 있을까요?”
“……. 무슨 일인데?”
이제야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것일까? 자신이 조사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위험한 걸. 하지만 교수는 교수, 머리를 굴려봐야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진실을 조금 흘려주는 쪽이 현명하다. 물론 조개처럼 입을 다물만한 내용은 꺼내지 않는 것이 좋겠지.
“전에 신목을 자르러 간 친구들이 몇몇 사고를 당하고 있습니다. 불길한 일이 생겨버리니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말이죠.”
“설마, 뭔가 천벌이 내릴 거라는 게 진짜로 되고 있다는 거냐? 그런 바보같은….”
“인연이라는 거죠. 그 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되지 않겠지만 그로 인해서 피해가 돌아오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에요.”
안 믿고 있군. 조금 강하게 나가야 할 것같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고라는 녀석은 목숨과 관계되는 일이에요. 두 명이 죽었어요. 미연이랑… 창욱이가 죽었다고요.”
오늘 아침 신문 내용을 떠올리느라 약간 말이 버벅거렸다. 분명히 창욱이라는 이름이었지
“설마, 후문에서 죽었다는 애들이 걔들이었단 말이야?”
오 교수는 약간 충격을 받은 듯 싶었다. 하긴 내게는 타인이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믿는 제자들만 추려서 데려간 것이었겠지. 아는 사람의 죽음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다.
“네. 더 이상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교수님에게 뭔가 추궁할 생각은 없으니 일단 리스트만이라도 적어주세요. 나름대로 대안을 세워야 합니다.”
“리스트를 적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보다 정희재 씨를 만나봐야 겠군.”
“정희재 씨요?”
“단오제의 제주인데… 아니야. 넌 알 건 없어.”
정희재라고, 기억해둬야겠군. 오교수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더니 급한대로 계산서의 뒷면에 그 날 대관령에 올라간 학생들의 리스트를 주욱 적어서 내게 넘겨 주었다.
“나도 나름대로 알아볼테니까. 몸조심 해.”
“혹시 교수님, 뭔가 짚히시는 건 없습니까?”
“글세, 무속인들이 부적을 사주지 않았다고 해서 애궂은 화풀이를 하는 경우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럼 교수 님도 몸조심 하십시오. 시내로 가실 거라면 좀 태워 주시겠습니까?”
버스로는 한시간 거리였으니까. 차를 얻어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 당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허둥지둥 다시 호텔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바람둥이 새끼. 언젠가는 저 것 때문에 망하게 될 거야.”
그 것이 솔직한 나의 감상이었다. 젊은 여자만 쫒다가는 지금보다 더 늙어서는 주책이 되게 되어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전화가 왔다. 학생폰이라고 불리는 별 기능 없는 휴대폰이 울리면서 천공의 성 라퓨타 음악이 퍼져나왔다. 취향이 이런 모양이라는 것은 조금 창피한 일이니까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네, 동해 전화기입니다.”
“아… 저 석남이라고 하는데요.”
“아. 석남이구나. 뭔가 이야기 해줄 거 있어?”
“그러니까. 깜빡하고 말씀 안드렸는데. 조금 바보같이 들릴까봐….”
“바보같이 들린다고?”
“그러니까… 제가 저주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 다음에 석남이의 음성으로 들은 내용은 한순간 내 머리를 ‘땅’하고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이 건… 완전히 특종이잖아. 이 것과 관련된 사진을 한 장만이라도 찍게 된다면, 나의 자료가 회의주의자의 사전에 실리는 것은 물론, 거의 모든 미스테리 프로그램에서 나의 자료를 예시물로 내걸 것이 틀림없다. 카메라 결함에 의한 스모크 형의 심령 사진 따위에 비할 것이 아니다. 누가 생각해도 유치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대박인 것이다!
“알았어. 고마워.”
하지만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단지 그런 대박 기분만은 아니었다. 잘못하면, 샤오륭이 위험할 수도 있다. 그 건 안되지! 지금 시간이 오후 4 시…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있다. 제발 시간에 닿았으면 좋겠는데….
1999 년 12 월 24 일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 샤오륭이 빌려준 메이드 인 차이나 CD 플레이어로 사카모토 류이치를 들으면서 솔직한 이야기로 울고 있었다.
세상에 십만원짜리 자취방이 어디있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약간의 설명을 하려한다면, 십만원짜리 자취방은 구조가 아주 단순하다. 누울자리, 그리고 개수대… 끝이다. 욕심을 부린다면 라꾸라꾸 침대나 책상을 들여놓을 수도 있다. 화장실이나 샤워시설 훗… 공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과금은 주인집에서 부담해주니 안심.
어쨌든 그런 썰렁한 곳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아무런 이벤트 없이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울 지경이다. 학교에 가서 밥 먹을 걸 그랬나. 혼자서 라면 죽이는 것은 정말로 죽을 맛이다.
회의주의자의 사전에 의하면 산타 클로스, 예상외로 자주 발견되고 있다.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있던데, 믿고 싶은 것만 잔뜩 믿으려한다니까. 확실히 말해두지 이 세상에 산타는 없어!
뭔가 한순간의 부정으로 환각이 보여졌다. 이태원의 가장 진귀한 거리에 존재하는 꿈을 파는 가게라든지….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역시나 인 거야?”
그 때 뜻 밖의 방문객이 와버린 것이다. 아니 올거라고 예상하지 않긴 했지만 온다면 역시 한사람 뿐인 사람이었다. 타지에서 만난 유일한 친구인 샤오륭이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당당하게 쳐들어 와서 한다는 소리가 ‘한심하긴’ 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집에서 지낼 거야? 친구들이랑 모여서 떠들썩하게 지내거나 같이 다닐 여자같은 거 없는 거야?”
“있으면 이러고 있겠냐?”
그러면서 방금전까지 꼴사납게 혼자라고 멋대로 울고 있었던 눈물을 훔쳐내자 그 꼬락서니를 본 샤오륭은 한심하다는 듯한 한숨을 에이구 하고 내쉬었다.
“너 우냐?”
“싸나이가 눈물을 흘리면 모른 척 해주는게 매너 아니야?”
“싸나이가 울긴 왜 울어! 바보 녀석! 어쩔 수 없지, 자 나가자!”
그러면서 샤오륭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멍청한 나는 일단 일어서긴 했는데…. 여기까지 오느라 완전무장이 되어있는 샤오륭과 반대로 며칠 째 갈아입지 못한 옷이 너무나도 꼬질꼬질해서…
“옷 갈아입을 게, 먼저 나가있어.”
대충 그렇게 먼저 쫒아내버렸다.
결국 그날 밤은 어디 목적지도 없이 샤오륭과 시내를 방황하다가 오락실에 들러서 총 몇 번 쏘고, 심야 영화관에서 결국은 보고 말았다…. 성룡 영화…. 러시아워 2….
그리고 추위를 감수하면서 나선 크리스마스의 밤바다… 경포대에 이르자 좌우로 야심한 데이트에 열을 올리고 있는 커플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하는 산책이라니…
“헤에, 커플들이 많네.”
“보지마, 눈 썩어.”
샤오륭의 말에 나는 왜 그렇게 무뚝뚝하게 반응해버렸을까? 아마도 그 때까지만 해도 샤오륭을 친구 이상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려나?
“그런데 말이야. 동해는 왜 친구가 없는 거야? 나말고는 마땅히 이야기 하는 사람도 없지?”
“친구라면 있어. 영혼을 나눠도 좋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이 한 세 명정도?”
“그래? 그럼 함께 다니지 그래? 이런 날에도 좀 불러모으고 말이야.”
“하지만 그 녀석들은 고향에 있는 걸. 외지 생활이라는 게 다 그런 거잖아. 간혹 그런 느낌이 들어. 이 곳에서 사귀는 인연들은 길어봐야 오륙년. 그냥 지나치는 인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다지 영혼을 나눌만한 사람, 인연이 될만한 사람은 없다. 라고.”
“글세, 하지만 네가 말하는 영혼을 나눌만한 친구들도 말이야. 니 나이를 생각하면 십년도 채 안되는 관계일 거 아니야? 과거의 친구가 좋아서 현재의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한다는 것은 왜인지 손해 같아.”
“웬 참견이셔?”
“바보야! 너는 말이지. 타지에서 살고 있는 것이겠지만, 나는 타국에서 살고 있는 거라고! 니가 그렇게 사람의 인연을 스쳐지나가는 것이라고 말해버리면, 나는 어쩌란 말이야! 나도 친구가 필요하단 말이야!”
샤오륭이 화를 냈다. 정말로 자신의 신세타령인지, 아니면 나의 한심함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몰라도 그녀는 내게 노골적으로 성을 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도…
“친구… 있잖아.”
“응?”
“그런 성격이 이상한 내가 너랑 상대해주고 있잖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왜인지 너라면 영혼을 나눠달라고 해도 나눠줄 수 있을 것같으니까.”
“…………. 뭐 먹고 싶은 거야?”
“응.”
샤오륭은 뭔가 사줄 것같이 말하더니 한동안 말이 없이 그렇게 멍하니 서있었다.
2000 년 3 월 6 일 오후 6 시
빠듯한 시간이었다. 동지 이후로 해 지는 시간이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겨울이다. 입춘이야 지났지만 날씨는 그다지 인정하고 있지 않을 걸. 해가 빠듯하게 산에 걸쳐있는 것이 이제 슬슬 낮과 밤이 바뀌는 타이밍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이 동네는 해가 산 위로 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좋다. 하지만 저 태양이 우리 편을 들어주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정동진에서 버스를 내린 곳은 신영 극장 앞. 시내 번화가에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국도로 빠져나와 강릉 납골 공원을 향했다. 목적지는 그 곳이었다. 분명 오늘 샤오륭은 화장하는 것을 보러간다고 했다. 이 동네의 화장터라고는 강릉 납골 공원 뿐이다. 도대체 그런 곳에 가서 뭘 보겠다는 건지! 중국인 특유의 감상이라는 거냐! 하지만 위험하다고, 왜인지 불길한 소리를 들어버렸으니까!
