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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생명 그 깨달음의 보고
11-8 관계 : 지구와 생명4 (진화2)
(이 글은 전체 열여덟 편 중 11번째 글의 여덟번째입니다. 이 글은 앞글의 결론의 연장이기 때문에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첫 번 글부터 차례로 읽으시는 것이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존재]
자아(自我)가 자아에게 묻는다.
"존재(存在)란 무엇인가?"
"감각(感覺)하는 것인가? 의식(意識)하는 것인가?"
"그대가 감각하는 것은 진짜인가?
혹시 그대가 의식하는 것이 가짜인가?"
어쩌면 장자(莊子)의 꿈처럼 그 반대일수도 있지 않을까?
시인(詩人)의 말처럼 인생은 한바탕 꿈.
꿈 꾼 후에 그대는 어디서 깨어나는가?
그대가 믿는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마라.
믿는다는 것은 모른다는 말과 같다.
과학적이란 말에도 현혹되지 마라.
과학은 우주에 대해 이제 고작 4%만을 지각했을 뿐이다. 96%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가?
[데카르트의 깨달음.]
우리가 잘 아는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말은 사실 수정 전의 말이다. 훗날 그는 이 말을 "생각한다. 존재한다."라고 바꾸었다. 이 두말이 가지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앞의 명제는 인과적 관계이다. 생각하므로 존재한다.
그러나 뒤의 말은 생각이 곧 존재란 의미를 가진다. 데카르트는 의식적으로 이 말을 바꾸었지만 사람들은 바꿔주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앞의 말은 그나마 이해가 되고 멋진 명언 같지만 뒷말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확실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만 생각과 같은 관념은 마치 바람과 같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있다고 할 수 없는 신기루와 같지 않은가?
그러므로 생각하므로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에는 간신히 동조할 수 있어도, 생각 그 자체가 존재라는 것에는 도저히 동의 할 수 없다. 데카르트가 술 한 잔 마시고 실언을 한 것과 같으니 뒤의 말은 위대한 천재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그를 위해서라도 무시하는 편이 더 나은 것 같다.
그러나 말을 이렇게 바꿔 보면 어떠할까?
우리가 감각하는 우주는 사실은 관념이고, 우리의 관념이라고 생각하는 생각 바로 그것이 실존이다.
관념 우주(觀念 宇宙).
우리는 혹시 컴퓨터 게임의 캐릭터처럼 가상의 공간 즉 관념의 공간에 있으므로 가상인 관념을 실존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을까? 캐릭터의 입장에서는 캐릭터 스스로가 실존이고 그를 움직이는 의지가 관념으로 느껴지겠지만, 게임 밖에서 본 상황은 캐릭터가 관념이고 그를 움직이는 의지가 실존인 것이다.
우리 우주는 규칙을 잘 지키는 정형화된 실존체 같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그 근본과 본질은 허구적이다.
138억 년 전의 어느 날 무한대의 질량과 무한대의 에너지를 가진 어떤 한 점이 느닷없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이 말과 우주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에서 찰나의 순간에 유(有)의 세계가 형성되었다는 불교적 우주관이나, 어느 순간 ‘빛이 생겨라!’로 시작되는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창세기를 경전으로 삼는 유일신 종교의 창조론이나 결국 다른 것은 없지 않은가?
과학은 빅뱅 후 우리 우주를 설계한 인플레이션 팽창에 대해서도 아는바가 없다.
인플레이션 팽창의 전제는 평탄한 우주이다.
단언하거니와 누군가 우주의 밀도를 정확하게 계산하여 입력하지 않는 한 평탄한 우주는 불가능하다.
거대한 우주를 움직이는 힘은 중력이지만 중력의 기준인 질량은 힉스에 의해 주어진 값일 뿐 우주의 본질은 아니다.
이 때문일까? 과학이 찾아낸 17개의 기본입자에는 중력자는 없다. 현대 과학이 밝혀낸 바로는 힘은 매개입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강력, 약력, 전자기력은 그 매개입자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17개의 기본입자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중력의 매개입자인 중력자는 이론만 있을 뿐 실존은 없다. 중력자를 못 찾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뻔히 존재해야하고 질량이 있는 곳 어디에나 흔하게 존재해야할 중력자의 부재는 우주의 근본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과학이 우주에 대해 지각한 것은 물질이라 불리는 전체 우주의 고작 4%에 불과하다. 22~23%에 달하는 암흑 물질과 무려 73~74%에 달하는 암흑에너지에 대해 과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유물론적 철학과 우연의 우주와 진화의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마치 4점짜리 수학 시험지를 받아들고 수학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인 것처럼 우쭐되는 어리석은 어린 아이와 다를 것이 없다.
또한 우리 우주가 65억 년 전 부터 가속 팽창을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과학은 아무 해답도 내어놓지 못한다.
결국 과학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말단의 현상만을 겨우 이해하고 이용하고 있는 것이지 우주의 근원적이며 근본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는 것이 없거나 심지어 가속 팽창과 같이 과학이 세운 규칙에 역행하거나 평탄 우주와 같이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나의 철학적인 판단은
우주는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것이고
우리 우주의 본질은 가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우주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는 게임 속 우주처럼 어느 날 갑자기 툭 생겨났다.
철학은 관념과 의식 등과 같이 정신적인 것을 근본으로 하고자 하는 기조와, 물질을 근본으로 하는 기조로 나뉜다. 이것은 우리 우주의 근본을 무엇으로 보고자 하느냐의 문제이다.
