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하는 공부는 가면 갈수록 처음같지 않고 오리무중으로 들어가면서 한없이 어려웠지만 애써 다 아는체 하며 세상을 굽어보려하였다. 연애소설에 빠진 급우들을 냉소하고 등하교 때 마주치는 여학생들의 풋풋한 자태를 애써 외면하였다.
급기야는 상급학교의 진학과 앞으로 배워야 할 제도권 공부의 가치마저도 무의미로 다가오며 허무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진실을 벗어난 학교가 싫어졌고 도서관이 좋았지만 어쨌든 등교는 해야만 했다.
이런 나를 형은 일찌감치 포기하였는지 나의 고교진학을 자기 멋대로 정하고 기술학교(5년제 경기공업 고등전문 학교) 기계과로 가라고 강요하였다.
가도 그만 말아도 그만이란 체념으로 형의 뜻을 따른 채 겨우 턱걸이 정도로 입학할 수가 있었지만 입학하자마자 신이 났다.
고등학생에게 대학생 교복을 입힌 채 대학과 흡사한 강의를 하며 선배말고는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를 주는 통에 아주 날아갈 것 같았다. 1년 선배들이 요구하는 신입의례(입학한 뒷날부터 한 달쯤 이어진 쓰잘 데 없는 훈시와 매타작)를 치르고 나서부터는 선배들이 앞서서 자유를 가르쳤다.
아현동 시장 포장집부터 신촌에 이르는 막걸리집을 드나들며 마시는 술과 아무앞에서나 버젓이 피우는 담배가 주는 자유란 여태 기대하며 상상했던 기쁨 그 이상이었다.
그 자유 가운데 가장 으뜸은 장서 가득한 학교 도서관을 형의 간섭없이 마음대로 누릴 수 있었음이고 바깥으로 나가면 일반 대학생들과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써클활동이었다.
맨 처음 학보사 수습기자에 들었고, 흥사단 아카데미에 이어서 불교학생회에 낀 다음에 산악부에도 기웃거릴 수 있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사장 우리 약초꾼들은 아무하고나 쉽게 어울리지 않어... 부정 탈께비 우리덜 행적을 가족한티도 알리지 않는디...."
스멀스멀 이어지던 내 회한을 끊으며 낮게 잦아드는 허씨의 숨소리에 나도 따라 잠이 들었다.
우리의 둥지는 퍽 아늑했던지 침까지 흘리며 자고 난 아침이 아주 참 상쾌하였다.
허씨는 언제 깼는지 벌써 아침밥을 차려놓고 늦잠을 잔 나를 싱그럽게 맞아주었다.
천왕봉 쪽에서 떠 오른 아침해가 따스하면서 새롭기만하다.
해를 등지고 하산길에 나섰다.
오를 때와는 달리 우리는 아주 느리게 뚜벅뿌벅 골로 들었다 산등을 탔다 하면서 더덕과 둥글레 캐 담아 약초 자루를 채웠다.
불일암터에 앉아서 표주박 샘물로 목을 추기며 초여름 한낮에 졸고있는 화개골을 바라보자니 마음이 치오르는 골바람처럼 맑아만진다.
허씨는 어째서 저렇게도 나를 믿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