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입니다. 아주 오랫만에 집으로 왔습니다. 이 나이에도 아직 집이 없는 나는 집이라면 그저 늙은 부모님께서 사시는 시골집이 나의 집일 뿐입니다. 세상이 좋아지니 이런 시골 구석에서도 인터넷을 할 수가 있군요. '집으로'라는 말을 쓰는 순간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몇 해 전 눈물콧물을 질질짜며 본 '집으로'라는 영화와 영화를 평생 사랑해 온 내 친구 '一啄 조희문'이 생각났습니다. 조희문! 그는 저 뿐만 아니라 다른 벗들의 자랑입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가 텔레비젼에 자주 나온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안팎에서 제법 폼을 잡아야 할 젊잖은 친구들도 그를 들먹이며 마누라나 자식들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목에 힘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친구들도 그가 텔레비젼에 나와 주로 얻어터지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는 영화계의 어떤 잇슈가 있을 때 방영되는 토론프로그램에 등장합니다. 그 전에는 가끔 영화평론같은 것도 하더니 어느 무렵부터 사라지더군요. 그가 별을 많이 매긴 영화가 재미가 없거나 흥행에 실패를 한 탓인지 아니면 이제 좀 나이가 들어 영화평을 부탁하기에는 좀 뭣하다는 기자들의 판단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가 어떤 영화에 별을 많이 매긴 것을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아마도 영화사에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혹시나 그가 나온 텔레비젼 토론 프로그램을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그는 그리 말을 잘 하는 편도 아니고, 발음이 분명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그리 세련되게 생기거나 옷차림이 멋진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의 아내와도 잘 압니다. 처음 장가를 가서 살 때부터 아담한 체구에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그의 아내는 항상 통통거리는 말투로 불만을 터트리거나 눈을 반짝이며 그가 온 집안에 늘어놓은 카메라, 영화잡지, 수 많은 책, 비디오테잎 이런 것들에서부터 온갖 구닥다리 물건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거의 치우거나 만지기를 포기한 상태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예쁜 아내가 좀은 가엾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아내가 그를 좀 세련되게 다듬어서 텔레비젼에 내 보낼 만도 하지만 그는 늘 그저 그런 수더분한 모습으로 나타나더군요. 그의 아내에게 그 이유를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주로 얻어터집니다. 그를 토론프로그램에 끌어들이는 방송국의 관계자는 다분히 그것을 목적으로 한 것 같습니다. 때리는 자와 얻어맞는 자가 분명해야 시청자들이 재미있어 할 것 아닙니까? 그런 주제에 그는 꼭 자기가 텔레비젼에 나갈 때 전화를 합니다. 그놈의 토론프로그램이라는 것이 대부분 늦은 밤에 방영되지 않습니까? "뭐하셔?" "응! 그냥 있어" "좀 있다가 텔레비젼 봐" 몇 마디 대화만으로 나는 그가 오늘 또 얻어터지러 가는 구나를 압니다. 그 시간쯤이면 부엉이처럼 밤일을 하는 나는 좀 귀찮지만 또 애꿎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야 합니다. 친구들이 마누라나 자식들에게 자랑할 기회를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숱한 기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과연 자랑을 했는지 좀 비참한 생각을 했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나야 혼자 있으니 뭐 자랑이고 쪽팔림이고 없지만 처음에는 "음~ 내 친구야"라고 하다가 대부분 좀 민망했을 것입니다. 천천히 그리고 어눌하고 불분명한 경상도발음으로 그는 지치지 않고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솔직히 영화야 재미있으면 되지 뭐 그리 복잡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와 토론 상대로 나오는 사람들은 말도 잘하고(여기에서 잘한다는 말을 주로 빨리, 많은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또 모습도 세련되고 보통 사람들이 얼른 공감하는 그리고 좋아하는 말들을 골라서 잘 하더군요. 그러나 그의 말은 뭐 별로 대단한 것 같지도 않고 영화나 영화산업에 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나도 할 만한 그런 내용이기가 십상입니다.