납골 공원에 도착하여 택시비를 지불하자 이제 내 지갑은 아슬아슬해져 버렸다. 오늘 돈을 너무 많이 썼군. 이만원 가까이 써버렸으니 갈 때 택시비는 그 녀석에게 지불하라고 할 작정이다! 샤오륭! 어디 있는 거야!
샤오륭을 찾기 위해서 둘러볼 것도 없었다. 커다란 굴뚝이 보이는 것이 저 곳이 ‘화장’을 하는 곳이라고 느껴졌다. 아니 그 보다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영구차 한 대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곡소리가 울리니 누가봐도 초상집 분위기였다. 사람이 하나 갔다는 것이… 제기랄! 사람을 죽이는 놈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많은 사람을 슬프게 하고도 그 인과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한 구석에서 역시 검은 색 정장을 입고서 하얀 꽃을 들고 있는 샤오륭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곳에 모여 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인문 대학에서 마주쳤던 얼굴들이었다. 아마도 이 학생의 동급생들이겠지. 그런 자리라면 샤오륭이 끼어있는 것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내게 삐진 이유도 그 것일지도 모른다. 샤오륭 역시 면식이 있는 친구를 잃었는데. 나는 그런 것을 ‘기분 나쁜 납골당 따위’라고 말해버렸다. 실수 했군. 하지만 이 곳에 있는 것도 실수이다!
일단 입고 있는 옷이 하도 거지꼬라지 같아서 영결식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구석에 서서 샤오륭의 울고 있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 녀석… 정말로 울고 있었다. 아니 이 녀석 뿐만 아니라 이 곳의 모든 여자들과 일부 남자들이 다들 울고 있었다. 제기랄!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로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가족들에게 있어서 가족의 죽음이라는 것은 같이 밥 먹던 상대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뭔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사라져’버려 다시 만날 수 ‘없게’되어 버린다. 지금까지 함께 했던 것이 그냥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마시려고 놔둔 우유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처럼 되어버린다. 그리고 지구상에는 우유가 모두 사라져버려서 세상 사람 모두가 우유라는 것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유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슬퍼지는 것이다. 우유를 마실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그 것이 얼마나 개같은 상황인지! 왜인지 멀리서 보고 있는 나조차도 화가 나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
병으로 죽은 것도 아니고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당한 것이다. 분노의 대상은 멀쩡히 살아서 어딘가를 활보하고 있으며, 이런 짓을 계속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나의 분노는 죽은 사람이 불쌍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사람을 불쌍해하는 샤오륭의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는 사실에 더 가슴이 에려왔다.
“녀석을 울리는 새끼는 죽여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사건, 내 손으로 풀어야 할 일인 듯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장식은 해가 지기 전에 시작되었다. 뭔가 군고구마 굽듯 슬라이드 식 통에 나무 관을 올려 놓고는 시신과 함께 스르륵 밀어 넣자 투명한 유리를 통해서 나무관이 타는 모습이 살짝 보여졌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안에서는 ‘쾅’하고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나무 관이 부서져버렸고, 그 이후로는 그저 시원스럽게 타버려서 굴뚝을 통해 검은 연기가 되어 나갈 뿐이었다.
시체가 타는 시간은 대략 30 분 가량. 처음에는 눈물 바다가 되었지만 점점 냉정함을 되찾아갔다. 가족들 이외의 사람들은 슬슬 눈물을 닦고 있었지만, 마지막에 다 타고 남은 뼈조각이 다시 슬라이드를 타고 나오자 한 때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던 시신이 몇 조각 뼈가 되어 나오자 다시 한번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그 것을 능숙하게 집게로 떼어내고 종이 봉투에 담아서 분쇄기에 집어 넣는 장의사의 모습이 어찌나 얄미워 보이던지…. 가족들이 울며불며 창욱아~ 하고 소리치는 걸 외면하는 모습이… 절대로 장의사는 할 게 못된다고 생각하였다.
식이 끝나자마자 나는 울고 있는 샤오륭에게 다가가서 주유소에서 나눠주는 휴지를 꺼내들고 그 것을 건내 주었다. 한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던 샤오륭은 갑자기 내밀어진 휴지를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고는 코를 핑 풀어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누가 내어 준 것인지 관심이 생겼는지 위를 올려다 보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태연한 척 눈물을 훔쳐 내었다.
“아는 애였어?”
“아니, 난 한국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너 밖에 없는 걸.”
“칫! 그런데 왜 그렇게 우는 거야?”
“바보, 사람이 죽는 것은 누가 죽든지 슬픈 거라고. 그리고 다들 우니까 나도 울고 싶은 건 당연하잖아.”
군중 심리라는 것인가? 학술적인 단어를 사용하면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들리겠지만 군중 심리라는 것은 쉽게 생각하면 ‘정’인 것이다. 남들이 슬퍼하니까 함께 슬퍼해주고 싶은 것이고 남들이 기뻐하니까 함께 기뻐해주고 싶어하는 이웃간의 따뜻한 정을 딱딱하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왔어?”
“응, 함께 가자며? 좀 늦긴 했지만 네가 걱정되어서 말이야.”
“……. 바보.”
“내가 왜?”
“결국 이렇게 따라 올거면서….”
그런가? 하지만 그 건 어디까지나 내가 얼버무리려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고.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일단 시내로 돌아가자. 여기에서의 볼일은 끝났으니까.”
해가 졌을 때. 시체는 한번 일어날 기회를 가지고 있었을텐데… 아마도 이 분위기에 압도 되어서 그대로 재가 되는 것을 선택한 것이겠지. 아마 나라면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울어준 적이 없었을테니까.
결국 시내에 돌아와서 만만한 까페로 들어갔다. 물론 돈은 샤오륭이 내는 걸로 합의를 보고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오늘 하루 조사한 것들에 대해서 샤오륭에게 털어 놓았다. 그리고 샤오륭 역시 일단은 조사를 위해서 납골 공원에 간 것이므로 그녀의 정보도 듣기로 했다.
“오늘 대충 목격자라는 애한테 증언을 약간 들었고, 오조림 교수와도 만났어. 먼저 목격자인 장석남 양에 의하면 이번 두 번의 사건의 피해자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오조림 교수가 필두가 되어서 행동한 장승목 베어오기에 참여한 사람이라는 거야.”
“장승목 베어오기라니. 혹시 그 사람들이 이번 장승을 벤 사람들이야?”
“아니, 그 반대야. 그러니까 장승으로 만들만한 나무를 베어왔다는 뜻이야. 장승을 세운 사람들이지.”
“그래서 오조림 교수 만나봤겠네. 그 사람은 뭐래?”
“글세, 건진 거라고는 이 것 밖에 없어.”
그렇게 말하고 내가 꺼낸 것은 오조림 교수가 리스트를 적어준 계산서였다. 그걸 받아본 샤오륭은 입을 살짝 가렸다.
“어떻게 커피가 팔천원이나 해!”
“그 뒷면이야.”
뒷면에는 대략 십여명의 학생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중 맨 위의 두 사람은 내가 옆에 체크 표시를 해두었다. 그 두 이름은 차미연과 유창욱이었다.
“이 리스트의 맨 아래에, 니 이름도 있네.”
“응, 바로 앞에 두고서도 날 맨 마지막에 적은 걸 보니 내가 어지간히 존재감이 없었나봐.”
생각해보면 그다지 수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아!
“그리고 오조림 교수가 잠깐 언급한 이름이 있는데. 정희재라고…. 아마도 단오제의 제주인 모양이야.”
“정희재라고? 음….”
“뭔가 짚히는 거 있어?”
“그 아저씨, 무속인이지?”
“아무래도 제주니까….”
“……. 오늘 납골당에 찾아온 아저씨 같은 걸, 희재 아저씨라고 불리는 박수무당이 말이야.”
조금은 쇼크인 걸. 의외로 모든 것이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석남이가 말해준 내용 중에, 죽은 여자. 그러니까 그 리스트의 차미연이라는 여자의 출혈은 목쪽이었대. 그리고 목에 뭔가 거칠게 물린 자국같은 것이 있다는 거야. 아주 전형적인… 드라큐라의 짓이라고…. 아마도 흡혈귀를 말하고 싶은 것이었겠지.”
“갑자기 비현실적인 걸.”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신목의 저주가 흡혈귀로 이어지는 느낌. 왜인지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내가 걱정이 되어서 납골 공원으로 달려오셨다?”
“…… 대충 그런 셈이지.”
“하아 조금 기쁘지만, 그러면 아까 날 따라오려 했다는 건 거짓말이네.”
“미안하게 됐어. 그럼 이번에는 네가 이야기 해봐.”
그래도 조사를 위해서 납골당에 갔다는 샤오륭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가 되었다. 그러자 샤오륭에게서 역시 정희재 씨, 즉 단오제의 제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아저씨 평소에도 상복을 입는 듯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났어. 처음에는 제사 상 앞에 앉아서 막 훈계를 하는 거야. 왜 나무를 베어가지고 이렇게 되었냐고, 시체에 대고 따지듯이 호통을 쳐서 주위 사람들이 말리려 했는데 알고보니까 그 남자도 울고 있는 거지 뭐야. 나중에는 죽은 애만 불쌍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버렸나면서 그 사람도 울고불고 난리가 아니었어.”
“나무라… 그럼 그 사람도 신목을 범인으로 점찍고 있다는 이야기네.”
“그 사람 뿐만이 아니야. 거기 참석한 사람들 대다수가 저주 받아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뭐랄까. 장례식장이라는 것이 그런 분위기잖아. 사후 세계라든지 신비라든지 하는 것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같은 슬픔에 잠겨서 그런 것을 오히려 더더욱 단단히 믿게 되는….”
“합리화구나. 그 것이 합리성을 가지지 않으면 자신의 시스템이 붕괴되기에 모순을 진실로 믿게 되는….”
“모순이라기 보다는 비합리의 합리화인 것이지. 그렇다고해서 정말로 이 세계가 합리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위안은 될 거야.”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저주 탓을 하기에는 범인이 너무나도 구체적이야. 병이라든지 사고라든지 했으면 그 누구의 책임도 묻지 못하고 오직 운명만을 탓해야겠지만, 이 것은 타인에 의한 피살이라고.”
“그게 마음에 걸려서 혹시나 싶어서 희재 아저씨를 유심히 살펴봤는데. 그다지… 악인 같아 보이진 않았어. 사람을 죽일 만한 사람은 못돼.”
