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이희돈 박사(전 세계무역센터 총재)
하나님의 일은 흥분되고 놀랍다
오늘은 제가 청년 시절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하게 된 사연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옥스퍼드대학교 종신교수’가 되는 영예를 갖고 있지만, 처음에는 피눈물 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유럽으로 유학 올 때, 부모님이 편도비행기 표만 끊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비행기 타고 떠나는 날, 공항에서 부모님이 봉투 하나를 쥐어주셨습니다. 저는 그 봉투 안에 돈이 얼마나 들어있을까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기내 좌석을 찾아서 앉아마자, 봉투를 열어서 그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정성어린 글씨가 적힌, 달랑 종이 한 장 뿐이었습니다.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리라!” 딱 이 문구가 적힌 종이 한 장 뿐이었습니다. 돈이나 수표는 단 한 푼도 없었습니다.
돈 없이 키운 자식 더 잘 돼
저는 그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유학 떠나는 자식에게…. 저는 혹시 여행자수표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나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JAL항공 스튜어디스는 저에게 몇 번이나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 매라’고 야단 쳤습니다.
믿음의 부모는 정말 무섭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여, 부모님들이 돈 안 보내준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부모들이여, 자식에게 돈이 없어 못 보내준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결단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돈 없이 키운 자녀들이 더 잘 됩니다.
무일푼으로 비행기에 탔으니, 할 것이라고는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공중에 떠서 절박하게 기도하니, 주님과 더 가까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거기서 마치 하란으로 떠나는 야곱처럼 기도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를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 그렇게 시작된 저의 유학생활은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의 감리교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요한 웨슬리, 옥스퍼드대학교의 홀리클럽, ‘캠브리지세븐’ 등에 익숙했습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이 단순한 학문의 요람일 뿐만 아니라, ‘해외선교운동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에 늘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나도 그 대학에 가서 과거에 그들이 한 것처럼, 그 장소에서 그들처럼 해외선교를 위해 기도해 보고 싶다.’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학생신앙운동을 펼치던 그 예배당에 한 번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유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거기 가는 차비만 겨우 마련해서 옥스퍼드(세인트 엔써니)대학을 찾아갔습니다.
그날따라 비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먼저 존 웨슬리기념교회에 가서 무릎 꿇고 기도 드렸습니다. 마침 그 대학에 내 전공과 같은 과가 개설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마음에 소원을 주시고, 그 다음에 이루어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크리스천이 잘 하는 것은 ‘도는 것’(땅 밟기)입니다. 그래서 이틀 동안 여리고성 돌듯 캠퍼스를 돌면서 기도드렸습니다. 잠은 길바닥에서 잤습니다. 이틀 후 비장한 기도를 드린 다음 교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비서가 내게 물었습니다.
간절하면 하늘이 돕는다
“무슨 목적으로 왔습니까?”
“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왔습니다.”
“지금은 입학 시기가 아니라 안 됩니다.”
“멀리서 고생하며 찾아왔습니다. 학장님을 만나서 왜 입학이 안 되는지 그 이유라도 듣고 싶습니다.”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또 학교를 돌며 기도했습니다. 비서는 창문 밖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오전도 돌고, 오후에도 돌았습니다. 그러자 비서가 들어오라고 불렀습니다. 결국 학장님과의 면담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옥스퍼드는 등록금이 대단히 비싼 학교다. 그리고 여기서 공부할 실력이 되느냐?”
“실력은 있지만, 만약 모자라면 학생이니 배우겠습니다.”
학장님은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을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공부할 돈은 있느냐?”
“이 학교에서 제게 장학금을 주면 됩니다.”
“장학금은 줄 수 없다. 네 실력이 증명이 안 되었는데, 장학금은 안 된다. 설령 우리가 장학금을 준다 해도 잘 데도 없다던데, 잘 곳도 없는 학생에게 장학금은 못 준다.”
“만약 잘 데가 확실히 보장되면, 학교에서 장학금을 줄 수 있습니까?”
“그럼 내일까지 여기서 확실히 먹고 잘 곳을 마련했다는 증명서를 가져 오라. 그러면 장학금을 주겠다.”
그리고는 냉정하게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내일까지 기숙사만 정하면 장학금을 준다는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기숙사 정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옥스퍼드에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수중에 돈 한 푼 없는데 어떻게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단 하루 만에!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옥스퍼드에서 나왔습니다.
런던브리지를 걸어가는데, 왜 그렇게 강바람이 센지…. 배도 고프고, 길에서 누가 감자를 먹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앞에 한 사람이 “헬로~!” 하면서 나타났습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내 앞에 내밀었습니다. 중국어로 ‘耶蘇天堂(예수천당)’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Jesus Paradise?”(예수천당)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며 내게 말했습니다.
“너는 이 글자를 읽을 줄 아니?”
아무리 한자가 서툴러도 한국인이면 누구나 그 정도는 알 것입니다. 그는 <캠브리지미션>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중국인들이 런던에 많이 오니까, 중국인들을 전도하고 싶은데, 자기 선교회원들 가운데 중국말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나마 중국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보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전도 다니다가 중국어를 읽을 줄 아는 나를 만나 반가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늘 이렇게 익사이팅하고 놀랍습니다. 그가 내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옥스퍼드대학 종신교수 된 배경
“우리 선교회에서 네게 숙식을 제공해 줄 터이니, 여기서 중국인들에게 이 중국어 전도지를 전해 줄 수 있겠니?”
“나는 중국 사람도 아니고, 중국어도 못 하는데?”
“아냐, 그 정도 알면 됐어.”
생긴 것도 중국인처럼 생겼고, 영어도 할 줄 알고, 중국말도 이 정도 아는 사람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숙식할 수 있는 보증서를 얻게 되었습니다. 단 하루만에! 지나간 일이지만, 지금도 생각해보면 너무 흥분된 일입니다.
저는 그 ‘숙식제공 보증서’를 들고 다음날 아침 일찍 옥스퍼드로 달려갔습니다. 학교에서는 그것이 진짜인지 전화를 걸어서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약속한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을 다녔습니다.
작년에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를 세운 집안의 공작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학교운영회의가 열렸습니다. 이제 옥스퍼드대학교가 ‘전 세계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데, 교수진을 서구권에서만 뽑아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돌아가신 공작 대신 ‘대학 평의원’으로 참신한 인물을 끌어들이자고 결정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을 알고, 거기에다 아시아까지 영향력을 미칠 사람을 물색했지만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때 학장이 저를 추천했습니다.
‘내가 옛날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이상한 한국학생을 알고 있다. 그가 요즘 세계무역센터의 고위직에 있다. 그 사람이 어떨까?’
그래서 옥스퍼드에서 대표단이 나를 만나러 미국으로 찾아왔습니다. 저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종신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종신교수 임명식’은 영국 여왕의 초청으로 이루어집니다. 임명식에서 저에게 수락연설을 하라고 했습니다. 원래 그런 자리에선 종교에 대해 발언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저는 이 학교가 진리를 탐구하고, 자유를 탐구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인 줄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진리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저는 확신하건대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순간 장내에 적막이 흘렀습니다. 제가 느끼는 바는, 저의 실력으로 옥스퍼드의 종신교수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께도 저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녹취 및 정리: 이화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