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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제임스 성경 팩트 체크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35)
여러분도 잘 아시는 김승규 장로님은 법무부 장관과 국정원 원장을 지낸 분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목사 뺨칠 만큼 신앙이나 인품이 훌륭하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다문화TV에서 방송한 제 설교를 듣고 비서인 허작 목사님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오셨습니다.
목사님, 나는 변 목사님의 설교 「왜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할까?」가 참 명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듣고 또 들어보면 좋은 설교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디모데후서 4장 6-8절을 참 좋아하는데 옛날에는 '믿음을 지켰으니'가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의 말씀인지 늘 궁금했어요. 오늘 이 설교를 다시 들어보니 정말 성경 전체가 들어있는 참 좋은 설교네요. 이 설교를 가지고 행함을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기도 많이 해야겠습니다. - 김승규 드림-
이 설교는 제가 최고로 꼽는 설교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안 중요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 답답했습니다. 그랬던 터라, 이 문자가 저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로마서 8장 2절에 나오는 해방의 정확한 의미를 파헤지는 설교를 했는데 그 핵심 내용은 다음가 같습니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해방'은 정확히 어떤 것일까요?
많은 이들이 이 해방이 무슨 뜻인지 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 정확한 의미를 놓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저는 해방의 의미를 깨달은 후에도 균형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2024년 6월 20일 아침기도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의 의미를 정확히 캐치하고 균형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네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말한 "해방"은 죄의 지배에서 자유케 된 실제적인 해방이다!
먼저, 저는 루터의 『노예의지』라는 책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라는 책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루터의 『노예의지』라는 책이 틀렸고,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라는 책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책 내용이 아니라 제목을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었고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따먹은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로 스스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인간의 자유의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에는 자유로웠고 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자유의지가 있지만 마치 노예의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7장은 바로 이런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2절에서 말한 "해방"도 정확히 이 상태에서의 해방입니다. 7장은 죄의 법이 룰처럼 작용하며 사람을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그것을 죄의 법이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8장 2절에서 죄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했습니다. 노예의지처럼 되어버린 우리의 의지를 자유의지로 회복시켜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방'입니다!
이것은 8장 1절의 "이제는"이 7장 6절을 받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도 증명이 됩니다. 6절은 5절고 다른 상태이고, 5절고 같은 상태를 보여준 것이 7-13절뿐 아니라 14-25절이기 때문입니다. 이 중 뒤 단락은 죄의 법 아래서 노예의지를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이고 8장 1-2절은 그 반대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해방'은 실제로 노예의지를 갖고 있는 것 같은 상태에서의 해방입니다.
또, 이것은 8장 1절의 "이제는"이 7장 6절뿐 아니라 25절 전반절을 받고 있다는 것을 통해 다시 한번 증명이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왜냐하면 그 전 절이 노예의지를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8장 2절의 "해방"은 노예의지와 같은 상태에서의 해방입니다.
한편, 이것은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해방이고 참 해방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태생적으로 다음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15-20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는 이 구절들을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타락한 아담의 후예인 전 인류의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해방은 이 상태에서의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해방입니다. 또한, 인류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놀라운 해방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말한 "해방"을 과도하게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저는 사람들이 바울이 말한 해방을 실제보다 과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몇몇 성경구절들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에스겔은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겔36:27)라고 예언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한 후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8:9)라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게다가, "해방"이라는 단어도 느낌이 강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해방"을 성령을 믿고 의지할 때 죄를 이기고 순종하는 상태가 된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방"은 죄를 이기고 순종하는 상태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로, 만약 우리에게 그런 해방이 주어졌다면 죄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해방되기 전인 일제시대 때는 독립운동을 하며 싸웠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후에는 싸울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바울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습니다. 즉, 싸웠습니다. 우리도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해방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또, 만약 그런 해방이 주어졌다면 모든 신자가 다 성화되고 다 천국에 가야 합니다.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요? 그러므로 해방에 대한 그런 견해는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해방"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죄를 이기고 순종하는 상태가 된 것이 아니라 죄르 이길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해방은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해방이 되었어도 필히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겠다고 진심으로 결단해도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며 살지만 우발적으로 또는 일시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방을 이런 죄에서까지 자유케 된 것처럼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셋째로, 바울이 말한 "해방"은 성령을 따르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으로 인도한다!
