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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공의 네째 며느리가 되시며 휘 숙무 (叔畝) 양도공 (良度公; 1386-1439)의 배위가 되시는 영동현주 (永同顯周 = 한산군주, 韓山郡主 = 경혜옹주, 敬惠公主) 전주이씨 (全州李氏)는 진안대군 (鎭安大君, 무품) 이방우 (李芳雨)의 2남 3녀중 장녀요, 태조 이성계 (太祖 李成桂)의 장손녀 (長孫女)요, 판판도사사 (判版圖司事, 정2품)를 지낸 충주인 (忠州人) 지윤 (池奫; ~1377, 우왕 3) 판관공 (判官公)의 외손녀이십니다. 부인은 태조 이성계의 장손녀로서 당대 명문가에서 곱게 자라신 귀한 맏따님이셨습니다.
관료생활에선 선-후배 사이였으며, 오랜 벗이기도 하였고, 또한 막판에는 영원한 정치적 라이벌관계에 있었던 고려말의 최고 학자집안 목은선조님의 손자분과 무신가문 (武臣家門) 출신 태조 이성계의 맏손녀따님이 혼인을 맺어, 두 집안이 사돈관계에 놓여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적 고찰 하나:
“함흥차사 (咸興差使)” 란 단어는 우리가 평상시에도 잘 쓰는 단어로 우리에게 익숙한 말입니다. 보통 알려진 바로는 태조 이성계가 제 1차 왕자의 난을 통하여 사랑하는 아들 둘 --신덕왕후강씨 (神德王后 康氏) 소생인 무안대군 (撫安大君) 이방번과 의안대군 (宜安大君) 이방석 (李芳碩)을 (李芳蕃)을 잃고서 상심하여, 정종에게 자리를 물러주고 한양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은거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무안대군 이방번은 18세의 나이에, 의안대군 이방석은 17세의 나이에 각각 죽임을 당했는데, 당시 부친 태조 이성계는 64세의 노인이었습니다. 어린 아들 둘의 죽음이 태조에게 큰 아픔으로 자리잡은 것은 사실이였습니다. 환궁 (還宮)을 재촉하며 태종이 계속해서 함흥에 차사들을 보내는데, 태종에게 아직도 화가 단단히 난 태조가 명궁답게 화살들을 쏘아 심부름오는 차사들을 다 죽였다는, 이래서 “함흥차사”라 하면 어디에 심부름이나 일을 보러 갔는데 한참동안 깜깜무소식인 사람들을 우리는 일컷습니다. 그런데,“함흥차사”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요?
태조가 말년에 아들 둘을 잃고 함흥에 가서 운둔했던것은 사실입니다. 1402 (태종 2)년 태조가 평양 (平壤)에 와서 머무른 일이 있었는데, 이때 태조는 시자 (侍子)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북면 (東北面)에 있을때에 태종이 사자를 보내지 않았고, 맹주 (孟州 = 평안남도 맹산군)에 있을때도 사람을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았으니 감정이 없지 않은 것이다.” 라며 오히려 태종이 무관심한것 같은 태도에 섭섭해 했다 합니다.
태조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한양을 떠나며, 전국의 사찰 (寺刹)을 찾아다니면서, 비명횡사 (非命橫死)한 두 아들의 명복 (冥福)을 빌었다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못했고, 자신의 명을 어기고, 자기 동생들을 죽인 태종에게 시원하게 복수를 하고 싶어했다 합니다. 한편으로 태조 자신이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1402년 11월 5일 태조 이성계가 도성 (都城)에서 돌아왔을 때를 기인하여 일어난 것이 바로 “동북면의 난” 혹은 “조사의 (趙思義)의 난”인데, 당시 신덕왕후강씨의 친척되는 안변부사 (安邊府使) 조사의와 역시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의 친족되는 강현 (康顯) 등이 태조 이성계의 힘을 업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당시 태상왕 (太上王)으로 있던 태조 이성계가 배후에서 반란을 지휘한 것은 사실이라 하며, 반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지방 수령들이 감히 조사의의 난에 대항하지 못했고, 오히려 반란군 (叛亂軍)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합니다. 조사의는 평소에 태종 이방원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상황이였는데, 마침 왕자의 난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킬 좋은 명분과 군력 (群力)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란이 일어난것에 당황한 태종은 태조에게 차사들을 보내 급히 도성으로 돌아올 것을 권했으나, 태조는 되레 태종이 보낸 차사들을 죽여 버렸다 합니다. 차사로 갈 것을 자청하여 갔던 박순( 朴淳) 역시 조사의의 무리에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함흥차사”란 말이 유래되었고, 기록에는 함흥차사들 중 박순의 이름만 적혀 있습니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고 조사의 및 모의자들은 참형을 당했으며, 나중에 태조 이성계는 결국 태종을 인정하고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합니다.