그것 때문에 나는 방송국관계자가 샌드백 역할로 그를 기용했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몇 해 전에는 문득 전화를 해서 으스대는 목소리로 “나 집 한 채 장만 했네.”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평창동 산자락에 이미 2층집을 사들인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이 사람이 무슨 부동산에 재미를 붙였나 싶어서 “또 샀어?”라고 물었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 홈페이지를 만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새 집을 찾아간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마아마하게 방대한 자료가 그것에 들어 있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아주 세련된 대문의 색깔과 예쁘고 깔끔한 문패 때문이었습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 이 방 저 방을 뒤지면서 머잖아 이 집도 조희문이 사는 집답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리 많은 자료들을 정리하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가 깨끗이 정돈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지금 인터넷 동네에 마련한 그의 집은 나의 예상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아무 검색프로그램이나 들어가셔서 “조희문”이라 치시면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엄청 치사한 사나이입니다. 몇 년 전에 영화진흥위원회인지 뭔지 하는 제법 힘있는 듯한 단체의 부위원장을 할 때 그 빽을 믿고 혹시나 영화표 몇 장 얻을 수 있을까하고 은근히 부탁을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돈 주고 봐!"라는 한 마디로 30년이 넘는 우정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힘 좀 있는 친구에게 얻었다고 으스대고 싶은 친구의 순진한 마음을 그리도 잔인하게 짓밟다니! 그는 치사한 인간입니다. 얼른 생각에는 그런 자리라면 영화표 정도는 뒤로 좀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뭐 별로 인기가 없는 것도 좋은데 그리 야박하게 말 할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하도 치사해서 그 일이 있고난 다음부터 당분간 영화는 물론 비디오도 외면했습니다.
그런 나의 저주 탓인지 그는 그 힘 있는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솔직히 좀 고소하다는 생각도 들고, 찔리기도 해서 눈치를 살폈더니 특유의 넉넉한 미소로 아무렇지도 않게 “응~ 싸울거다”라고 했습니다. 싸우다니? 소심한 우리 같은 사람이야 감히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면 좀 흥분하다가 거의 대부분 끽소리 못하고 주저앉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가 얼마나 싸움을 잘 하는 인간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를 쫓아내는 일에 앞장 선 인간들 엄청 고생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반드시 조희문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나는 王保守인 그가 어떻게 해서 DJ 정부에서 그런 자리로 갔는지 처음부터 좀 의아했지만 좀팽이같이 그가 그곳에 가 있으면 영화표는 쉽게 얻을 수 있겠다는 정도로 기분좋아했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순진한 건국대학의 강모교수까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 어째 남의 통시~(경상도 사투리로 변소)에 똥누러가는 것 같지 않나?”라고 했지만 나는 잔머리만 굴렸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는 자뭇 비장한 각오를 한 것 같습니다.
그는 포위공격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 홀로 적진에 들어갔습니다. 마치 황산벌에서 홀로 적진에 뛰어든 관창이나 반굴과 화랑처럼 꿋꿋이 갔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그가 그것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실없는 녀석들은 그저 나같이 영화표나 얻을 궁리를 했고, 운수 좋으면 예쁜 여배우나 탈렌트 구경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 동네에서 일어나는 스캔들 뒷이야기 정도를 직접들을 수 있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나 했습니다.
힘 있는 자리에서 쫓겨난 그는 다시 대학으로 복직할 때까지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는 조용히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나중에 홈페이지를 찾아가 본 나는 그 당시 그가 얼마나 힘든 싸움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좀 더 그에 관한 이해를 했던 순간에도, 나는 그의 행동이 大勢가 그렇다 해도 누군가가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志士的 사명감이라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홈페이지에서 그를 공격했던 사람들의 글과 그의 주장을 꼼꼼히 읽고 난 다음 나는 처음으로 그를 생각하며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글도 원문 그대로 꼼꼼히 챙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쪽의 주장이 옳은지에 관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나는 내가 자랑하는 벗이 오랜 시간을 홀로 싸우고 있었음에도 고작 영화표 몇 장에 연연했던 것이 부끄러웠을 뿐입니다.
