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0(숙종 6)∼1741(영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서화가.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白下)·학음(鶴陰). 만년에는 나계(蘿溪)·만옹(漫翁)이라 하였다.
1712년(숙종 38)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에 등용되었다.
1723년(경종 3) 응교로 사은사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7년(영조 3) 이조참판으로 대제학을 겸임하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난 때
감호제군사(監護諸軍使)가 되었으며, 1729년 공조판서가 되고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35년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1739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으며, 그뒤 평안도관찰사로
관내를 순찰하던 중 벽동(碧潼)에서 객사하였다.
조선시대 양명학의 태두인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이며 정제두의 아우 제태(齊泰)의
사위이다.
그는 당시 조정과 산림에 있는 선비들의 허위와 타락을 논하면서 양심적 시정(施政)과 개혁을
주장하였다.시문은 물론 산수·인물·화조 등의 그림도 잘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글씨의 대가로 우리나라의 역대서법과 중국서법을 아울러 익혀
한국적 서풍을 일으켰다. 그의 문하에서 이광사(李匡師)가 배출되었다. 글씨에 있어
만호제력
(萬毫齊力), 즉 중봉법(中鋒法)을 고수하고 세속적 외형미를 배제한 창경발속(蒼勁拔俗)을
주장하였다.서풍은 왕희지(王羲之)·미불(米)의 영향이 많은데, 그가 쓴 많은 비갈(碑碣)을 보면
소식(蘇軾)체로 쓴 것도, 동기창(其昌)체에 가까운 것도 있다.
또한, 김정희(金正喜)는 《완당집 阮堂集》에서 “백하의 글씨는 문징명(文徵明)에서 나왔다.”
고 주장하였다. 이같이 그는 옛사람의 서풍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대가의 역량을 지녔다.
특히, 행서는 각가(各家)의 장점을 조화시켜 일가를 이루었다.그가 쓴 비갈로 경기도
강화의
고려산적석사비(高麗山積石寺碑), 장단의 참찬윤순지표(參贊尹順之表)·예참서문유비
(禮參徐文裕碑), 양주의 풍릉조문명표(豊陵趙文命表), 광주(廣州)의 이판서현석비(李判書玄錫碑),
이창발묘갈(李昌發墓碣), 영상홍서봉비(領相洪瑞鳳碑), 좌상이태좌표(左相李台佐表), 호참송징은비
(戶參宋徵殷碑), 응교심유갈(應敎沈濡碣), 기백윤훤표(箕伯尹喧表) 등이 있다.
저서에 《백하집》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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