결국 피에 또 피를 흘린 뒤에야 태조는 쌓인 원한을 풀고 겉으로나마 아들인 태종과 화해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동현주의 외조부가 되시며 태조 이성계에겐 맏사돈이 되는 지윤 판관공에 대하여서 고려사 (高麗史)의 편찬자들은 후세에 결코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습니다. 공의 출신성분 (出身成分)에서부터 행적 (行績)에 이르기까지 낯 뜨거운 사건들로 엮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상당히 부정적인데,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 당시 사관 (史觀)들이 공의 전기 (傳記)를 왜곡 (歪曲)하여 폄하평가 (貶下評價) 하지 않았었겠나 하긴엔 그 범위가 넓은것입니다. 공의 삶을 왜곡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중의 하나가 있다면, 판관공의 맏사위되시는, 즉 영동현주의 친정아버님되시는 진안대군 이방우는 부친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威化島 回軍 ) 및 조선건국 (朝鮮建國)을 반대하였던 인물로 야사 (野史)에 전합니다. 조선왕조의 정당성 (政堂省)을 부각 (浮刻)시키고, 고려말의 사회와 조선건국을 반대한 비협조적 인물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할 당연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휘 숙휴 (叔畦) 진목공 (晉牧公) 배위 숙부인 흥해배씨 (興海裵氏)편에서는, 숙부인의 조부님되시는 흥해군 (興海君) 배전 (裵詮)의 자랑스럽지 못한 행적을 보았는데, 이 또한 정치적 이유로 폄하평가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고려사를 편찬하였던 당시 사관들이 흥해군 (& 판관공)께서 휘 종학 (種學) 인재공 (麟齋公)과 인척관계 (姻戚關係)에 놓여있었다는 것을 몰랐을리 없습니다. 인재공은 고려말의 대표적인 충신 (忠臣)으로 조선왕조에 끝까지 절의를 지키며 순절 (殉節)하신 분입니다. 아무래도 흥해군 배전의 전기를 저질적 (低質的)으로 묘사하여 반정부인사 (反政府人士) 계열의 집안에 간접적으로나 정신적인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는 있지않았겠나하며 추측을 할 필요는 있다고 여겨집니다.
보통 액면 그대로 다 믿기게 의심쩍은 부분이 있는 상황시에, 서구권에서는 “Take With a Grain of Salt (Pinch of Salt)”라는 말을 흔히 쓰는데, 해 (害)가 될 음식을 소금 한 줌과 같이 먹으면 몸에 피해가 적다는 고대로마의 일화에서 유래하였다 합니다. 모계 (母系)까지 넓게 살피며 선조들의 행적을 추적할때에 접하는 위인 모두가 다 충신열사 (忠臣烈士)라고 자부할수는 없을 것이고, 혹 너무 부정적/긍정적으로 표현된 인물을 만날때에 떠 올릴수 있는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되어집니다. 명문가 (名門家)의 진짜 자랑은 부계-모계 넓게 살폈을때 충신열사가 많은 것도 자랑이겠지만, 또 한편으론 간신 (奸臣), 역신 (逆臣), 탐관오리(貪官汚吏) 등이 아예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숫자가 매우 적었다는데에 있지 않겠나하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쪽 저쪽 다 털어서 먼지 안날 명문가는 아마 이 지구상에 하나도 없을것으로 생각됩니다.
지윤 판관공의 조부는, 즉 영동현주의 외고조부 (外高祖母)님 되시는 분은 문하시랑 평장사 (門下侍郞 平章事, 정2품의 재상직)를 지낸 지흡 (池翕)이며, 판관공의 부친은, 즉 영동현주의 외증조부 (外曾祖父)님 되시는 분은 원외랑 (員外郞, 정6품)을 지낸 지덕명 (池德溟)으로, 충주지씨의 가계 (家係)는 고려말에 대대로 귀족 (貴族)집안이었습니다. 허나 판관공의 모친, 즉 영동현주의 외증조모님되시는 분이 무속인 (巫俗人= 무당, 巫堂) 이었다고 기록되어있는 것을 보면, 영동현주의 외조부 판관공은 본인의 부친되신 지덕명 원외랑께서 어느 이름없는 무녀와 벌인 혼외정사 (婚外情事) 불장난의 부산물 (副產物)로 태어나신걸로 보여집니다.
여말선초 (麗末鮮初)의 격동기 (激動期)를 보면 출세길에 글래스 실링 (Glass Ceiling)이 존재하긴 하였지만, 한미 (寒微) 한 배경으로 신분상승 (身分上乘)을 이뤄 출세한 케이스를 어쩌다 볼수 있는데, 이때는 신분제약 (身分制約)이 비교적 엄격했던 조선전반 대부분에 비하여, 사회 분위기가 좀 더 역동적 (力動的)이며 신분상승을 이룬 케이스들은 당시 사회전반에 깔린 불안정감 및 다이내믹성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한미한 배경으로 의해 판관공은 처음에 군졸 (軍卒)로부터 출발합니다. 점차 무공 (武功)을 세우며 공민왕에게 용맹함을 높이 인정받은 끝에 여러 벼슬을 거쳐 공민왕 재위 후반에는 판숭경부사 (判崇敬府事)가 되었으며, 서북면 원수 (西北面 元帥), 경상도 상원수 (慶尙道 上元帥) 등 출정군 (出征軍) 의 지휘관의 자리에도 오릅니다.
공민왕 말기 1371년에 신돈 (辛旽)과 그 일파가 역모죄로 몰려 숙청되었을때, 인재공의 장인되시는 이춘부 (李春富) 문하시중공 (門下侍中公) 또한 함께 처형당하였다고 익히 알고 있습니다. 신돈이 처형당하자 당시 숭경부 판사 (崇敬府 判事)로 있던 판관공은 신돈의 의복과 장식품 등을 모두 본인이 차지하였다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신돈의 당여 (黨與)로 몰려 처형당한 강을성 (姜乙成= 신돈의 씨다른 동생)의 재산을 가로챈 일이 있었는데, 강을성은 처형당하기전에 판도사 (版圖司)에 상당한 양의 금 (金) 을 바쳤던 일이 있었습니다. 강을성이 죽으므로 그가 미처 받지못한 금값의 비용 (費用) 인 포목 1천5백필이 남아 있었는데 이것을 판관공 본인이 모두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강을성의 아내는 본인의 첩으로 취하였다 합니다. 이런 사례들로 볼때 판관공은 탐욕스러운 탐관오리로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또한 당시 신돈의 친족인 재상 신순 (辛順) 역시 복주 (伏誅)되자, 판관공은 아드님 지익겸 (池益謙)을 신순의 딸과 결혼시켜 몰수당했던 신순의 집과 재산을 찾아내어 자기 아들에게 다 주었다 합니다.