“그럼 역시 미스테리 쪽인가?”
전형적인 흡혈귀의 목을 문 자국이라….
“그리고 이 거, 몰래 찍어온 사진이야. 화장 되기 직전에 얼굴 한번 보여줄 때 찍어왔어.”
그리고는 샤오륭은 창욱이라는 사람의 시신을 찍어온 모양인지 그 것을 내게 내밀었다. 뭔가 죽은 사람의 모습이라…. 입안에 쌀을 넣어서 입이 약간 불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창백한 입술이라든지…. 그냥 보기만 해도 토할 것같은 느낌이었다. 왜 그런 무시무시한 것을 보면 ‘먹는다’라는 것이 떠올라 버리는 걸까? 이 걸 먹으면 틀림없이 토하겠다라는 생각을 해버렸다.
“여기 목에 보이지? 니가 말한대로 아주 전형적이야. 흡혈귀에게 물린 자국.”
“출혈 과다에 의한 사망, 그리고 흡혈귀에게 물린 자국…. 언론사의 게이트키퍼들에 의해서 필터링 된 것은 그 것인가? 흡혈귀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 위해?”
“하지만 별일이지? 오컬트 잡지 같은 곳에서는 오히려 이런 것이 잡히면 대박 터졌다고 할텐데 말이야.”
“뭐 대충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 게이트키퍼들은 심령현상을 믿지 않는 냉혹한 현실주의자이거나, 아니면 흡혈귀의 존재를 미리부터 알고 있으면서 그 것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지키고 있는 그야말로 게이트키퍼이거나. 하여튼 서둘러 화장하려 한 이유는 이 것이었군.”
흡혈귀에게 물린 사람은 흡혈귀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세간에 알려져 있다. 그 힘은 믿을만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믿었기에… 석남이에게 전화를 받자마자 납골공원으로 튀쳐간 것이었다. 괜히 시체가 일어나서 일을 벌이지 않도록, 아니 그 것을 막을 힘, 잘 생각해보니 나한테는 없었다. 십자가나 마늘, 은탄같은 것은 내게 없다. 그 걸 막지는 못하더라도 샤오륭을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빼내오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행동이었다. 어쩌면 그런 것을 믿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넌 흡혈귀의 소행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현단계에서는 아무 것도 없어. 신목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 겠어. 더 알아낸 건 없어?”
“글세. 그 안에서 대충 들은 이야기인데. 신목림 말이야. 거기 그야 말로 대박인 것같던데.”
“대박?”
“잘은 모르겠지만, 그 근처의 나무들이 거의 수 백년 이상 된 고목들이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크게 자라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겠지. 뭔가 있어. 수백년 묵은 나무이면서도 크게 자라지 못하다니.”
“원래 오래된 소나무들은 그런 거야. 천연기념물인 천년송도 부러질 듯 연약한 몸이잖아.”
“하지만 해송은 크게 크게 그리고 곧게곧게 자라는 거라고.”
그 말은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역시 신목에는 뭔가 있다. 그렇지만 그 것이 살인사건과의 연계는… 그 중간 고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조림 교수와 정희재 씨. 이 둘인가?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일단 연계 가능한 이상 이 쪽으로 알아보는 수 밖에 없다.
약간의 토론을 끝내고 커피샾에서 나오자 하늘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커피 대신 저녁을 얻어먹는 건데…. 구내 식당은 문 닫았겠고, 역시 라면인가?
“동해야, 너 이제 어디로 갈거야?”
“어디긴, 집에 가야지.”
“동아리방은 안 갈거야?”
“동아리방? 그러고보니 볼일이 있었던 것같기도 하네.”
수줍어 하긴, 혼자가기 무서우면 무섭다고 하지. 일단은 그렇게 해서 목적지는 학교인가?
학교까지 샤오륭과 함께 걸어갔다.
밤길을 함께 걷는다. 밤 거리를 함께 거닌다. 보통의 경우에는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남녀간에 그렇게 같이 어울리는 일은 없겠지. 그 것도 서로 상대방 뿐인 관계도 그렇고, 하지만 나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우리는 서로를 그다지 이성으로 의식하지 않는다. 타국에서 사귄 유일한 친구, 그리고 나 역시 낯가림 심한 주제에 그 친구와 어울리고 있는 친구.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해대는 친구 사이인 것이다.
같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별자리를 맞춘 기억도 있다.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낸 적도 있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면서 항상 함께 해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들의 사이는 이렇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 남자로써의 매력이 없는 것일까? 하지만 반대로 샤오륭은 매력적인 여성이다. 머리도 좋고, 사교성도 있고, 땋은 머리에 중국인이기까지도 하다. 스무드한 쌍거풀은 있는 듯 없는 듯 작다면 작은 눈이지만 렌즈를 끼고 있어서 푸른 눈동자는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것까지다. 그 이상 그녀가 내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만큼, 나 역시 그녀에게 여성으로써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이 녀석과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남녀간에는 연인이 될 뿐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해리가 말했다.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고향에 있는 세 친구만큼이나 소중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바람이 역시 쌀쌀한지라 서로 자기 주머니에 손을 넣고 타박 타박 걸으며 기숙사를 향하는 길을 거쳤다. 서로 아무 말이 없긴 하였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기분, 누구도 무슨 말을 꺼낼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이 한순간 한순간을 느꼈다.
그리고 여자 기숙사에 도착하자 샤오륭은 현관 문으로 들어가면서 내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조심해서 돌아가. 무서운 아저씨가 달려들면 도망치고 나한테 전화해야해.”
“너한테 전화하면 어떻게 해줄 건데?”
“카메라 들고 나갈게.”
아주 악담을 하시는군.
대충 그렇게 샤오륭을 보내고 학생회관을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자취방을 향해야 옳겠지만, 왜인지 자료를 더 뒤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워낙에나 잡동사니 자료들을 수집해 놓은지라 어쩌면 뱀파이어나 신목에 관한 자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혼자 남는 외로운 밤시간을 그 걸로 때울 작정이었다.
그러나 4 층에 올라가는 길에 바닥에 왜인지… 붉은 혈흔이 이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누군가가 코피를 흘린 듯 점 점 찍혀 있는 혈액이 제멋대로 퍼져있었다.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올라가는 것을 그만두려다가 왜인지 봐둬야 하는 일이 생겼을 것같은 느낌에 오히려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그리고 혈흔을 따라가자….
C.C.C…. 교내에서 일종의 기독교 환자들 집단이라고 불리는 이단아들의 집이다. 닫힌 문의 아래로 핏자국이 이어져 있다. 이 건 뭔가… 기분이 좋지 않다. 이 문을 열만한 용기가 나에게 있던가? 아니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지혜였다. 그 지혜가 없었기에 나는 무심코 그 문을 열어버렸고, 봐서는 안되는 것을 보고 말았다.
1998 년 3 월 2 일
신입생이었던 나는 강의가 끝나고 아무 생각없이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생활 이후 첫 대학 생활이라서 아무 것도 적응이 안되어 있던 나에게 웬 이쁜 여학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듯 하더니 왜인지 타겟이 내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 여학생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 조금 잘 생긴 편이었던가? 고등학교를 남학교를 나온지라 도저히 적응이 안되는 상황에서 대학교는 좋은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저기 실례하겠습니다.”
목소리도 곱고 상당히 사근사근한 느낌이었다. 나… 헌팅 당해버린 거야?
“네… 네….”
여성의 말에 나는 약간 긴장해서 엉겹결이라는 느낌을 팍팍 풍기며 대답해버렸다.
“혹시 시간 있으세요?”
“네?”
와우~ 이 거… 딱 영화나 만화에서 본 그 건데… 하지만 도저히 이런 여자와 나의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등하교길에서 자주 본 것도 아니고, 뭐 그렇다면 한눈에 필이 왔다는 건가? 후후후훗
“식사 안 하셨으면 같이 하시겠어요?”
“!!!!!”
너무 대담해. 뭔가 있다는 생각은 이 때부터 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어찌할 줄 몰라했다.
“혹시 말씀 같은 거 배우실 생각 있으세요?”
말씀을 배우란다… 나더러 말씀을 배우란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 것이 나의 CCC와의 첫 만남이었고 그 이후로는 간혹 철학과 강의에서 보는 정도였다.
2000 년 3 월 7 일
자취방에서 깨어나자마자 긴장을 해버렸다. 분명히 어제밤… 나는 무슨 일을 해버렸다. 약간은 데인져러스한 시츄에이션을 크리에이트 해버린 것이다.
방 안에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인지 뭔가 수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여자도 누워있었다. 그렇다면 결국은 ‘혼숙’이 되어버린 거지만 정확히는 나는 구석에 쪼그려 있었고 이 여자는 제대로 이불 위에 누워있었다. 그 것도 약간의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의를 조금 위로 말아 올려서 배부분에 가제솜을 대고 붕대로 감는 정도의 지혈이었고, 오른쪽 어깨 쪽으로도 상처가 있어서 빨간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두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짓을 해버린 거지?”
상황은 이러했다. 어제 밤에 동아리 방에 올라가는 도중 CCC의 앞까지 핏자국이 이어진 것을 보고는 무심결에 문을 열어버렸는데. 웬 교회삘이 나는 여자가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학교 다닐 나이는 지나보이는 여자였는데 회색 수녀복을 입고 있어서 C.C.C의 지도 수녀님인가 싶었지만 옷에 피를 묻히는 수녀같은 것은 모른다. 하지만 수녀치고는 젊은 편인데다가, 이쁘기도 하니까 위화감은 느끼지 않았다. 단지 이 사람을 구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 넘겨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사람… 왜인지 묘한 것에 당해버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 돌아다니는 살인마와 같은 것에게 당했을 것이다. 신목과 흡혈귀라는 것과 동시에 대비되는 것 그 것은 바로 기독교였다. 이 여자… 뭔가 있다.
