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에 잠기다
손진숙
거실 한쪽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본다. 화선지의 양쪽 가에 어긋나게 그려놓은 난초 무더기가 청초하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날개 편 잎, 숫제 창공을 향해 아슬하게 머리 내민 잎, 오르다가 부드럽게 허리를 구부린 잎, 뒤처져 무릎을 꺾어 늘어져 버린 잎, 잎들 사이로 살며시 보이는 꽃은 고결하고 청아하다.
꽃이 떨어져 버린 빈 꽃대도 있다. 빈 꽃대 위에는 쓸쓸함이 맺혀 있다. 쓸쓸함에도 향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다. 난초는 깎아지른 벼랑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일까, 은은하고 고아한 풍취를 자아낸다. 숨을 모아서 들이마셔 본다. 코끝에 먹의 향기인지, 난초 향기인지 모를 향기가 와 닿는다. 향기를 좇아 먼 데 눈길을 보낸다. 내 눈길이 멎는 곳에 삼십 년 전 백률사(栢栗寺) 정경이 우련하다.
시골에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을 때였다. 막 불교에 눈 뜰 무렵, 이차돈의 목을 베자 잘린 목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진 자리에 세웠다는 백률사를 찾아가보고 싶었다.
혼자 길을 나섰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봄을 맞을 채비를 하느라 산골짜기가 한창 기지개를 켜는 시각, 햇살도 포근히 속닥이던 날이었다. 대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지나자 길게 뻗어 올라간 돌계단이 나타났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도 숨찬 줄을 몰랐다.
작고 조용한 절이, 숨어 있던 아이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백팔나한(百八羅漢)과 삼존불(三尊佛)이 동거하는 대웅전, 바위에 새긴 석탑과 그 아래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올라갔다 돌아와 법당에 들어갈 때 밟았다는 발자국을 살폈다. 한참 머물러 있다가 발길을 돌리려는 참이었다. 건너편 선방 문이 열리며, 차 한 잔 하고 쉬었다 가라는 스님의 음성이 나를 붙들었다.
활짝 열어젖힌 방문 안으로 들어서자 나를 반긴 건 묵향이었다. 스님은 벼루에 먹을 갈아 난을 치던 중이었다. 어떻게 밖에 내가 와 있는 걸 알고 문을 열어 불렀을까. 이 또한 삼생 인연의 한 획일까?
차를 마시고 나자 가만히 있기도 멋쩍어 먹을 갈기 시작했다. 곧은 자세로 앉아 화선지에 난을 치는 스님의 붓끝을 슬쩍슬쩍 곁눈질하면서 쉼 없이 먹을 갈았다. 나중에는 팔이 뻐근했으나 팔 아픈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점심때가 되었다. 스님이 떡라면을 삶아 먹자고 하며 떡과 라면을 꺼내 놓았다. 나는 공양간에 나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떡라면을 끓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내 마음에서도 피어올랐다. 점심을 먹는 동안의 즐거움은 특별했다. 스님은 떡라면 맛이 일품이라며 흡족해했다. 비록 떡라면 한 그릇이지만 그 음식을 먹기까지의 고마움을 향기롭게 표현한 것이리라.
설거지를 하고 나서 선방에 들어오니 스님은 다시 난을 치고 있었다. 나도 곁에 앉아 또 먹을 갈았다. 화선지에서 묵향과 난향이 풍기기를 얼마 동안,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님은 난 한 폭을 건네며 먹을 갈아 준 보답이라고 했다. 방금 붓이 지나간 향기가 오롯이 전해왔다. 한 획 한 획에 들인 정성을 놓치지 않고 눈여겨보았기에 더없이 값진 선물이었다.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내내 손에 쥔 묵향과 난향에 잠겨 있었다.
며칠 후 표구를 해와 내 방에 걸어 두고 지냈다. 결혼해서도 시골집에 남겨두지 않고 데려 오는 걸 잊지 않았다. 이사할 때마다 잊지 않고 챙겼다. 동고동락한 지 삼십 년, 강산이 세 번 바뀌었어도 싫증 한번 나지 않았다.
점잖으면서 쾌활하고, 온화하면서 호방하고, 무심하면서 사려 깊던 스님을 다시 찾아가 보리라 다짐했지만 미루고 미루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더 잇지 못한 인연의 옷 깃, 호젓한 산사에 그윽하던 그날의 향기가 그리워진다.
액자에 쓰인 글귀를 따라가며 내 마음대로 음미해 본다.
深谷香風芝葉蘭
雲根科倚碧琅𤣳
깊은 골 향기로운 바람 난초 잎에서 이는데,
구름 뿌리 무성히 푸른 옥돌 계곡에 내렸네.
심산에 숨어 있는 작은 산사의 전경이 떠오른다. 스님은 내게 드러나지 않는 향기를 품고 살아가라 설법을 내린 듯하다. 그동안 겉보기로 떠돌며 살아온 세월이 부끄럽게 다가온다.
화제 끝에 ‘南牧’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다. 남목 스님이 지금도 살아 계실까? 살아 계신다 해도 운수납자(雲水衲子)이니 백률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는 않았을 테지. 행여 소식이 닿는다면 노스님 장삼 소매의 묵향을 다시금 맡고 싶다. 겨울이 물러갈 즈음 떡라면을 앞에 놓아도 좋으리라. 맑은 구름이 흘러가고 깊은 골짜기에서 난초 향기가 불어온다면 한층 입맛을 돋우리라.
첫댓글 꽃이 떨어져 버린 빈 꽃대도 있다. 빈 꽃대 위에는 쓸쓸함이 맺혀 있다. 쓸쓸함에도 향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다. ㅡ 깊은 사유를 이끌어 내는 구절입니다. 수필이 수필다워 시나 소설에 뒤지지 않을 품성이 이런 문채에서 발견됩니다.
먼저 2017년 책이 나왔을 때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마침 이번에 드릴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이렇게 또 졸작을 올려 주시어 고맙습니다.
'시골에서...'
'점잖으면서...'
한 행씩 앞당겨 주시면 하고요.
15행 '활짝... 향이었다.'를 '... 묵향이었다. '로 수정해 주셔야 맞겠네요.
금아문학 카페에서 옮겨 붙이기를 했더랬습니다. 교열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이 두 손과 마음과 생각을 이끌어 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조기현 잘 수정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제 수필을 한 편씩 올리고 있네요.
무슨 인연에서인지 모르겠어요.
하고많은 수필가의 작품집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