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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3월 04일 원천 교회
“그대로 하라”
본문 : [개역] 요 02 장 1~11 절
서론 :
“창밖에 봄이 왔습니다. 백로가 날고 청둥오리가 물가에서 한가로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습니다”
한가한 주말 설교준비를 하며 창가에 앉아 이런 저런 묵상에 빠져 듭니다. 우리 삶이란 것은 수많은 사건과 사건들, 관계와 관계들로 이루어 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주어지는 사건들을 지혜롭게 잘 처리하고 사건들을 원만하게 해결 합니다만 어떤 사람을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당황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 줄 몰라 절절 매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 결과 한 사람은 인생 전체가 평안과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는 반면, 어떤 한 사람은 인생이 불확실성의 어둠과 칙칙한 회색 빛 슬픔으로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잠언14:8은 말합니다.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고...
우리는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 살면 모든 것이 정답인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가 그 말씀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것이 첫 번째 문제이고 두 번째는 그 말씀이 들려진 대로 행동하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지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어머니,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 곳에 있는 문제들이 어떤 것들이며 그런 문제와 사건들을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하며 살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론 :
오늘의 본문은 ‘v1 사흘째 되던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계시고 v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라고 시작합니다.
오늘의 무대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그 무대 위에는 여섯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1)마리아와 2)예수님, 3)제자들, 4)하인들, 5)연회장, 그리고 6)그 외(신랑 신부 하객들)..그러나 오늘 복음서의 저자 요한은 주인공으로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다음으로 하인들과 연회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외의 인물들은 결혼예식의 실제적인 주인공이기는 합니다만 복음과 믿음의 주제 안에서는 엑스트라로 그려집니다.
오늘 저는 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사건(문제)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 문제에 봉착한 사람들의 반응하는 모습과 그들의 반응하는 행위 안에 있는 믿음의 모습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 첫 번째 가나 혼인 잔치에 펼쳐진 사건, 포도주가 떨어진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까요?
이스라엘의 결혼은 축제와 같아서 일주일씩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많은 하객들과 손님들이 방문해서 즐기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포도주와 음식 준비는 결혼 예식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축제의 자리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사건은 연회장 입장과 혼주 입장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사건입니다. 그들은 지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이렇게 무엇인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사업상 실패와 직장을 잃게 됨으로 발생하는 물질적인 문제를, 어떤이는 육체에 심각한 병을 얻게 되어 발생하는 건강의 문제, 어떤 사람은 가족과 대화가 단절되어 생기는 관계의 문제, 어떤 사람은 사고와 소송과 신체적인 상해의 문제를 경험하기도 하지요.
이처럼 사건과 사건의 문제아 문제의 연속으로 이루어 진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결국 인생은 사건과 문제의 연속인 셈이죠. 문제가 하나도 없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 혼자만 문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요 모든 사람이 문제를 경험하기 때문에 인생은 이러한 문제들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는 학교라고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 박사는 그의 책 ‘인생수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학교입니다.
어려서는 어린이에게 적합한 사건과 문제들이 주어지고 어른이 되고 나면 어른에게 적합한 사건과 문제들이 주어지죠. 그래서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끝없는 질문과 문제들로 이루어져 있는 듯도 합니다.
예를 들면 5살 어린이들은 “왜 초롱이는 나를 귀찮게 하지?” “왜 나는 하영이를 좋아하는데 하영이는 나를 괴롭히는 걸까?” 왜 엄마는 나더러 이것도 안된다, 저것도 안된다 모두 안된다는 말만 하시는 걸까? 아빠는 왜 따가운 수염이 있는데 엄마는 수염이 없지?...
10살이 되면 “왜 이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하는 거지? 나는 축구하고 노는게 훨씬 좋은데..” “왜 민경이는 내가 싫어하는 다른 애들과만 친하지? 민경이랑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왜 엄마는 내가 PC게임하는 것을 그렇게도 싫어하시는 걸까? 엄마 몰래 게임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15살이 되면 “내가 크면 대체 뭐가 되는거지? 나는 대체 무엇을 잘 할 수 있을까? 사랑은 무엇이지? 왜 내가 좋아하는 수경이 앞에만 서면 손에 땀이 나고 가슴이 두근 거리는 걸까? 뽀뽀는 어떻게 하는 걸까?” 애기는 어떻게 낳는 거지? 왜 선생님들은 수업을 저렇게 딱딱한 방식으로만 하시는거지? 엄마 아빠는 어릴 때 공부를 잘 했다고 하시는데 정말 잘한 거 맞나? 대학은 어떤 전공으로 선택해야 하는 거지?