하지만 이대로 두기도 위험하다. 무엇보다 춥다고 판단한 나는 되는대로 그녀를 들쳐 업고 나와 그나마 보일러 따뜻하게 돌아가는 내 자취방에 들여다 놓고 깨어날 때까지 지켜보려 했는데. 결국은…
아침이 되어서도 끄떡없었던 것이다. 의외로 심하게 다친 걸까? 수녀복이라고 생각했던 옷은 생각 외로 투피스인데다가, 그 안에는 사복을 입고 있었다. 재미있는 상황이지만 그다지 농담이 나올 기색은 아니다. 일단 깨어나면 뭐라고 말해야할지 생각부터 해둬야겠다. 아무래도 자신이 낯선 남자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면 들고 날뛸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종교인 같은 걸, 목에 단정하게 끼워진 칼라(터틀넥)가 뭔가 ‘포인트’라고 외치고 있다.
“강의 들어가야하는데.”
그보다도 일단 아침에 슈퍼마켓에 들러서 신문을 체크 해봐야한다. 그야말로 밤새 안녕 하셨는지 체크해야하는 것이다. 조금 심장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지는 느낌은 그 안녕 해야하는 대상에 나도 포함되어 있고 일단은 나는 오늘을 맞이했다는 느낌으로 생의 향취를 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이 여자를 어떻게든 해야한다. 그냥 나가자니 도망쳐버리면 다시 못 볼 것같기도 하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말이다. 이 사람은 아마도 범인을 본 유일한 목격자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환자인 것같고….
그 건 그렇고 학생도 아니면서 이렇게 상처 입고 학교로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대단한 걸…. 대충 시계를 보자 8 시가 되어간다. 아침 강의는 9 시이고, 식당 문여는 시간은 8 시 반. 지금 가면 딱인데…. 그리고 딱 8 시가 되자 이 여자는 뭔가 무서운 기세로 눈을 번쩍 떠버렸다!
“후앗!”
그러더니 기합을 넣으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옆에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와 시선을 마주쳐버렸다. 이 사람…. 결코 종교인이라든지 가련형이라든지 하는 거 아니다. 틀림없는 육체파다! 이 기합이 내 영혼과 싱크로 되면서 그렇게 데이터를 전하고 있다!
“아야야야야~”
하지만 그 기세는 어느새 아픔을 호소하는 입소리로 변하여 다시 드러누웠다. 아마도 상처가 벌어져버린 걸까나? 출혈이 있을 정도의 상처였으니 당연히 무리지.
“저기….”
나는 그녀에게 슬슬 말을 걸기로 시작하였다.
“아? 여긴 어디?”
아무래도 말하는 순서를 조금 조정을 해서 흥분하지 않게 해야겠다.
“당신이 다친 채로 학교에 쓰러져 있길래 일단 따뜻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여긴 누추하긴 하지만 저희 집입니다.”
처음부터 ‘우리집인데’라고 말했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 되어버렸던 것이다.
“아아… 도움을 받아버렸군요. 나도 참 꼴불견이지. 아무리 팔백년된 종이라고 해도 매장자가 당해버리다니….”
“매장자? 팔백년된 종?”
그녀의 입에서 나온 혼잣말 중에서 뭔가 짚히는 두 단어를 꺼내서 되풀이 하자 그녀의 얼굴은 확실히 당황스러워했다.
“…….”
“그 게 무슨 뜻이에요?”
“그 게 무슨 뜻인가 하면… 알면 다치는 내용이에요.”
“교황 직속의 기관으로써 기적 탐사 및 이단 처단을 위해 결속된 비밀 기관으로써 가롯 유다의 이름을 딴 13 과 이외의 십자군 성기사단과 성녀단으로 이루어진 엑소시스트 집단, 표면적으로는 비밀로 부쳐져 있으나 영화 엑소시스트에 의해 표면으로 드러나 버린 그 실재가 의심되는 집단이며, MIB 즉 검은 옷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그 존재를 불확실화 시켜준다. 라는 내용 말인가요?”
자료실에 내가 정리해 놓은 내용이다. 매장기관은 대충 엑소시스트 집단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나 정도의 지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겠지만, 그 실재는 모두가 의심하고 있다. 만약 이 여자가 진짜 엑소시스트라면 나는 누구나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실제로 목격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신 정말 매장기관이에요?”
“아니 그럴 리가….”
“음…… 사람을 거짓말 할 때 동공이 축소한다는 사실 알아요?”
“아! 역시 축소되었나요?”
“거짓말이었군.”
유도심문에 너무 잘 넘어간다. 이 사람 뭔가 숨기는 것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당신…. 원래대로라면 목격자는 모두 제거라고요! 당신도!”
라고 소리치면서 뭔가 허리 춤에 손을 넣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생명의 은인에게 그런 짓은 역시 무리지요.”
포기가 빠른 타입이구나. 왜인지 재미있는 사람같긴 하지만 이런 사람이 매장기관이라니. 이 쪽에서 믿어주지 않을 것같다.
“저기, 저는 김동해라고 합니다. 그 쪽은….”
“아, 그 전에 일단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제 이름은 요한나. 세인트 요한나예요.”
세인트라고? 살아있는 사람이면서 스스로에게 세인트라고 이름을 붙이는 사람은 없다. 아니, 딱 한 명있다고 들었다. 신탁에 의해서 살아생전에 성녀의 운명을 점지 받아 죽기 전에서부터 성녀로써의 칭호를 사용한다는… 성녀단! 마치 그 것은 과거 예수가 번제물로 점지 되어 있던 것처럼, 이들 역시 살아생전 희생을 전제로 생을 이어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설마하니 성녀단의 그 세인트?”
“당신은 아는 게 많군요.”
“아니… 반신반의하면서 주워모은 자료에서 당신의 이름을 봤을 뿐이야. 그런데 당신은 여기에 왜 온 거야?”
“글세 이런 건 역시 일반인에게 공개하기….”
“혹시 흡혈귀? 어제 당신 흡혈귀에게 당한 거지?”
“!! 도대체 당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요한나는 깜짝 놀라서 내게 소리쳤다. 그럴 수밖에 웬만한 자료야 그대로 떠돌아 다닌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이 동네에 흡혈귀가 돌고 있다는 사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석남이와 나, 그리고 샤오륭 정도이다. 그 것도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태. 단지 이 여자의 출현으로 나는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시…. 사실, 그 흡혈귀의 차기 목표가 저일지도 모릅니다.”
“설마요! 이 동네의 흡혈귀는 이미 800 년 전에 제거 되었단 말입니다!”
“그럼 당신을 공격한 흡혈귀는 뭐에요?”
“인간과는 인과를 가지지 않을 흡혈종이에요. 그는… 나무란 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흡혈귀와 신목의 관계가 이어져버렸다.
1231 년 고려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 지금의 강릉)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800 년 전 이야기에요.(그런까 이 건 요한나의 목소리예요.) 몽고군이 잔뜩 힘을 불려서 아시아 대륙을 정복하고 터키에까지 이르렀을 때의 이야기지요. 역사상 가장 커다란 제국을 이룩한 징기스칸의 시대랍니다.
잠깐, 그 전에 한국에 쳐들어 온 것은 징기스칸이 아니라 쿠빌라이 칸 시대 아니야?(그러니까 이 건 동해 목소리랍니다.)
대충 넘어가도록 하세요(그러니까 이 건….)
제가 아는 것은 이 곳에 커다란 전쟁이 있었고, 그 엄청난 군세는 기마병이었다는 것이지요. 고대의 전투는 병법이 발달한 시기라서 훌륭한 무기보다는 훌륭한 진형이 승패를 좌우하던 시기였지요. 하지만 중세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랄까. 몽고의 경우 기마민족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그들은 이동과 생존의 수단으로 말을 키우고 있었지요. 아이들은 자라면서 말 한 필씩 가지게 될 정도였다니까요. 물론 남자에 한해서이지만, 마치 한국의 시골에 집집 마다 소가 있듯이 그들은 집집마다 말이 있었던 거예요. 그에 비해서 타국은 어땠나요? 말은 이권을 가진 상인들이나 키울 수 있었던 귀한 물건이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몽고군은 전쟁의 판도를 ‘기마전’으로 바꿔버린 겁니다. 과거에 쌓아올린 진형이라든지 하는 체계가 전혀 쓸모 없게 된 셈이지요. 기동력이 있는 적은 진형을 너무나도 쉽게 무너뜨리고 압도적으로 상대를 무력화 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하여 몽고 제국은 대제국으로 번성하였고, 그 것은 고려국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문제는 있었습니다. 바로 대관령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험난한 고갯길이었지요.
대관령이라면... 역시 신목들이 잔뜩 있는 곳이잖아.
그 신목이라는 것이 과연 정말로 신목이 되는 건지... 어쨌든 그런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지금은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한 용맹한 기사 아니 장군이 요새를 짓고 농성을 벌이고 있었답니다. 대제국의 군사와 마주한 이름도 없는 장군이라니, 누가봐도 오래 가지 못할 것만 같았지요. 하지만 갔답니다. 아주 오래 갔답니다. 장승의 힘이었지요. 어두운 곳에 장승을 여러 개 세워 놓고 밤이면 풀피리를 울려서 적국의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고, 낮에는 숲 속으로 적들을 유인해서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밤이 되면 아무도 산 속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되게 무서웠겠네요.
나라를 위해서 사력을 다해 싸운 사나이, 하지만 위의 특성은 뭔가 있는 것같지 않아요? 밤에 지치지 않고 낮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밤에는 실력을 발휘한다. 즉 밤의 일족인 것이야. 루마니아의 늑대인간이나 드라큘라라든지, 중국의 강시나 구미호라든지 하는 것처럼, 밤의 일족, 귀신, 유령이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하지요. 그리고 그 것은 살아있는 인간이 신격이 되는 이 나라의 모습으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지요. 그 무명의 장수는 그 순간 뭔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 쉽게 말해서 귀신이 되어버린 겁니다. 지금 알려진 것처럼 이 지역의 장승인 대관령 산신은 통일신라 건설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이나 범일 국사같은 것이 아닌, 이 지역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죽은 이름 없는 영웅인 것입니다. 실제로 단오제에서 범일 국사나 김유신을 기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학술적인 내용일 뿐, 단오제 내에는 마땅히 기리는 신이 없지 않습니까? 단지 추상적으로 대관령 산신이라고 할 뿐, 그 대관령 산신을 누구나 명명백백히 알수 있는 김유신에 빗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고는 고려를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그 장군도 결국은 몽고의 맹공에 쓰러져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신목림을 가지고 있다. 이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어요?
