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은 다 아는데, 서울 사람에겐 생소한 메뉴가 있다. 밀면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냉면을 끓일 때 메밀을 구하기 힘들어, 미군 구호품인 밀가루를 사용하면서 탄생한 음식'이라는 설이 있지만 '진주 밀국수 냉면'이 변형된 것이다.
냉면에도 함흥식, 평양식이 있듯 밀면에도 가야식과 개금식이 있다.
가야밀면 은 한약재와 돼지뼈 육수를,
개금밀면 은 닭육수를 사용한다.
얼음가루 둥둥 띄운 시원한 밀면. 벌써부터 괜찮은 밀면집 앞에는 줄이 늘어졌다. 며칠간 밀면을 줄곧 먹었다. 하루 다섯 그릇을 먹은 적도 있다. 나중에는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부산 밀면이 어떤 길을 걸어왔고, 나아가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밀면의 3요소는 육수·면·양념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육수라고 한다. 부산의 몇몇 이름난 밀면집을 편의상 구분해 소개한다.
·한방재를 넣은 깊은 맛의 육수
육수의 색깔이 거무스름한 집이 있다. 육수를 끓여낼 때 잡냄새를 없애고 맛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10여 가지의 한방재를 넣는다. 거부감이 없고 외려 맛이 은근하다. 감칠맛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집들이 현재 부산 밀면의 전형에 가까운 것 같다.
△사철밀면(부산 동래구 사직동)=먼저 내주는 온육수부터 거무스름한 색깔의 한방약재 육수다. 성기훈 사장은 "돼지뼈에 시원하라고 닭뼈를 넣고, 맛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한약재를 넣어 이틀 정도 육수를 끓인다"고 했다. 이 육수가 대여섯 가지 재료를 넣은 양념과 어우러져 맛의 조화를 부린다. 깊다.
양념의 맛이 다른 집보다 얼큰하면서 깔끔하다고 해야 할까. 출출하기는 좀 이른 오후 3시30분, 취재를 하면서 한 그릇의 물밀면을 마저 먹어버렸다. 이 육수의 맛이 깊어 양념을 걷어내고 육수의 맛만 만끽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사직운동장 인근이어서 롯데 프로야구 선수들이 자주 온단다. 11년째 장사를 하고 있는 집이다. 사철 밀면 하나만을 고집하고 있는 성 사장은 "연구와 실패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100% 밀가루만 사용한 면이다. 물 4천원, 비빔 4천500원. 오전 10시~오후 9시 영업. 옛 송월타올에서 사직운동장 방향으로 좌회전, 첫 신호대에서 우회전하면 첫 블록 끝 모퉁이에 있다. 051-504-1609.
△소문난 밀면(부산 금정구 부곡3동)="괜찮다"고 소문이 난 집. 이 집 육수 역시 한방약재를 넣어 거무스름하며 특유의 향이 좋다. 김원철 사장이 시골집을 빌려 두 달간 밤낮으로 육수 만들기 시범을 한 결과 터득한 육수란다. 1996년 창업. 면도 특이하게도 갈색이다. 냉면 면발인가? 100% 밀가루를 사용하지만 강화도의 쑥을 달인 물로 반죽하기 때문이다. 면이 부드럽고 쫄깃하다. 양념은 매운맛을 적당히 내기 위해 양파를 이용한 것이 특징이란다. 물·비빔 각 4천500원(소), 5천원(대). 오전 11시~오후 8시50분 영업. 산업도로변, 부산대 쪽 진입로와 동래백병원 중간 지점. 051-517-1183.
△춘하추동(부산 부산진구 부전1동)=푸짐한 고명이 강하고 걸쭉하다는 식후감을 남긴다.
거무스름한 육수에서 한방약재 계통의 깊은 맛이 나고, 고명으로 얹은 돼지고기에서도 비슷한 향이 난다. 낮 12시30분,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19년 연륜. 1, 2층이 있다. 국내산 한우 소뼈를 곤 것이 육수의 베이스. 물·비빔 각 4천원(소), 4천500원(대). 오전 10시30분~오후 10시 영업. 지하철 서면역 9번 출구, 영광도서 지나 복개로 따라 150m 직진 오른쪽. 051-809-8659.
·우리집 면발 먹어봤나
육수도 저마다 특색이 있지만 특히나 면발이 독특한 밀면집들이 있다.
◆고구마 전분이 들어간 쫄깃한 면발
△내호냉면(부산 남구 우암2동)=이 집은 부산 밀면의 발상지로 알려진 집. 면발이 쫄깃하다. 고구마 전분이 3분의 1이 들어갔기 때문. 옛 시절 쫄깃한 냉면이 그리워 취했던 그 방식 그대로이다. 가느다란 면발에 회색빛이 살포시 감돈다.
유상모 사장은 "밀면 육수는 냉면 육수를 그대로 사용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밀면 육수는 일주일, 10일, 보름치의 진국을 한꺼번에 빼놓은 뒤 물을 섞어 희석해서 낸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3~4시간 달인 한우 사골 육수를 급랭시켜 밀면 육수로 바로 사용하고 있다. 아들 재우씨는 "육수를 달이는 과정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라고 했다. 또 독특한 것은 물 비빔 구분할 것 밀면을 낼 때는 이춘복 여사장이 조물조물 주물러 낸다는 점이다. 밀면을 개발한 실향민 정한금 할머니는 지난 2월 87세로 작고했다고 한다. 물 4천원, 비빔 5천원(小 기준). 우암동 부산은행 옆길 들어가 50m 지점 왼편. 051-646-6195.
