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1:1 - 호세아 가정
(호 1:1, 개역)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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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여럿 왕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왕이 아니라 여럿 왕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이 결코 영원한 하나님 왕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인간의 단체나 조직은
기껏 약하고 어설프고 모자라는 인간들을 앞장 세워서 버티고 있는 양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조직체는 하나님께 인정한 바가 없는 조직체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계속 버틸 만한 근거를 갖고 있지를 못합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호세아에게 관심을 갖지 말고
그에게 임한 ‘하나님 말씀’에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즉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본 마음과 본 뜻을 드러내겠다는 겁니다.
이 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내막에 접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즉 그동안 그들의 왕을 대표로해서 구성해온 이스라엘 나라가
왜 하나님 나라에 합하지 못하는 가를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호세아 선지자들 통해서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호세아 선지자를 의도적으로 음란한 여인과 혼인하게 만들므로서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서 음란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밝히 드러내시려고 합니다.
여기서 기존의 음란이나 간음이나 음행의 의미와는 차이가 납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간음과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사람이나 이방민족들이 생각하는 간음이
완전히 차이나는 겁니다.
언약이 개입되므로서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 개념들이 바뀌어져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왕 중심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언약적으로 이해하는 간음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 언약이 처음 등장한 그 경우로 돌아가봐야 합니다.
아담을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이상한 일을 경험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 자기 앞에 있었다는 겁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왜 자기 말고 누군가 있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부터 아담은 ‘몸’이라는 것은 혼자서 규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즉 자기의 몸 말고 딴 몸이 발생되므로서
졸지에 아담은 비로소 홀로 사람이 아니라
‘남자’라는 새로운 입장을 부여받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남자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었습니다.
그것도 홀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잠자고 깨어보니
자기가 유사한 사람이 자기 앞에 등장되어 있습니다.
비로소 아담은 그 여자를 상대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파악하게 됩니다.
“저 여자는 어디서 나왔고 누가 만들어내었가?‘
이 질문은 곧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왜 만들어져야 하는가?
뿐만 아니라 나는 나 홀로만으로 사람이 아닌가?”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23)
따라서 아담 홀로 한 몸이 아니라
여인이 있을 때 비로서 언약 안에서 한 몸이 구성되는 겁니다.
이것은 또한 왜 사람이 몸을 가져야 하는지와 관련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진정한 몸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 몸은 아담이나 하와를 위한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을 위한 약속의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4-6)
이 몸이 이스라엘의 존재로 나타나면서
그 안에 언약 장치가 작동되고 있습니다.
즉 언약이란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획되고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들의 몸이 언약을 보여주는 몸이 되느냐가 성경 해석의 관권입니다.
여기에 호세아의 선지자의 몸이 가담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몸을
이스라엘의 본래 모습을 알려주는 씨앗으로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즉 현재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 이스라엘 안에 진정한 언약의 몸이 싹트게 만드십니다.
그 방식은 어디까지나 처음 아담과 하와를 만드는 그 원칙에서 이탈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왜 나 말고 딴 몸이 있으냐를 통해서
도대체 나라는 몸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를 파악하게하시겠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호세아의 몸이라고 간주하는 것으로
전에 있었던 아담의 몸에 참여하는 계기가 됩니다.
지금 주어진 언약 작용에 몸을 온전히 실어버리면
우리의 역사가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하나로 연결되는
묵시 세계의 본질 안에 놓여 있는 바가 됩니다.
그렇다면 간음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개입없이
인간 자신이 자신의 몸을 위하여 자기가 선택하는 행위가 곧 간음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7:33-34에 보면,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생 라합이 자기 민족을 배반한 것을
잘 아시지요.
그녀가 자기 몸을 위해서 배신한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기 위해,
다시 말해서 언약에서 말하는 그 몸을 위해 배신 겁니까?
하나님의 개입으로 배신도 하고 거짓말도 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언액적 개입이 빠진 상태에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몸을 절대시하고
자기 몸에 좋은 쪽으로 작용하는 바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간음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음란한 여인과 혼인하게 된 것은
현재 이스라엘 자체가 이런 음란한 짓거리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