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녀 지영이와 점토로 오래간만에 동물 형상 등을 만들어 보았다. 나의 어린 시절과는 너무나 달라진 조소 재료, 그 색상의 다양함이나 부드러운 질감에 놀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만들기를 좋아했다. 요즘 아이들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그때는 만드는 도구나 재료를 내가 만들어 써야 할 때가 많았다. 소위 자급자족이다. 대나무로 먼저 조각도를 만들어 그것을 도구로 삼아 야외에서 구한 황토나 백색 점토를 조각하는 것이다. 6.25 전후(前後)복구가 안 되고 우리나라 경제의 대부분이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때였다. 그래서 조각도나 점토를 구하기 힘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당시의 입시지옥은 대단한 것이라 중고등학교 입학 시험과목을 제외하고 아이들이 다른 과목 특히 예능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부모님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 가정 형편이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지만 부모님께 조각도를 사달라고 했다가 꾸중을 들은 적도 있고 <괴도 루팡>등 소설책도 숨어서 보아야 하는 그런 시절이었다.
... 중2, 부산 부전동에 살 때이다. 집 앞 도랑을 치우다가 거기서 나온 하얀 점토(고령토?)를 발견하고 그것을 파서 아버지의 흉상을 만들어 보았다. 그것이 내가 조소를 해본 첫 경험이다. 경남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전담 미술 선생님이 계시질 않고 부산대학 교수님이 가끔 나오셔서 시간 강사로 미술을 지도해주셨다. 그러나 미술반 지도는 직접 받아본 기억이 없다. 나는 생물반과 미술반을 오가며 과외 활동을 했는데 생물 반은 주상우 선생님 등 쟁쟁한 선생님이 많이 계셔서 식물채집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나 미술반은 취미가 있는 몇몇 친구들이 가끔 모여 자습을 하는 정도였다. 미대를 다닌 두 딸이 입시준비를 하는 과정을 지켜본 내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사람이 아닌가? 착각이 된다.
... 고등학교 2학년 때 인근에 있는 경남상고에서 제1회 경남조소대회가 열렸다. 조소를 배워 본적도 없으면서 어디에서 그러한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그 조소대회에 참석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우리 부전동 집 도랑에서 구한 질 좋은 하얀 점토를 다시는 구할 수 없어 급한 마음에 경남고등학교가 있는 구덕산 기슭에서 황토를 파서 한말들이 양철통에 담았다. 그리고 큰 대나무를 구해 다시 열심히 조각도를 만들었다. 50cm x 40cm의 널판위에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못질하고 십자가에는 황토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짚으로 만든 노끈을 칭칭 감았다. 황토 한말 정도를 물에 정성껏 이겨서 다시 담으니 무척 무거웠다. 출전 준비는 완료된 것이다.
... 택시도 없이 그 무거운 황토를 들고 낑낑거리며 대회장에 들어섰다. 물론 대회장이라는 곳이 경남상고의 한 교실이었다. 중앙에 목만 깊이 내어놓은 모델이 의자에 앉아있고 출전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빙 둘러 앉았다. 나도 황토를 담은 통을 옆에 내려놓고 흉상을 만들, 내가 만든 십자가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황토를 발라 흉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만 황토로 조소를 하고 있고 모두들 회갈색의 조소용 점토를 구입해 와서 열심히 흉상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 학교만 미술 선생님이 안계신지 다른 출전 학생들의 뒤에는 각 학교 미술 선생님들이 돌아다니면서 “ 야! 터치를 살려! 그리고 특징을 살려!” 하면서 자기 제자들을 격려한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간 황토는 자꾸만 흘러내려 시간 내에 기본 형태를 만들기도 어렵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널판에 못질해둔 십자가를 제거하고 널판 위에 얼굴의 반면상만 만들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반면상을 만들며 나도 터치를 살려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때 내 뒤를 돌아다니든 미술 선생님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남고 미술 선생님은 누구지? 아참! 전임 선생님이 없다고 들었어!” 그리고 내게 물었다. “학생 누구한테 조소를 배웠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 하고 말았다. 옆의 중고등 학생들의 작품은 내가 보아도 상당히 멋있는 터치가 살아 있는 점토로 만든 조소 작품들이었다. 모두 나보다 잘 만든 것 같았다. 내 것만이 반면상에 황토로 만든 것이니 나는 너무나 창피했다. 작품을 내지 말까하다가 다시 들고 오기도 무거워 이름을 써 부쳐놓고 도망치듯 대회장을 빠져 나왔다.
