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화요일 비
항해사에게 시모노세키 앵커러지 도착 전 20마일 지점에서 연락하라고 했다. 04시 기상하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제주 부근까지 북상한 장마전선은 이곳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 제주는 폭우가 쏟아지고 강풍이 분다고 한다. 06시 10분 앵커러지에 닻을 내리다. 09시에 파이로트 승선. 10시경 부두 입항 예정이다. 어제 대리점에서 온 전문에 의하면 시모노세키 시에서 다섯 명의 환영단이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동안 다른 항구에서는 없었던 일이고 지난 4월 토야마 입항 때도 마찬가지였다. 관광 유치 차원인가 보다. 갑판장이 말린 오징어를 스무 마리나 가져왔다. 엊그제 블라디보스톡에서 잡은 오징어다. 마침 맥주 안주가 떨어졌는데 잘 됐다.도선사는 60대 후반으로 작은 키에 과묵한 사람이다. 목소리가 얼마나 작은지 귀를 바짝 들이대야 겨우 들릴 정도다. 9시 승선 예정인데 십 분 전에 미리 도착해서 슬며시 조타실로 오는 바람에 누구도 알아차리질 못했다.
항구에 배를 댈 때까지 행동 하나하나가 침착하고 정확하다. 조용하고 침착하기는 수속 업무를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서툰 한국어 실력이지만 볼일 마치자 재빠르게 떠난 두 명의 경찰, 역시 한국어가 가능한 직원을 대동한 대리점 그린쉬핑, 식수 보급선, 예인선 할 것 없이 모두가 정확하고 빠르다. 또 예의 바르다. 이들은 가능한 한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한 후 재빠르게 떠난다. 식수가 충분치 않아 블라디보스톡 출항 날부터 식수를 제한했었다.
식수 130톤을 요청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당장 식수 보급이 시작됐다. 불과 30분! 블라디보스톡에선 입항 날부터 출항 직전까지 식수 하나로 마음 고생이 심했다. 그런데 이곳 일본은 너무 차이가 난다. 말 그대로 신속 정확하다.오후에 시모노세키 시 항만국장 일행이 방문했다. 꽃다발과 기념패, 시내 지도, 항만시설 등 안내 책자를 함께 가져왔다.
항구를 찾아준데 감사하다며 기념 촬영과 함께 잠시 환담을 나눴다. 부두세도 약간 감해 준다고 했다. 별건 아니지만 기분이 좋았다. 부담가지 않게, 아주 작은 것으로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것. 조용함과 침착함, 그리고 예의 바름. 이런 것들이 일본인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선진국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사는 곳일 터이다. 우리의 무질서하고 혼란스런 교통문화. 시끄러운 소리가 먼저 연상되는 공공장소와 식당. 당장 고쳐야 할 것들이다.
7월 2일 수요일 맑음
블라디보스톡 앵커러지에서 낚은 오징어를 며칠째 톱브릿지 바닥에 말리는 중이다. 그런데 일본에 오자 난데없이 까마귀 떼가 오징어를 물어간다. 사방이 까마귀 천지다. 생각다 못한 실습생들은 돌아가며 당직을 선다고 한다. 바다에선 항해 당직으로 바쁘더니 입항하자 까마귀 당직 서느라 바쁘다.
7월 4일 금요일 비
올스타전을 앞두고 실시하는 팬 투표에서 아메리칸리그 소속인 뉴욕 양키스의 마쯔이와 시애틀 마리너스의 이치로가 외야수 부분 1, 2위에 나란히 랭크되었다. 일본 텔레비들은 앞다퉈 이 소식을 보도하고 있다. 두 선수 모두 일본야구를 대표하는 간판 선수들로, 특히 외모가 출중한 이치로는 여성 팬의 인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그나저나 시카고 컵스의 최희섭은 어찌되었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던데.