정치적으로 판관공은 친원파 (親元派) 노선이였던 당시 권신 (權臣) 이인임 (李仁任)의 심복이 되어 염흥방 (廉興邦)등과 함께 원나라의 권세를 업고 친원책 (親元策)을 펴며 전횡 (專橫)을 일삼았고, 이숭인 (李崇仁), 양촌 (陽村) 권근 (權近)선생, 정도전 (鄭夢周), 김구용 (金九容), 박상충 (朴尙衷; 목은선조님의 #1 매부) 등의 신진사대부 (新進士大夫)가 핵심이 된 친명파 (親明派)와 대립하였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고려말-조선초를 잇는 대부분의 신진사대부들은 목은선조님이 일찌기 공민왕대에 발탁 (拔擢)하여 키운 당대의 큰 인물들이었습니다.
1375 (우왕 1)년 무렵에, 목은 선조님의 매부되신 박상충 반남선생 (潘南先生)께서 친원파의 전횡과 횡포를 보다 못해, 이인임과 판관공을 주살 (誅殺)할 것을 왕한테 주장하였는데, 반남선생은 이 상소에 연좌 (連坐)되어 장형 (杖刑)을 선고받습니다. 장형을 받고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등과 함께 귀향길에 오르시던 중 청교역 (靑郊驛) 에서 44세로 비명에 숨을 거두십니다. 아마도 곤장을 맞은 후에 오른 장독 (杖毒)에 의한 죽음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참고: 목은선조님의 매부되셨던 박상충 반남선생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굉장히 잘 풀려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명문거족 (名門巨族)중 하나로 성장하였습니다. 반남선생의 아드님 되시며 가정선조 (稼亭先祖)님껜 외손자가 되는 박은 (朴訔) 조은 (釣隱) 선생은 부친 반남선생이 비명에 돌아가셨을때 불과 여섯살이였는데, 외삼촌되신 목은선조님의 배려와 관심속에 학문에 정진하여 나중에 문과에 장원급제 (壯元及第)하였습니다. 조은선생의 내손 (來孫 = 5대손)되신 문강공 (文康公) 박소 (朴紹) 야천 (冶川) 선생은 반남박씨의 중흥조 (中興 祖)로 일컬어지는 분이신데, 야천선생 또한 문과에 장원급제하셨고, 야천선생의 현손 (玄孫 = 4대손)되신 박세당 (朴世堂) 서계 (西溪) 선생과 서계선생의 2남 정재 (定齋) 박태보 (朴泰輔) 선생 또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습니다. 반남선생-조은선생-야천선생-서계선생으로 이어오는 가계는 명문 반남박문중에서도 현달한 가계중 하나로 역사에 유명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반남박문중에서도 서계가문 (西溪家門)이라 하면 명문가의 후손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문중입니다.
이렇게 반남선생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관직 (官職), 훈공 (勳功), 학문 (學問)에 있어서 가장 혁혁 (赫赫)한 가계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는데, 목은선조-반남선생으로부터 5-6대가 흘러 한산이문과 반남박문 (=서계가문)이 다시 인연을 맺는것은 야천 박소 선생의 맏사위 되시는 분이 휘 맹진 (孟畛) 판중추공 (判中樞公)의 5대손되시는 휘 희백 (希伯) 연안부사공 (延安府使公)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1681 (숙종 7)년경에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추숭사업 (推崇事業)을 추진할 무렵, 반남 박상충 선생의 현양사업 (顯揚事業)의 물꼬 또한 트신 분이 계셨는데 바로 우암 (尤庵) 송시열 (宋時烈) 선생이십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암선생과 반남선생의 후손들은 각각 이념적으로 다른 정치노선 (政治路线)을 선택하여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인 (西人)에게서 부터 갈라져 생긴 노론 (老論) 의 영수 (領袖)이셨던 분이 바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셨고, 역시 서인에게서부터 갈라져 생긴 소론 (少論) 계열 대표적인 가문의 자제분이 바로 반남선생의 10대손 서계 박세당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우암선생과 서계선생은 나중에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게 되었는데, 한 분은 한산이문의 사위이셨고, 한 분은 한산이문과 선대로부터 혼반을 통해 밀접한 외척 관계에 계셨던 분이셨던 것입니다.
1670년대 초에 경에 경기도 지역에서 대표적인 열셋 소론 (少論) 가문의 자제들 58명이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정기적으로 모이는 행사를 주관하는 등, 문중간의 친목을 다지는 세강계 (世講契)란 친목계 (親睦契)를 결성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 열셋 가문은 “근기소론 (近畿少論) 13가문”이라 일컬어지며 당시의 구성원은 소론계를 대표하는 명문 세도가들이였는데, 1674년에 발행된 세강계첩 (世講契帖) 에 기재된 이들 열셋 가문들은 반남박씨 서계 박세당 가문, 한산이씨 휘 현영 (顯英) 창곡공 (蒼谷公) 가문, 전의이씨 (全義李氏) 이만상 (李萬相) 가문, 달성서씨 (達城徐氏) 서문중 (徐文重) 가문, 전주이씨 (全州李氏) 이경석 (李景奭) 가문, 전주이씨 (全州李氏) 이경직 (李景稷) 가문, 경주김씨 (慶州 金氏) 김주신 (金柱臣) 가문, 덕수이씨 (德水 李氏) 이경증 (李景曾) 가문, 능성구씨 (綾城具氏) 구봉서 (具鳳瑞) 가문, 나주임씨 (羅州林氏) 임서 (林㥠) 가문, 해평윤씨 (海平尹氏) 윤훤 (尹暄) 가문, 덕수장씨 (德秀張氏) 장신 (張紳) 가문 및 양천허씨 (陽川許氏) 허회 (許淮) 가문 이였습니다. 이들 소론계 명문가들은 서로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했을뿐 아니라 혼반 (婚班)을 통해서도 서로 결속을 다지고 이해관계를 증진해 나갔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소론가문에게만 극한된 것은 당연히 아니였습니다.