앞의 기조를 관념철학이라 하고 뒤의 기조를 물질철학이라고 해보자. 물론 모든 철학에는 이 두 가지 관점이 적당히 혼합되어 있지만 어느 것을 더 중요시 하는지는 가릴 수 있다. 관념 철학은 종교에 가깝고, 물질 철학은 과학적인 판단을 중요시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확실히 관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 철학의 대부라 불릴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히 학문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위대한 철학자이다. 학문의 분류가 그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위대한 철학자의 오류는 인류의 지성이 진보하는데 커다란 막힘 돌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남성우위론은 그리스도교에도 영향을 주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을 정당화하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남성 우위의 문화는 지금도 우리 사회에 공공연히 만연해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 프라톤의 손은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은 땅을 향하고 있다)
중세에 있었을법한 남녀평등에 대한 가상 이야기.
평등A :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거 아니야?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다고 생각해.
불평등B : 너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선생님 아는가?
평등A : 응, 근데 왜?
불평등B : 그 위대하신 분이 여자는 남자가 되려다가 만 미완성인간이라 했지. 하느님도 아담을 먼저 만들고 그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지, 하와의 갈비뼈로 아담을 만든 게 아니지.
평등A : 그래도 모든 사람은 여자인 어머니를 통해 만들어지고 태어난 거잖아. 여자가 미완성이라면 미완성을 통해 완성의 인간인 남자가 태어난다는 게 모순 아니니?
또 성경도 그래. 여자의 배속에서 아기가 만들어지고 태어나는 거니까 하와의 갈비뼈로 아담을 만들었다고 하는 게 좀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불평등B : 하, 무식한 놈 같으니. 네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똑똑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기나 해? 그 위대한 철학자가 남자가 진짜 인간이고 여자는 되다 만 미완성인간이라 했는데 네가 뭘 안다고 까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의 과학으로는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고 하지만 이 위대한 철학자의 천동설은 지동설의 갈릴레이를 삶과 죽음을 가름하게 하는 가톨릭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종교재판으로 밀어 넣는다.
천동설은 우주를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다. 천동설이 지금은 과학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해도, 지구에서 보면 오늘도 태양과 달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은 정해진 하늘 길을 재잘거리며 돌아다닌다.
일종의 상대성이랄까? 지구를 고정시키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태양은 지구를 돌고 있고 모든 우주의 모든 천체도 지구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운동을 한다. 거대한 우주가 하루에 한번 씩 지구를 중심에 놓고 회전한다. 천동설은 틀린 것이 아니라 관점의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동설은 또 다른 관점의 문제이다.
천동설이 자기중심적인 관점이라면, 지동설은 제3자적인 관점이다. 즉,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에서 떨어져서 우주를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동설과 지동설처럼 우리 우주는 어떤 관점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주 내부에서 보는 관점, 즉 자기중심적인 관점이라면 물질은 실존이고 관념은 허상이다. 그것은 천동설과 같다. 그러나 우리 우주를 한발 떨어져서 관찰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물질은 관념이 되고 관념은 실존한다.
눈을 감고 그대의 관념을 우주와 분리시켜보라. 그대가 우주를 떠났다. 그대 보이는가? 우주는 온데간데없고 그대의 생각만이 실존한다. 138억 년 전의 한 점은 실존하는 점이 아니다. 무한대의 질량과 무한대의 에너지를 가진 한 점이라는 전제는 사실 말도 안 되는 설정이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우주(宇宙)는 만들어졌고 그것은 누군가의 커다란 관념(觀念)의 산물(産物)이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 안에 가상의 우주를 만드는 것과 같다. 우리 우주는 Big Bang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Big Idea의해 형성되었다. 그대의 육체는 불과 몇 십 년 후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몇 백 년 후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지구의 대자연에 녹아 흩어질 것이다. 그러고 그대의 생각 역시 원래의 그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육체는 Big Bang으로 돌아가고, 생각은 Big Idea로 돌아간다. 물질은 허상이므로 결국 생각만 남는다. 생각이 곧 존재(存在)이다. 그 생각이 죽은 후 천당이나 지옥으로 가게 될지, 혹은 다시 다른 생명의 재료가 되는 윤회를 할런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그것은 아직까지는 종교의 영역이고 믿음의 문제이다. 그러나 생각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다만 나의 생각이 Big Idea와 일치하기를 바랄뿐이다.
데카르트는 진정 위대한 철학자이다.
퇴계선생이 만약 지금 살아계신다면 약간은 비겁과 무지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폐지하고 당당하게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하실 것이다. 그것은 율곡선생의 이기일원론과는 다르다. 물질을 의미하는 기(氣)가 유일한 근본이라는 일원론이 아니라, 관념과 정신을 의미하는 이(理)를 우주의 유일한 근원이라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관념을 담은 그릇이다. 그릇 안에 담겨있는 것이 중요하지 그릇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둘이 공존하지 않으면 그릇 안에 있는 것도 흩어질 것이므로 그릇을 무시해서도 아니 된다. 그렇다하더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그릇 안의 것이다. 그릇 안에 물이 담겨 있으면 물그릇이고, 밥이 담겨 있으면 밥그릇이 된다. 그대의 육체라는 그릇에는 어떤 생각이 담겨 있는가?
생명의 진화는 그릇을 안정적으로 키우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그 사전정지작업이 진핵세포로의 진화이다. 최초의 생명에서부터 진핵세포의 출현까지 약 20억년이 걸렸다. 지구 생명 역사의 절반이 세포 하나를 만드는데 걸린 것이다. 그 20억년의 시간 동안 지구는 수많은 환경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 지구 초기 20억년 동안 6500만 년 전 공룡을 멸종시켰던 지름 10Km의 소행성보다 훨씬 큰 소행성이 지구를 수십 번 덮쳤을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 생명의 공통 조상인 박테리아들은 때로는 바위 속으로 숨고, 때로는 바다 밑으로 숨고, 때로는 자신의 몸을 변화시키며 살아남으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수없이 죽어나가며 간신히 살아남은 생명들은 그 여린 생명의 계보를 이어가고자 온갖 생태의 고난과 환경의 재앙을 이겨내야 했으리라.