그 무명의 장군은 그토록 애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기를 그러다가 그 시름이 기원이 되어서 결국 그 장군은 신격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그는 어떠한 흡혈귀 한 명과 접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서양 귀신 따위가 어떻게….
흡혈귀는 전 세계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인간의 아종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장군이 만난 흡혈귀는 특별했지요.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업보를 씻으려하는 자였으니까. 바로, 가롯 유다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역사의 어느 곳에나 존재했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가롯 유다는 영생을 저주로 얻었으며, 그 이후 악마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악마는 바로 징기스칸이었지요.
즉, 저는 과거 유다의 흔적을 쫒아다니면서 그가 행한 일들의 뒤처리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피를 나누어 흡혈귀를 만들어 냈고, 그 무명의 장군도 흡혈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과거의 역사. 하지만 현재와 관계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아무리 강력한 흡혈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흡혈귀는 인간을 당해낼 수 없답니다. 인간은 흡혈귀를 죽이는 데에 특화된 방법들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무서운 환상종을 만들어 낼 때마다 그들의 약점을 함께 만듭니다. 용의 경우는 혀를 자른다든지, 금시조의 경우는 털이 하나라도 없으면 힘을 못 쓴다든지, 거대 원숭이는 꼬리를 잡는다든지… 흡혈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대로지요. 마늘, 은, 햇빛, 십자가…. 물론 십자가의 경우는 유다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물건이긴 하였지만, 서양 쪽에서는 거의 모든 흡혈귀들이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장군의 경우는 그런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더 용맹한 장군에게 당한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몽고의 장수가 무명의 장군과 칼부림 끝에 그의 긍지를 꺾고 목을 베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투를 통해서 튀어버린 피가… 이 신목림의 나무들에게 흥건히 젖어 있는 것이지요.
흡혈귀의 피를 마시면 흡혈귀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나무는 흡혈귀의 피를 마셔버렸다.
실제로 세상에는 유사한 케이스가 상당히 많답니다. 저주 받은 나무에 관한 전설들이 그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아무 일 없이 지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불로불사의 흉폭한 뱀파이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2000 년 3 월 7 일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못하고, 단지 관광명소가 되는 경우도 많은 걸요. 대부분은 천연 기념물이 되거나 하지만, 미국의 자이언트 레드우드도 흡혈목이에요. 보통 흡혈목의 경우는 햇빛을 싫어하는 편이라서 크게 못자라지만 데이워커의 피를 받은 것들은 마땅한 흡혈 충동도 없이 햇빛을 받은 채로 불로불사하는 경우지요.”
그러니까…. 흡혈귀 나무란 말이야? 하지만 흡혈귀 나무는 해를 끼치지 못한다면….
“그럼 당신은 누구에게 당한 거야?”
“누구긴요. 그 흡혈목에게 당한 거지요. 당신들이 말하는 신목 말이에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나무와 싸우다가 상처를 입은 여자라니. 애초에 이 여자의 정체부터 다시 의심해봐야겠다. 하지만 이렇게 대충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8 시 반이 되어버렸다.
“아아, 아침식사! 요한나 씨. 당신 갈아입을 옷 있어?”
“아, 겉옷만 벗으면 사복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약간 띨빡한 아가씨는 일어나더니 옷을 훌훌 벗어제꼈다. 그러자 안에 입은 산뜻한 니트와 스커트가 드러났다. 그리고 뭔가 엘라스틴한 듯한 헤어가 좌르륵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 Good"
3 월 7 일 오후
“그러니까 당신 일족은 그 신목을 지키기 위해서 단오제의 제주를 맡으면서 베어질 신목을 골랐다는 거죠?”
샤오륭은 단독으로 정희재 씨의 집을 찾아간 듯 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야기를 몇가지 들었다. 그 나무에 걸려있는 저주하며, 그렇기에 흡혈목이 아닌 나무를 골라서 신목으로 사용하게 한다고…. 워낙에나 산 입구에 근접해 있는지라 이런 식으로 땅을 신성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베어가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는데. 근대 이후로 그 신성성은 미신성이 되어갔고, 새천년에 와서는 민족 문화 어쩌구 한답시고, 결국은 그 신성성을 파괴하고 상징물을 만들려 했다는 것이다. 즉 그 장승은… 흡혈목으로 만들어진 장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잘도 돈을 받고 팔았군요.”
“아무도 굿같은 거 하지 않는다고, 나도 대대로 내려온 이야기라고 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아무래도 내 실수 인 것 같구나.”
임무를 소홀이 한 수호자 일족 덕분에 이렇게 일이 커진 거라고, 하지만 그만 탓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바보 교수가 이 일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그도 그런 것 눈감아 주지 않았을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신목이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거죠?”
“장승이 움직였다고….”
1999 년 9 월
중국 인형 극단이 강릉 대학교 문화원에서 연극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제목은 ‘서유기’ 그렇다. 예전부터 매스컴을 타고 중국 내에서도 투어를 계속하고 있다는 등신대 인형을 이용한 연극, 움직임이 살아있는 사람과 다를바가 없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는데다가 인형의 디자인이 경극과 상당히 흡사하다고 들었다. 상당히 유명한 공연인데, 이번 금강산 항로 개항 이후 중국과의 교류를 넓히기 위해 각종 문화단을 초청한 내용 중에 이 인형극이 끼어있었던 것이다.
“에또 하지만 혼자 보러가긴 좀 그렇고….”
혼자보러 가는 것이 쑥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이런 연극같은 거 하면, 표를 어떻게 끊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왔다. 극장과 다를바 없겠지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막상 혼자서 그런 일을 겪으려니 약간 긴장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표가 두장이었다. 대충 누군가가 보려고 사 놓은 것인데, 술값이 없다면서 나한테 강매를 해버린 셈이었다. 아직 누군가 마땅히 사귀어 놓은 친구도 없어서 곤란해 하고 있는 통에 전부터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여자 아이가 떠올라서 그 녀석을 찾으러 도서관에 달려갔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가는 길에…. 마주쳐버렸다.
“동해야! 중국 인형극단이 왔대! 보러가자!”
그렇다. 결국 아직 낯이 익지 않은 중국인에게 이끌려서 문화원 쪽으로 가게 되었다. 정말로 막무가내였다. 나는 도서관 쪽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여자 애가 끌고 가는 힘에 반항할 만큼 매너없진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지갑을 열고 표를 구입하려 할 때…
“표는 있어. 중극 인형극단에 관심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표 두 장을 꺼냈다.
“역시! 너랑은 마음이 잘 통하는 것같아!”
쓸데없이 밝은 척 하려는 중국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왜 인지 그 것은 이미지 파괴였다. 마치 이 모습이 그녀의 본 모습이겠거니 생각했던 나는…. 그 이후에야 알아버렸다. 이 녀석… 나 이외의 사람들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다는 사실을. 단지 중국에 관심이 있다는 말에 내게만큼은 상대방과 쌓아두었던 벽을 치우고 문 한 쪽을 열어두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연극이 다 끝난 후 역시 관심있게 지켜보던 연극이라서 그런지 인형 움직임이 좋았다. 지방 연극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힘을 쏟아 부었다고 생각하니 대단해 보였다. 역시 지방 연극 답게 관중은 그다지 없었지만 이들은 아주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감동받은 나는 꽃다발을 한아름 사들고 백스테이지로 갔다. 그러자 의외로 가냘프고 아름다운 인형과는 상반되는 근육질의 아저씨들이… 내가 주는 꽃다발을 받고 기분 좋아하고 있었다. 함께 간 샤오륭 덕분에 그들과 이런 저런 간단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그래봐야 연극이 좋았다. 당신들 휼륭하다. 라는 말만 통역해준 것이지만, 왜인지 기억에 남는 대화도 있었던 것같다.
“이 인형들 어떻게 만드는 건가요?”
“인형을 만드는 작업은 매우 신성한 의식이다. 단장이 직접 고른 ‘신목’에 예를 올리고 장인이 조각한다. 이 작업은 매우 신성하므로 장인과 도제만이 참가할 수 있다.”
그 때 알았다. 인형 하나도 쉽게 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형은 사람의 혼이 깃드는 것이므로, ‘신령’이 필요하다는 것도…
2000 년 3 월 9 일
아침에 나오자마자 신문을 펼쳐봤다. 이런 이런, 오늘도 심장의 살 한 꺼풀이 벗겨져 나갔다. 오 교수로부터 받은 리스트에 또 한 줄이 그어졌다. 이 걸로 4 일부터 5 일을 빼고는 매일이로군. 벌써 5 명이다. 리스트의 인물도 벌써 절반이나 줄었다. 최근 이틀간 나는 요한나 씨와 함께 움직이면서 흡혈귀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장승을 처리한 것은 다름아닌…
“제가 했어요.”
라고 요한나 씨가 실토해버렸다. 하지만 그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우상숭배 반대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흡혈목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제거한 것이라고 했다. 그 것도 아주 깨끗하게 ‘정화’ 시켜버렸으니까 뒷탈은 없었을 거라고 했지만, 여전히 살인 사건은 계속 나고 있다. 출혈 과다에 의한 쇼크사. 그러나 그 모습은 목줄기를 물어 뜯겨서 사망하는 것이었고, 출혈 과다라고 해도 혈액이 발견되지 않는, 영락없는 흡혈귀의 짓이었다.
장승을 베어버린 범인은 매장인이고, 흡혈목인 장승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요한나 씨는 흡혈귀에게 습격을 당해버렸다. 그 것이 지금까지의 수사를 미궁으로 빠뜨려 버렸다. 매장기관의 요한나 씨가 당해버렸을 정도라면 상대는 상당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악마라는 것인데…. 그런 거 감당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샤오륭도 나름대로 조사를 계속하고 있지만 그녀의 조사 역시 우리의 내용과 크게 틀리지 않거나, 조합해보면 미궁으로 빠져들고는 했다. 이제는 하루 하루가 피를 말리는 느낌이다. 이 리스트의 맨 아래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이 이름의 리스트가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 너무 무섭다.
