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01. 고창읍성내 맹종죽림 사적
글 유현영 여행작가
선운사 동백꽃은 진작 졌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사랑하여 봄마다 찾던 동백은 지난 계절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꽃 진 자리를 밟아 미당을 추억하며 길을 걷는다. 그의 시 때문에 제대로 보지도 못한 꽃을 두고 청춘들은 가슴앓이를 한다. 그의 시가 마치 나의 것 인양 사무치는 이들이 자박자박 길을 걷는다. 어쩌면 그리움은 갈증과 같은 것이어서 여간해선 가셔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초록이 융단처럼 깔린 고창군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만나는 일은 해갈의 기쁨을 준다.
바람 가득한 그 곳, 미당시문학관 영남에 청마 유치환이 있다면 호남엔 미당 서정주가 있다고 했다. 태어난 시기는 청마가 1908년으로 앞서지만 두 시인 모두 1930년대에 등단하여 그 시기의 문단에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시문학계의 양대 산맥이다. 1915년 고창에서 태어난 미당은 22세가 되는 1936년 등단 이후 85년에 걸친 생 동안 900편의 시를 남겼고 15권의 시집을 남겼다. 그가 남긴 900여 편의 시를 모두 알진 못해도 교과서를 통해 그의 시를 접하고 누군가의 노래로 들어오면서 햇살이 좋은 날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푸르른 날」)’고 흥얼대게 되고 바람이 불면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팔할)이 바람(「자화상」)’이라고 했던 그의 고백을 떠올리게 된다.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가면 미당시문학관이 있다. 소요산 자락에 자리한 미당시문학관은 폐교된 선운분교를 개조해 만들었다. 푸른 담쟁이가 싱그러운 느낌을 주는 대문을 지나 나지막한 건물은 현대적이고 안정적인 모습이다. 아이들의 차지였을 운동장 너른 터를 여유롭게 걸어 문학관으로 들어선다. 볕이 곱게 들어오는 문학관 내부에는 미당의 육필원고와 남긴 작품들, 그리고 그의 애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벽에는 그의 작품들이 걸려 있고 익숙하고 또 새로운 시들을 읊조리며 전망대로 향한다. 층을 오르며 만나는 그의 사진과 흉상 속에는 다양한 그의 얼굴이 담겼다. 매서운 눈빛이 간담을 서늘케도 하고 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엔 활짝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익살스런 표정엔 친근감이 느껴진다. 늘 소년의 마음이고 싶었던 미당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의 생을 조각조각 흩어진 기억들을 밟고 전망대로 향한다. 그리고 하늘 문이 열리듯 전망대 문을 열면 쉼 없는 바람이 지난다. 둥그런 창 너머로 초가를 얹은 생가가 보인다. 그리고 멀리 돋움볕 마을의 벽화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학관을 나와 생가로 향한다. 초가 얹은 아담한 시골집, 작은 장독대에도 따스한 볕이 내리고 마을길을 따라 사거리 왼편으로 그가 글공부를 했던 서당 자리와 오른편으로 외가 자리가 있다. ‘뻐꾹새 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을 알았던 다섯 살 소년(「뻐꾹새 소리뿐」)’이던 그는 일하러 나간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 할머니 무릎에 머릴 대고 잠든 날이 더 많았다. 그렇게 까무룩 잠결에 듣던 이야기속의 전설과 신화들이 시로 탄생한다. 돋움볕 마을을 향해 걷는다. 문학관을 등지고 멀리 벽화마을이 보인다. 미당의 잘 알려진 시 「국화 옆에서」가 담벼락에 쓰여 있고 집집마다 담장이며 지붕에 국화꽃 그림을 이고 있다. 환하게 웃는 누이 같은 얼굴은 마을 주민의 얼굴이다. 한창 바쁠 시기의 농가마을은 고요하고 넓게 펼쳐진 들판은 한창 푸르게 물이 올랐다.