'해방'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입니다(마5:20). 참 신자는 모두 이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들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뿐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똑같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따르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동적으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반드시 해방뿐 아니라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할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은 성도들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와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원어에는 현재시제)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의 이 상태에 근거해서, 로마서를 받은 후에는 더욱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에 근거해서 8장 31-39절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해방"의 의미를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으로 축소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해방된 신자들에 대해, 바울처럼 그들 대부분이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로마서에서처럼 칭의와 성화와 견인의 교리가 성경대로 선포될 때만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타협하지 않고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교회 선택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다음 두 구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분은 "생명의 성령"이란 불리는 성령님입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거듭남으로 새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해방과 거듭남을 같은 것으로 보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거듭난 자들에 대해 뭐라고 말했습니까?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한일서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요일 2:15-17, 24, 28, 3:3, 5:16-17). 그러면서도, 동시에 거듭난 신자들에게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고, 세상을 이겨야 한다가 아니라 세상을 이기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해방"을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과 완전히 분리시키지 말고 신자들이 대개는 그로 인해 그렇게 살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와 전망을 가져야 합니다. 즉, "해방"과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 사이에 불연속성뿐 아니라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방의 의미를 너무 약화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말한 대로 이것은 로마서나 요한일서처럼 칭의와 성화와 견인의 교리가 바르게 선포될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성경대로 올바른 진리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나 요한이 가진 긍정적인 기대와 전망을, 자신과 대다수 성도들을 상대로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이것이 '해방'을 이해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균형입니다! 할렐루야!
넷째로, "해방"되었다고 죄에 대한 승리와 순종이 반드시 쉬운 것은 아니다!
하버드를 졸업한 허대니 목사님이나 서울대를 졸업한 이정우 목사님 사모님처럼 어떤 사람들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재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김옥경 목사님이나 박세훈 목사님처럼 "말씀대로 사는 것이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화나 완전성화가 사람들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쉽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성화된 사람이고 완전성화가 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몸의 속량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화나 완전성화가 되었어도 상대적으로 쉬울 수는 있어도 마냥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참 신자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며 사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자동적으로 되거나 쉽지만은 않습니다. 심지어, 반드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버림받는 사람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해방을 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길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갈등이나 탄식이 없고 의와 평강과 희락만 넘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착각합니다. 즉, 주로 순종하면서 우발적인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거듭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해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한, 제가 해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처럼 보강하기 전의 설교를 김승규 장로님이 들으시고 이런 문자를 보내오셨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로마서 8장 1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이처럼 킹제임스 성경에는 로마서 8장 1절에 하반절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방'이라는 뜻이 진짜 해방이 아니겠습니까?
킹제임스 성경이 만들어지고 400여 년을 지내오다가 1850년쯤에 와서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 등이 발견됨에 따라 성경에 칼질을 하기 시작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반절이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장로님은 성경 지식이 수준급이고 헬라어와 히브리어도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문자에 대한 보고를 받고 스트레스가 확 몰려왔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느라 극도로 피곤하고 지쳐있는 상태였는데 '아~ 또 해석이 뒤집히는 것인가?'라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상이 걸렸고, 즉시 킹제임스 성경을 포함해서 성경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다행히, 그 번역이 옳다 해도 해방에 대한 제 해석이 뒤집히지는 않더라고요. 그러나 상대가 김승규 장로님이라 세 번에 걸쳐 꼼꼼하게 연구하고 거듭 확인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뒤에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가 나옵니다. 그래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 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해방됐기 때문에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제 견해와 달리 해방이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서 행하는 삶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킹제임스 성경의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를 그대로 인정해도 나의 견해와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에 이어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해방이 됐기 때문에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3절이 나오고, 4절에 "육체를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썼습니다. 즉, 2절의 "해방하였음이라." 뒤인 3절에 "왜냐하면"이 있고 4절에서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3절에서 말한 일을 행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4절 앞부분이 조건이며 신자에게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4절뿐 아니라 그 뒤 구절들도 13절까지 계속 같은 내용입니다. 이처럼 육체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교훈을 주다가 12-13절에서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을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러므로 이것은 해방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갈라디아서 5장 16절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