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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조 단심가가 정몽주의 작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정몽주를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자리 매김하는 결정적 단서이다. 과연 그렇가? 이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전 부터 있어 왔으나, 주장하시는 분들이 이미 고인(지헌영, 강전섭선생)이 되셨다. 본인은 아무래도 단심가와 하여가가 거짓이라고 믿어 졌다. 생각해보라, 어찌 구테타를 하는 마당에 한가롭게 술잔을 나누며 시조나 읊을 수 있나? 그리고 정몽주와 이방원이와의 나이 차가 얼마나인데 대작할 수 있나. 그리고 설령 그렇게 했다손 치더라도 이걸 이방원이 말하지 않고 누가 기록할 수 있을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이 있어, 문헌을 찾아 자료조사하던 중 이미 60년대 지헌영(충남대 교수) 님과 그 제자 강전섭님(대전실업대 교수)이 '80년대 논문으로 발표한 것을 찾았으나, 앞의 본인과 같은 주장으로 거짓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강전섭님은 세세한 자료를 제시하며 거짓임을 밝혔지만 미흡하다며, 후에 누군가 밝혀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본인은 이에 힘얻어 강전섭님의 자료들을 하나씩 원전으로 확인하여 드디어 확신할 수 있는 결과를 얻었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나타나는 모든 고서와 그리고 정몽주의 문집을 쌑쌑이 살폈고 시조 문학의 시원부터 국문학 장를를 섭련한 결과였다. 그러기에 확실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물론 고려 말의 정몽주의 행적도 살폈다.
본인은 이 두분의 연구 실적을 토대로 정몽주의 단심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하였기에 그 공과는 두 분에게 돌리고 싶다. 결론은 위작이라는 것이다. 위작자는 심광세이고 심광세는 악의가 없이 어린이들이 감계될 역사 위인 이야기를 쉬운 노랫말로 부르도록 고안해 낸 것이해동악부이고 여기서 단심가는 그져 별 중요성을 두지 않고 일화정도로 소개하고 꾸민 이야기다. 악부형태의 시조들이 유행하였다. 그 앞에 도산 12곡을 만든 퇴계선생도 이러한 형태를 이미 취하셨고 율곡 선생도 구산 12곡을 지으셨다. 바로 심광세가 퇴계선생의 도산12곡에서 이를 표방하여 만든 것이 해동악부이다. 발문은 그 내용의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우리에게 시조문학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생겨난 것이다. 그 이유는 소리 글자인 훈민정음으로 우리 말을 표기하고부터 나타는 독특한 형태이다. 그럼 고려말의 선현들의 시조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할 수 있는데, 이 또한 가객 김천택이 청구영언에서 위작한 것들이다. 이유는 시조라는 용어도 이세춘이 처음 영조 때 사용하였다. 가객 김천택의 영구영언에는 작자 미상작이 많이 실려있고, 고려 말 충신의 작품은 한 분이 한 수만 실려있는데, 유일하게 이조년의 시조만 2수 있다. 책의 권위과 흥미를 돋우려고 고려 말의 선현들의 이름을 붙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시조에 대한 시원을 명학하게 밝히는 학자는 없고 모두 추측성일 뿐인데, 고려 말의 시조가 시조의 시원을 밝히는데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본인은 고려 말 선현들의 시조가 위작이라는데 처음 주장하는 사람으로 그 입증자료는 그 분들의 문집이다. 혹자는 문집에는 훈민정음 (한글)이 쓰지 않는다고 하나, 그럼 어떻게 글자없이 400년을 구전으로만 유지되어 왔느냐는 의문을 풀 수 없다. 그것도 한 분의 시조가 아니고 많은 선현들의 시조가 단, 한 수 씩 전해 진다는게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하여가는 퇴계선생의 도산 12곡 중 제 1곡에 나타나는 것을 약간 객색했을 뿐이고, 단심가의 "이몸이 죽고죽어" 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들의 음률의 반복적 사용은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장육가(원조는 중국에서 발생)의 전형이며 하여가와 단심가 이 둘을 하나의 작품으로 합쳐 놓으면 하나의 장육가이다. 여기서 심광세는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도산12곡 중 1곡을 한자로 바꾸어 놓고 단심가 또한 한자로 쓰여있다. 한 사람이 지은 것이 분명하다. 심광세가 분리하여 이방원과 정몽주의 작이라고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예시한 것이다. "님향한 일편 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는 당시 기생들이 주로 읊던 노랫말이다. 성삼문의 시조에도 똑 같이 등장한다.
