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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s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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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상실 *◈ 스크랩 사랑의 무게
Peace 추천 0 조회 65 17.08.09 14: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한은원 지음 , <사랑의 무게>- 우리 시대 서구 소설과 함께 읽는 영미시 34편 / 한국문화사

                       

0 싹 트고 꽃 필 때 / 봄이 어디 그 기쁨을 감추던가?  - 윌리엄 블레이크


0 존재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존재 양상이라고 해도, 사라진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특히 사랑했던 사람의 흔적은 우리가 기억하는 한 우리 곁에 남아있다.


0 도스토옙스키는 자신 내면의 악을 투철히 바라보면서 삶과 씨름을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인류 역사상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스토옙스키 역시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실패가 아마 그로 하여금 계속 글을 쓰게 한 원동력이었을 것 같다.


레오니드 치프킨은 <바덴 바덴의 여름>에서,

 도박 중독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사에서 나타나는 도스토예스키의 성격상 결함을 객관적으로 전달한다.

그는 너그럽지 못하며 질투심도 많고, 격정적으로 분노와 참회를 반복하는 사람이었다. 치프킨이 보기에

도스토옙스키는 내면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비도 "광기어린 참회' 같은 것이어서, 도움을 받은 이들이 오히려 그를

비웃을 정도로 뭔가 부자연스럽고 병적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는 끊임없이 고통을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렸다.

치프킨은 그 허우적거리는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치프킨은 도스토옙스키의 한계를 아파했을 것도 같다.


0 프랑스 소설가 로맹가니의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


이 책에서 로맹가리는  자신이 삶에서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도전이 아니라 존엄성의 선언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처절하게 도전했다. 그렇게 도전하면서, 그는 자신이 나름대로 주어진 삶을 이겨내었다고 여긴 듯하다.

이 자전적 소설은 "나는 살아냈다"라는 비장한 문장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는 삶을 사랑한 것 같지 않다.


0 영국 시인 스티비 스미스는 그의 시 <결코 다시는>에서 "저는 할 바를 다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스미스의 시들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가족을 버리고 바다로 나갔다.

스미스는 삶이 아니라 죽음이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고 여겼고,

 자살을 포함한 모든 죽음을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기렸다.

8살에 처음 자살을 생각했는데, 이 생각이 오히려 그녀를 살아 있게 했단다.


- 결코 다시는 난 눈물을 흘리지도

두 손을 쥐어짜지도

벽에 대고 머리통을 박지도 않을 테다

왜냐하면

"따르려 하지 않아도 운명은 날 질질 끌고 간다"

그래도내가 할 바를 다했을 때

나는 일어나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리라

그러곤 그 분께 이렇게 말하리라

아버지, 저는 할 바를 다 했습니다. (시 전문)


따옴표 안의 구절은 세네카의 문장을 약간 수정한 거다.

세네카는 , 운명은 기꺼이 따르는 자들은 이끌어 가고,

기꺼이 따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질질 끌고 간다.


0 웨일즈 시인 딜런 토마스의 <초록빛 퓨즈 통해 꽃 내모는 힘이>


- 시간의 입술이 샘물가에서 거머리처럼 빨아대고

사랑은 뚝뚝 흘러 모인다. 허나 떨어진 피가

그 상처를 달래주리라

그러니 계절 따라 부는 바람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시간이 별들을 돌며 하늘에서 째깍 대고 있으니.-


0 아내와의 불화로 집을 나가 객사한 톨스토이의 죽음은 그렇게 평화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0 영국 시인 필립 라르킨의 <새벽의 노래>


- 날이 밝아오자 마음은 텅 비어간다. 베풀지 못한 선행,

주지 못한 사랑, 낭비해 내버린 시간- 에 대한

회한 때문도 아니고,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잘못된 시작을 바로 잡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아예 그럴 수도 없어 비참해지기 때문도 아니다.

영원히 완벽한 공허,

우리가 옮겨 가선 항상 길을 잃고 말

그 명백한 소멸 때문이다. 여기에 없고,

그 어디에도 없지만,

곧 가게 될, 더 두려울 수도, 더 확실할 수도 없는 그곳.


...

버티던 징징대던 죽음이란 달라지지 않는다.



천천히 날이 밝아오고, 방이 모습을 드러낸다....

복잡하고 잠시 빌린 이 세상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하늘은 점토처럼 희뿌옇다.

오늘의 일상을 또 살아내야만 한다.

우체부들은 의사처럼 이집저집 찾아다닌다.-


시인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며, 끝까지 그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죽음이란 종교나 이성적 설득으로 위안 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한 공포 앞에서, 그는 선이나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고 또는 시간을 낭비했다고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시 암울하게 밝아오는 새로운 날 앞에서 그는 그저 일상사로 돌아갈 뿐이다.

그 일상사를 이어가는 것은 마치 저승사자의 통고를 기다리는 일과 같다.


0 바다는 다양한 색조를 지닌 아름다운 곳인 동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곳이다.


0 언제나 낯선 거리에는 손 내밀어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이 처음이다. 이 땅이 낯설 수밖에 없다.