어느 날에는 어마어마한 소행성이 지구와 부딪쳐 폭발하고 지구 내부의 모든 마그마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지구의 표면은 테이아와 충돌했을 때처럼 온통 수천도의 액체 마그마상태가 되어 지구 내에서는 박테리아들조차 숨을 공간이 없어 모두 멸종하였다. 지구 생명은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수 만 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지구는 다시 식어 다시 바다에 물이 고인다. 그러나 바다는 죽음의 샘처럼 아무런 생명의 움직임도 없다. 다시 또 수 만 년이 흘러갔다. 지구는 완전히 식어 이제 살만한 곳이 되었는데 하늘엔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2배는 더 커다랗게 보이는 보름달만이 지구 바다를 당겼다 놓기를 반복하며 바다를 휘저어 놓고, 철없는 파도들만 갯바위를 부술 듯 쟁쟁거리며 달의 줄다리기 놀이에 놀아난다. 아! 지구에서의 생명은 끝난 것일까? 5억 평방 Km의 지구 어느 곳에서도 생명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는다. 또 다시 수 만 년이 흘러 이젠 정말 끝났구나 하며 죽음의 별이 된 지구, 그 초라한 장례의 장송곡마저 사그라질 무렵 어디선가 운석 한 덩어리가 대기를 가로질러 불을 뿜으며 바다로 떨어진다. 원래는 제법 큰 바위덩어리였는데 대기층을 통과하며 거의 다 타버리고 농구공만한 크기의 돌덩어리가 되었다. 연이어 몇 개의 운석들이 더 떨어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운석 안에 숨을 죽이며 잠자고 있던 박테리아 한마리가 깊은 잠에서 깨서난다. 그는 고향의 냄새를 맡는다. 이제야 돌아왔다.
(2014년 10월 8일 개기월식 후의 달의 모습을아내가 찍었다. 이글에서 많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달은 지구 생명의 탄생과 진화에 많은 조력을 해준 조력자이다.)
어찌된 일일까? 수 만 년 전 지구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거대한 소행성이 지구를 때리던 날, 수많은 바위들이 그 충격으로 지구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튕긴 바위들의 대부분은 지구 중력에 잡혀 다시 지구로 돌아왔지만 몇몇 바위들은 지구 중력을 벗어나 태양의 중력에 의해 지구와 같이 지구궤도를 선회한다. 진공의 우주. 태양빛을 받는 면은 금방 수백 도까지 온도가 올랐다가 태양빛을 못 받으면 영하 수 십 도로 금방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바위 겉면에 붙어있던 수많은 박테리아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운이 좋게 바위 속에 숨어있던 몇몇 박테리아들만 이 혹독한 환경에서 수 만 년을 버틴 뒤 지구와 다시 만나 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기는 했지만 생명은 이렇게 모질고 긴 세월을 인내하며 진화하였다.
움직이는 단백질 같았던 원핵세포에서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와의 결합으로 진핵세포 생명체로 진화하였다고는 하나 우리 눈에 보이는 생명체의 출연은 아직도 멀고멀다. 진핵 세포라고 하여도 아직은 박테리아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박테리아들의 번식 방법은 이분법(二分法)이다. 우리 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도 이분법으로 증식한다.
이분법 증식은 장점과 단점이 있다. 장점은 단순하며 편리하고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조건만 맞는다면 이분법 증식은 2의 제곱수로 늘어난다. 2의 10제곱은 1024. 대략 1000으로 계산하면 20번 증식을 하면 100만, 30번 증식하면 10억, 40번은 1조, 50번만 증식하면 1000조개의 생명체로 증식할 수 있다. 지금도 박테리아나 세균은 대부분 이렇게 증식을 한다. 어떤 음식이나 사체에 세균 한 마리만 달라붙으면 수조개의 세균으로 번식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 된다. 이 방법은 멋있거나 아름다운 이성을 찾아 구애할 필요도 그로인한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도 없다. 즉, 사랑이 없는 증식인 것이다.
단점은 단세포 이상의 크기로 변화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다. 환경이 변화하면 금방 죽어 없어지고 살아남은 몇 마리만이 또 다른 증식의 기회를 엿보게 되는 것이다. 즉, 생명체의 증식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빠르지만 생명체 자체의 구조를 바꾸는 진화의 속도는 그만큼 느릴 수밖에 없고, 단세포 생명체를 극복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초기 생물체의 진화 속도가 느린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생명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했다. 그것이 곧 성(性)의 분화이다.
현재 지구상의 모든 진핵세포 생물의 특징 중 하나는 성(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성의 결합을 통해 번식하는 유성생식(有性生殖)은 복잡하고 비효율적이지만 다양한 유전자가 섞이기 때문에 생물체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다. 사람은 다 비슷해 보여도 다 다르다. 다양성은 환경의 변화나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생존할 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에볼라 바이러스나 에이즈가 창궐한다 하여도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겠지만 그 질병과 바이러스에 면역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그들은 죽지 않고 인류의 대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20억 년 전 함께 살기를 통해 진핵세포가 만들어졌다. 이 세포 생명체들은 각자 이분법을 통하여 증식하려 하였을 것이고 수많은 돌연변이를 만들어 내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였을 것이다. 한 세포 안에 두개의 서로 다른 유전자가 후손에게 서로 자기 유전자를 전달하려 치열하게 다투고 때론 양보하기도 하면서 공생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 해답을 얻는 데는 무려 10억년의 세월이 걸린다. 그 결론이 다세포로의 역할분담과 성의 분화이다. 세포의 유전자는 둘로 나뉘어졌다가 재결합하고,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는 어머니의 유전자만을 전달하기로 합의를 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생명에 성의 분화가 생긴 것은 약 10억 년 전이라고 추정한다. 진핵세포가 생긴 지는 약 20억 년 전. 그러니까 그 10억년의 길고 긴 세월동안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생명진화의 2라운드가 완성되었다.
