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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을 입고 싶었다 |
때는 1970년대의 어느 날로 돌아간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파이낸셜 타임즈』를 정독하며 주가를 분석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는, 그 시절 교복을 입어보는 게 간절한 소원이었던 얼굴 새까만 시골 촌 소년이었다. 돈이 없어 중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소년은, 또래 중학생들이 지나갈 때면 초라한 행색이 창피해 풀숲에 숨곤 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지게를 지고 땔감을 구하러 다니던 그는 혹독한 현실에 무릎 꿇지 않았다. 그리고 조그만 시골 교회 선생님으로부터 배움의 기회를 얻은 소년은 그때부터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한다. 비록 밥상을 책상 삼아 차디 찬 마룻바닥에서 하는 공부였지만, 배움의 열망이 그 모든 악조건을 희망과 기대로 바뀌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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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을 꿈꾸다 |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정말 어렵게 모은 돈으로 지방대 경제학과에 입학금을 내던 그날의 감격을 그는 지금도 늘 마음속에 품고 있다. 중학교도 못 갔던 형편에서 야학을 마치고, 검정고시를 보고, 농고에서 비료를 다루면서도 독학을 해 대학 입시에 도전했던 그였다. 그의 학창시절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과 실천의 연속`이었다. 그를 그토록 충동질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겪은 가난은 그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볼 때 대단히 내세울 만한 남다른 불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풍요로운 시대에서 자라난 지금의 젊은 세대와 달리, 그때의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운 시절을 살아낸 경험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의 어린 시절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현재의 나보다 좀 더 큰 사람이 되고자 했던 의지`였다. 막연히 가난하게 살지 않으리라는 바람 이상의 무엇, 그의 내면에는 이미 거인이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 하되,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마지막 지점까지 최선을 다 하는 것. 그것은 증권분석가로서 현재 그의 모습이며,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한결같은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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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란 무엇인가? |
2006년 1월까지 주식 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종합주가지수(KOSPI)가 사상 처음으로 1,400을 넘어섰다. 그후 3월에는 잠시 1,300까지 하락했으나, 4월 들어 다시 1,400선을 넘어서고 주가는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해갔다. 대부분의 투자전략가들이 이번에는 주가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말부터 2006년 2분기에는 주가가 크게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투자자들에게 경고를 계속했다. 신문들은 “1,200까지 내릴 것–최근의 주가 상승은 해외 호조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견해를 실었다. 그런데 기사가 나간 뒤 그는 투자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전화벨 소리가 두려울 정도였다. 회사 내에서도 영업하기 어렵다고 비난이 쏟아졌다. 주식투자자들은 주가가 떨어진다고 전망하면 싫어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분석을 믿었다. 아무리 다시 분석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분석대로 주가는 5월 12일부터 폭락하기 시작했다. 5월 11일 1,465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6월 8일에는 1,220선까지 떨어졌다. 그가 다소 앞서 가기는 했으나, 그의 주가 전망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내 스스로 내놓은 결과물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확신`의 신념이 남들보다 조금 더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보다 좋은 환경이나 머리를 갖지 못하고 남들보다 더 나은 이력을 가지지 못한 그를 프로로 만든 것은, 남들이 갖지 못한 열정과 노력으로 만든 굳건한 자기확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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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로 산다는 것 |
성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얼핏 `희망`만이 보이나, 사실 그들의 그림자에는 절망이 반이다. 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때문에 그 절망의 그림자를 밟고 일어서야 비로소 성공이라 부를 수 있다. 돈, 머리, 학벌, 이런 것들이 성공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성공의 요소일 뿐이다.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한 뒤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애널리스트`가 된 사람이 있다.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 김영익, 우리는 그를 진정한 `프로`라 부른다. 프로는 환경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을 탓할 뿐이다. 좋은 환경을 가지지 못했다면, 좋은 희망을 가지면 된다. 가난을 벗어나고 싶다는 작은 희망보다, 더 큰 프로가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진정한 거인을 꿈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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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2006-08-11 19:00~21:00 |
장 소 |
교보문고 광화문 본사 지하이벤트홀 |
강 사 |
김영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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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의 깡촌 함평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중학교 검정고시 과정을 배웠다. “의자도 없어서 마룻바닥에 엎드려 배웠다”고 했다. 농고에 입학했지만 그만두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학력을 취득했다. 전남대 경제학과에 들어간 때가 스물두 살, 서강대학교 석사과정을 마치고 사병으로 입대한 때가 스물아홉 살, 그리고 대신경제연구소에 입사한 것은 서른한 살 때였다. 입사 이후 지금까지 그의 출근 시간은 새벽 6시다. 술 마시고 새벽 2시에 들어가도 어김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난다. 소위 `아침형 인간(그의 표현에 따르면 농부형 인간)`의 표본인 셈이다. 그는 또한 증권회사 재직 중에 서강대학교에서 박사과정(야간대학원이 아닌 정식과정)을 졸업했다. 스카이(SKY, 서울대․연대․고대를 말함) 출신이 대부분인 증권가에서 몇 안 되는 `지방대 출신`으로서 차별을 느꼈지만, 그는 자신만의 특별한 열정과 노력으로 극복했다. 지난 2000년의 주가 급락, 9․11 테러 직전의 주가 폭락과 그후의 반등, 2004년 5월의 주가 하락과 2005년 주가 상승 등을 줄줄이 맞히면서 그는 여의도의 족집게 스트래티지스트(strategist, 증권사 연구원 중 개별 기업이 아니라 주식 시장 전체의 흐름을 분석하고 전략을 짜는 사람)로 떠올랐다. 2006년 1월까지 주식 시장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종합주가지수(KOSPI)가 사상 처음으로 1,400을 넘어섰고 대부분의 투자전략가들이 주가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그는 2005년 말부터 “2006년 2분기에는 주가가 크게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투자자들에게 계속해서 경고했다. 그는 언론사에서 펀드매니저들을 상대로 조사해 발표하는 `베스트 애널리스트` 순위에 최근 5년 동안 연속해서 선정되었고, 대한민국 증권인상과 베스트 이코노미스트 부문, 스트래티지스트 부문에서 모두 1, 2위를 차지하는 프로 중의 프로로 자리 잡았다. 또한 이런 실력을 인정받아 2005년 투자전략실장에서 리서치센터장으로 승진했다. 동기들 중 가장 빠른 임원 승진이다. 대한민국 최고령 애널리스트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예순 살이 넘어도 계속 공부를 하고 직접 자료를 쓰는 스티븐 로치(모건 스탠리의 유명한 이코노미스트)처럼 되는 것이 그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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