그는 몇 해를 넘기는 법정 싸움 끝에 결국은 승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간단히 그 소감을 피력했습니다. “이겼다. 그러나 돈은 한 푼도 못 건졌다” 그는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지도 않았고, 의기양양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파이터였습니다. 진정한 파이터는 싸움을 먼저 걸지 않습니다. 그러나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를 피하지도 않습니다. 싸우는 도중이나 싸움이 끝난 후에도 절대로 흥분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고요한 물처럼 담담히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흐름에 따라갑니다. 어린 시절에 제법 싸움질에 이골이 났던 나는 조금은 파이터를 구분합니다. 비로소 나는 그가 왜 맷집좋게 텔레비전토론에 나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와 나는 소년시절에 만났습니다. 내 고향 상주는 그리 벽촌은 아니지만 시골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지금은 당당한 사나이로 변한 당시의 그는 또래 가운데 비교적 작은 축에 속했습니다. 오래된 당시의 사진을 보면 그는 통통한 뺨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닌 귀여운 소년입니다. 내 기억 속의 그는 제법 큰 축에 속했던 내가 자전거 앞자리에 싣고 다닐 만큼 작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보호해주고 싶었던 친구였습니다. 공부를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재능이 특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래라도 좀 큰 녀석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다른 작은 아이들과 달리 단지 그는 아무나와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습니다.
당시의 상주는 우리나라에서 자전거를 가장 많이 타는 고장이라 하였습니다. 아직도 다리가 짧아서 안장에 올라타지 못하는 꼬마도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는 안장을 잡은 채 짧은 다리를 자전거 앞부분에 밀어 넣고 빠른 속도로 달렸습니다. 흡사 몽골의 아이들이 준마의 배에 붙어서 이리저리 마음먹은 대로 초원을 달리는 것처럼 상주의 아이들은 여자아이나 남자아이를 가리지 않고 자전거를 탈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자전거를 배운 아이들은 너른 길을 마다하고 일부러 논둑길이나 철길을 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아득한 들판의 논둑길과 철길을 지나가 산밑에 자리를 잡은 제법 큰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찾아간 그의 방에는 우리 같은 시골 아이들에게 너무도 생소하고 놀라운 풍경이 있었습니다. 벽 한쪽에 거의 우리 키 만큼의 높이로 쌓인 각종 영화포스터, 일본잡지 스크린, 서양의 영화잡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또래들이 영화와의 인연이래야 산골에 찾아오는 포장극장이나 전교생이 함께 가는 단체관람 또는 일요일 오후에 5원 정도로 기억되는 관람료를 내고 들어가는 문화교실 정도였지요.
그것은 작은 소도시 아이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생활기록부 작성을 위해 가끔 조사를 할 때 취미라는 항목에 대부분이 만화책 나부랭이나 보는 주제에 독서라고 쓰든가, 흔해빠진 우표 열 댓장 모아놓고 우표수집이라 쓰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던 우리에게 그것은 최초로 콜렉션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충격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외국배우라고는 돌아온 외팔이의 왕유밖에 모르던 우리에게, 듣도 보도 못한 외국배우의 이름을 줄줄이 꿰주었으나 무슨 말인지 그것이 나와 관계가 있는지 도대체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영화의 길을 갔습니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와 나는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났습니다. 어느 신문사의 기자로 근무하던 그와 음료수회사의 영업사원이던 나는 수원에서 자주 만나 작은 추어탕집에서 점심을 먹곤 했습니다. 지나는 길에 음료수나 판촉물로 나온 컵과 같은 나부랭이를 들고 그의 집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그의 아내가 지금은 대학생이 되어 제 아비보다 훨씬 큰 아들을 힘겹게 등에 매달고(업었다고 말하기에는 도저히 어울리는지 않는 폼이니까) 시장을 다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놈들 그걸 알면 제 엄마에게 잘해야 할낀데!