나는 생명의 진화를 5단계로 나누어 보고자한다. 물론 과학적인 분류는 아니고 그 철학적 의미를 살려 내가 임의로 분리해 본 것이다. 그 1라운드는 최초의 생명에서 진핵세포의 형성까지 약 17~18억년의 기간이다.
모든 생명의 공통점은 죽는다는 것이다. 생명뿐만 아니라 별도 죽고 결국 우리 우주도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자손을 통하여 그 생명을 유지 연장하려한다. 나는 지구 40억년 생명의 거대한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선의 바로 앞에는 나의 부모가 있고 바로 뒤에는 나의 사랑하는 자식들이 그 질기고 긴 끈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최초의 생명은 RNA를 통해 유전자를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바다 속을 둥둥 떠다니는 눈에 보이지도 않은 작고 여린 몇 종류의 아미노산으로 결합된 단백질 조각들이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크기도 키우면서 종류도 다양해지자 전달해야할 유전정보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에 세포는 핵 안에 DNA라는 일종의 메모리 창고를 만들고 RNA는 DNA의 명령을 운반 복제하는 역할로 바뀐다. 이들 생명체들은 길고 긴 세월동안 이분법 증식을 통하여 느리지만 끈질기게 환경에 적응해가며 생명의 종류를 늘려나가다 마침내 20억 년 전 혐기성세균인 메탄생성 고세균과 호기성박테리아인 알파프로박테리아가 결합해 동물세포의 원조가 되는 진핵세포로 진화하게 된다. 식물세포의 원조 진핵세포는 여기에 광합성을 하는 시아노박테리아까지 3중 결합을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를 1단계 생명의 진화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1단계 진화를 통해 생명은 비로소 세포다운 세포를 가지게 되었다.
3단계 생명의 진화는 앞에서 언급한 성의 분화가 일어나는 10억 년 전까지로 정의하고자 한다. 2단계는 잠시 후에 언급하겠다. 성은 생명 증식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같은 생명체를 암컷과 수컷으로 구분해야하고 유전자를 1/2로 나누어야하고 나뉜 유전자가 다시 결합하여 성장하여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한다.
성(性)의 철학적 의미는 사랑(愛)과 경쟁(爭)이다. 배우자를 찾는 과정, 새끼를 만드는 과정, 새끼를 낳아 기르고 생활하는 과정을 사랑이라 하면, 똑같이 배우자를 찾는 과정, 새끼를 만드는 과정, 새끼를 낳아 기르고 생활하는 과정은 경쟁의 연속이다. 우리는 동성의 다른 개체에 비해 내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이성의 예비배우자에게 어필해야하고, 정자가 난자에 수정하기 위해서는 수억대 일의 경쟁에서 일등을 하여야 하며, 험난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개체들과 지독한 먹이 경쟁을 하여야 한다. 이 모든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 만이 생명 진화의 선위에 설 수 있다.
성(性)은 사랑을 빙자한 경쟁시스템이다. 생존을 위한 이 치열한 싸움에서 사랑은 잠깐씩 주어지는 달콤한 휴식이며, 때로는 사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모든 생명의 DNA는 쌍으로 되어 있다. 유전정보를 반으로 나누어 배우자의 반과 합하면 하나가 된다. 처음부터 이러하였는지 혹은 이런 DNA를 가진 개체만이 살아남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건상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클 것 같다. 즉, 초기 진핵세포 생명들의 수많은 진화실험이 있었지만 성을 둘로 갈라 진화한 놈이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우월한 놈만이 살아남는 경쟁시스템이 3단계 진화를 통해 갖추어졌다.
4단계 진화는 눈(目)이다. 생명이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5억 4천 3만 년 전의 일이다. 그 최초의 생명은 삼엽충이고 이때부터 다양한 생물종이 폭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지질 역사로 따지면 고생대 캄브리아기의 시작점이다. 고생대의 시작을 5억 4천 2백만 년 전부터 라기도 하고 어떤 자료는 5억 7천만 년이나 5억 8천만 년 전부터 라고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멀고 먼 옛날의 몇 천만 년의 정확도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학적 시기의 정확성을 알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에 나타나는 철학적 의미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삼엽충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갑옷과 같은 딱딱한 외피를 갖추어 입었다는 것이다. 삼엽충의 눈과 갑옷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그 이전의 생물은 갑옷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갑옷이 갑자기 왜 필요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포식자의 머리에 눈과 입이 생긴 때문이다. 그 이전의 생물들은 서로 보지 못한다. 먹고 먹히는 관계라는 것은 주변의 물이나 흙을 몸의 어떤 구멍으로 흡수해 우연히 들어오는 플랑크톤이 있으면 먹는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가 되면 먹히는 것이다. 그 구멍을 입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므로 굳이 먹이를 쫓아가거나 혹은 도망가거나 숨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지질연대표)
이 시기의 중요한 생태변화는 삼중 공생을 하던 식물 진핵세포 생물들이 진화하여 번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생명은 아직 물 속에 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뭍으로 올라온 생명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때의 식물은 우리가 지금 흔히 식물로 부르는 풀이나 나무의 형태는 아니다. 육상 식물이나 동물의 출현은 아직도 멀고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 생물이 육상으로 올라온 것은 이로부터 약 1억년 후인 실루리아기 때로 추정된다. 자료에 따라서는 이보다 조금 빨랐다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겨우 조류 형태의 물속 식물들이지만 광합성을 하여 양분을 만드는 까닭에 식물은 우수한 양분을 만드는 먹이임에 틀림이 없다.
