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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답하라 1982(응답파리) 6편
-이런 통화 기억나세요?-
지금은 집에 전화가 있어도 가족 모두가 별도로 휴대폰 하나 쯤은 들고 다니는 세상이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갓 스물 82년의 세상은 멀리있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집에 있는 검은 색 전화기 하나였다.
그마저도 자기 집에 살면 주변을 살피지 않고 외부와 통화할 수 있었지만, 서울로 유학 온 친구들은 눈치 봐 가며 하숙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아야 했고, 또 고향집으로 전화라도 한 통화하려면 벚나무 곧게 심어진 명진관 왼편, 안중근 의사의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라 적힌 유묵비 뒷편에 있던 우체국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긴 줄을 서야 했다.
전화 부스라야 고작 두어대 정도의 시외전화 전용 전화기가 놓여 있었고, 우체국 직원이 순서를 알려주면 전화를 들고 급하게 통화하기 바빴던 시절. 통화 최소 단위인 3분의 시간은 왜 그리도 야속하게 빨리 지나가는지. 말할 사연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요금 걱정에 수화기를 놓는 청춘들과 우리들의 어머니는 말로 다 전하지 않아도 알아듣고 전할 수 있었던 텔레파시를 가지고 있는 초인들이었다.
82년 갓 스물의 청춘들에게 전화통화란 짧은 통화 속에서 긴 이야기를 유추하는 독심술이었으며, 미팅 때 만난 친구의 마음을 긴 호흡 속에서 읽어내야 했던 고독한 심리학이기도 했다.
요즘 말로 썸타는 그 또는 그녀(당시에는 대부분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순간은 왜 그리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만 드는지, 혹시라도 거절 당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마음 지우지 못하고 떨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행여 수화기 건너 저편까지 들릴까봐 심호흡 크게 한 후 전화를 걸었던 갓 스물의 청춘들.
또 어쩌면 그렇게도 슬픈 예감처럼 불안한 예감도 틀린 적이 없는지, 그녀의 부모님이 받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전화를 통해 들려 오는 낯선 목소리에 애써 태연한 척 "ㅇㅇㅇ있습니까? 친구 ㅇㅇㅇ라고 하는데요"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했던 우리들 갓 스물의 어리숙했지만 순수하기 그지 없었던 청춘들.
전화로 마음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 그리고 썸인지 아닌지 구분 못하다 불현듯 뜨거운 그 무엇을 느낀 순간, 갓 스물 82년의 청춘들은 거리낌없이 편지지를 꺼내 한자 한자 또박또박 써내려가며 최대한 자신의 마음을 손편지에 담아내려고 긴밤을 하얗게 새우곤 했다. 다음날 아침 구겨버린 종이가 한다발은 되었지만. 그렇게 호흡이 긴 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길었던 호흡 만큼 전달하는 내용의 유효기간도 길게 잡으려 했던 갓 스물 82년의 청춘들.
35년전 그들은 손편지로 약속 장소를 정했고, 어렵게 건 집전화로 약속시간을 확인하면서 사랑을 싹 틔우고 가꿔갔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디지털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날로그적 삶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 당대의 현대인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유효기간이 긴 대화를 하던, 그래서 호흡 긴 대사도(그리고 리엑션도) 참고 기다리며 들을 수 있었던 갓 스물의 청춘들은 어느 덧 모바일 속에서 순간 순간의 호흡 짧은 이야기를 건네면서 존재를 확인하는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가 되었다.
갓 스물 82년의 청춘들은 알파고는 아니었지만, 수십개에서 십수개 정도의 전화번호는 손가락에 외우고 다녔고, 구글과 페이스북의 도움 없이도 가족과 친구들의 생일 정도는 챙겨줄 수 있었으며, 그리고 사랑과 우정을 전하고 확인하기 위해 긴 밤을 글로 채울 줄 알았던 시인이자 소설가들이었다.
▶ 응답파리 7편 - 막걸리
거친 세상이었다. 학교 안에 학생과 교수, 그리고 교직원 외에 머리 짧은 아이들이 있었고 대학에선 그들의 책임자들이 상주할 수 있는 공간을 내주던 이상한 법칙이 작용되던 시절이었다. 날카로워야할 지성은 제몫을 방기한 채 고약한 정권의 매서운 군화발 앞에 스스로 입 다물고 있었던 세상. 그런 세상이 갓 스물 우리가 입학했던 82년의 공간이었다.