그의 아내는 아들 둘을 낳았고, 여전히 커다란 세 남자들 틈에서 통통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북향이던 평창동에서 동남향인 지금의 구기동집으로 이사를 한 이들 부부는 요즈음 동행하는 일이 잦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참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조희문은 그의 아내에게 커다란 아들을 맡겨 둔 채로 바쁘게 지냈습니다. 보기와는 전혀 달리 그의 아내는 두 아들과 조희문이 엄청나게 쌓아 둔 온갖 자료들을 지켰습니다. 보기와 다르다는 표현은 그녀가 집안보다 밖에서 우아한 표정으로 분위기 있는 찻집에 앉아 있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지난 해 겨울 나는 그의 아내와 그를 꼭 닮은 작은 아들을 데리고 북경을 다녀왔지요. 어느 새 흰머리가 제법 보이는 그의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처럼 한 옥타브 높은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반짝거리는 눈이 매력적입니다. 풍문에는 결혼자금을 趙熙文이 횡령하여 모두 낡은 영사기나 카메라 같은 것을 샀다고 합니다만, 아직도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로 趙熙文이 아내에게 평생 눈치를 보고 사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이 세상에서 우직한 파이터 趙熙文을 가장 꼼짝하지 못하게 제압하는 사람은 그의 아내입니다. 그의 아내는 趙熙文이 열 마디 정도 말을 하면 한 마디 정도로 간단히 제압을 합니다. 그렇다고 매몰차거나 기품없이 대드는 것은 아닙니다.
몇 년 전에 고등학교에 다니던 내 딸아이 쨔쨔가 영화에 빠져서 허우적거린 적이 있습니다. 대학입시를 앞 둔 주제에 암만 봐도 물에 물탄 것 같은 프랑스영화나 좀 촌스러워 보이는 제3세계권의 영화를 빌려와서 밤새 들여다보는 바람에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나도 짜증이 났습니다. 게다가 학교에서 영화동아리에 가입하여 회지를 낸다고 조희문을 인터뷰하겠다고 해서 딸을 데리고 집으로 찾아 갔습니다. 딴엔 준비를 했답시고 조희문을 앉혀 놓고 질문을 하는 딸아이를 지켜보던 조희문이 좀 답답하던지 노트를 빼앗아 자기가 직접 묻고 대답하는 글을 썼습니다. 곁에 있던 그의 아내는 그것을 보고 대뜸 일침을 놓았습니다.
“박사가 뭐 그래?”
그의 아내는 딸아이의 무안해하는 심정과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남편을 그렇게 나무랐습니다. 좀처럼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던 시건방 9단짜리 딸아이가 돌아오는 길에 “아빠! 그 아주머니 참 이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조희문으로 인해 시작된 내 딸의 영화사랑은 끝이 났습니다. 그의 집에 있던 수많은 영화에 관한 자료는 영화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조희문은 우리나라에서 영화학박사 제1호입니다. 이것은 그 뒤로 나온 다른 영화학박사는 누구도 제1호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영화계에서 ‘王保守’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왜 ‘王保守’라는 소리를 듣는지 잘 모릅니다. 그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스크린쿼터제도의 존속 또는 변경 여부에 관한 논쟁에서 과감한 철폐를 주장했습니다. 보수란 기존의 가치관이나 제도를 지키려하는 쪽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나는 조희문의 주장이 왜 보수파의 견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법 유명한 영화인들이 모두 머리에 띠를 두르고 반대를 할 때 조희문은 그에게 주어진 지면을 이용하여 거의 홀로 전면개방을 주장했습니다.