식물이 번성하자 환경이 바뀌었다. 식물을 먹는 놈이 훨씬 더 유리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생물은 가차 없는 멸종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동물들이 먹이인 식물들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에 떠다니는 플랑크톤을 흡수하는 수동적인 먹이 사냥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먹이를 찾아 움직인다. 그 동물들에게는 먹이를 흡수 할 구멍이 아니라 그 식물을 움켜쥐고 물어뜯을 주둥이가 필요하였고 식물을 찾아다닐 눈이 필요하였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지느러미나 다리가 필요하였다.
생물들은 점점 덩치가 커질 필요가 생겼고 우리 눈에 보일 정도로 커지기 시작한다. 그래봐야 처음에는 mm단위이기는 하지만 세균 수준의 크기에서 이만한 성장은 혁명적인 크기의 변화임에 틀림없다. 세포의 역할분담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진다. 처음에 다세포 생물은 단세포생물들이 뭉쳐있는 군집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점점 세포의 역할분담으로 바뀐다. 이제 생물체의 몸짓이 커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역할분담. 그것은 조화이다. 한 생명체가 멋진 몸을 가지고 잘 살기 위해서는 수많은 세포들이 분화되어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야한다. 어느 한 곳이라도 부실하거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 생명체 전체는 심각한 결함이 발생하거나 죽게 된다. 이는 우리 인간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문명사회라는 의미는 다세포 생물과 같이 사회 구성원이 분화되어 역할을 분담하여 수행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중 어느 한 구성부분이라도 결함이 생기면 그 사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몸의 어느 부분이 고장 나면 약을 먹든가 수술을 하든가 해야 하듯이 우리 사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그 부조화가 곪아 썩기 전에 처방을 하여야 한다.
다세포 생물은 약 17억 년 전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추정되고, 캄브리아기의 생물 대폭발 때 본격적으로 많은 다세포 생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다세포 생물의 철학적 의미는 <역할분담>과 <조화>이다.
다세포 생물로의 진화를 나는 2단계 진화로 정의하고자한다.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는 과정을 나타낸 그림)
고생대가 시작하기 전의 생물들에게는 눈도 없었고 갑옷도 없었다. 당연히 고생대 이전의 시기에는 남아있는 화석이 드물다. 화석으로 남을 딱딱한 부분이 없는 까닭이었다. <종의 기원>쓰기 전 다윈을 가장 곤란하게 하였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캄브리아기에 생명의 빅뱅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화석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종의 조상이 발견되었는데 바로 그 앞 시기까지는 발견된 화석이 없었다. 진화가 설명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의 연결고리가 있어야하는데 이를 증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1900년 무렵 캐나다 로키산맥의 버제스고개에서 마침내 고생대 이전의 연체동물들의 화석이 대거 발견됨으로서 이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피카이아(pikaia)의 상상도: 모든 척추동물의 시조로 여겨지며 척추로 발전할 척삭을 가지고 빠르게 헤엄친다. 삼엽충 이전의 생물들은 이처럼 뼈나 껍질이 없거나, 너무 작거나, 혹은 너무 오래되어서 화석으로 남아 있는것이 거의 없다.)
식물을 뜯어먹는 동물들이 번성하게 되자 이 동물들을 잡아먹는 포식동물이 나타난다. 지금의 화살벌레와 비슷한 프로토헤르트지나가 최초의 포식동물로 추정된다. 1~5mm의 작은 동물로 동물을 잡는데 필요한 입은 있었으나 아직 눈을 가지진 못했다. 이때 전 세계의 해양에는 프로토헤르트지나의 이빨에 맞설 딱딱한 갑옷을 지닌 생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5억 4천 4백만 전부터 5억 4천 3백만 전 까지 약 100만년에 걸쳐 갑옷에 눈을 가진 삼엽충이 진화하였다. 눈은 이 시기 100만년의 진화 결과라 한다. 생명이 세상을 보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최초의 포식자로 추정되는 프로토헤르트지나 화석의 상상도 : 지름이 1~5mm 정도로 아주 작다.)
눈을 가진 생물이 나타나 번성하자 뒤에 진화하는 다른 동물들도 눈을 가지는 쪽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눈은 공통의 조상으로 부터 진화한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가지게 된 다발적 기원의 산물이다. 어찌되었든 생물들에게 눈이 생김으로서 생물의 세계는 급속도로 팽창하게 된다.
(삼엽충 화석 : 갑옷과 눈을 가진 최초의 생물로 고생대를 대표하는 생물종으로 몸을 머리, 가슴, 다리로 나눌 수 있어 삼엽충이라 불린다. 17,000종까지 분화하여 번성하였으며, 크기는 0.5C에서 70Cm까지 다양하였으나 보통 5~8Cm정도였다)
눈의 철학적 의미는 <지각(知覺)>과 <팽창(膨脹)>이다. 생명은 드디어 지구를 보기 시작했다. 보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경우는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엄청난 생활의 변화뿐만 아니라 진화의 방향도 새로 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30억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굼벵이 진화가 아니라 진화의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마치 산업혁명 이전의 인류와 이 후의 인류의 차이, 컴퓨터와 인터넷 이전의 인류와 이 후의 인류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큰 변화가 생물의 진화 여정에 생긴 것이다.