이 낯선 땅에서도 누군가 손 내밀어준다면 , 더는 헤매지 않을 수 있을 거다. 적어도 덜 헤맬 수는 있을 거다.

길을 물을 사람을 찾듯이, 우리는 늘 그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도 하다.

인간에 대한 사랑도 그러하고, 신에 대한 사랑인 신앙도 그러하다.

그 사랑을 통해 더는 이 삶에서 헤매지 않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이야말로 구원이리라.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신에 대한 사랑을 긍정한다면, 우리는 헤매면서도 이 삶을 즐길 수 있을 거 같다.

아주 조금이라도 감을 잡고 나서 내가 낯선 거리를 즐길 때처럼 말이다.

여전히  헤매면서도 야릇한 흥분을 느끼면서 이 낯선 삶을 즐길 수 있을 거 같다.


0 17세기의 종교시인 존 밀턴의 시 <내 눈이 멀고나니>

그는 크롬웰 공화정에서 최고의 관직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이 시의 영어 원시는 "참고 기다린다"라는 동사로 끝난다.

삶의 의미를 알 수 없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 걸까.

그 답을 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에는 인내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으니 온전히 믿고 기다리며 인내해야 한단다.

불교에서도 인간 세상을 사바라고 부르는데, 산스크리스트어로 인내하다의 의미란다.


0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인가 <분노의 포도>인가에서

"부모도 결함이 많은 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아이는 어른이 된다"라고 쓰여 있다.


0 아이를 키운다고 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다.

아이를 사회화시키면서도 그 사회의 관습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내도록 하는 것이 훈육이기 때문이다.

이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이다.


0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지만, 그러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단지 진부한 삶을 빛나게 하는 충만한 순간이 있는 것 같다. 그 순간은 각자 다를 거다.

자연을 즐길 때, 예술을 즐길 때, 노동을 즐길 때, 친교를 즐길 때, 고독을 즐길 때 그 어느 때에도 충만함은 가능하다.


0 우리의 삶에서 고통이란 "가장 평범한 일상에서 빚어지"는 "흔하디 흔한 "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아치형 길이, 입구가, 틀이" 된다는 의미에서, 고통은 신비롭다.

그러한 신비한 힘을 지니려면 고통은 표현되어야 한다.

그럴 때 문틀은 부여잡고 울음을 참는 곳이 아니라 단단히 잡고 넘어가는 기반이다.


0 심리학적으로 '탈융합'이란 고통스러운 건 고통스러운 거고 나는 나라고 하면서,

고통이라는 감정과 나를 분리시키는 작업이다. 심리치료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궁극적 ?표라고도 한다.

하지만 고통과 마주할 자신도 없으면서, 이 '탈융합'이란 비겁한 자세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0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 <성 루시 날의 야상시>

어둠은 가장 근원적인 무(nothing) 이다.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큰 존재의 일부분일 뿐이며 우리 모두는 그 큰 존재 안에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에게, 그 큰 존재란 영원한 하느님이다.

고통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의ㅣ 의미를 깨달으면서, 존 던은 삶의 의미를 받아들인다.

삶은 이렇게 항상 사랑 뒤에 온다.


0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 <우울에 바치는 노래>

이 시는 우울이 지닌 힘을 노래한다.

어린 시절 불우했던 키츠야말로 우울이 무엇인지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시인일 거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했고, 병약하기까지 했던 그는 사랑하는 약혼녀와의 결혼도 꿈꾸기 어려웠다.

살아있는 동안 그의 시가 제대로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도 없다.게다가 이 시를 썼던 1819년은 남동생이 결핵으로 죽고

그 병이 전염된 키츠도 죽음을 예감하던 시기였다.그리고 2년 뒤인 1821년  키츠는 2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 그러지 말고, 온갖 꽃들의 고개 꺾어버리고,

시월의 푸른 언덕 수의로 덮어버리며,

비구름 닥쳐오듯이 갑자기 하늘에서

우울의 발작 떨어질 때면:

그 때 슬픔을 실컷 맛보라 아침녘 장미에서,

또는 바닷가 모래파도 그 너머 무지개에서,

또는 활짝 핀 작약 꽃들의 풍만함에서 실컷 맛보라:

아니면 그대 연인인 우울이 몹시 화를 낸다면,

그 보드란 손을 움켜잡고, 악을 쓰게 놔두면서

더할 나위없는 그녀의 눈을 깊게, 깊게 들여다보라.


우울은 아름다움과 머무나니 - 아름다움은 사라지기 마련이기에 :
또한 기쁨과 함께 머무나니, 기쁨은 작별을 고하려 늘 입술에

손 대고 있기 마련이기에: 쓰라린 쾌락과도 가까이 머무나니,

쾌락은 꿀벌이 빠는 그 순간에도 독으로 변하기 마련이기에:
그러나니 환희의 신전에서,

우울이 은밀히 깃들어 있는 바로 그 신전에서,

격렬하게 혀를 눌러 섬세한 입천장에 대고

기쁨의 포도를 터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기쁨이 무언지 알지 못하리:
그의 영혼은 우울의 힘찬 슬픔을 맛볼 것이고,

그 희뿌연 트로피 사이에서 가려지게 되리라.-


너무 슬퍼서 마치 우울이 화를 내며 악을 쓰고 있는 것 같다 할지라도,

우울의 손은 보드랍고 우울의 눈은 더할 나위없이 아름답단다.