심광세가 여기에서 힌트 얻어 그 자신의 고백대로 어린이에게 감계(교훈)될 내용들을 노래와 무용을 하면서 쉽게 익힐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심광세의 해동악부다. 임진왜란으로 백성들의 민심이 떠날 때로 떠난 조선에서는 백성의 충성심 결집을 위해 정몽주의 단심가를 적극 보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몽주 문집의 발간 변천을 보면 극명하게 나타난다. 충분한 고증자료를 거쳤기에 누구라도 정당한 입증자료를 제시하며 이의를 달면 이에 기꺼이 응할 준비가 이뤄졌다. 그럼 우선 수필형식으로 적어가기로 한다.
고강전섭선생은 문헌비판에 독보적인 분이었다. 우리나라는 '70년대 초 문헌 비판이란 학문이 싹트는 가 하더니 사라졌다. 외국에서는 세익스피어 작품의 글자가 소문로 되어있느냐 대문자로 되어있으냐 가지고도 혹독한 논쟁을 한다. 이유는 거짓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거짓이 발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그 많은 자료를 어떻게 수집하고 정리하셨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워낙 실력이 출중하여, 지방 국립대 국문과 1회 졸업생으로 그 대학 교수로 임용되려는데 그 곳 후배 교수들이 보이코트했다고 알려진 분이다, 그래서 당시 실업초급대학에 재직하셨지만 선생의 연구실적은 참으로 놀라웠다. 지금처럼 연구비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문헌비판은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환영은 커녕 냉대받는 학문이다.
어떤 이들은 교수라는 이름으로, 특정 문중의 거짓 자료를 토대로 위인화시켜 거금을 받는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문헌비판은 그들로 부터 비난의 대상이기에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잘 못된 사실을 제대로 밝혀 바로잡는 것이 학문의 길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분이다. 본인은 그 분을 만나뵙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쓰는 것은 자료조사를 하는 과정에서그 분의 논문을 보고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방에 계시기에 우선 전화로 인사드리니 사모님께서 받으시며 썩 기분이 좋은 반응이 아니었다. 어떻게 되기에 전화하느냐고 퉁명스러우셨다. 자초지종을 말씀을 드리니 돌아가신지 2년되었다며, 그 후부터는 친절히 말씀도 해주시며 소장자료들이 있으니 집으로 필요하면 방문하라고 하셨다. 사모님 또한 학문을 존중하시는 분이셨다.
단심가와 하여가가가 위작이라는 증거는 이미 왕조실록에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정몽주가 살해되던 당시의 전후 상황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태종 이방원은 자신이 늙어감에 따라 다음에 누군가 자신과 같이 나라를 뒤엎으면 어떻하나에 우려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정몽주같은 충신(?)이 앞으로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자기와 한패였던 정몽주와 정도전이었는데 이 둘을 모두 죽었으니 회한이 남달랐을 것이다. 정도전을 구하기 위해 정몽주를 죽인 것에 대한 후회가 컷다. 정도전은 당시 정몽주에 의해 감옥에 갇혀있었고 이를 구하려 정몽주를 살해했는데, 그런 정도전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믿었다. 현실적으로 죽이려 하지 않았다고 백번 양보해도 이방원을 비롯한 동복 형제들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 정도전에 대한 적개심을 떠올리며 정몽주를 죽인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래서 정몽주를 복권시키고 정몽주의 문집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 갈 대목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부관으로 각전투에서 이성계를 따라 다니며 이성계에게는 둘도 없는 충신이었다. 물론 당시는 정도전 이방원과 같은 무리였다. 이성계일파인 정도전 이방원은 고려왕이 실질적 권한이 없는 명목상의 왕으로 만들고 자기들이 조정할 수 있는 공양왕 (이성계의 조카 사위)을 세우는데 정몽주는 앞장섰다. 사전개혁도 말이 개혁이지 실제로는 당시 부패한 승려들의 사찰의 토지와 부패 권세가의 토지를 빼앗아 자기들이 갖는 것이었지 실질적으로 농민에게 돌아간 토지는 없다고 보는 사가들이 있다. 최근에서도 부정 축재자들의 재산 몰수를 보면 명약관화한 것이다.
