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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길과 청주사람 길을 생각하며 걷다 | ||||||||||||
60년대 북문로 청주역 옮기고 4차선 상당로 건설하면서 길맥 트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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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길은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동차 따위가 지나갈 수 있게 땅위에 낸 일정한 너비의 공간이다. 2.길은 물위나 공중에서 일정하게 다니는 곳이다. 3.길은 걷거나 탈 것을 타고 어느 곳으로 가는 路程이다. 4.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개인의 삶이나 사회적 역사적 발전 따위가 전개되는 과정이다. 5.길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거나 사회가 발전하는데에 지향하는 방향 지침 목적이나 전문 분야이다.” 이것 말고도 길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서너가지가 더 있다. 근현대의 여러가지 변화가 길의 너비 변화와 길이 변화 등에 긴밀히 엮여져있고 넓고 새로운 길의 개척은 틀림없이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의 변화를 만들어 내었다. 현대인의 빠른 걸음걸이까지도 그러한 결과물이 아닐까? 어릴적부터 느릿느릿 걸었던 나는 “이 걸음걸이 때문에 틀림없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뒤처지고 말거야”하는 조바심도 생겨난 것 같았다. 시청서쪽편의 좁은 2차선도로를 대체할 남북 관통도로였는데 이 넓은 도로는 원시적 포장공사방식으로 수십명의 인부가 모래와 자갈을 삼태기에 담아 뿌리면 그 뒤를 따라 로울러가 다지고 그 위에 끓인 아스팔트를 뿜어 굳히는 재래식 포장공사였다. 따라서 공사기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길가에 새로 심겨진 플라타너스 가로수 잎은 언제나 뽀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새동네와 정하로 갈라지는 내덕삼거리에서 상당공원근처에 있는 상공회의소건너편까지 거리는 수십년동안 기찻길이어서 뇌리에는 석탄가루가 날리던 ‘늘 까맣던 거리’로 기억된다. 1970년 6월무렵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전교생이 시청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인 사건이 있었다. 3학년이었던 우리들 몇명이 주도하여 학교앞의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닭장을 철거해달라며 요즘의 환경시위를 한 것인데 도로공사 마무리를 위해 여기저기 길 위에 쌓아놓은 자갈더미 옆으로 줄을 맞추어 앉아있던 학생들이 눈에 선하다. 당시 조선일보사회면에 “전국최초의 용기있는 환경데모”라며 큼지막하게 기사가 났던 것도 생각난다. 우리들은 시장님의 철거약속을 받아내고 방아다리를 돌아 무심천 좁은 제방을 걸어 학교로 돌아갔었다. 그때 시장실에 함께 들어갔던 나와 내 학우들중 하나는 지금 시장실에 근무중이다. 시외버스는 소방서와 청주경찰서가 있던 주네쓰앞을 지나 서문시장앞의 차부에 사람들을 내려놓고 손님을 태운 뒤 좁은 사직동길을 거쳐 충북대정문앞길을 지나 조치원으로 갔다. 기차가 지나가면 간수가 행인들을 막아서고 긴 막대로 만든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오고 천천히 묵직한 쇳소리를 내며 눈앞을 지나갔던 어린 시절의 기차! 기차는 시청근처에 있던 청주역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동안 청주사람들의 기억에서도 멀어진 거리만큼 잊혀져 갔다. 오래된 외국도시의 지상철길들이 지하철이 되고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청주가 철도를 쉽게 버린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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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전앞에 있던 중앙시장 떡전...추억의 여인숙이 생각나는 친구들도 꽤 있을텐데...
지금도 몇군데는 현존하고 있는데 경기가 안좋은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철길 이야기가 나오니 기차 통학하던 친구 생각도 나네 반무록이 서정웅이 고중진이 윤석관이 유성걸이 내수에 누구더라 ..............
청주역자리는 지금 북문로 파출소 좌측에 대한통운 신용식이네 역전식당 있었고 철도 표시비석은 우리 강충렬 친구 대림라사가는길에서 많이 보지 ... 세월은 유수 라고 오는 12일 만나서 수다 떨자..
청주 토박이면서 사정이 있어 서울에서 10년간 이름모를 길을 헤메다 청주 고향에 왔어도 잊혔거나 가물가물하던 기억들을 길을 통해 석위친구가 알려주어 새록 새록 생각이 나는구만.... 지금 성안길을 걷는 젊은이들도 우리가 옛날에 걷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길을 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