우울은 그가 보듬어야 하는 아름다운 연인이다.


키츠는 스물다섯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지나간 아름다움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추억할 시간을 갖지 못한 셈이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삶을 사랑할 충분한 시간도 갖지 못했다.

그 대신 그의 시는 우울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면서 우리가 그럴 수 있기를 북돋아 주는 듯하다.



0 호주 소설가 마커스 주삭, <책도둑>

이 소설의 나레이터인 죽음은 자신이 생명을 거두려고 낫을 휘두르는 잔인한 존재가 아니라고 밝힌디.

때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는 인간들의 영혼을 거두어들이는 존재일 뿐이라고 밝힌다.

죽음은 우리를 다정하게 굽어보며 있다가, 때가 되면 영혼을 품에 안고 살며시 간다는 거다.

그의 품 안에서 영혼은 따듯해지고 치유가 된다고 한다. 죽은 사람은 그렇게 평화로워진다.

문제는 나은 사람들을 보는 일인데, 죽음은 그들을 보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0 죽음에 대한 시를 많이 쓴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 <이 바람은 과수원에서 온 건 아니야>
메사추세츠의 중상층 집안에서 태어난 이 시인은 별로 교육받은 것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평생 집을 거의 떠나지도 않고 살았다.

특히 말년의 몇 십 년은 하얀 옷을 입고 자신의 방 밖을 거의나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거의 관계를 맺지 않은 고립 상태에서 살았던 거다. 실연이 이유라고도 하지만 그 이유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생전 10편 정도의 시만 발표했다. 출판하지 않은 상태로 1800 여 편의 시를 남긴 채, 그녀는 56살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도 시에서도, 그녀는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는 소극적이고 어두운 성격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통렬하게 진지하면서도 따듯한 유머가 있는 그녀의 시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은둔 생활도 어둡게 고립된 것은 아니었다.


청교도적인 주변 상황에서 종교적 억압에 순응하지 못했고,중상층 도덕이 요구하는 여성의 삶에 대해서도 순응하지 못했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제대로 이해받을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여 자기 식대로 살고자 했던 것 같다.


죽음은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일이다. 그 다른 곳이 어딘지 모를 곳이기 때문에 , 우리는 죽음이 두렵다.



0 인지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테터 ,< 괴델, 에셔 , 바흐>

저자는 인간의 뇌의 뉴런들이 어떻게 조직화되어 논리 정연한 마음을 창조해 내는가를 다루고 있다.

그에 의하면 , 나는 "나"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경험들이 모여서  패턴으로 형성되어 감에 따라서 자아가 점차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의식은 결국 나의 경험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재귀적 구조를 지닌다.

그 재귀적 구조를 묘사하기 위해서 그는 이상한 고리(strange  loop)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1993년 뇌암으로 아내를 갑자기 잃었다.

그녀가 죽었어도 자신의 뇌 안에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내가 이루었던 의식의 광대한 패턴은 , 마치 컴퓨터 디스켓의 소프트웨어처럼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고,

객관적이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어서, 그녀를 기억할 때 그녀의 이러한 패턴들은 여전히 살아서 존재한다는 거다.

그래서 한 개인의 의식은 타인의 뇌에도 어느 정도 존재할 수 있고, 윈래의 뇌가 소멸해도 그 단편들은 살아남을 수 있단다.

호프스태터는 타인들의 뇌 안에 새겨진 이 단편들을 영혼 조각(soul-shards)이라고 부른다.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서 부서져 내린 많은 조각을 자신에게 접합시켜 온전한 무언가로 거듭나냐 한다는 거다.

이렇게 해서 지금 곁에 없는 사람은 오히려 곁에 있을 때보다 더욱 곁에서 느끼게 된다.


그에 의하면 ,마음이란 신경 시스템 안에  패턴화되어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타인의 뇌에서도 복제될 수 있다.

과학적으로 이러한 일, 즉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을 내 영혼에 살아 있게 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제시한다.


0 영국 시인 오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


- 별들을 우러르며, 나 너무 잘 알고 있네

저들의 무심함에 나 지옥에 떨어질 수 있음을,

그러하니 사람이나 짐승의 무심함 따위야

이 땅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나.


허나 기쁘겠는가 되갚아 줄 수 없는 열정으로

타오르는 것이 내가 아니라 별들이라면?

만일 동등한 사랑을 할 수 없다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되게 하소서


저 무심하기 짝이 없는 별들을

내 아무리 열렬히 사랑한다 한들,

지금 저 별들을 보니, 내가 어느 한 별을

내내 무지막지 그리워했다곤 말할 수 없네.


저 별들 모두가 사라지거나 죽어버린다면,

텅 빈 하늘을 보고는 배워야겠지

그 완벽한 어둠의 장엄함을 기리는  법을,

그러기엔 비록 시간이 조금 걸릴 테지만.(시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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