처음에는 바보 취급 받을까봐 리스트의 사람들에게 주의 주는 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는 한명 씩 만나봐야 할 것같다. 일단 이 피해자들의 왕두목인 오 교수한테 먼저 가봐야겠다.
1999 년 3 월 3 일
오조림 교수의 결혼식에 철학과 학생들과 국문학과 학생들이 모여서 하객으로써 자리를 빛내 주었다. 나이는 좀 들었지만 원체 작고 둥글둥글한 귀여운 모습이어서 숱한 여학생과 트러블을 빚었던 그도 이제는 마음 잡고 정착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오조림 교수의 결혼식장에서 남학생들은 쾌재를 부르는 반면 여학생들 중에는 간혹…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2000 년 3 월 9 일
“이런 때도 있었나?”
거의 무단침입에 가까웠다. 교수의 연구실 주제에 문도 안 잠그고…. 결혼식 사진을 이렇게 잘도 전시해 놓은 주제에 뭐야 바람이나 피우고. 뭔가 싸늘하군, 여긴 난방도 안하는 모양이야. 어디보자. 이 사람 스케쥴표가 탁자 위에 붙어있네. 응? 이번달 내내 중국 답사잖아. 하지만…. 불과 사흘 전에 만났는데. 어떻게 된거지?
“이게 바로… 출장 핑계대고 놀러가기라는 건가? 생각보다 질이 안좋은 사람이었네 역시 이 걸로 망할 것같은 느낌이야.”
그래서였구나. 전에 과사에 어디있는지 물어보니까 휴대폰 전화 번호만 달랑 가르쳐 준 이유가.
3 월 10 일 AM 2:30 경
요한나 씨와 함께 잠복하고 있었다. 최근의 살인 사건은 모두 강릉대학교 후문 쪽에서 일어났다. 역시 경찰들도 배치되어 있긴 했지만 그럼 우린 경찰이 없는 곳에 배치되면 땡이지 뭐…
“거기 누구냣!”
하지만 왜 경찰들은 이런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느냔 말이야!
결국 그날은 파출소로 끌려가서 보호감호 받게 되었고, 다음날 아침에 또 이름 하나를 지우게 되었다.
3 월 10 일 아침
최근에는 요한나 씨와 거의 붙어 살다시피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도 내가 헛소리를 퍼뜨리지 않도록 지키고 있고, 나 역시 그녀가 어딘가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는 관계였다. 그런 두 사람이 아침 일찍부터 초현상 연구회를 향했다. 할 일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에는 이 곳에서 자료를 뒤져보든지 샤오륭과 합류하여 토의를 하기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하다. 만약 샤오륭과 만나게 된다면 샤오륭에게 요한나 씨를 소개 시켜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동아리방의 문을 열자 역시나 역시나 샤오륭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샤오륭과 마주 앉은 후 의자를 꺼내서 가운뎃 자리에 요한나 씨를 앉히자 샤오륭은 뭔가 궁금한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누구야? 이 그리스 사람?”
…………. 잠깐, 그리스 사람이라고? 이 녀석은 외국인을 보고 구분할 수 있는 건가? 아니 그건 둘째치고 아무리 봐도 동양인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리스 사람이라니!
“안녕하세요. 저는 ….”
“!!!”
이 여자 틀림없이 뭔가 내 입을 봉하기 위해서 함께 다닌다고 했지만 자기 소개할 때 멋대로 ‘세인트 요한나’라고 할 것이다. 같은 미스테리 연구회인 샤오륭도 세인트 요한나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이 사람은 테레사라고 해. 여기 C.C.C의 지도 수녀 님이야.”
하하하… 대충 그러헤 넘기기로 했다. 그러자 요한나 씨는 내 옆을 살짝 꼬집으며 작게 말했다.
“내가 왜 테레사예요!”
작게 말해봐야 다 들리는 건가? 아주 한심하다는 듯이 이 쪽을 쳐다보는 샤오륭의 눈빛이 느껴진다. 하지만 막상 여자의 세례명같은 거 떠오르는 게 없었단 말이야. 최근 돌아가신 테레사 수녀 님밖에… 그보다도 사복을 입고 있는 수녀에게 왜 세례명을 붙일 생각을 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었다. 나 그리스 이름이라고는 소크라테스랑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밖에 모르니까.
“샤오륭, 이 분은 그러니까 종교 쪽이니까 흡혈귀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래.”
“오오 그러셔? 그래서 장승을 베셨나 보네.”
헉! 생각해보니까 샤오륭은 C.C.C에 대해서 적대적이지 않았나? 그녀는 중국에 있었을 때에는 종교 생활을 조금 했는데. 그녀가 한 것은 파룬궁 즉 법륜공이었다. 일종의 포괄적 사이비 도교같은 것인데. 사이비 기독교인 C.C.C와의 관계는 그다지 좋을 것 없었다. 무엇보다도 장승 소실 사태를 전적으로 C.C.C의 짓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멍청한 아가씨는
“앗, 그 걸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바로 대답해버렸다. 그 순간 팔꿈치로 턱을 괴고 있던 샤오륭은 ‘큭’ 소리를 내면서 균형을 잃었다.
“그게 사실이란 말이야?”
“아, 하지만 있잖아. 그 나무는 흡혈귀의 피가 흐르는….”
중간에서 중재를 위해서 상황 설명을 하려하자 샤오륭은 내 말의 허리를 잘랐다.
“알고 있어. 정희재 노사와 이야기를 나눴어. 저주받은 피가 흐른 땅이라 저주받은 나무들이 있다고, 그 곳에서 신목을 고르는 행위는 그 저주받은 나무를 제외한 정상의 나무를 고르는 행위 였다는 거야. 물론 장승을 세우기 위해서 꺾어온 나모는 신목을 고르는 의식을 치르지 않았겠지. 그래서 베었다. 그 거 아니야?”
“네.”
“뭐 이 걸로 일단은 장승 소실 사건의 미스테리는 밝혀졌네.”
“그렇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살인 사건이잖아.”
“흡혈목을 베어서 처리했는데 어째서 살인사건이 계속 일어나느냐 이 거지?”
“응.”
“글세…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니가 참 멋있어 보였는데. 이제 와서는 네가 얼마나 바보 짓을 해버렸는지 알아버렸어.”
“에?”
크리스마스라고? 기억을 조금 더듬자 엄청난 것이 떠올라 버렸다.
“천년송….”
“그렇지. 천년송 따위를 가져올 게 뭐야! 흡혈목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잖아. 개강하기 직전에 이런 건 이제 필요없다면서 네 녀석이 버린 나무는 여전히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다고!”
시기상으로도 딱 맞아 떨어진다. 내가 그 나무를 버린 게 삼일절 날이었으니까. 나는… 어쩌면 가장 천벌을 받을 짓을 한 건…
“어쩌면 가장 천벌을 받을 짓을 한 건 네가 아닐까?”
“설마… 난 그저… 크리스마스를 즐기려고….”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서 흡혈목을 벤 거야?”
생각해보니까 되게 살벌하네.
“그 건 그렇고 저 테레사라는 사람은 어쩌다가 만나게 된거야?”
샤오륭이 그다지 요한나 씨를 반기는 눈치가 아니다. 뭔가 한마디 한마디를 하더라도 톡톡 쏘아 붙이는 것이 왜인지… 화가 난 것같기도 하다.
“아, 이 분은 그 살인마를 본적이 있는 목격자야.”
“뭐라고? 살인마를 본 목격자라고? 그래 그 녀석 어떻게 생겼어요?”
샤오륭은 뭔가 잡았다! 라는 눈치로 요한나 씨에게 얼굴을 들이 밀었다. 하지만 요한나 씨의 얼굴은 약간 어두워지면서
“저도 갑자기 습격을 당한지라….”
“보지 못했다?”
“네.”
“도대체 어디가 목격이라는 거야!”
뭔가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다. 그러고 보니 나도 보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 것같다. 결국 흡혈귀가 아닐 수도 있다. 라는 것인가?
“하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요. 나에게 상처를 입힌 녀석은 나무 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통 통 통 하는…. 그림자 속에서 봤지만, 그 것은 마치…”
나무로 만든 꼭두각시.
1989 년 강릉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라가 조금 안정되기 시작하자 강릉시에서는 마을 축제를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다들 서로 자기 마을에 축제를 만들어서 야시장을 세워서 놀거나 다른 지역의 사람을 관광객으로 유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을 축제라니, 조선 시대에는 당연히 추수 후에 축제가 있거나 모내기 철에 축제를 열거나 했지만, 경제 발전 도중에는 도저히 그런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먹고 마셔도 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올림픽도 개최한 나라이다. 축제를 사랑하는 민족이 되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 강릉에서는 그 축제의 형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 결과 과거 아주 깊은 전통이 있는 축제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 것은 바로 ‘단오제’였다. 일제 시대에 민족 말살 정책으로 중단 되었던 그 축제를 다시 여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사라졌던 문화 유산인 강릉 관노 가면극도 복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관노 가면극에 사용되는 가면… 그 형태가 전래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강릉에는 관노 가면극 패거리가 세 개가 있는데. 과거 어린 시절에 본 것을 바탕으로 복원에 참여했던 노인들 패거리와 강릉 대학교 패거리 그리고 관동 대학교 패거리 이렇게 세 군데가 만들어 졌다.
그리고 그들은 지도 교사에 따라 그 의복의 차이가 나기 시작하였다.
2000 년 3 월 10 일
샤오륭에게서 들을 만한 이야기를 다 듣고나자 샤오륭은 기분이 나쁜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동아리 방을 빠져나갔다. 핑계는 강의가 있어서 가볼래. 였지만 왜인지 톡쏘는 듯한 분위기가 안쓰러웠다.
“동해 씨. 저 사람 화가 나있는 것같아요.”
“글세요.”
“혹시 저 때문이 아닐까요? 여자와 함께 있으니까 괜히 질투 하시는 거라든지….”
“에이 설마, 저 녀석 나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걸요. 정말로 그 것이 아니라면…. 저 사람 왜 저렇게 불안해 하는 거죠? 마치… 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적을 만난 거라고?
“만약 동해 씨 말이 사실이라면 저 여자를 조심하세요. 왜인지 저 사람에게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아요.”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인간과 인연이 이어질 수 없는….”