눈의 진화로 인해 생명은 삶의 영역을 육지로 넓힐 준비를 마쳤으며 온 지구를 생명으로 가득 채울 만큼 다양한 생물종으로 번성할 다양성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를 거치는 5억 5천만년 동안 지구 생태계는 크게는 5번의 대멸종, 비교적 작은 규모를 합치면 15번의 멸종 사건을 겪게 된다. 우리가 지질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대체로 이 멸종 사건과 관계가 있다. 2억 5천 1백만 년 전 고생대 페름기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를 가르는 대멸종은 생물종의 90%가 멸종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시베리아의 대폭발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약 100만년 정도 지속된 화산 활동으로 공기 중 이산화탄소의 양이 올라가고 이로 인해 지구의 평균기온이 상승하였다. 요즘 북극과 남극이 녹는 것처럼 당시 얼어있던 땅들과 바다들이 녹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동토의 땅과 바다 깊숙이 숨어있던 불타는 얼음으로 불리는 고체 메탄인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녹아 분출되기 시작하였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무려 72배나 강력한 온실가스이다. 이 결과 대기 중 산소의 양은 줄어들고 온도는 급격히 상승하였다. 그리고 90%의 생물종이 멸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생물 개체의 90%가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해 대가 끊긴 생물종이 90%이고, 나머지 10%도 대부분은 다 죽었지만 어찌어찌 운이 좋게 살아남은 몇 마리의 개체들에 의하여 유전자의 끈이 이어졌다는 의미이다. 생물 개체수로 환산하면 전체 생물의 99.99%가 죽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우리와 지구위의 모든 생명들은 이 때 살아남은 0.01%의 지독하게 운이 좋았던 조상의 후예들이다.
6천 5백만 년 전 중생대와 신생대를 가르는 유카탄반도에 떨어진 지름 10km 짜리 소행성의 충돌은 공룡을 비롯한 전체 생물종의 75%가 멸종했다. 인간의 문명이 지구를 지배하는 지금, 과학자들은 6번째 대멸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현재 지구에는 2천만~1억 종의 생물종이 산다고 하고 매년 약 5천~2만5천종의 생물종이 멸종한다고 한다. 이 정도 속도이면 짧게는 800년 길게 잡아도 2만년 후에는 지구의 모든 생물이 멸종할 것이다.
고생대 이 후 가장 무서운 사건인 2억 5천 1백만 년 전 지구 생물종의 90%를 멸망시켰던 고생대 대멸종은 100만년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인류문명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하고 있는지 인간은 성찰하고 자성하여야할 필요가 있다. 시베리아의 화산 대폭발과 메탄하이드레이트의 폭발로 지구의 평균온도는 약 6도 상승하였고, 현재 인류 문명이 석탄, 석유, 가스 등의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 올려놓은 지구 온도가 이 정도 되기 때문이다. 참고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지구 해양의 곳곳에는 메탄하이드레이트가 엄청나게 갖혀 있다. 우리나라 동해에도 많은 양이 있어 이를 개발하여 연료로 쓴다고 한다. 그리고 시베리아를 비롯한 툰드라 지방의 땅속엔 역시 얼어 있는 메탄 덩어리들이 엄청나게 존재한다. 고생대 페름기 말기의 그때처럼 지구 온도 상승으로 메탄이 순식간에 녹아 방출되기 시작하면 지구는 걷잡을 수 없는 환경재앙에 직면하게 되며 인류는 지구의 모든 생물들과 지구의 역사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될지도 모른다.
(메탄 하이드레이트 매장지도 ; 지구 곳곳에 어마어마한 양이 묻혀있다. 기온이 올라가 이것들이 기화될 경우 지구 환경은 걷잡을 수없이 변화할 것이 자명하다)
(지구에는 전체 화석연료가 5000기가톤이고 메탄 하이드레이트가 그 2배인 1만 기가톤이 존재한다.)
나는 이제 생물의 5단계 진화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앞에서 말한 4단계의 진화 즉 진핵세포로의 진화, 다세포 생물로의 진화, 성의 분화로 인한 진화, 눈의 진화는 지금 살아있는 거의 모든 생물종이 공통으로 공유했던 진화이다. 이 진화에 동참하지 못한 생물종은 도태되어 멸종하였다. 그러나 5단계 진화는 조금 특수하며 특별하다. 그것은 인간의 진화이다.
인간(人間)!
이 독특한 생물종이 특별한 까닭은 지성(知性)의 진화(進化)이다. 생물학적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다른 생물종에 비해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인간의 진화가 특수 한 것은 지성의 진화를 통해 형이상학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인 사고란 인간이 별을 본다는 의미이다. 형이상학이 형상화 된 것이 종교, 과학, 그리고 철학이다. 형이상학이 기술이 되고 생활이 된 형이하학적인 산물의 결과를 우리는 문명이라 부른다.
인간의 지성이 별을 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주와 생명의 본질에 대하여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문 앞에 서 있다. 동굴을 나가는 문이다. 진실을 통해 진리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판단을 하여야한다. 이미 우리는 우주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누군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생명에 대한 판단을 하여야한다. 생명은 우연의 산물인가, 누군가의 작품인가 하는 판단을 하여야 한다. 지구 생명 40억년의 치열한 진화의 결과가 단지 우연의 산물이라면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되듯이 생명이 시작되었을 리도, 수많은 멸종의 위기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을 수도, 끈질기고 악착같이 변화와 혁신을 통해 지금까지 연결될 수 있는 지를 판단하여야 한다. 공교롭게도 나의 글의 대부분의 참고자료는 무신론적 우연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의 자료가 대부분이다. 유신론적인 창조를 기반으로 하는 자료는 자기가 믿는 신에게 창조의 초점을 맞춘 까닭에 사실 인용할만한 가치가 떨어지거나 심각하게 왜곡되고 오염되어 있어 쓸 만한 자료가 없었다. 예를 들어 고생대의 생명의 폭발현상을 창조의 시점으로 본다든가 생명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든가 미토콘드리아 이브나 Y염색체 아담을 연결시켜 억지로 인간의 창조를 창세기에 짜 맞추려고 하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차라리 슬프기까지 하다. 성경은 문구가 아니라 그 문구가 품고 있는 의미가 중요하다.
"해야, 기브온 위에,
달아, 아얄론 골짜기 위에 그대로 서 있어라."