20살이 되면 “나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결혼은 어떤 여자와(남자와) 해야 행복할 까? 이 친구는 이런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이런 단점이 있고..내 인생은 대체 어떻게 펼쳐지는 거지?” “부모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넘 미안한데 어떻게 하면 돈을 효과적으로 벌수 잇지?
25살이 되면 “결혼은 해야 하는데..모아놓은 돈은 없고 어떻게 해야하나?” “집은 어디서 구하고, 아이는 몇을 낳아야 하는 거지? 대체 어떤 직장을 가져야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인가?”
30살이 되면 “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지? 아! 이 아이는 왜 이리 울어 대는 걸까? 이 아이가 얼마나 커야 나는 좀 자유로울까? 이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길을 알아봐야 하나? 아내(남편)는 대체 내가 알고 있던 그 여자(남자) 맞는 걸까? 내가 이 사람과 평생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건가?
40살이 되면 “대체 우리집 아이들은 왜 이렇게 럭비공 같을까? 대체 어떻게 야 이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는 거지? 아이들과 집에 들어가는 자금이 점점 커지는데 어떻게 하면 노후를 대비할 수 있는 자금을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까? 지금 다른 일을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내가 이렇게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사는게 내가 기대하던 나의 인생이 맞나? 왜 아내는 점점 뚱뚱해 지는 걸까? 왜 남편은 점점 무모해 지는 걸까?
50살이 되면 “ 내 아이들이 제대로 독립된 개체로 살아 갈수 있을가? 이 아이들 결혼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지? 부모님 건강은 이대로 잘 지탱하실 수 있으신가? 큰 병이라도 걸리시면 문제가 큰데..부디 건강하시길...”
60살이 되면 “몸이 여기 저기 아픈데..건강은 어떻게 지탱해 나가야 하나..지식들에게 짐이 되면 안되는데..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나...손주들이 보고 싶긴한데... 자주오라 하면 부담이 클까?”
70살이 되면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나? 그 친구는 벌써관련 세상 떠낫다는데..나는 언제 떠나게 되나? 손주들과 아이들이 보고 싶은데..애들은 왜 자주 오지 않는 거지?”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 가지고 있는 온갖 질문과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과 사건과 문제들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으로 다루는 것일 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게 됩니다.
■ 이러한 삶의 문제들을 다루는 무대 위의 사람들의 사건에 대한 반응의 모습(행동)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가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이제 혼인 잔치가 막 무르익어 가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우왕좌왕 합니다. 마리아와 혼주와의 관계는 구체적으로 서술 된바가 없으나 온 가족들이 초청된 걸로 보아 마리아와 혼주는 상당히 가까운 관계일 듯 싶습니다. 이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참 이 여인의 말이 기이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왜 예수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요? 예수님이 포도주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요? 저는 이 말씀에서 아들의 구세주 되심에 대한 마리아의 강렬한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이 문제의 해결자임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답변 합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머니도 참으로 이상하신 말씀을 하시네요. 왜 남의 잔치에 포도주 떨어진것을 제게 이야기하십니까요? l 여기 까지는 일반적 반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에서 독특한 표현을 발견합니다. ‘여자여’ 예수님이 어머니를 향해 독특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 역시 어머니의 요청이 이제까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사람으로서의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가 아니고 구세주에 대한 한 여인의 믿음의 요청, 연약하고 불쌍한 인간들의 문제와 사건속에 메시야이신 당신이 직접 개입하여 해결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요 요청임을 인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여자여’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에서 ‘관계의 변화’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아들이 어릴 때에는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장성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권위 있는 위치에 서게 되면 이제 관계가 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때가 옵니다.