사촌이 논을 사니 배가 너무 아프다.현지 대리점인 ‘그린 쉬핑’ 의 요시토미 씨는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여직원인 미스 호리노를 대동한다. 호리노 양은 연세대 어학당에서 3개월쯤 어학 공부를 했다는데 유창하진 않아도 어지간한 대화는 가능하다. 1미터50센티쯤 될까. 작은 키에 연약한 외모인 그녀는 목소리 역시 여리고 작다. 말 그대로 모기소리만 하다.
작은 목소리 때문인지 말할 때는 얼굴과 어깨를 앞으로 내미는 습관이 있다. 그녀는 그런 습관말고도 항상 미소와 웃음을 잃지 않는다. 볼 때마다 그런 것으로 봐 거의 천성적인 듯 하다.상대가 작은 목소리면 함께 작아지고 미소를 띠면 따라 미소짓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호리노 양이 뭔가 말을 하면 우리 직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작은 목소리에 미소 띤 얼굴이다. 원래 큰 목소리인 기관장이 그렇고, 무뚝뚝한 이등항해사도 마찬가지다. 마치 돌림병 같다고나 할까.
작은 목소리와 미소를 전염시킨다? 어쨌든 묘한 현상이다. 그녀가 반드시 여성이어서가 아니다. 작은 목소리에 살며시 미소짓는 독특한 모습이 상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호리노 양을 보면서 느낀 게 있다. 누군가 그랬는데(카알 힐티?) 역시 여성의 아름다움은 겸손함과 부드러움에 있다. 특히 조용히 미소 띤 얼굴! 아마 남자라도 그럴 것이다.은별이가 부탁한 보푸라기 없애는 것 - 용어가 따로 있나? 제거기? - 은 결국 사지 못했다.
그 큰 백화점을 두리번거리며 찾았지만 눈에 띠지 않는다. 일본어로 보푸라기를 뭐라고 하는지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만 포기했다. 보푸라기라, 이거 혹시 일본어 아닌가? 귀가하기 전에 이마트에 들를 일이다. 딸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니까. 가족 중 무섭기는 딸 - 아들 - 아내 순(順)이다.
오늘 하루 커피를 세 잔이나 마셨다. 슬슬 계획이 어긋나고 있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다잡아야 한다. 티브이 뉴스 시간에 어제 일어난 선박 충돌 사건이 나왔다. 관할 해역이 시모노세키인 것으로 봐 근처 해상인가 보다. 부산에서 출항한 파나마 선적 3300톤급인 흥아 주피터와 100톤급 일본 어선이 충돌했는데 일본 어선이 침몰했다. 선원 중 다섯 명이 실종되고 한 명은 사망했다고 한다. 뉴스 시간에 성이 고 씨인 당직 항해사가 수갑 찬 모습으로 호송되는 장면이 나왔다.
어선이 전속으로 흥아 주피터 쪽으로 접근했다고 하는데 일본어라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흥아호라면 한국 선박이 분명하다. 더구나 항해사 성이 고 씨인 것으로 봐 틀림없다. 앳된 이십 대 나이던데 아마 갓 학교 졸업한 항해사일 것이다. 수갑찬 모습을 보니 남의 일 같지 않다.내일 출항이다. 대리점에 지불할 경비 계산은 오후에 모두 끝냈다.
여행 경비 포함해서 총 123만엔. 우리 돈으로 1200여 만원이다. 도선사 승선은 입항 시만 해당되고 출항 때는 선박 측 의사에 달려있다. 한 번 승선에 약 9만엔. 한화 100여 만원이니 결코 소소한 액수가 아니다.
그동안 대부분 출항은 내가 직접 지휘했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항내는 다소 협소한 편이고 바람까지 분다. 경비를 아껴볼까 했는데 망설여진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사고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요시토미 씨가 그런다. 그 말에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 옆에 있던 S 교수도 거들었다. 조 선장, 도선사 승선시키세, 경비 염려 할 것 없다구. 일본 어선과 충돌한 ‘흥아 주피터’ 가 떠올랐다. 결국 도선사는 승선시키기로 결정했다. 만약 내 돈을 지불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직접 지휘할 것이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