이들 열셋 가문들의 후손들은 현재 보인회 (輔仁會)라는 친목계를 조직하여 아직까지도 정기족으로 교유하며 친목을 다지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한산이씨 후손들의 당색 (黨色)은 다양하였으니, 경상좌도 (慶尙左道)를 위시하여 영남-호남 지역에는 당색이 동인 (東人)->남인 (南人)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노론벌열 (老論閥閱) 집안으로 잘 알려진 한산이씨 가계들이 있는데 충청도의 충주, 청주, 괴산 지역등에 기반을 둔 가문들이 그 중 일부입니다. 반면에 같은 지역이라도 당색이 다른 경우가 흔했는데 예를 들면 노론 텃밭인 충남 예산 지역 출신의 수당 (修堂) 휘 남규 (南珪) 선생의 가문은 동인에게서 부터 갈라진 북인 (北人)의 영수 휘 산해 (山海) 아계공 (鵝溪公), 아계공의 장남되신 휘 경전 (慶全) 석루공 (石樓公)으로부터 내려오던 기호지방 (畿湖地方) 의 대표적인 남인가문이였습니다. 대체적으로 기호지방은 조선후기 250년간 집권하였던 여당 (與黨)인 노론의 당색이 강하였고, 다른 지역들은 야당 (野黨) 의 당색이 강하였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우리 선조님들은 당색이 소론-남인-노론-북인으로 가지각색을 이루며 일정치 않았고, 혈연 (血緣)-학연 (學緣)- 지연 (地緣)에 의해 소속당이 결정된 경우가 많았고, 또 시대에 따라서도 당색이 변하였던 것입니다. 이웃사촌 일가친척이라도 혹 정치노선이 다른 경우가 있으면 서로간에 왕래 (往來)도 하지않는 악습 (惡習)을 낳았으며, 남정네의 평상시 행동 및 아녀자들의 옷매무새-겉치장까지 당색에 따라 각기 달랐습니다. 이렇게 당색이라는 것은 한 집안의 철학과 가풍 (家風) 및 혼반을 정의 (定義)하는 중요한 정체성 (正體性)이기도 하였습니다.
목은선조님의 다른 누이동생 세분은 판위위시사 (判衛尉寺事) 영해인 (寧海人) 박보생(朴寶生), 양촌 (陽村)권근 (權近)선생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고려왕조에 끝까지 절의를 지킨 예문관제학 (禮文官提學 ) 죽헌 (竹軒) 금성인 (錦城人) 나계종 (羅繼從) 선생, 사간원정언 (司諫院定言) 경주인 (慶州人) 정인량 (鄭仁良)에게 각가 출가하셨습니다. ]
판관공이 1376 (우왕 )년 문하찬성사 (門下贊成事)로 있을 때 북원파 (北元派)로 몰려 참수당한 감찰대부 (監察大夫) 왕중귀 (王重貴)의 미망인 행주기씨 (幸州奇氏= 기황후, 奇皇后의 오빠가 되는 기철, 奇轍, 의 따님. 기황후에겐 조카가 됨)를 아내로 삼으려고 여러 번 중매자를 보낸적이 있었습니다.
허나 행주기씨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기다리다 못한 판관공은 자신의 졸도 (卒徒)들을 데리고 행주기씨가 사는 집으로 갔습니다;
행주기씨의 종이 급히 달려 가 부인에게 이르기를, "부인은 몸을 빨리 피하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행주기씨가 말하기를, “ 내 구차하게 피신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으므로 종들은 아마 행주기씨가 판관공에게 응종 (應從)하려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행주기씨가 술상을 차려 판관공을 대접하니 판관공도 일이 잘 되고 있나 보다고 여겼습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판관공이 내실 (內室)로 들어 가려 할 무렵에 행주기씨가 판관공의 멱살을 들고 뺨을 후려 갈기며 꾸짖기를, "소위 재상이라는 자가 이 같은 강폭한 행동을 하느냐? 내 차라리 죽을지언정 네 말을 들을 줄 아는가?"라고 하였다 합니다. 판관공은 부끄러워 그만 그 자리에서 물러가 버리고 말았다 합니다.
행주기씨가 최벽 (崔璧?)에게 가서 말하기를, "내가 좋은 가옥에서 살고 있으므로 지윤이 그것을 차지할 욕심이 나서 나에게 폭행을 한 것이다. 당신은 청백-정직하기로 알려졌기 때문에 찾아 와서 말한다.”라고 하고 곧 이사하였다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갸륵하게 여겼다 합니다.
판관공은 평소에 매관매직 (賣官賣職)및 옥 (獄)을 팔아 재산을 많이 모았으며, 30명의 첩을 거느렸는데 미모에는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부자만을 취하였다 합니다. 또한 우왕의 유모 장씨 (張氏)와 간통했고 공의 부인 원주원씨 (原州元氏) 또한 장씨와 가까워 수시로 궁중을 출입하며 전횡을 일삼았다고 하는데, 판관공은 평소에 심복들을 대간 (臺諫)에 배치, 그들을 사주하여 언론을 장악하고 부귀와 권세를 누렸다 합니다.