그 시절 우리가 가장 자주 마신 술은 막걸리였다. 세상 만큼 거칠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쌀막걸리만큼 목넘김이 시원하지는 않았던 시큼털털한 밀가루 막걸리였다. 그래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 중턱쯤에서 팔았던 밀주는 쌀막걸리가 아닐까하여 두눈 밝히고 찾아 나섰던 시절이기도 했다.
'먹을 쌀도 부족한데 언감생심 술까지' 하는 마음으로 권력은 술도가들에게서 쌀을 포기시켰지만, 여전히 당시 국민들은 25도짜리 두꺼비보다 목넘김이 편했던 밀가루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물론 서울올림픽이 열린 88년, 막걸리는 맥주에게 '국민술'이라는 바통을 넘겨주었지만, 그 전까지 막걸리는 농민들의 피곤을 풀어주던 피로회복제였고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대중들의 친구였다.
그런데 그땐 몰랐었다. 막걸리 몇 잔 마시면 쉽게 취해야했던 이유, 그리고 역한 트림으로 귀가길 버스 안에서 옆자리 승객을 괴롭혔어야했던 이유를. 또 심하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울렁거림을 참으며 집을 향하다 어김없이 목적지 한 정거장쯤 앞에서 갑작스럽게 구토의 기미를 느끼면서 전전긍긍했어야 했던 이유를 말이다.
문무대나 전방부대 입소를 앞두고 학과에서, 그리고 서클과 동문회의 선배와 친구들이 따라주던 막걸리 잔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 없는 찌그러진 양은그릇이었고, 안주는 지금처럼 기름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매일 새우깡은 아니었으며 노란 무가 전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두어 되의 막걸리에 정신줄 놓기 일쑤였고, 역한 트림과 참을 수 없을 만큼 쏠렸던 헛구역질과 구토를 피할 수 없는 생리현상으로 여기면서 갓 스물의 청춘기를 보냈다.
그리고 매일 마시는 막걸리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우리는 포장마차 조명으로 쓰였던 카바이트에게 모든 혐의를 씌운채 막걸리를 시켰고, 학사주점의 동동주를 마셨고, 몰래 만들어 파는 밀주를 체제에 대한 저항 쯤으로 여기며 찾아다녔다.
요즘 나오는 막걸리에선 사라진 트림과 심한 숙취를 그 때는 싼값에 마시는 술이 주는 반작용쯤으로 생각했지만, 당시 마시던 막걸리는 카바이트로 숙성시키지 않았고, 동동주는 막걸리에 커피와 사이다, 때론 콜라와 소주까지 섞었던 학사주점 주인장의 칵테일이었다는 것을 갓 스물 청춘들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갓 스물 82년의 청춘들은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제사와 잔치를 기다리며 정성껏 빚는 술이 막걸리라는 사실을 모른채 흔하게 마시는 값싼 술로만 여겼고, 그저 마시고 취하면 되는 술쯤으로 여기며 살았던 철부지 디오니소스였다.
<사족-막걸리를 위한 변명>
우리가 대학에 입학한 82년, 막걸리업계는 대도시 시장을 두고 알코올 도수 25도짜리 소주와 경쟁을 벌인다. 맥주는 아직 대세가 아닌 만큼 빠르게 성장하는 소주와 한판 승부를 벌여서 도시에서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6도의 알코올 도수를 8도로 올리게 되는데, 이 전략이 오히려 막걸리 시장을 위축시키고 말았다.
농사처럼 수평의 공간에서 이뤄지던 노동 과정에서 마시던 새참은 6도의 막걸리와 8도의 막걸리가 큰 차이가 없었지만 수직의 노동이 주를 이루는 도시에선 알코올 도수 2도 차이가 매우 크게 나타났다. 그 차이는 인사사고로 연결됐고 결국 지하철 및 건물 신축 공사현장의 새참에서 막걸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4년 뒤 도수를 다시 6도로 내렸지만 막걸리의 쇠퇴는 예정된 경로였다. 충분히 숙성시키지 않고 시장에 유통시킨 탓에 역한 트림(위에서 후발효되면서 나타난 현상)은 불가피했으며, 항아리에서 꺼내 주전자로 건네주면서 물을 탄 막걸리는 술의 신뢰도를 떨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90년대 이후,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충분한 숙성 과정을 거친 후 출하되는 막걸리들을 접하면서 과거의 명성을 되찾고는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마시는 우리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취기를 목적으로 막걸리를, 그리고 소주를 술이라는 이름으로 마시고 있다
▶ 응파리 8편
- <광장>과 '헬조선' -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갓 스물 82년의 청춘들이 대학에서 처음 빌려본 책의 첫 문장은 이처럼 동지나해의 묵직한 바다표현으로 시작됐다.