02. 선운사 도솔천
시인의 마음으로 선운사를 거닐다 도솔천 물소리를 들으며 선운사로 향한다. 선운사 입구에는 미당의 시비가 있다. 1974년에 세워진 ‘선운사 동구’ 시비를 지나치며 걷는다. 그 시를 쓸 무렵 그도 꽃이 피기 전 이른 걸음에 아쉬움이 컸던가보다. 막걸리집 아낙네의 소박한 육자배기 가락이 귀에 들리는 듯 흥얼거리며 느린 걸음을 옮긴다. 꽃이 피는 때를 맞추는 일은 의외로 어려워서 일러도 아쉽고 늦어도 아쉬운 걸음이 많다. 꽃이 아니더라도 선운사로 가는 길은 꽃처럼 곱다. 도솔천 맑은 물빛이 좋고 오색연등 걸린 흙길도 곱다. 수선화 핀 선운사 경내에서 잠시 머물다가 만세루 낡은 마루에서 삐걱대는 소리에 맑은 차 한 잔으로 갈증을 가시고 오가는 사람들 틈에 다시 발을 섞는다. 그리고 내쳐 도솔암으로 향한다. 선운사 차밭도 지나고 장사송도 지나 도솔암으로 가는 길은 한창 초록이 우거진다. 선운사 매표소에서 도솔암까지 느리게 걸어도 두어 시간이면 족하다. 그러니 조바심 낼 것 없이 걸어도 좋다. 도솔암 마애불을 찾아간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좌상의 거대한 모습은 압도적인 크기지만 친근하고 푸근한 모습이다. 마애불을 지나쳐 내원궁으로 향한다. 절벽으로 난 수직의 계단을 오르는 일이 숨이 찰 무렵 하늘이 보인다. 산봉우리들이 눈높이로 보이는 높은 절벽. 그 위에 제비집처럼 앉아있다. 기도를 하러 가는 일도 고행이다. 선운사를 돌아 나오며 시비를 다시 만난다. 누구라도 이곳에선 시인의 마음이 되어 그리움과 간절함을 품어보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꾸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짐작해본다.
03. 미당시문학관에 재현된 서정주 시인의 집필실 04. 돋움볕 마을 골목 어귀
정감어린 고창읍내와 고창읍성 선운사를 나와 고창읍성으로 향한다. 조선시대 고창현을 지키고 나아가 호남내륙을 수비하던 역할을 했던 고창읍성은 성곽의 모습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고 관아, 객사, 옥사를 비롯한 성내 건물들이 복원되어 있어 성 안팎의 모습이 다양하고 아름답다. 자연석을 다듬어 쌓아 만든 성곽은 구불하게 아름다운 곡선을 가졌고 치성에서 바라보는 옹성의 모습이 언제 봐도 곱다. 고창읍성은 성곽 걷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성의 입구이자 북문인 공북루에서 등양루 방향으로 걷는다. 공북루와 마찬가지로 등량루도 옹성으로 가려져있다. 반원 모양의 옹성의 역할을 문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게 가려주는 수비의 용도인데 그 모습이 아름다고 견고하다. 성곽에서 사각형 모양으로 내어쌓은 치성도 성곽수비를 위한 것. 이곳에 서면 성곽의 모습과 고창읍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곽길이 싫다면 성안 길로 걸으면 된다. 소나무가 우거진 솔숲 길은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솔숲 우거진 길을 봤다면 맹종죽림도 찾아봐야 한다. 사적으로 지정된 이곳의 대숲은 한창 우거 졌다. 바람에 댓잎 스치는 소리를 따라 숲 가운데로 들어가면 고요한 또 다른 세상이다. 그대로 걷다보니 다시 공북루 앞이다. 다리병이 낫기를 바라면 한 바퀴, 무병장수를 바라며 또 두 바퀴, 극락왕생을 바라며 세 바퀴를 돈다는 답성놀이까지는 아니어도 한 바퀴 돌고나니 후들거리던 다리가 짱짱해졌다. 성 아래 신재효 고택 스피커에선 정겨운 판소리 가락 흘러나오고 한낮의 볕도 어느덧 누그러든다.
전북 고창 여행정보
▶ 가는 길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 나들목에서 선운사 방향으로 나와 22번 국도를 타고 부안면 소재지를 지나 용산저수지를 왼쪽으로 끼고 삼거리에서 우회전, 고갯길(질마재)을 넘어서면 미당시문학관이 보인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흥덕을 거쳐 고창으로 가는 버스가 1일 16회 운행(오전 7:00~오후 7:00) 중이며 3시간 10분 가량 소요된다. 미당시문학관과 선운사로 가려면 흥덕에서 하차 후 선운리 행, 선운사 행 군내버스로 환승하면 된다.
미당시문학관 www.seojungju.com 063-560-2760 선운사 www.seonunsa.org 063-561-1422 고창군청 문화관광과 http://culture.gochang.go.kr 063-560-2457~8
▶ 맛집 고창터미널 근처에 고향집(보리밥, 홍어탕 063-562-1609)에서는 푸짐하고 맛있는 보리밥 정식을 맛볼 수 있다. 고창읍성 근처에 60년 전통의 조양관(한식당, 2인 이상 063-564-2026)과 황토마을(갈치조림, 2인 이상 063-564-9979)이 맛있다. 선운사 지구에서 장어구이, 산채비빔밥 등을 잘하는 집이 여럿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