불길한 소리하고 있어. 하지만 저 녀석은 남을 위해서 울어 줄 줄도 아는 녀석이라고. 그런 위험한 냄새같은 거 날까봐. 아마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저 녀석은 내게 있어서 만큼은 둘도 없는 친구니까.
대충 샤오륭에게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오조림 교수에 대한 이야기인데. 결혼 생활이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오조림 교수는 계속 병원을 다니고 있다고 하는데, 지난 일년 동안 결강도 잦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올해에는 한달간 휴가를 내기까지 했다는데. 정작 그 사람이 강릉에 있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듣고는 놀랐다는 것이다. 예정대로 였다면 그는 중국에 가서 연구 중이어야 했다. 라나?
“뭔가 구려요.”
2000년 3 월 11 일
오늘은 엉뚱한 껍질이 벗겨져버렸다. 리스트에 이름을 지우는 대신…. 이름을 하나 추가 시켰다.
정희재 씨 사망
일이 어떻게 돌아가려는 건지…. 불안감이 커져서 오조림 교수에게 전화를 해보았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불안이 커진다. 정말로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을 당하는 것일까?
상점에서 신문을 하나 꺼내들고 읽고 있자, 주인 아저씨가 노려보고 있다.
2000 년 3 월 11 일 학생회관 2 층 구내 식당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눈 아래에 다크 서클이 생겨버렸다. 이대로는 속도전이다. 남은 기일 동안 내가 녀석을 잡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남은 녀석은 세 녀석. 그리고 그 이름 아래에 내가 있다. 길게 잡아 봐야 나흘. 내 죽음이 4 일밖에 남지 않았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내 곁에 누군가를 두지 않으면 불안하지만 누구를 둬야할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항상 내 곁을 따라다니는 요한나 씨도 부담스럽다. 유일한 목격자라고는 하지만 사실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이 아닌가? 밤 중에 피투성이가 되어서 내게 발견되었다. 흡혈귀 흡혈귀 하지만 그녀는 정작 목격하지도 못했다. 괴상한 이야기나 늘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동해 씨. 얼굴이 안 좋아요.”
“요즘 머리가 안 돌아가서 그래요. 악몽도 꾸고 있어요. 요한나 씨가 옆에 있어줘서 일단은 버티고 있지만 솔직히 무서워 죽겠어요. 어느날 밤 갑자기 요절해버릴까봐.”
“내가 곁에 있는 동안은 안전해요. 저 이래뵈도 매장인이니까 흡혈귀에 대해서는 특화 되어 있어요.”
“하지만 흡혈귀가 아니라면….”
…… 그렇지 이 사람 상처를 입은 채로 발견되었지. 기습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상대가 흡혈귀가 아니라면…. 단지… 살인마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살인마의 살해 동기는? 이 것은 무차별 살인이 아니다. 엄연히 이 리스트에 의해서 한 명 씩 죽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것은 충분히 동기가 있는 살인이다. 신목을 베는 것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그 것이 무슨 의미…
“제기랄. 그 것은 이 녀석들에게 듣는 수 밖에 없잖아.”
남아있는 리스트의 이름을 체크 하였다. 진영재, 김정호, 백종구…. 진작에 만났어야 하는 녀석들이다. 이 녀석들… 지금쯤이면 이 녀석들도 뭔가 낌새를 느끼고 있겠지! 이 녀석들을 만나려면… 국문과인가? 철학과인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뭔가 머리가 오버히트 된 느낌에 기억력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며칠간 밤잠을 설친 결과이다. 처음에 가볍게 시작한 일이. 이 리스트 덕분에 내 심장을 조이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아무 것도 모르고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야 백배 낫다. 나는 살아 남을 거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을 거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는데… 너무 뜨거워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 때 즈음에 해서 구내 식당으로 눈에 익은 중국사람이 들어온다. 샤오륭은 식당 안에서 누군가를 찾듯이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오다가 내 옆의 요한나 씨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여자는 맨날 끼고 다니는 거야?”
“응. 뭔가 보디가드야. 요즘 불안불안 해서.”
그러면서 나는 손에 들린 리스트를 샤오륭 앞에 흔들어 보였다. 이 리스트의 사람들이 모두 죽은 사람이라고 빨간 펜으로 엑스 표시가 되어 있는 걸 보자 샤오륭도 뭔가 안 좋은 표정이 되었다.
“알았어. 나도 열심히 조사하고 있으니까 힘내. 오늘 정희재 노사가 죽었대. 자살이라고 하는데. 유서가 남아있질 않는다는 거야. 목 매달았으니까 자살로 보는 것이 옳지만, 아무래도… 냄새가 나.”
제기랄. 그 건 또 뭐야. 나름대로 추리하기로는 정희재 씨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신성성을 먹고 사는 무속인이 한 복수극이라면 딱 맞아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기랄! 오 교수 역시 정희재 씨를 점찍었는데. 그 사람이 죽어버렸다면, 자살이든 타살이든 일단 범인은 아니라는 거잖아!
“아, 샤오륭. 혹시 진영재, 백종구, 김정호 중에서 아는 이름 있어?”
“다 알고 있는데. 중문학과 학생들이잖아.”
“그래? 걔들 좀 조사 좀 해줄래?”
“알았어. 다음 강의가 종구랑 정호가 나와 같은 거니까 만나서 물어볼게.”
“땡큐. 그럼 나는 영재라는 녀석을 만나봐야겠네.”
“…… 힘내. 그리고 그 옆의 여자랑 너무 붙어 다니지마.”
그러면서 샤오륭은 용건을 남겨주고 사라졌다. 일부로 신경 써주다니. 역시 친구는 저 녀석 뿐이구나.
“하아… 나 미움 받고 있군요.”
“정말… 질투하는 걸까?”
3 월 11 일 오후
중문학과 과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서 영재 있어요? 하고 물어본 다음에 버티기 모드로 들어갔다. 강의에 다 들어갔다면 세시간에 한 번 정도는 과 사무실에 들어오겠지.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있었나? 결국 그 날 오후 6 시가 되도록 진영재는 물론 김정호, 백종구도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 전화가 오기를 그 둘도 강의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절망감에 빠져서 전화를 들고 오조림 교수에게 전화를 날렸다. 제기랄… 여전히 받질 않는다.
나중에 어떻게 리스트에 마지막 남은 3 인의 전화 번호를 알아냈지만, 그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느닷없이 날아온 낭보가…. 중문과 사무실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얘들아! 영재랑 종구가 죽었대!”
정말로 낭보였다. 내가 찾는 세 녀석이 이미 죽어버렸다는 소리를 들어버린 것이었다. 해가 지기도 전의 이야기였다.
3 월 12 일 아침
자취 방에서 일어나자…. 없어졌다. 요한나 씨가 사라져버렸다. 내 보디가드를 해주기로 한 여자가 이렇게 사라져버리다니. 제기랄…. 리스트의 이름은 순식간에 지워져서 이제는 나와 김정호라는 이름만 간신히 남아있다. 아마 내가 살아있는 걸로 봐선… 오늘 신문에는 어떻게 나왔을까?
아침 상점에 나가서 신문을 들어보자… 주인 아저씨가 여전히 노려보고 있다.
어제 사건에 대한 전말이 적혀 있었다.
진영재 (22)가 백종구(22)와 시비가 붙어서 서로 싸우다가 감정이 격해져 칼로 찌르고 이 싸움을 말리려던 김정호(23)가 결국에는 중재 중에 우발적으로 진영재를 과실로 사망케 하여서…
그러니까 이 녀석들도 그 리스트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처럼 혼자가 아닌 이 녀석들은 서로 감정이 갈 때까지 가서 서로를 의심했던 것이겠지. 하지만 이제는….
그 옆 면에는 아주 가관이었다. 결국 그 김정호라는 인물도… 정석으로 죽어있었다. 과다 출혈에 의한 쇼크사로…. 이 걸로 리스트가 순서대로 모두 지워졌다. 이제 남은 것은 내 이름 뿐. 다음 마지막 목표는 나…. 마지막 목표는 나…
제기랄 정신이 어찔해진다. 내 목숨이 24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건가? 이런 사형선고 같으니라고! 그렇다면… 이 사건에 대해서 남은 사람은… 나와 오교수 밖에 없는 거잖아. 그럼 다음 타겟은? 나? 아니면 오교수? 제기랄 일을 제대로 정리해야지! 일단 오 교수와의 접촉은 피해야해. 그 녀석이 저지르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오조림 교수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중문학과 사무실로 가야겠어.
1999 년 12 월 25 일
“크리스마스인데 도대체 아무 것도 없는 거야!”
동아리 방에서 크리스마스를 죽치고 있는 청춘 둘이서 메이드 인 차이나 CD 플레이어를 통해서 사카모토 류이치의 메리 크리스마스를 듣고 있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머리를 쥐어 짜 내봐야 겨울 바다 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청춘 남녀라고 해도 연인이 아닌 이상 뭔가 케익을 자른다든지 하는 이벤트 따위는…
“역시 겨울 바다 밖에 없나?”
“경포대는 질렸어!”
“그럼 정동진 갈래?”
“정동진?”
“응. 거기라면 잠수함도 있으니까.”
“잠수함 타는 거야?”
“아니…. 무장공비 간첩선이었는 걸.”
“뭐야, 크리스마스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럼 옆에 있는 선크루즈에 가든지.”
“선크루즈? 그 건 또 뭐야?”
“응 바닷가 옆에 있는 배 모양의 호텔이야.”
“………… 너 제정신으로 이야기 하는 거냐?”
“응?”
“보통 그런 곳에 있는 호텔이라는 거! ‘러브 호텔’이잖아!”
헉! 나 엄청나게 실례되는 소리를 해버린 걸까!
“하지만 러브호텔도 그 정도라면….”
아니 왜인지 더더욱 수습이 안되고 있다.
2000 년 3 월 12 일 중문학과 사무실
중문과 사무실은 완전히 발칵 뒤집혀 있었다. 오조림 교수의 방은 저질스런 낙서로 더럽혀져 있었고, 앞에는 못으로 나무판자를 박아 놓아서 들어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지?
중문과 사무실에 들어가서 조교에게 대충 물어보았다.
“조교 누나. 저기 왜 저모양이에요?”