눈에 잡힐 듯한 사실적인 장면들, 그리고 운율을 위해 자주 등장하는 쉼표. 하지만 82년의 현실은 소설이 지닌 형식적 측면을 읽어낼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고, 또 우리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똥 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여있는 남한의 광장과 꼭두각시 뿐, 사람이 없는 북한의 광장 사이에서 번뇌하는 이명준의 고민은, 갓 스물 청춘들에게도 검푸른 바다색 만큼, 진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영웅이 싫었고 평범한 사람이길 바랬던 해방공간의 철학과 대학생 이명준. 한국전쟁의 상흔 속에서 남과 북, 그 어느 쪽도 자신의 조국으로 선택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반도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저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필요로 했으나, 남과 북 그 어느 쪽도 그에게 이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인도 국적의 타고르호를 타고 중립국을 향한 것이다.
요즘은 이 소설의 일부가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능시험에도 나왔다지만, 1960년 가을, 당시 25살의 소설가 최인훈에 의해 발표된 <광장>은 작품의 강한 주제의식 만큼 82년 갓 스물의 청춘들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설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갓 스물 82년의 청춘들은 국정교과서에서 접하지 못했던 소설 속 해방 정국에 대한 설명에서 경악했으며, 그동안 읽었던 책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남한과 북한의 정치 경제적 모순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정신적 공황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광장>은 82년 갓 스물의 청춘들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반도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 그리고 처음으로 가져본 자신만의 근사한 '렌즈'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주인공 이명준이 보여준 선택과 결정 중 가장 큰 충격은 남한도 북한도 선택하지 않았던 포로 석방과정이 아니라, 배의 포스트에 앉아 줄곧 그를 따라오던 두 마리의 갈매기를 두고 스스로 타고르호에서 투신하는 결말부였다.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도, 지식도 일천했던 갓 스물 82년의 청춘들은, 그래서 이명준의 죽음을 설명할 논리도 없이 쓴 소주 삼키며 답없는 논쟁을 벌이기 일쑤였다.
그런데 인생은 이렇게 가혹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을 읽으며 각성된 이성의 힘을 믿게 되었던 갓 스물의 청춘들은 35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낳아 기른 새로운 갓 스물의 청춘들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주지 못해 그들을 동굴과 밀실로 내빼게 만들고 있다.
취업, 결혼, 주택은 갓 스물 82년의 청춘들에겐 시간은 걸려도 실현 가능한 낭만적 이상이었지만, 우리가 낳아 기른 갓 스물의 청춘들에겐 불가능을 넘어선, 그래서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엄혹한 현실일 뿐인 2016년. 더 이상 유행어가 아닌 구체적으로 살아 숨쉬는 단어가 된 '헬조선'은 우리보다 나은 스펙을 갖춘 이명준을 일년에 수천에서 수만명씩 워킹홀레데이 비자를 받아 일본, 호주, 캐나다 등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다.
63년전 이명준은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횡포 속에서 설 곳을 잃어 제3국을 택했다면, 2016년의 갓 스물의 이명준들은 수저의 색깔만이 생존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 이 땅에서, 희망은 커녕 좌절만을 느끼면서 '헬조선'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몇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 한국이야 어떻게 되는 괜찮아. 망하든 말든. 별감정 없어. ...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라면 더 쉬울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2016년 갓 스물의 청춘들이 즐겨 있고 있는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한 장면이란다. 아직 읽지 않은 이 소설이 갓 스물 82년의 청춘들이 읽었던 <광장>만큼의 무게감으로 다가오진 않겠지만, 우리가 나아 기른 청춘들과의 공존을 위한 연결고리를 찾고 싶은 마음에, 서점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 응답파리 9편
미팅편
때가 되어서 먹는 과일을 우리는 제철과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하우스 농법으로 제철을 잃은 과일들이 차고 넘쳐, 오히려 제철을 잃어버린 과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꺼내는 이야기다.