...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부산대학교에서 가끔 나오시는 미술선생님께서 믿어지질 않는 낭보(朗報)를 전하시는 것이다. 나를 교무실로 부르더니 “이군! 축하한다. 이번 조소대회에서 네가 특선을 했어. 며칠 후에 조회시간에 특선 메달을 교장선생님이 목에 걸어 주실 거야. 그리고 경남중학교에서 전시회가 있으니 가 보도록 해.” 기쁘기도 하지만 어안이 벙벙해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분명 동정 점수일거야!” 그 당시 미술을 한다는 것은 생활고에 허덕여야 한다는 의미와 동격이다. 그 당시 많은 선생님들은 자기의 미술 성향을 고집하지 못하고 당장 팔리는 작품을 만들어야 생활이 가능한 분들도 많았다. 그래서 내가 무척 가난한 집안의 학생이고 조각칼도 스스로 만들어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동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의외의 특선이 된 이유를 달아보았다. 좌우간 기분은 무척 좋았다.
... ‘그래도 내 작품의 어디엔가 약간의 가능성이 보였겠지!’ 혼자 자위하며 경남 중학교에 마련된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만든 반면상, 특선 작품이 형태를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되어 있질 않은가! 어떻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점토도 아닌 황토가 마르면 갈라질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내가 바보이지! ... 그러나 이 난센스는 고3에 올라가 진학 문제가 대두되자 다시 불거졌다. 미술 선생님이 아버지를 만나자고 하시더니 나를 미대로 보내라고 종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생각하기로도 미술가로 성공하려면 미켈란젤로나 로댕처럼 천재적인 소질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 천재적인 소질은 없다고 생각하고 부모님과 형님의 권유대로 의대로 진학하기로 마음을 잡았다.
... 의대에 다니면서도 조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빨래비누에 내가 존경하는 슈바이처상등을 조각하여 내가 좋아하는 분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해군에 군의관으로 있을 때는 피나무로 거북선을 만들기도 하고 내가 존경했던 한 해병대 연대장의 멋있는 모습을 피나무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분이 고맙다고 전역 후 내게 전한 말이다. “내가 해병대에 있으면서 많은 상패도 받고 했지만 집안을 정리할 때 모두 없애고 이 소령이 만들어준 나의 전신상만은 고이 간직하고 있소. 얼마 전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하여 빈소에 둘렀더니 사모님이 나를 알아보시고 또 그 말씀을 하신다.
... 나의 약간의 조소 소질을 막내인 유미가 받았는지 유미는 서울미대 조소과로 들어가 졸업을 하였다. 그러나 최근 유미는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인데 지금에서야 오빠처럼 의사가 되고 싶은지 “아빠 지금 의대 학사 편입 시험을 치면 어떨까요?” 그래서 나는 한사코 말렸다. “네 나이가 지금 삼십 육세인데 무슨 고행 길을 인생 후반에 가려고 해? 마루, 마린이나 잘 키워!” 사람은 자기가 해보지 못한 것에 미련을 갖는 것일까? 아직 나도 미련을 못 버렸는지 유미와 같은 조소과 급우인 사위 정서방에게 전화를 걸어 “정서방! 혹시 조소과 선배들이 은퇴 후 취미 클럽을 만들어 조소를 하는 모임이 있는지 알아봐줘!” 그러나 그 뒤 소식이 없다. 아마 장인의 부질없는 생각이 좀 우습게 비춰졌는지도 모르겠다.
... 한때는 한 5-6년만 의사 개업을 하고 고갱처럼 나도 훌렁 떠나버릴까도 생각해보았다. 아무 뜻도 모르면서 <달과 6 펜스>를 그리워 한 적도 있다. 그런데 벌써 개업 30주년이 내후년이다. 고희도 몇 년 남지를 않았다. 이젠 나의 미련은 접고 손자들이 자라가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낙이 될 것이다. 손녀 지영이도 만드는 솜씨가 제법이다. 외손자 마루 마린이도 부모를 닮아 그림을 잘 그리고 공작 솜씨도 좋다. 이젠 나의 욕심은 포기하고 손자들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