그러자 백성이 원수들에게 복수 할 때까지
해가 그대로서 있고
달이 멈추어 있었다. (여호수아 10,12-13)
이 성경구절은 지금부터 약 3300년 전 경 이스라엘의 여호수아가 아모리족과 전쟁을 할 때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 문구를 어찌 해석하는 것이 옳은가?
‘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용기백배 사기충천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아모리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로 정리해보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구절은 유명한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에 사용되었다. 신성모독은 죽음의 죄이고 성경의 무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신성모독에 해당된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아는 것 같은 재판관이 화려한 성직자의 옷을 입고 높디높은 의자에 앉아, 꿇어 엎드린 갈릴레이에게 묻는다.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하였느냐? 지구를 멈추게 하였느냐? 태양이 지구를 돈다면 태양이 멈추어야하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면 지구를 멈추어야하지 않겠느냐?"
힘없고 가난한 과학자 갈릴레이는 이 무지(無知)의 폭력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우주는 무한하게 퍼져 있고 태양은 그 중에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들도 모두 태양과 같은 종류의 항성이다." (조르다노 브루노)
(조르다노 브르노의 초상화 ; 이 슬픈 철학의 순교자는 아무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통찰은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년 ~1600년 2월 17일)는 이탈리아의 사상가이며 철학자이다. 그는 도미니꼬 수도회의 수도자이기도 하였다. 16세기. 이 얼마나 위대한 발견인가? 갈릴레오보다 16년 먼저 태어난 이 천재는 자기의 발견을 너무나 기뻐했을 것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 위에 태양과 달과 별들이 촘촘히 걸려있다고 믿었던 중세의 작은 우주관에서 우주의 영역은 무한히 넓어졌다. 그에게는 하느님의 영역이 그 영광의 영역이 그 만큼 늘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우물 안에 개구리였던 중세의 지성은 그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와 성경을 부정하는 신성모독과 이단으로 몰고 간다. 그의 기쁨은 슬픔과 공포로 바뀌고 그는 이탈리아를 떠나 종교개혁 이 후 사상의 폭이 조금은 넓어지고 자유로워진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의 위대한 발견을 설파하려 한다. 그러나 영국에서마저 그의 위대한 우주관은 조롱거리가 된다. 그는 고향이며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이탈리아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는 1591년 현재의 이탈리아 땅인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체포되어 8년간의 감옥 생활을 하며 온갖 고문과 회유를 당한다. 그러나 회유에 굴복하지 않았던 그는 결국 로마 교황청 이단 심문소로부터 이단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화형을 당할 때 그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말뚝에 묶여 있는 나보다 나를 묶고 불을 붙이려 하고 있는 당신들 쪽이 더 공포에 떨고 있다."
진리를 설파하였으나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와, 진실을 이야기했으나 화형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르다노 브르노.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하여 좀처럼 바꾸려하지 않는다.
생명은 우연인가?
우연이라고 믿는 학자들에게 아무리 우연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여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은 지구의 모든 생명은 하나의 조상으로 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생명이 만약에 우연히 생긴 것이라면 마땅히 우연히 만들어진 여러 생명체의 후손들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또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는 새 생명이 우연히 만들어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지난 40억년동안 생명은 단 한그루의 생명나무를 가지고 진화해왔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었고, 마치 레벨을 높여가며 점점 힘이 세어지는 RPG(Role Playing Game)게임처럼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좀 더 멋지고 강하게 진화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또한 그 진화의 순간순간마다 창조자의 의지가 개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게임의 캐릭터가 스스로 레벨을 올릴 수는 없듯이 진화의 레벨도 스스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누군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미 이야기하였듯이 우리의 생각은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BIG IDEA의 산물이며 얼마의 시간 후에는 모두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의 창조자는 ‘빛이 생겨라!’로 시작하는 전지전능의 천재형 하느님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기를 희생하여 우주를 만들고, 죽을 때 그의 몸에서 나온 구더기로 생명을 창조한 반고(盤古) 하느님 쪽에 더 가깝다. 우리의 하느님은 노심초사 생명을 지켜내고 번성시키려 무지무지 노력하는 노력파 성실형 하느님의 모습인 것이다.
반면 창조론자들은 오로지 자기들 경전에 모든 것을 맞추려한다. 자기가 믿는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처럼 위험하다. 유연성 없는 신념과 신앙은 세상을 하나의 잣대로만 재단하려 한다.
다시 5번째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진화에 창조자가 개입하였다면 대부분의 생명에게 주어진 4단계의 보편적 진화와는 달리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지성의 진화인 5번째 진화에는 그 특수한 목적이 있을 것이다. 지성은 창조자가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를 통하여 그가 존재함을 느꼈고, 과학을 통하여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고, 철학을 통하여 그의 목적을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목적이 무엇일까? 나는 한동안 고민을 하였다. 며칠을 숙고하고 명상을 한 후 깨달은 것은 안타깝게도 창조자는 인류에게 도움을 요청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명상의 결과가 틀렸기를 바란다. 너무나 안타깝지 아니한가? 인간은 신에게 기도를 해야 하는데 오히려 창조자가 인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 분은 생명의 지구와 생명의 우주를 지켜내는 일에 내부의 조력자로서 인류를 지목하였다. 그리고 길게는 수백만 년, 짧게는 수십만 년을 준비하고 최근 몇 천 년 동안은 인류의 진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인류의 모든 민족의 시작은 신화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인류는 불과 몇 천 년 사이에 순식간에 지구를 완전히 점령한다. 문명을 통하여 인류는 엄청난 힘과 지혜를 얻었다.
이제는 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인류는 장님의 코끼리처럼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문화를 통하여 발전하였다. 그러다 몇 백 년 전 인류는 지구의 형태와 거기에 흩어져있는 종족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의 지구 세계는 완전히 통한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고, 필요하다면 그 곳의 구성원들과 소통할 수도 있다.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모은 지혜는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넘실되고 있다.