사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잉태할 때 자신에게 있었던 놀라운 사건들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입니다. 처녀의 몸으로 이미 정혼한 남자가 있는 상황에서 아이가 생겼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서는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기에 그 일로 인해 죽을 것 같은 두려움과 고민에 빠졌던 어머니 마리아 입장에서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며 그로 인해 언젠가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백성을 구할 메시아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녀는 오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드디어 아들이 아닌 메시야의 역할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관계들이 주어집니다. 그중에 시간이 흐르면 바뀌어야 하는 관계들이 있지요. 특히 권위의 문제에 관한 것들이 그러합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장성해 감에 따라 아들에 대한 부모의 권위는 달라져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모든 것을 부모가 가르치며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청소년기가 되면 아들을 친구 입장에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제는 아이들이 독립된 가정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잘 살아 갈 수 있도록 후원해주고 지원해 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관계의 변화에 잘 적응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 것이지요.
어머니 마리아는 이제 아들 예수를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메시야로 인식하고 자신과의 관계를 달리 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의 대답에 이은 어머니 마리아는 믿음의 발자욱을 한발 더 깊이 떼어 놓습니다. 이제는 담대하기 까지 합니다. 예수님이 아직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인들을 불러서 이렇게 지시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저는 이 말씀에서 마리아의 대단한 믿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는 믿음을 행위로 옮기고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이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능과 기적의 하나님이심을 강하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아들 예수님으로 하여금 연약하고 불쌍한 인간들의 문제에 개입하시고 해결해 주심으로 메시야이심을 나타내고 영광을 드러내도록 움직이시게 만듭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하인들을 불러서 명령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20~30갤론(3.78리터*20)이나 들어가는 물항아리 6개에 물이 가득 채워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라’ 하인들이 갖다 주었더라...우리는 이 사건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권능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분의 권능의 말씀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하인들의 모습에서 작동되고 있는 것이 발견됩니다. 비록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지시할 때 무엇이든지 예수님이 지시하는 대로 그대로 하라고 하였지만 만약에 하인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의지로 이것은 비 합리적인 지시야 라고 하거나 말도 안되는 일을 하다가 연회장에게 봉변당할 것을 두려워 한다거나 했다면 마리아의 믿음은 결코 결과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인들의 놀라운 순종으로 인해 마리아의 믿음은 하인들의 손을 통해 결과로 나타납니다.
오늘 저는 이 혼인잔치의 포도주 사건을 통해 믿음이 어떻게 작동 되고 있는지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 작동되는 원리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은 어떤 한 순간에 외부의 문제와 사건에 봉착할 때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 간절한 믿음의 기도는 누군가의 순종의 손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설혹 그것이 비합리적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러한 믿음의 행동이 인간적으로는 무척이나 두려운 것일 지라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므로 그대로 순종하는 것...그것이 믿음의 역사와 결과를 경험하게 합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예수님이 문제의 해결자이심을 믿었습지다. 예수님은 권능과 기적의 메시야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과감하게 믿음의 행보를 한발짝 한발짝 옮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움직이셨습니다. 하인들의 손, 순종의 손을 통해 예수님의 권능과 기적은 실체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삶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듯 당황스러운 문제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일들, 이때가 우리는 예수님께 무릎을 꿇어야 할 때입니다. 그 분께 문제는 들고 나가, 그 분께 아뢰어야 합니다. 포도주가 떨어 졌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순종하면 우리는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대로 하라...
결론 :
사실 오늘의 본문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에는 물이 포도주가 된 기적 말고도 또 한 가지 재미 있는 일이 숨겨져 있습니다.
v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사실상 요한 저자는 오늘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의 최종 목적지는 제자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세례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하고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은 아직 예수님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을 보며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라고 요한 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제자들에게도 믿음이 들어갑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음으로 인해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믿을 만한 종교가 아니며 예수님의 이름이 너무 가벼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마리아처럼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맞닥드리는 사건과 문제들을 대하게 된다면 우리는 분명 예수님의 권능과 기적을 경험케 될 것이며 그로인해 그 기적을 먼 발치에서 지켜 보던 사람들마저 예수님을 믿게 만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대로 하라!! 말하던 마리아처럼 강한 믿음으로 이 문제 많고 힘든 세상을 예수그리스도의 권능과 기적으로 넉넉히 이겨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