△황산밀냉면(부산 중구 영주동)=이북 황해도의 실향민이 빚어내는 서민의 입맛. 역사는 32년이나 되었다.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의 비율이 7 대 3. 첫 입에 면이 까슬하면서 쫄깃하니 맛이 난다. 황해도 연백 출생의 김창식(75) 할아버지가 이 집 육수 만드는 것을 관장하고 있다. 냉면집 주방장도 했다. 육수의 비법은 아들도 모른다. "소뼈 한약재를 넣고 아버님이 일주일간 육수를 끓여내요." 이귀순(73) 할머니는 "밀면의 양념은 양파 고춧가루 등 12가지가 들어간다"고 했다. 아들 며느리 딸 등 한 식구들이 운영하는 식당. 오전 11시~오후 8시30분 영업. 부산터널 가는 사거리의 영주동 쪽 모퉁이에 있는 영주시장 안. 051-469-6918.
◆옥수수 전분이 들어간 면발
△가야할매밀면(부산 중구 남포동)=가야할매밀면의 면발은 옥수수 전분이 들어간 게 매우 독특하다. 밀가루도 우리밀이다. 굵은 면발이 미끄러지면서 빚어내는 입속 느낌이 괜찮다. 달착지근한 옥수수의 맛이 희미하게 감도는 게 독특하다.
이 면발을 개발한 이는 정공애 할머니. 김연자 사장의 친정어머니인데 2년 전 작고했다. 육수는 돼지뼈 소뼈를 넣고 각종 야채와 12가지 한약재를 넣어 하루 이상 끓여낸단다. 장사 경력 11년. 물·비빔 각 4천원. 오전 10시~오후 9시30분 영업. 남포동 할매회국수 골목, 원산면옥 옆. 051-246-3314.(15년째의 연산동 가야할매밀면은 김씨의 제부가 운영하는 곳. 똑같은 옥수수 전분 면발. 지하철 연산동역 1번 출구 국민은행 뒤편. 051-865-8017.)
·육수가 또 다르게 특이하다
동물 뼈를 넣지 않은 식물성의 깔끔한 육수, 닭을 넣은 시원한 육수로 다른 집과 다른 육수의 밀면집이 있다.
△장수밀면전문점(부산 동구 수정동)=그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밀면 집. 만 10년. 육수가 아주 특이하다. 돼지사골 소뼈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식물성 육수다. 그래도 밀면 육수인가? 만 10년간 손님들이 찾고 있으니 다 이유가 있는 법. 장인수 사장은 "한약재 13가지를 52시간 푹 달인 육수"라고 했다.
고기 뼈를 넣어 달인 육수는 면발의 광택을 더하고 식성에 따라 맛이 깊다 하겠으나 이 집의 밀면은 다른 길을 간다. 뒤끝이 깨끗하고 깔끔한 육수를 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고기뼈 육수는 텁텁하잖아요?"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 그게 적중한 것이다. 물 3천500원, 비빔 4천원. 오전 10시30분~오후 9시30분. 봉생병원 뒤편. 051-642-7903.
△부산밀면(부산 해운대구 중동)=닭을 넣어 달인 육수가 특이하다. 최시한 사장은 "닭은 넣으면 육수가 시원해진다"고 했다. 육수를 한 번 끓일 때 돼지 사골에다가 소 사골을 추가하면 그 무게가 100㎏ 정도이고, 거기에다가 또 닭 스무 마리를 넣는다. 물론 10여 가지 한약재나 향신료와 각종 야채가 들어간다.
이것을 사흘간 달여 빼낸 진국을 육수의 베이스로 삼아 20~30일 정도 사용하는 것이다. 최 사장은 호텔 요리사 출신. 물 3천500원, 비빔 4천원. 오전 10시30분~오후 10시 영업. 해운대문화회관 맞은편 대천천 건너. 051-747-5009.
△개금밀면(부산 부산진구 개금동)=부산 밀면계에서 이른바 '개금식'으로 통하는 밀면의 원조 집. 1966년 창업. 맑고 투명한 육수가 깔끔하다. 육수를 끓일 때 닭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입맛은 주관적이어서 혹자가 "부산 밀면 중에서 제일 낫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물·비빔 각 4천원(소), 5천원(대). 지하철 개금역 1번 출구 나와 서면 방향으로 200m. 개금골목시장 15m쯤 들어서 왼쪽 첫 골목 안. 전화 안 받음.
·그 외
△국제밀면(부산 연제구 거제1동)=얼큰하니 톡 쏘는 맛이 괜찮은 밀면이다. 중독성도 제법 있는 것 같다. 일요일 오후 3시30분에 갔는데 줄을 섰다. 온육수를 내주는데 색깔이 맑다. 노랗고 쫄깃한 면발과 맑은 육수의 맛이 괜찮게 어울린다. 호주산 소의 뼈에서 육수를 우려내고 있다. 장사 경력 10년. 오전 10시~오후 9시30분 영업. 국제신문사에서 지하철 동래역 방향 왼쪽 첫 골목 50m 안. 051-501-5507.
△초량밀면(부산 동구 초량동)=먼저 내주는 온육수가 짙다. 가느다란 면이 자잘하게 입속을 간질이면서 부서지는 느낌이 좋다. 육수는 한방약재 향이 나면서도 맑다.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다. 물·비빔 각 3천원(小 기준). 지하철 부산역 9번 출구 나와 부산진역 방향 국민은행 옆. 051-462-1575.
글=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사진=김병집 기자 b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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