그러나, 판관공의 최후는 비참하였습니다;
아드님 지익겸 (池益謙)을 왜구토벌의 지휘관으로 파견하는 문제 등으로 점차 이인임과 사이가 나빠졌는데, 기회를 엿보던 이인임이 판관공의 심복부하인 김승득 (金承得), 이열 (李悅), 화지원 (華之元) 등을 정부 비방죄로 몰아 유배시켰습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판관공은 마침내 지신사 (知申事) 김윤승 (金允升)과 공모하여 군사를 일으켜 거병 (擧兵)하게 되었는데, 이인임, 최영 (崔瑩)등을 제거하려고 시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체포되었습니다. 결국 아드님 지익겸 (池益謙)등 가족 일부와 공의 당여와 함께 비참히 처형되었습니다.
화 (禍)를 면하고 살아남은 판관공의 일부 자손들은 향리 (鄕吏) 신분으로 전락하였습니다. 후일 17세기 경 조선후기의 시인 윤휴 (尹鑴)가 금강산 기행문으로 쓴 “풍악록 (楓岳錄)”에 풍악 (楓岳)을 방문하다가 아전 (衙前)으로 전락한 공의 후손 지응룡 (池應龍)을 만났던 것을 기록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말에서 내려 다릿 가에서 쉬고 있노라니 옷차림이 남루하고 얼굴도 깡마른 늙은 아전 (衙前) 하나가 앞에 와서 절을 하였다. 성명을 물었더니 지응룡 (池應龍)이라고 하는데 함께 얘기해 보니 문자도 꽤 알고 또 말하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그래서 글을 얼마나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소년 시절 사서 (四書)와 이경 (二經)을 읽고 이백 (李白), 두보 (杜甫), 한유 (韓愈) 등 여러 문장가의 시를 일만여 수나 외웠으나, 과거 (科擧)에는 응했다가 합격을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은 시가 있으면 외워보라고 했더니 그는,
“하얀 이슬 갈바람 계절은 가을인데 / 白露西風八月秋
눈 같은 갈대꽃이 강주에 가득하네 / 蘆花如雪滿江洲
지사라면 누구나 감개가 많을 때인 것을 / 從知志士常多感
어찌하여 그때에 송옥만이 슬펐으랴 / 不獨當年宋玉愁”
했고, 또 금강산에 가 놀면서 지은 것이라고 외우는데,
“흰구름 가에 있는 영롱한 사찰 하나 / 玲瓏金刹白雲邊
누각 밑 숲 사이로 오솔길 하나 났네 / 踏閣攀林一徑穿
동문에는 용이 나와 언제나 비 뿌리고 / 龍出洞門常作雨
소나무에 학의 둥지 몇 해 됐는지 모른다네 / 鶴巢松樹不知年
전상에 중은 서서 밥때라고 종 울리고 / 僧從殿上鳴鍾飯
산중에 온 나그네는 자리 빌려 졸고 있네 / 客至山中借榻眠
밤들어도 이상하게 꿈 이루지 못하는 것은 / 恠底夜來難得夢
들창 밖 우는 샘을 갈바람이 맴돌아 서라네 / 秋風窓外繞鳴泉”
하였다. 그의 세계 (世系)를 물었더니 고려 말기 지윤 (池奫)의 후예라고 하였다. 지윤이 베임을 당하자 그 자손들은 아전으로 전락 (轉落)되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윤이 문리 (文吏)였기에 그 기류 (氣類)가 서로 유전된 것 아니겠는가. 그 사람은 비록 늙고 쓸쓸해 보였지만 그 시는 읊을 만했으니 그 골몰한 꼴이 가련했다…..”
위의 기록을 보면 후손 지응령이 당시 중인 (中人)들이 많이 응했던 잡과 (雜科)에 응시하였던 것으로 보여지고, 대역죄 (大逆罪)로 몰려서 처형당한 선조를 둔 후손의 어려운 실생활을 엿볼수 있습니다. 또한 지윤 판관공을 무리 (武吏)라고 표현하지 않고 문리 (文吏)로 부른것 또한 특기할 만한 사항입니다. 윤휴의 표현을 빌리자면 판관공 지윤은 무장이었을 뿐 아니라 학문에도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던 문무를 겸비했던 위인으로 비쳐집니다.
반면에 나중에 조선왕조의 개국공신 (開國功臣)이 된 충의공 (忠懿公) 지용도 (池龍圖)와 충무공 (忠武公) 지용수 (池龍壽)는 판관공의 5촌 당질 (堂姪)이되며, 충의공-충무공, 충원부원군 (忠原府院君) 지용기 (池湧奇)와 판관공을 포함한 고려말-조선초 충주지씨 장군 네명을 일컬어 “지문4걸 (池門四傑)”이라 부른다 합니다.
공의 따님 세 분은 모두 태조 이성계의 며느리가 되었는데, 첫째 따님은 태조의 맏며느리가 되었고, 둘째와 셋째 따님, 즉 영동현주의 두 이모님들은 성빈 지씨 (誠嬪 池), 숙의지씨 (淑儀 池氏)로 태조의 둘째며느리들, 즉 정종의 후궁들이 되었습니다. 영동현주의 이종사촌들은 덕천군 (德泉君), 도평군 (桃平君) , 의평군 (義平君, 선성군 (宣城君), 임성군 (任城君), 함양옹주 (咸陽翁主) 입니다.
