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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사회의 동요
12세기 이후 높은 벼슬을 차지한 문벌 귀족들은 대토지를 차지하면서 경제적 부를 누렸다. 청자로 기와를 한 화려한 집에서 살고 금으로 불경을 배껴 쓸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이에 비해 백성들은 귀족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여 토지를 빼앗기거나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새롭게 중앙으로 진출한 관료들이 왕의 측근 세력으로 성장하여 문벌 귀족과 대립하면서 문벌 귀족 사회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정치 세력 간의 갈등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여 주는 잔과 잔 받침
이자겸의 권세와 총애는 나날이 커졌으며,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자는 백방으로 중상하여 멀리 추방하거나 귀양 보냈다가 죽였다. 이자겸은 그 족속을 요직에 앉히고, 관직을 팔았으며, 자기의 일당을 많이 배치하였다. 스스로 국공이 되어 왕태자와 똑같은 예우를 받거나 자신의 생일을 인수질이라 부르게 하였다. 여러 자식들이 큰 집을 경쟁적으로 지었으므로 온거리에 그들의 집이 줄지어 들어섰다. (중략) 남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았으며, 종들을 시켜 마차를 약탈하여 자기의 물건을 실어 들었다.
- 고려사 -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 귀족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과 거듭된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유력한 외척 가문이 되었다. 특히 이자겸은 딸들을 예종과 인종의 왕비로 만들어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인종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자, 도리어 이자겸은 난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궁궐이 불타는 등 위기에 처했지만, 이자겸의 난은 곧 진압되었다. 이러한 사회 불안 속에 묘청 등 서경의 정치 세력은 인종에게 '고려를 황제국이라 칭하고, 독자의 연호를 사용하며, 금을 정벌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개경의 기운은 쇠퇴하고 서경의 기운은 왕성하다고 주장하면서 서경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맞서 개경의 정치 세력이 서경 천도에 반대하자, 묘청 등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중앙 지배층 내부의 분열과 문벌 귀족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낸 사건들이었다.

▲ 대화궁터
반란을 일으킨 묘청 등이 서경에 건설한 궁터이다.

▲ 고려 궁터에서 발견된 막새형 기와
신채호의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국사학자이며, 독립 운동가였던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서경 전역은 곧 낭, 불 약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이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었으니, 이 전쟁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조선사 연구초 -
* 전역 : 전쟁
낭, 불 양가 : 낭(고유의 전통 사상)과 불(불교)의 두 사상

▲ 수박도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보이는 수박은 오늘날의 태껸과 비슷한 운동이다.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의종은 무신들에게 명령하여 오병수박희(수박의 일종) 놀이를 개최하도록 하였다.
무신정변의 원인이 된 문무 간의 차별 대우
고려는 문신이 중심이 된 귀족 사회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신은 문신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 마땅히 무신이 맡아야 할 최고 지휘관도 문신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강감찬, 윤관과 같은 이름있는 인물들도 본래는 문신들이었다. 무신에 대한 차별 대우는 의종 때에 와서 더욱 심해졌다. 문신은 경치 좋은 정자를 찾아다니며 향락 생활을 즐기는 의종의 곁에서 함께 즐거움을 나누었지만, 무신은 왕과 문신을 지키는 호위병 구실밖에 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문신인 김돈중이 최고의 무신인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일도 있었고, 나이 많은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문신인 한뢰에게 뺨을 맞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무신들의 분노는 극도로 높아져서 무신정변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무신들의 권력다툼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관리들은 군사를 일으켜 무신 정권에 대항하였다. 또한, 귀족들과 가까웠던 교종 계통의 승려들도 무신들을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들은 곧 무신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러한 반발을 누른 다음에도 무신 정권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신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많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최충헌은 권력을 잡자마자 다시 정치, 사회, 경제의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봉사십조) 하지만 최충헌의 개혁은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여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최씨 정권은 몰락한 문벌 귀족의 토지를 독차지하거나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전국 곳곳에 농장을 만들었다. 또한, 사병을 양성하여 권력 유지에 치중하였으며, 국가의 중요 정책까지도 좌우하였다. 최충헌이 죽은 후에도 권력은 그의 아들 최우에게 넘겨졌으며, 최씨 정권은 무려 4대 60여 년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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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 집권기의 지배 기구
최씨 정권의 권력 유지
초기 무신 정권은 중방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지만, 최씨 정권이 수립되면서 새로운 권력 기구인 교정도감을 두었다. 교정도감은 처음에는 최씨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고자 설치되었는데, 점차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정치 기구가 되었다. 또한, 신변을 보호하고 반대파를 누르기 위해 도방 등 사병 집단도 두었다. 최우는 자신의 집에다 정방이라는 기구를 두어 관리들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한편으로는 이규보와 같은 문인들을 등용하여 국가의 중요 정책을 자문받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최씨 정권은 다른 무신 정권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층민들의 봉기
무신 정권의 등장으로 문벌 귀족 중심의 신분 질서가 흔들리면서 사회가 혼란해지고 하층민들의 저항이 전국 각지에서 나타났다. 당시에 농민들의 가장 큰 불만은 과중한 세금이었다. 세금을 내지 못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농민들은 이러한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공주 명학소 망이, 망소이의 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대표적이다. 노비들도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각지에서 신분 해방을 부르짖으며 저항 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만적은 노비들을 규합하여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봉기를 꾸미기도 하였다. 이러한 하층민들의 저항은 실패로 끝났지만, 고려 말에 향, 소, 부곡민 출신이 재상이나 장군 등 높은 벼슬에 오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운문사
김사미가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사찰로, 울산의 효심과 연합 세력을 형성하여 경주 여러 고을을 점령하였다.
희망을 저버린 무신들의 횡포
무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의종의 사적으로 축적한 재산을 모두 나누어 가졌다. 정중부는 본래 욕심이 많고 천박하여 거리낌없이 고리대업을 하였고, 시중이 되자 여러 곳에 큰 농장을 가졌다. 또한, 집안 하인들과 문객들도 권세를 빙자하여 횡포를 부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 고려사 -
최충헌은 민가 1백여 채를 허물고 자택을 화려하게 지어 집둘레가 몇 리나 되었다. 규모는 대궐과 비슷하여 북쪽은 시전을 향해 십자각이라는 별당을 지었다. 이 공사에서 부역이 아주 심해 백성들의 원성이 많았다.
- 고려사 -
참고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위키백과, 고려사
사진출처 - 공식 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 gnedu.net, 충혼장백님 블로그, 나최고님 블로그, 실암의 photo & story,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카페, 전통청자의 명가 송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