내 친구 조희문은 그렇게 모두가 가는 길이라 해서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王保守라기보다는 아주 치밀한 현실주의자이자 미래지향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주로 ‘朝中東’에 글을 싣습니다. 朝中東에서만 그에게 지면을 할애하는지 아니면 그가 다른 신문에 일부러 글을 싣지 않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의 글에는 어려운 단어가 거의 없습니다. 그는 쉬운 말로 쉽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문성근이나 명계남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들이 정치에 맹렬히 참여하여 아주 선동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과 조희문은 태생이 다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이 조희문을 공격한다는 이유 때문도 아닙니다. 조희문이 그들을 싫어하는 것은 그들이 현실적이거나 미래지향적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지난 해 나는 공덕동 사무실에서 숱한 밤을 새우고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에어콘이 들어오지 않아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아도 찌는 듯한 늦은 밤에 가끔 그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때로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그는 9층까지 터벅터벅 걸어서 올라옵니다. 우리는 윗옷을 훌러덩 벗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로 두 세 시간을 가볍게 넘깁니다. 주로 내가 묻는 말에 그는 천천히 대답을 합니다. 때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나의 상상에도 그는 귀를 기울이고 찬탄을 보냅니다. 내 말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대견해서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목적도 목표도 없는 나의 작업은 그와의 토론을 통해 점차 구체화됩니다. 지극히 장황했던 내 글로 그의 유려한 문체를 본받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나는 그런 그가 좋습니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호를 지어주게”라는 말을 불쑥 했습니다. 그러나 무려 1년이 지나도록 그의 호를 붙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밤을 새우다가 갑자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몽롱하던 의식 속에 나는 드디어 그의 지난 행태와 지금의 모습 그리고 앞날을 아우르는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얼른 일어나 메모를 하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한 낮이 되어 일어나 메모장을 보니 두 글자가 적혀있었습니다. 일탁(一啄)!
그 어원은 ‘줄탁동시(茁啄同時)’라는 禪宗의 가르침입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습니다. 스무하루가 되면 부화를 마친 병아리들이 껍질을 깨고 나옵니다. 아직 기운이 모자란 병아리에게는 그 껍질을 깬다는 것은 사활을 건 투쟁입니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 곧 ‘茁’입니다. 그러나 어미닭은 짐짓 모른체합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이곳저곳을 부리로 쪼던 병아리가 드디어 약한 곳을 찾아 껍질을 깨는 순간 어미닭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굳센 부리로 그곳을 단 한 번 쪼아줍니다. 어미닭이 그렇게 단 한 번 쪼는 것을 ‘啄’이라 합니다. 병아리의 ‘茁’과 어미닭의 ‘啄’이 만나는 그 짧은 순간을 ‘茁啄同時’라 합니다.
그는 오랜 홍안의 소년시절부터 영화를 사랑하던 ‘茁’의 시기를 지나왔습니다. 초조하게 서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이 해야 할 노력을 게을리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인고의 세월을 넘어 그는 제1호 영화학박사가 되었고, 아주 느릿하게 세상을 바라보다가 어느 한 순간에 엄청난 내공이 실린 ‘一啄’을 서슴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는 여전히 자기가 쪼아야 할 곳을 둔탁한 그 부리로 쪼아댈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쪼인 상대는 누구도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상처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얻는 계기가 될 곳입니다. 공교롭게도 '일탁'이라는 호를 주고받은지 몇일 후 그는 상명대학교 예술대학의 학장이 되었습니다.
40대의 끝 무렵에 접어 든 우리는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사랑을 말하고, 아직도 기품을 부러워하고, 아직도 자신의 소임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치기어린 만용으로 비춰지는 것은 홍안의 소년이었던 시절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홀로 사는 벗을 염려하여 그는 작은 소형차를 타고 그의 아내와 가끔씩 나의 암자나 사무실을 찾아옵니다. 그의 아내는 가끔씩 김치통을 들고 옵니다. 나는 김치맛보다 그들 부부의 우정이 주는 맛을 라면과 함께 즐깁니다. 어느 주말에는 아내와 함께 내가 사는 동네의 감자탕집을 찾아옵니다. 나이를 먹으며 아내와 함께 하는 모습이 점차 늘어나 보기 좋은 내 친구 조희문은 여전히 나와 내 벗들의 자랑입니다.
이 사람아! 모처럼 고향에 와서 내 부탁할 말이 꼭 하나 있다네. 다 좋은데 약속시간 좀 지키게나. 어떤 사람이 허구한 날 나보고 약속시간 어기는 것이 상주사람들 특징이라 하네. 나 욕먹는 거야 도리가 없지만 고향사람 통째로 욕먹어서야 되겠는가?