고려말 변방 무신출신 집안의 태조 이성계가 중앙진로를 꾀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장남을 통하여 사돈관계를 맺을 만큼 당시 재상이었던 판관공 지윤의 위세는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영동현주의 친정아버님되시는 진안대군 이방우는 어렸을때부터 유달리 총명하였고 충효와 우애가 남달랐다 합니다. 사서에 능하였고 일찌기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의판서 (禮儀判書)와 밀직부사 (密直副使)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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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 (우왕 14)년 5월 정유일에 요동정벌 (遼東征伐)을 독려하기 위하여 평안도 성주 (成州 = 성천, 成川)에 우왕이 있었는데, 마침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威化島 回軍)을 감행하습니다. 만일의 후환 (後患)을 막기위해 고려조정에서는 이성계의 아들 몇을 성주에 볼모로 잡아 두었습니다.
이날 밤에 진안대군은 동생 정종 이방과 (李芳果 ) 및 퉁두란 (佟豆蘭)/이지란 (李之蘭 )의 아들 이화상 (李和尙) 등과 함께 성주를 빠져나와 부친 태조 이성계가 회군하는 곳으로 달려 갔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한 편 이지란의 저서인 “청해백집 (靑海伯集)” 에 이 때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는데 내용은 약간 다르니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가 요동을 정벌할 때 진안대군, 정종대왕 , (내 아들) 이화상을 위험인물이라 하여 성천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태조고황제가 출동한 이 후 장마가 계속되자, 감옥에서 정종대왕이 진안대군에게, “탈옥해서 이 사실을 아버님께 알리십시오.”하니 대군은 답하기를, “임금의 명을
어김은 도리어 효가 아니다.”하며 거절하자, 정종대왕이 담을 넘어 탈옥하여 위화도로 달려가 태조고황제에게 아뢰었으므로, 회군할 때 성주에 들러 나머지 사람들을 석방했다. 이 때 석방된 진안대군은 곧 태조고황제가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붙들고, “죽으면 죽었지 임금의 명을
어기고 회군하는 것은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태조고황제가 듣지 않자 가족을 이끌고 철원 보개산 (寶蓋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한다.
후에 태조고황제는 대군의 굳은 뜻을 알고 고향인 함흥 (咸興)에 전사 (田舍)를 하사하여 살 곳을 만들어 주어 편안히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태종 이방원 (李芳遠)은 서울 개성에 머물다가 위화도에서 부친 이성계가 회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하지 않고 포천 (抱川) 재벽동 (滓甓洞)과 철현 (鐵峴)에 있던 신의황후한씨 (神懿皇后韓氏= 태조 이성계의 정비로 정종과 태종 등의 생모)와 신덕황후강씨 (神德皇后康氏 = 태조 이성계의 계비로 무안대군, 撫安大君, 이방번, 李芳蕃 과 의안대군, 宜安大君, 이방석, 李芳碩 및 경순공주 , 慶順公主의 생모)의 나머지 가족과 함께 급히 철원 (鐵原), 이천 (伊川) 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1392 (태조 1)년 태조가 등극한 뒤 8월 7일 여러 왕자를 군으로 봉할 그때 진안대군 이방우는 진안군 (鎭安君)에 봉해졌고, 1393 (태조 2)년 10월 17일 태조 이성계는 장남인 진안대군에게 명하여 4대 선조를 제향 (祭享)케 하고, 신주 (神主)를 효사관 (孝思觀)에 임시로 안치케 하였다 합니다.
태조실록에 실린 진안대군의 졸기 (卒記) 내용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1395 (태조 4)년 12월 13일 진안군 방우가 별세하니 평소에 성질이 소주를 많이 마셔 병이 났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경효(敬孝)”란 시호를 내렸다. 14일에는 백관들이 진안군을 조위 (弔慰) 했고, 15일에는 진안군을 장사하는데 백관들이 문밖에서 전송했다.”고만 서술되어 있습니다.
진안대군은 1395년 12월 13일에 별세하여 15일에 장례를 지냈는데, 처음에는 함흥 북원 (北原) 평사 (平社) 마내곡 (馬內谷)에 장례지냈다가 1408 (태종 8)년에 모친 신의고황후의 능침인 제릉 (齊陵) 곁에 모신다는 의미에서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황강리 몽상동으로 이장했습니다. 사호 (祠號)는 청덕 (淸德) 이며 1418 (태종 18)년에 진한 정효공 (辰韓 定孝公)에 추증 (追贈) 되었습니다.
역사의 기록은 패권 (覇權)에서 승리한 승자들의 관점에 의하여 서술됩니다. 집안의 장남으로 맘만 먹었으면 왕이 될뻔도 한 진안대군이 부친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및 조선건국에 반대하여 훗날 사관 (史官)들은 대군의 전기를 부정적으로 기록한 듯 보입니다.
진안대군은 정부인 (= 삼한국대부인 충주지씨, 三韓國大夫人 忠州池氏. 영동현주의 생모) 에게서 아드님 한 분, 즉 영동현주의 오라버니를 보셨는데 봉녕부원군 (奉寧府院君)에 봉해진 안강공 (安簡公) 이복근(李福根) 입니다. 1차 왕자의 난에 숙부 태종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워 정사공신 (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어 봉녕부원군(奉寧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정종대왕때 친필 교지를 받았고, "안간 (安簡)"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1456 (세조 2)년에 사육신등이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운동 (端宗復位運動)이 일어났을 때 영호남의 유생들 사이에서, “송현정 이견신 (松峴正 李堅信 = 진안대군의 증손자로 태조 이성계의 장손)은 태조고황제의 적손이다”란 말이 떠돌며 이견신을 왕위에 옹립한다는 소문이 일자 이견신의 식구 5명이 몰살을 당하였습니다. 이래서 진안대군의 장손계열은 영구히 절손되었습니다. 이 때 이미 작고한 가음정 이은생 (嘉音正 李銀生 = 송현정 이견신의 동생) 의 아들 3형제는 이 사실을 알고 살아 남기 위해 가속을 데리고 잠적 (潛跡)하였는데, 장남 이우 (李瑀)는 충북 괴산군 도락동 (道樂洞)으로, 차남 이정 (李玎)은 경기도 수원 화성으로, 3남 이향 (李珦)은 충북 월악산 (月岳山)으로 달아나 뿔뿔히 흩어져 숨어 살았다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진안대군파는 크게 세파로 나뉘며 가음정 이은생의 장남 이우의 후손은 종파 (宗派), 차남 이정의 후손은 수원파 (水原派), 3남 이향의 후손은 옥천파 (沃川派)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단종복위사건을 계기로 진안대군의 묘소는 실전됐고 이후로 진안대군의 후손들 또한 무사 (無嗣)한 것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졌었습니다.
