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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조정민님의 글(아체베의 콘라드 비판에 대한 비판)에 대한 제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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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분명한 것은, 서구인들에 의해 아프라카의 현실이 (어떤 식으로든) 재현되는 행위, 그것 또한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19세기에 이미 헤겔이 <역사철학>에서 말한 것, 즉 검은 오지, 아프리카는 도저히 구제받을 땅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지금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헤겔의 예언이
옳은 것인가요? 슬라보예 지젝 같은 비평가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지젝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는, 결과를 놓고 원인을 소급적으로 규정하는 상투적 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헤겔이 <역사철학>을 쓸 무렵, 즉 근대의 여명기를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 무렵,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전략도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서구인들에 의해 재현된 아프리카의 현실은 그 재현의 행위와 상관없이 실제로 야만적인 것은 아닌가, 조정민님의 생각은 이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정민님은 실제로 다음과 같이 다시 쓰고 있습니다. "근대 인식과 역사에 뿌리박혀있는 아프리카의 야만성". 그렇지만 그것은 일종의 반박불가능한 대전제처럼 보입니다. 저는 조정민님께서 그런 야만성이란 서구인들에 의한 식민지배의 산물, 이라고 말하는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그것이 아니더군요. 조정민님은 "그 야만성을 토대로 인격을 무시하고 무력을 행사했던 서구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이때의 야만성은 분명히 대전제임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즉, 의심해보거나 검증하지 않은 대전제. 서구인의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지배가 있기 전에도 아프리카인들은 야만인이었다, 라는 문명인의 전형적인 사고방식. 조정민님의 사고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점검해보시길 바랍니다. 과거(현재도 그렇지만)에 서구의 문명인들에게 비서구의 타자는 매혹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며, 경탄과 동시에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비서구인들은 때로는 재현이라는 미학적 행위를 통해 타자로 규정됩니다. 아프리카의 부족제도와 풍습이 두렵다고 했지만, 거기에 대해 경탄에 찬 호기심을 느낀 맨 처음 이들은 서양인들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라고 맨 처음 느꼈던 이들도 서양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니, 즉 야만적이니 문명인의 우월한 풍습과 교육으로 교정하거나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들도 서양인들, 즉 문명인들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부족제도와 풍습, 이것은 지금 기껏해야 서양인들에 의해 상당부분 절멸되고 거세되어 지금은 박물관에 진열되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관람행위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그것이 잔인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서구인들(미국인들)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태도나 다문화주의를 통해 타자의 문화에 대해서도 그 동등한 가치를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런 타자의 문화란 자신들이 지난 역사에서 문명의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이미 절멸시켜 버리고 남은 찌꺼기들입니다. 거기에 대해 존중한다는 것에 깔린 것은 실제로는 금욕적 시혜행위이며, 그런 행위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결국 서구인들의 자문화에 대한 보편적 자부심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상정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야만성, 실제로 그것은 서구의 비서구에 대한 폭력적 지배와 착취의 산물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서구로부터의 독립 후에 발생한 부족간의 대립이나 거기에서 벌어지는 유혈사태와 인종학살, 사실 그 기원은 바로 서구의 비서구에 대한 지배방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거기에 다시 문명과 인권의 이름으로 개입하는 서구나 미국의 행위는 참으로 파렴치합니다. 그들은 그러면서 바로 유혈학살이 벌어지는 아프리카의 그 부족들의 전통춤과 풍습은 매우 존중한다고 말하지요. 라틴 아메리카도 그렇지만, 인종학살이나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아프리카의 독재정권의 대부분은, 촘스키와 같은 정치평론가가 밝힌 것에 따르면, 미국 CIA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세워진다고 하더군요. 한편, 독립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아프리카의 인종학살이나 가난, 기근 등은 상당 정도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그것을 지양한 것은 적어도 미국이나 외세의 힘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현재의 아프리카는 사정이 훨씬 더 나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권이나 문명의 이름으로 개입하면서 그 이면에서 착취를 바라는 미국과 같은 나라의 정치적/경제적 개입이 아니라, 전세계의 무조건적인 도움입니다. 