공양왕 추대는 고려의 왕실의 혈통을 부정하기 위해 이뤄진 사건이다. 전제개혁이 고려왕실을 부정하기 위한 경제적 조치였다면 공양왕 옹립은 그 정치적 조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사건에 정몽주가 중용한 위치에 있으므로 과연 그가 고려왕실을 위해 절의를 다해 죽었던 가하는 점은 의심스럽다. 훗날 사림파 내부에도 이 당시에 정몽주가 취했던 행동을 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정몽주는 그 댓가로 우공신 아홉명을 뽑는 9공신의 지위를 얻어 많은 토지를 지급받았다. 그리고 이성계가 문하시중일 때 그 밑에서 수문하시중의 자리를 했다. 이 때까지 이성계와 한무리로서 잘 지내다가 공양왕의 신임을 얻어 이성계와 동열의 문하시중이 되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 때부터 차츰 정도전의 행태를 수상히 여겨 그를 감옥에 투옥시키고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던 중 살해 당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진술에도 조선은 두 정 즉 정몽주와 정도전의 공이 크다고 증언하고는 것이 태조실록에 나온다.
그러므로, 태종 이방원은 노후가 되어, 자신들에게 충성을 다하던 정몽주와 정도전의 행실을 회고하며 정몽주에 대한 미안함과 정도전에 대한 치떨리는 배신감을 중첩하며 정몽주가 자기 아버지에게 보였던 충성을 후세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그에 대한 행적을 최대한 수집하여 문집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그런데도 그 당시 문집에는 정몽주와 자신만이 나눈 하여가와 단심가에 대한 자료는 없다. 왜 그렇가? 정몽주를 찬양하여 그 본을 받기 위한 목적인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귀감 중의 귀감의 자료를 숨기었나? 그렇다면 단둘이서 나눳다는 이야기는 누구로부터 발설되었는가? 죽은 정몽주가 꿈에서 나타나 실토하였는가? 정몽주는 꿈 이야기와 밀접한 이야기는 이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죽은지 225년 후에 환생하여 심광세에게 실토라도 했단 말인가?
하여가와 단심가 이야기는 죽은 지 225년 후인 1617년 심광세가 지은 어린이용 학습 노래에 맞춰 율동하며 쉽게 익히도록 한 해동악부 풍세악편에 처음 나타난다. 풍세악(風世惡) 이란 세태가 나쁘게 돌아간다 라는 의미인데 정몽주가 말했다고 썼다.
심광세의 의도는 정몽주의 행동이 비겁한 것으로 기술했다. 즉, 진유( 참 선비)가 아니다라고 맨 앞에서 시작한다. 오히려 정몽주의 시종을 볻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정몽주는 당시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므로 당연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하지만, 정몽주 시종(2명)들은 하찮은 이들로 목숨을 버릴 이유가 없는데도 상관인 정몽주가 철퇴를 맞고 말에서 떨어지자 정몽주를 몸으로 감쌓아 안아 상관인 정몽주를 몸으로 막으려다 함께 맞아 죽었으니 그 충성심이 정몽주에 비교할 게 아니라는 취지이다.
그러니 이런 미천한 신분의 백성도 모시는 사람을 위해 목슴을 받쳤으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임금 이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치라는 감계의 글이었다. 여기서는 오히려 정몽주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자주 들리는 친구집에 갔다가 친구가 없자 뜰의 꽃에 가서 춤추며 친구부인에게 술 가져오라고 하는 등 민망스런 정몽주의 행적을 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도 나온다. 심광세가 성현의 용재총화를 보고 쓴 것이다. 그러면서 정몽주가 풍세악이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다음에 해동악부 사본을 올려가며 세세히 기술하련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정몽주가 고려 충신으로 확고부동하게 이르게 하는 자료가 되고, 그 시종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으니, 아이러니다. 물론 심광세의 해동악부 발문 자체가 아이러니 한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을 본인이 발견했다. 시리즈를 기대하시라!
그럼 다음에
첫댓글 마치 역사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언젠가 전화로 이야기 들은바 있고 브로구에 잠깐 훌터보기도 했습니다
단심가 하여가가 위작이란 예긴 처음 듣습니다 우리는 책에 있는대로 알고있는 수순이니
아우님의 깊이 있는 연구에 귀가 번쩍 ,,,관심가지고 읽고 있습니다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먼 옛날의 사건으로 책에서 배운대로 암기하고 있는데 위작이라니 새삼 관심이 생깁니다. 앞으로 시리즈로 밝히신다니 많이 기다려집니다.
출석체크 왔다가 긴 내용을 보고 갑니다.역사속에도 너무나 허와 실이 난무하고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의증의 역사가 역사를 장식하니 개탄할 일입니다.아이러니한 내용들 시원히 밝혀지는 날이 꼭 오길 기다려 봅니다.내용 글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