“응. 하도 여자들에게 찝적 거려서 마침내 터진 거지. 부인도 있는 아저씨가 왜 저러는지 몰라.”
“그러게요. 하지만 너무 요란한 거 아니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뭔가… 리스트가 있을 정도의 바람둥이였다잖아. 전에 있던 학교의 여학생이 임신한 채로 찾아와서 난동을 부렸대 글세. 그래서 이번에 당했던 여자애들이 동시에 들고 일어나는 거지. 안그래도 이번에 죽은 애 중에 미연이라는 애 있잖아. 걔도 오조림 교수랑…. 내가 무슨 소리하는 거야. 하여튼….”
조교는 뭔가 이야기 하려다가 스스로 자중하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만났을 때도 선크루즈였지….
“올해 초에 사라져버렸기에망정이지 이 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올해 초에 사라졌다고요?”
“설 전에 중국으로 떠나서 4 월 달에 돌아올 예정이래. 그러니까 적어도 4 달 동안은 중국 여자들 밖에 못 꼬시고 있겠지.”
그럼… 이 건 뭐야? 오조림 교수가 국내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나와 샤오륭 뿐이라는 거야? 그렇지. 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그 녀석들은 오조림 교수가 국내에 없다고 생각했으니 서로서로 의심하다가… 그러니까 살해 방법이 틀렸지. 하지만 오조림 교수의 리스트에 내가 추가 된 건 내가 억지로 그를 만났기 때문이잖아. 그 역시 잊었을지도 모르는 것을 내가 기억나게 해준 셈이다. 무엇보다도… 이 리스트를 작성한 사람이 오조림 교수 자신, 그렇기에 자신의 인상에 남는 사람의 순서대로 이 리스트를 작성했을테니, 살해 순서도…. 범인은 그 녀석이라는 거야! 아직 확증은 없지만…. 내가 범인이 아니니까. 녀석이 범인인 거야! 놈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샤오륭이 중문과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동해야 여기 있었구나! 유력한 용의자를 추려냈어. 바로….”
“오조림 교수지?”
“응, 그 리스트의 녀석들…. 다들 오 교수를 협박하고 있던 녀석들이야! 그리고 정희재 씨의 유서도 발견 되었어!”
이 걸로 확실해졌다. 내 승리다. 이제 남은 것은 녀석이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그 녀석을 잡는 것이다.
샤오륭에게 전해 들은 내용에 의하면 오조림 교수의 계좌의 돈이 텅텅 비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녀석들의 입막음으로 수십에서 수백까지 밀어 넣었다는 것, 문제는 그러면 그럴수록 일이 점점 커지고, 게다가 자신이 벌려놓은 일이 워낙에나 많아서… 감당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청소’였는데 그 청소부로 정희재 씨를 선택했던 것이다. 신목림으로 나무 하러 가자는 것은 결국 녀석들을 으슥한 곳으로 꼬드긴 것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간에 마음이 변해버린 정희재 씨는 착수금으로 받은 200 만원을 꿀꺽하고 그대로 돌려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상대가 교수라는 직분을 이용해서 협박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살인 사건이 계속 되면서 오 교수의 복수가 두려워진 나머지 자살을 결심하였고, 자세한 내용을 적어서 은밀한 곳에 숨겨 두었다가 오늘에야 발견되었다는 것이 그 내양이었다. 그런데 오 교수는 지독한 바람둥이여서 그 날에도 사고를 치고 말았는데. 차미연이라는 학생에게 손을 댔다가. 그 학생이 하도 찰거머리같이 붙자…. 최근 어떻게 연락이 닿게 되자 따로 만나서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같다고….
지독한 녀석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퍼즐이 풀린다. 우발적인 교사라면 목에 멍이 남을 만하다. 하지만 출혈 과다는? 그 건 역시 연쇄 살인을 위한 트릭이었을까? 그는 그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중국에 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였던 거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국내에 머물러 있었다는 증거를 내가 가지고 있지!
3 월 6 일 선크루즈 카페의 계산서. 여기에 날짜가 똑똑하게 찍혀 있고, 이 뒷면에는 오조림 교수의 필체가 적혀 있다 이 말씀!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녀석을 파멸로 몰고갈 준비가 다 되어있는 것이다! 내가 죽여야 해. 내가 죽기 전에 죽여야 해!
2000 년 3 월 13 일 밤
사라진 줄 알았던 여성이 강릉 대학교 근처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캄캄해서 아무도 오지 않는 운동장의 가운데였다. 뭔가 넓은 장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곳에 서서 멍하니 기다리고 있자 어느새 어둠 너머에서 시커먼 그림자를 끌고 오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정체는 샤오륭이었다. 뭔가 멍한 듯한 눈빛으로 인간의 빛을 잃은 모습이었다.
“당신을 쫒아 다녔어요.”
“매장기관에서 냄새를 맡았을 줄은 몰랐는 걸. 그래 바오로가 날 찾아오라고 했나?”
“글세요. 그저 흡혈귀 냄새가 나길래 쫒아 와본 것 뿐이에요. 우리는 언제나 그 것만 찾아 다니니까요.”
“…….”
“어째서, 당신은 이 나라에 있는 거죠? 그리고 왜 그 사람 곁에 있었던 거죠? 당신같이 영겁의 세월을 살아갈 사람에게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짧은지 알고 있잖아요. 인간과 친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텐데 어째서….”
“그 건 나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말이야. 내가 외로운 것처럼 그만큼 외로워하는 녀석을 보니까. 왜인지 옛친구가 생각나 버리는 것같아서 말이야. 그렇게 조금만 친하게 대해줘도… 영혼을 나눠주겠다고 말하는 친구가 너무나도 좋아서 말이야. 불행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어차피 이 것도 당신의 업보의 굴레. 당신도 해결하기 위해서 온 것일테니까 책임은 묻지 않겠어요.”
“응, 그래 나도 해결해버렸으니까.”
그러면서 샤오륭은 손에 들린 시커먼 그림자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고는 발로 밟아 버렸다. 그러자 그 그림자는 꿈틀꿈틀 거리더니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교황청으로… 돌아가주세요.”
“아니…. 나는 그 곳에 있을 수 없어. 베드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선생님에게 속죄해야하니까. 속죄의 행을 끊을 수 없어. 그 행이 다시 카르마가 되어서 억겁을 반복한다고 해도, 나는 그 것을 따르는 수 밖에….”
“네. 당신이 이 땅의 사나이를 사랑하여 이 땅에 흡혈귀를 만든 것이 당신의 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것이 다시 반복 된 것입니다. 영원히 고통스러워 하세요. 가롯 유다여.”
매장기관, 성녀단의 총수인 세인트 요한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샤오륭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샤오륭은 혼자 남아서 훌쩍 훌쩍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울어버렸다. 샤오륭을 울린 녀석은… 내가 가만 두지 않기로 했는데 말이다.
2000 년 3 월 12 일 오후 6 시 경
정동진 선크루즈 호텔로 택시를 타고 갔다가 봉변을 당하였다. 경찰들과 함께 오조림 교수를 잡으러 갔는데. 역시 그의 방을 알아내기는커녕,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경찰들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해산 시킨 후 돌아오려다가 오 교수와 마주쳐 버린 것이었다. 그는 매우 분노하고 있었고, 손에는 조잡한 식칼이 들려 있었다.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었다. 상대는 나를 죽이려 하고, 나 역시 녀석을 죽이려 했다. 그리고 결과는…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나의 승리였다. 나는 피가 묻은 손으로 오 교수의 숨통을 끊었고, 그의 악행에 점을 찍었다. 나는 영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걸로 이 거리에는 더 이상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된다! 살인마를 죽였다! 리스트에는 이제 완전히 내 이름만 남게 된 것이다. 내가 나를 죽이지 않는 이상 이 리스트는 더 이상 갱신 될 수 없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렇게 생각하고 경찰들을 불러 모두 수습하려는 순간….
내 앞에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덮쳐 왔다.
그 순간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그 야말로 검은 그림자였다. 검은 비닐 봉지를 둘러 쓴 것같은 모습 목 부분을 끈으로 동여매서 간신히 사람의 머리와 어깨 모습만 갖추고 있을 뿐 그 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야 말로 눈 코 입 없고 머리 카락 없는 유령의 그림자가 내 앞에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표면에는 인형을 만들 때 쓰인다는 ‘신목’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 것은!!
그렇다. 관노 가면극의 가면은 종이로 만들어지는 탈이다. 하지만 장자마리 탈의 경우는… 검은 흑지 혹은 플라스틱 섬유로 목과 허리를 묶고 그 위에 해신을 기릴 때에는 미역과 다시마를, 산신을 기릴 때에는… 신목을 매단다.
그런데…. 그런 것이 어째서 지금 여기에! 이 시커먼 그림자가 갑자기 나를 덮치더니 내 목을 심하게 압박한다. 비닐 봉투가 딱딱하게 굳어진 채로 내 목구멍을 찌르려 든다. 제기랄! 제기랄! 딱딱하게 되어버린 비닐봉투가 내 목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어왔다. 이건… 흡혈귀다… 틀림없는 흡혈귀다!
이 사건의 범인은… 오조림 교수가 아니라… 진짜 흡혈귀 였던 것이다!!!!
살려줘! 살려줘 샤오륭~! 샤오륭~~~~~~~~~!
2005 년 10 월 1 일
대충 그렇게 해서 헤어졌다고 생각한 요한나가… 이번에 새로 차린 가게에 놀러와 버렸다. 그 때 멋대로 우리 동아리 방에 있었던 자료인 몽셍미셸 앵크를 목에 차고 있는 채로…
"당신!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나 좀 도와줘!”
도대체 무슨... 이 곳에 요한나가 왜 있는 거야?
“마녀가 일본에 있다는 첩보를 얻었어. 당신이라면 도와줄 것같아서 왔는데.... 정작 당신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 아무래도 이 여자. 나를 찾아 다녔나보다.
나는 이스트시, 몽환당을 경영하는 꿈의 마법사. 이 여자를 만나는 순간 괜히 과거의 추억이 떠 올라 버렸다. 샤오륭이라는 여자가...
첫댓글 대단해. 정말!
누나 난 왜 이렇게 대단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