그들 나라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우리에게는 가까이 베트남이 있습니다). '악의 축' 북한의 경제난과 인권의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미국(그리고 그의 국내 추종자들인 '한나라당')은 바로 북한에 대한 자신들의 경제 봉쇄정책에서 그런 인권의 문제가 돌출되었다는 사실에는 당연히 눈을 감습니다.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적/경제적 행위란, 얼마전에 방한한 소설가 귄터 그라스도 그런 말을 했지만, 외세의 개입이나 그것을 최소화하는 방식에서의 무조건적인 대북지원입니다. 현실적으로, 그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흐른 감이 있어서, 이쯤에서 멈추고 다시 조정민님의 다음 문장을 읽겠습니다. 저를 화나게 하는 것은 아체베 같은 지성인의 경솔한 비판입니다. 그는 분노때문에 (쌍수대인님이 말하신 것 같이 저는 한국인이고 아체베는 아직도
인종차별이 심한 세상에 살고 있는 흑인입니다) 판단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콘래드가 흑인들을 향해 느끼는 증오와 매혹을 시작으로해서 마침내 그는
콘래드가 인종 차별주의자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읽을 가치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지식인이 그렇게 판단력을 잃을 수 있습니까? 탈식민비평이나 탈식민이론에 반대하거나 그렇지 않던간에, 제 3세계의 비평과 소설에 자주 나타나는 고발행위와 분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분노나 고발 행위 그 자체가 작품의 미학적 차원을 심각하게 손상한다고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그때, 저는 그렇다면, 작품의 미학적 재현행위, 아우에르바하가 '미메시스'의 역사를 통해 드러낸 서구 문학의 재현의 행위 그 자체에 대해 얼마만큼의 반성이 있었나 물어보고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탈식민비평이나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제국주의에 대한 고발과 분노란 당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노와 고발의 재현 행위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맥락, 그 차원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해야만 합니다.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와 거기에 힘으로는 맞서기에는 너무나 약한 식민지 민중이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합리적 의사소통이라는 민주주의적 이념에 따른 대화나 타협은 아닐 겁니다. 필요한 것은, 착취의 현실에 대한 지속적인 고발과 저항의 행위입니다. 전 한국어로 번역된 아체베의 비평을 읽어봤지만, 원래 영어로 쓰여진 그 비평을 활력있고 생기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식민주의적 지배와 그것을 재현한 콘라드 소설에 대한 아체베의 분노와 고발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분노와 고발의 행위가 나온 맥락입니다. 그의 분노는 결코 사적인 분노가 아닙니다. 제 3세계의 지식인으로서 그가 해야 했던 첫번째 일은 바로 그 자신이 몸담고 있기도 했던 대학의 영문과에 대한 의문, 즉 서구의 영문학 교과과정을 그대로 답습하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대학의 수많은 영문과라는 제도에 내재한 제국주의의 역사에 대한 비판이며, 그 비판은 처음엔 외마디의 분노와 증오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노가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했던 만큼의 오랜 역사에 대한 분노라면, 그런 분노를 무화시키고자 하는 또 다른 제국주의적 간섭과 방해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면, 그런 분노는 오래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혹여나 그런 분노에 내재한 (니체적) 원한의 감정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임슨과 같은 비평가는 <정치적 무의식>에서 니체의 원한 감정을 지배 세력을 격파할 수 있는 민중의 동력으로도 설득력있게 고쳐 읽습니다.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에 성찬받는 니체적 원한 감정에 대한 상투적인 비판들은 제국주의의 피식민자들에 대한 지배의 역사를 고찰하는데 정치적으로 거의 무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피지배자들은 이런 원한감정만으로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저항의 한 방식이지요. 제가 아는 한, 콘라드는 인종주의자였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을 가치도 없다고 말하는 아체베의 발언에 대해서는 저는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더라도, 사람들은 계속 콘라드를 읽을 것이기 때문이고, 아체베 역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체베는, 그의 선구적인 글에서 서구비평의 콘라드 독해(F.R 리비스나 기타의)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의문을 던집니다. 현재 탈식민주의 문학이론과 비평에서 진전된 콘라드 독해에는 아체베의 선구적 업적이 스며들어 있습니다(에드워드 사이드도 이 점을 지적합니다). 이제 문제는 이제 그런 아체베의 발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맥락을 냉정하게 점검하는 행위일 겁니다. 그것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입니다. 어쨌든 좀더 생각할 것들이 많지만, 제 공부가 짧아, 여기서 일단 멈추기로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들과 의문들을 갖게 해주셔서 조정민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