그러던 중 300여년이 흘러 1758 (영조 34)년 인성군 이공 (仁城君 李珙 = 선조의 일곱째 아들)의 증손 낙창군 (洛昌君) 이당 (李樘)의 상소로, 진안대군의 13대손 이윤석(李胤錫)을 비롯한 후손들이 충북 괴산지방에 살고 있다는 것을 조정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14대손 이효원 (李孝源)에게 벼슬을 주려 했으나, 이미 작고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진안대군에게 “정의 (靖懿)'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그 후 1787 (정조 11)년 가을 장마 때 진안대군의 묘소 일대가 물바다가 되고 사태가 나 흔적이 막연한 가운데 장마 후 솟아난 석물에 “ 太祖大王 第一男 鎭安大君 妻 夫人 池氏 (태조대왕 제일남 진안대군 처 부인 지씨”라는 글자에 의하여 그 동안 실전되었던 진안대군의 묘소를 찾게 되었다 합니다. 이에 대군의 15대손 이국주(李國柱)가 1789 (정조 13)년 2월에 마침 정조가 백부인 진종 이행 (眞宗李緈 = 효장세자 ,孝章世子. 나이 10세에 요절) 의 능인 영릉 (永陵)을 봉심하고 돌아오는 길에 진정함으로써 정조는 사실을 알게 됐고 경기감사 조정신 (趙鼎信)으로 하여금 진안대군의 묘소를 복원하게 하였습니다.
정조가 지은 “진안대군 이방우 묘비문 (墓碑文)”에는 “어려서 태조를 섬길 때 효자로 칭송받았고, 형제 사이에도 우애가 돈독했으며, 점점 자라면서는 시서 (詩書)에 마음을 쓰고 검약을 실천하면서 부귀영화 따위에는 마음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영락 (零落)한 처지에 이르러 돌보지 않은 탓에 진안대군의 산소 일대가 황폐해지고 백성들 무덤이 30여 기나 근처에 암장되어 식별이 곤란하던 중에 공사를 관에서 복원하고 이듬해인 1790 (정조 14) 년에 어제 (御製) 비문까지 하사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매년 춘추로 풍덕현감 (豊德縣監)이 직접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수호하는 사람도 두게 하였다는데, 남북분단 이후로 휴전선 이북 개성에 있어 봉사조차 못하여 충북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385번지에 있는 진안대군의 사당인 청덕사 (淸德祠)에서 제향하고 있다 합니다. 이 청덕사는 진안대군의 현손 이우 (李瑀)의 종파들이 이곳에 모여 사는 관계로 1828 (순조 28)년 사우를 중건하고 사액 (賜額)까지 받게 되었다 합니다.
이렇게 진안대군은 태조 이성계의 장남이면서도 본인도 숨어 살았고, 후손들도 화를 겪으며 숨어 살은 결과, 그 후손들이 번성하지 못하고 몇백년을 내려왔던 것입니다. 정조대 (正祖代) 이후부터 충북 괴산의 진안대군의 사당 청덕사 (淸德祠)를 중심으로 산재되었던 후손들이 서로 연락하여 현재 진안대군파의 파종회를 조직하며 교유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하는데, 현 인구는 만 5천여명에 이릅니다.
진안대군파는 주로 충북 괴산과 충주, 옥천, 수원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어 주류를 이루고 강원도 지방에 함흥땅에서 남하한 후손들과 삼척에 분포된 후손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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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현주의 이복남동생은 순녕군 (順寧君) 이덕근 (李德根)이며 이복여동생 옹주이씨 (翁主李氏)는 첨지돈령녕부사 (僉知敦寧府事) 순흥인 (順興人) 안종렴 (安從廉)에게 하가 (下嫁)하였습니다. 또 한명의 이복여동생 이씨가 있었습니다.
1831 (순조 3)년에 건립된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 청덕사 (槐山郡 佛頂面 牧渡里 淸德祠). 후손 이의만씨 소유 관리.
영동현주께서 한산이문에 시집오시게 된 배경에는 친정아버님되시는 진안대군이 고려말에 한산이문과 친분을두텁게 쌓은데에 기인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시아버님되시는 인재공께서는 고려조에 출사하셔 끝까지 충성을 다 하셨고, 친정아버님 진안대군 또한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아마 같이 고려말에 관료생활을 하시는 중에 양쪽 집안의 유대감이 쌓여가며 결국엔 사돈을 맺는 관계까지 발전하지 않았나 보아집니다.
영동현주께서는 역동기에 한산이문에 시집을 오셔서 양도공과는 다복한 가정을 이루시며 후손들의 출세와 번영에 이바지하신 고마운 분이신데, 양도공과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셨습니다. 장남은 휘 원증 (元增) 청주목사공 (淸州牧使公)이요, 차남은 휘 형증 (亨增) 첨지중추부사공 (僉知中樞府事公)입니다.