형이상학인 종교와 과학과 철학은 서로 다른 방향 에서 한 곳을 보고 있다.
근본 질문.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는 형이상학의 융합이 필요하다. 인류의 지성이 지금까지의 모든 지혜와 깨달음을 통하여 마침내 그분이 만든 우주와 생명의 본 모습을 보고, 그 분의 대의지(BIG IDEA)를 깨달아 인류의 의지가 창조자의 대의지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분의 파트너가 될지 오히려 문명의 이기를 잘못 이용하여 6번째 생명 대멸종의 주범이 될지는 지금부터의 인류의 판단에 달려있다.
어느 날 인디펜던스 데이(Independence Day)라는 영화를 본 딸아이가 외계인의 존재에 대하여 묻는다.
나는 아마도 존재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외계인이 있다면 ‘지구를 침략할 것 같으냐?’고 묻는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왜냐고 다시 묻는다. 영화를 보면 나쁜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여 인류를 멸망시키려하고, 외계인이 거의 승리할 무렵 용감한 영웅이 나타나 지구를 구한다는 내용이라고 반문한다.
나는 답한다.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한다고 믿는 것은 만약 현재의 인류가 외계인의 별을 발견하고 그들이 인류보다 약하다고 판단하면 정복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바타라는 영화에서는 인간은 욕심 때문에 외계를 침략한다. 그것이 현재까지의 인류의 문명 수준이다.
인류의 문명은 싸움을 통하여 발전하여 왔다. 물론 지구 생명도 싸움을 통한 진화과정을 겪어왔다. 그러나 이 싸움의 문명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결국 인류는 스스로 자멸할 것이다. 인류는 이미 인류뿐만 아니라 지구 생명 모두를 멸종시킬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과학기술을 볼 때 앞으로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결국 인류가 싸움의 레벨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이 힘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곧 자멸이다. 인류는 이미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보다도 월등히 우월한 존재가 되었다. 이 우월성을 싸움을 하는데 지속적으로 사용할지 인류를 포함한 다른 생명체와 지구의 보호자가 되는데 사용할지는 인류의 선택이다.
이 업그레이드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인류의 과학은 지속적으로 발전해 우주를 여행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행성에서는 외계생명체도 발견할 것이다. 그때 우리가 할일은 이 행성을 파괴하거나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멀리 떨어져서 혹은 뒤에 숨어서 그 곳 생명체들이 잘 번성하고, 지구와 같은 또 다른 생명의 별인 이 행성이 잘 보존되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 지구에 수십 광년 혹은 그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지구를 방문한 손님이 있다면 그들도 마땅히 우리에게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 적어도 그들은 이미 피조물의 영역을 넘어 창조자의 영역으로 들어섰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인류가 과연 피조물의 영역을 넘어 창조자의 영역으로 진화해 5번째 진화 모험이 성공으로 끝날지, 아니면 끝까지 지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다 결국 멸망의 길을 걸어 또 하나의 실패한 진화로 기록될지 초조하게 지켜보는 이가 있다. 40억년 생명의 역사에서 모든 진화가 다 성공한 것은 아니다. 말했듯이 우리의 창조자는 실패를 모르는 전지전능 천재형 하느님이 아니라, 온갖 실패와 역경에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묵묵히 전진하는 노력형 초절정 성실파 하느님이다. 그분은 실패를 안타까워는 하겠지만 두려워 할 분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진화에 실패한 생물종은 생명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진화에 성공한 생물종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6500만 년 전 유카탄 반도에 떨어져 공룡을 멸망시켰던 지름 10km짜리 소행성이 다시 온다면, 현재의 인류는 능히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주의 역사를 우리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 내부에 있으므로 그 일이 가능하다. 나의 생각에 소행성이 지구로 오는 것은 우주 내부의 시스템의 문제이므로 외부에서의 조종은 불가능할 것이다. 게이머가 캐릭터는 움직일 수 있지만 프로그램을 바꿀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내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내부에 있는 우리들 밖에 없다. 이것은 5번째 진화의 이유이며 또한 목적이다.
만약 인류의 과학이 좀 더 발전한다면 2억 5천만 년 전 고생대 페름기 말에 있었던 대재앙도 과학기술로 예방하거나, 혹은 노아의 방주처럼 생물종들을 데리고 잠시 피신하였다가 다시 돌아오거나 아니면 새로운 행성을 찾아 정착해 생명의 역사를 이어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더 큰 힘을 얻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창조자의 영역으로의 진화의 완성이다. 그것은 싸움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이다. 그 진화를 위하여 우리 모두는 우주와 생명에 관한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알았다.
유레카(Eureka)
[동굴]
나는 지금 생명의 복도의 끝자락인 진리의 문 앞에 서 있다. 지난 50억 년 간 태양과 지구에서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우리는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남았고 이제야 비로소 창조자의 조력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진화하였다. 내가 이 동굴의 문 앞에 서 있듯이 인류도 지금 5번째 진화의 문 앞에 서 있다. 인류가 이 문을 보고자 한다면 볼 것이고, 열고자 한다면 열릴 것이다.
진실을 아는 만큼 진리를 볼 수 있다.
나는 문을 연다.
(문을 열면 새로운 길이 있다. 우리는 저 닫힌 문 넘어에 무엇이 있을까 미리 두려원한다. 그러나 누군가 한사람이 저 길을 걸어가면 비로서 그 길이 길이 된다. 사진 : 2014년 8월2일 안산 갈대습지공원)
원문; 2014년 3월 6일
수정; 2014년 10월 10일
참고자료 : 위키백과, 엔하워키 미러, 과학동아, 최낙언의 자료보관소, R&D백과사전, 이대모 서대문 자연사 박물관장의 자연사이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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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0일 하늘바다 여운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