딸기의 제철은 4월말부터 5월. 그리고 참외와 수박은 각각 6~7월과 7~8월이 제철이다. 그런데 2월말부터 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요즘 딸기의 제철은 3월이 되었고, 4월 중순만 넘어서도 아예 시장에서 찾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갓 스물 첫 축제를 기다리며 마음 설레던 청춘들의 82년, 딸기의 제철은 분명 5월이었다. 학기 초부터 자신의 반쪽을 찾는 미팅 섭렵에 나서길 두어 달.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팅일정은 계속되지만, 큐피트의 화살은 좀처럼 원하는 사람에게 꽂히지 않았고, 사랑은커녕 수많은 썸만 나홀로 애태우며 타고 있었던 젊음들.
축제일이 다가올수록 짝을 찾지 못한 청춘들의 조바심은 극에 달했고, 그래서 찾았던 곳 중 하나가 딸기밭이었다. 물론 무턱대고 딸기밭에 간다고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딸기가 제철이라는 미명하에 벌였던 딸기팅이 주목적이었던 청춘들은 자신의 반쪽을 위해 기꺼이 불광동의 딸기밭(지금은 그곳에 딸기밭이 있었던 사실 조차 잊고 살지만)을 찾았으며, 멀게는 안양과 수원으로 먼 소풍을 가기 위해 용산 시외버스터미널을 향하기도 했다.
딸기밭 입장에 얼마의 돈이 들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진 않지만, 그렇게 딸기밭을 향한, 양복바지 줄잡아서 다려 입은 그와 스커트 단정하게 차려입고 뽀족 구두 신은 그녀들은 딸기로 배 채우며 미팅을 즐기던 끝물세대가 되었다.
그 시절 '사랑의 짝대기'는 없었지만, 소지품과 숫자번호로 짝 맞추고, 지루한 탐색전격인 호구조사 끝에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집까지 바래다주는 에티켓 정도는 있었고, 짝 찾지 못한 친구들 걱정에 다음 미팅 섭외하는 '과대표'도 있었던, 갓 스물 82년의 청춘들에겐 나름의 낭만은 찾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이가 빠진 동그라미'를 찾아 헤매는 청춘들의 몸부림이 봄 축제에 국한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짝을 찾지 못할수록 제짝에 대한 희구 열망은 더욱 강해지는 법. 갓 스물의 열정은 4월 벚꽃의 계절, 아직 원에서 궁으로 바뀌지 않았던 창경원에서 이름만 야한 나체팅(나이트 체리섬 미팅, 밤벚꽃미팅)을 즐겼듯이 종묘와 덕수궁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미팅을 이어갔고, 강한 비트음에 몸을 맡기고 싶은 청춘들의 열망을 담아 고고장에서 만남을 갖는 고팅 등으로 수위와 깊이를 달리하며 바리에이션되었다. 심지어 학기말고사를 끝낸 갓 스물 청춘들은 종강을 기념하는 학과의 종강파티를 고팅과 결합시켜, 값싼 종로의 고고장에서 타과와 합동 파티를 진행시키기도 했는데, 그것이 이름 하여 ‘종빙고’, 즉 종강파티를 빙자한 고팅이었다.
이렇게 늘어만 가는 미팅의 숫자만큼 일기장에 적힐 파트너의 전화번호도 늘어갔지만, 사랑은 여전히 일부의 청춘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처럼 쉽게 결실을 맺지는 못했던 것이 그 시절 순진한 청춘들의 일상이었다.
특히 썸에서 사랑으로의 전환은, 열병을 거치지 않고는 이뤄지지 않았으며 그 열병은 정도와 범위에 따라, 어떤 청춘에겐 '눈물 젖은 배겟잇' 소동으로 이어졌고, 또 때론 새우깡에 깡소주 마시는 친구들의 푸념을 들어줘야 하는 슬픈 청춘들의 '술푼' 사연이 되기도 했다.
모두가 스스로 킹카이자 퀸카였지만, 상대방에겐 일부만이 에이스카였고, 또 일부만이 서로가 만족하는 백양카로 인정받았지만, 사랑을 찾지 못해도, 여전히 짝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즐거웠던 것이 갓 스물 청춘들의 82년, 한 여름 태양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던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