1녀는 군사 (郡事) 진주인 (晉州人) 하맹질 (河孟秩)에게, 2녀는 감사 (監司) 순흥인 (順興人) 안승효 (安崇孝)에게, 3녀는 부사 (府使 ) 청풍인 (淸風人) 김리 (金理) 에게, 4녀는 감사 (監司 = 강원도 관찰사, 江原道觀察使) 파평인 (坡平人) 윤잠 (尹岑)에게 각각 출가하였습니다.
[역사적 고찰 하나 더:
영동현주/양도공의 막내사위되는 관찰사 윤잠에 관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건들이 몇이 있는데,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 나중에 단종복위운동에 나타나는 인물들이라 흥미롭습니다.
윤잠은 1453년 세조의 계유정난 (癸酉靖難)을 도와 그 공으로 1455년에는 원종공신 (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어 특헤를 누리는 등 내외의 여러 요직을 거쳤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물의도 빚었으니, 1463년 우승지 (右承旨)로 재직당시, 9월 서산 (瑞山)에서 세조가 가진 사냥놀이에서 구경하던 중 군율 (
약간은 물의를 빚은 두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452년 2월 12일 일어난 이 첫번째 상소는 단종복위운동 사건이 벌어진 때보다 4년 앞섭니다.
“헌납 (獻納) 조원희 (趙元禧)가 아뢰기를,
“도관좌랑 (都官佐郞) 윤잠 (尹岑)이, 지조사 안숭효 (知曹事 安崇孝 = 관찰사 윤잠의 윗 동서. 영동현주/양도공의 둘째 사위)가 상피 (相避 = 친족, 親族, 또는 그 외의 관계로 같은 부서, 部署, 에서 벼슬하는 일이나, 청송, 聽訟, 시관, 試官, 같은 것을 피함)의 처지인데도 종부시판관 (宗簿寺判官)으로 승진 임명하였으며, 윤잠도 또한 지이조 (知吏曹) 강맹경 (姜孟卿 .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휘 개, 塏, 사육신 백옥헌공의 부인 가지, 加知, 는 당시 우참찬, 右參贊, 강맹경에게 주어졌다 함. 나중에 영의정에까지 승진) 처 (妻)의 당형제 (堂兄弟 =종형제, 從兄弟. 사실은 강맹경의 처 윤씨와 윤잠은 사촌형제지간이었음. 사육신 백옥헌공에게 윤잠은 6촌형제의 남편이었던 것임)이기 때문에 강맹경에게 상피할 처지가 있는데도 관계 (官階)를 뛰어넘어 승진시키기를 이같이 했으니, 탄핵하기를 청합니다. 또 김질 (金礩. 사육신등과 단종복위운동을 모의했다가 나중에 변신하여 모의를 누설한 사람)도 마땅히 개정 (改正)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질 (金礩)은 내가 마땅히 개정 (改正)하겠다. 윤잠 (尹岑)은 그 날에 수직 (守職 = 품계는 낮고 관직은 높은 경우의 그 관직. 관직 앞에 “수, 守”자를 붙임. “행직, 行職”과 반대)을 제수 (除授)한 사람이 이 사람에 그치지 않았는데 무엇이 불가 (不可)한 것이 있겠는가?”하였다.
조원희 (趙元禧)가 아뢰기를,
“이조 (吏曹)에서 상피 (相避)할 사람을 천망 (薦望)하니 진실로 옳지 못합니다. 이를 용서하고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외람 (猥濫)되는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조 (吏曹)는 죄가 없고, 윤잠 (尹岑)은 내가 그것을 개정하겠다.”하였다.”
결론적으로 인친척관에 놓여있던 사람들의 속칭 “족벌정치인 네포티즘 (=nepotism)”의 악습을 막기위해 상피제도를 두었던 것인데 윤잠은 그것을 잘 지키지 않았다는 탄핵입니다. 실력이 출중하였기에 상피제도에 상관없이 자신의 외척들은 승진시킨 것이 정당하였는지, 아니면 부당하게 승진시켰는지는 명확치 않습니다.
2. 첫 사건으로 부터 22년후인 1474년 사간원과 사헌부 합작으로 당시 공조참의 윤잠의 죄를 고하여 파직케 한 적이 있습니다;
“사간원 대사간 (司諫院 大司諫) 정괄 (鄭适)이 차자 (箚子)를 올리기를,
“공조참의 윤잠 (尹岑) 은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 (黃海道 觀察使)가 되어, 제읍 (諸邑)의 표피 (豹皮), 어교 (魚膠)를 거두어 한명회 (韓明澮) 에게 주고, 또 산양피 (山羊皮)를 경기 관찰사 (京畿 觀察使) 최한경 (崔漢卿) 에게 주었으니, 어찌 방면 (方面)의 관찰사에 임용 (任用)하겠습니까? 청컨대 율( 律)에 의거하여 윤잠은 장 (杖) 80대에 고신 (告身)을 거두고, 그 피물 (皮物)은 호조 (戶曹)로 하여금 구분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명하여 단지 윤잠 을 파직(罷職)하게 하였다.”
이 해 3월에 윤잠은 성균관 대사성 (成均館 大司成) 겸 강원도관찰사로 제수되었는데,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들고 일어났던 것이고, 본인 스스로가 사직을 청하여 강원감사직에서 물러났다 합니다.
이상 내 멋데로 풀어본 우리 할머님네집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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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여운 오타 및 오류 몇개를 편집하였습니다 . 혹 존칭에 관해 제가 무의식중에 표기 잘 못한 것이 있으면 양해 구합니다. 눈에 들어오는데로 바로 잡고 있네요. ^^
다음 두 편엔 휘 숙치 순절공 배위 순흥안씨와 휘 계린 공무공 배위 청주이씨편이 실리겠습니다. 계속하여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스토리가 이어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