첫댓글정말 소중한 친구를 두셨군요... 저도 간밤에 한 친구로부터 멜을 하나 받았습니다. 요즘 내가 연락이 뜸해서 많이 걱정하고 있었는지 항상 힘이 되주지 못하는 자신을 많이 미안해 하더군요... 글나 저 또한 좋은 소식을 못전해주어 늘 미안할 뿐이랍니다~~~ 어릴적의 친구는 아니지만 만난지 벌써 14년이 됐네요...
첫댓글 정말 소중한 친구를 두셨군요... 저도 간밤에 한 친구로부터 멜을 하나 받았습니다. 요즘 내가 연락이 뜸해서 많이 걱정하고 있었는지 항상 힘이 되주지 못하는 자신을 많이 미안해 하더군요... 글나 저 또한 좋은 소식을 못전해주어 늘 미안할 뿐이랍니다~~~ 어릴적의 친구는 아니지만 만난지 벌써 14년이 됐네요...
푸른바다님! 그리운 사람은 망서리지 말고 즉시 만나야 합니다. 나이들어 생각하니 그렇더군요. 바빠서~라는 건 핑계더군요. 무관심의 다른 말!
세월이 갈수록 피폐하고 늙어가는 사람이 있는반면,갈수록 정기롭고 기품이 있는사람이 있습니다.바로 일탁님이 그렇습니다.고귀한 벗과 그를 이리 아끼고 이해하는 묵계님이 있다는것이, 혼탁한 세상에 참 인생의 빛을 보는듯 합니다.두분 곱게 곱게 지내세요.아직은 청춘이십니다.
묵계님, 저 푸른바람입니다... 바다가 아니고요... 그리고 피천득님의 "인연"을 아십니까?
죄송합니다. '靑風'님! 순전히 저의 능수능란한 오타실력(?) 때문입니다. 피천득의 인연은 본 듯 하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좀 알려주시죠?
조희문교수님 홈피 가서 패왕별희 영화평 대담 읽고 왔습니다. 그리고 서**님이 올리신 중국영화시장에 관한 보고서도 일별... 상주는 누에뿐 아니라 인재도 많이 내는 고장인가봐요.
'人材'가 아니라 '人災'랍니다. 장~님. 지금 장~님께서 사시던 마포와 아현동에는 눈발이 내립니다. 훨~ 훨~. 근데 이런 글쓰고 그집 마나님께 혼나지 않을까요? 왠지 김치공급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드는군요.
묵계님, 인연의 이야기는 나중에 마포에서 시래기국과 해드리면 안되나요? 좀 비밀이 요합니다~~~
좋지요. 푸른바람님! 지금 서울계십니까? 언제가 좋으신지요?
묵계님, 저 아직 청도에 있고요... 1월말쯤에 들어갑니다... 예전에 제가 가끔 기사를 써서 페이지 땜방을 했던 농구잡지사가 불교방송 앞에 있어서 책 나온후에 기사료는 안주고 소주한잔으로 입막음 할때 자주 갔었는데 혹 그 부근이신가요?
맞슴다. 공덕오거리 마포경찰서쪽입니다. 공짜로 주는 시래기맛이 제대로 입니다. 꿀꺽~
묵계님의 요즘글은 옥편없이 볼 수 있어 편합니다. 그렇다고 과거글에 대한 불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칙과 기준, 깨끗함, 그리고 미래지향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계시는 왕보수이신데요. 친구에 대한 진한 애정이 있어 가슴이 따땄했습니다.
북청송님! 저도 옥편없이 쓰는 것이 편하답니다. 머~쓱
도심속의 녹지대. 며칠전 스-님이 말씀하신-극찬하신- 분이시네요. 닥종이로 만든 우리만화가 느껴집니다. 어매니티가 잘 이루어진 우리까페. 자랑스럽습니다. 고맙게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