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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데뷔 때는 시속 150km의 강속구와 강력한 슬라이더가 무기였다. 이후, 직접 개발한 반포크볼과 투심패스트볼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가 준비한 마지막 무기는 바로 투혼과 근성이다. |
2005시즌 승리없이 3패에 평균자책점 4.73을 기록했다. 어깨관절순파열이 원인이었다. 작년 9월 미국 버밍햄의 앨라배마 스포츠클리닉에서 수술을 받았다.
어떤 수술이었나. 1992년 팔꿈치 수술과 비교한다면
어깨 인대가 끊어져 다 떨어져 나가고 말미잘 촉수처럼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그걸 다 덮어서 꿰매고 연골판도 찢어진 걸 핀으로 고정시키는 수술이었다. 팔꿈치보다는 어깨 수술이 훨씬 더 힘들더라. 팔꿈치는 어느 정도 아파도 어깨 힘으로 던지니까 스피드가 나오는데 어깨는 스피드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다.
37살의 나이에 수술을 선택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고통이 무척 심해 수술할 때가 왔구나 싶었다. 구단에서도 과연 재기할 수 있을까 고심을 많이 했지만 요즘은 구단이나 선수나 나이 들어서도 운동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다.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재활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팬들뿐만 아니라 프로야구 관계자들도 “나온다 나온다 하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하고 물어본다. 어디 잘못된 게 아니냐고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고. 하지만 정상적인 재활과정을 밟고 있다. (어깨를 가리키며) 여기 핀이 6개 박혀 있다. 국내에 어깨에 핀을 6개나 박은 투수가 없다. 그만큼 좋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을 받은 거다. 이달 중순이나 이달 말쯤 1군으로 올라갈 것 같다.
집(서울 대치동)에서 고양시 원당훈련장까지 무척 멀텐데. 벌써 1년째다.
멀긴 멀더라. 기름값도 장난이 아니다.(웃음) 보통 집에서 아침 8시 30분 정도에 나와 저녁때 돌아간다.
야구인생의 시작과 태평양 돌핀스
야구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인천 숭의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했다. 형이 먼저 야구를 했는데 무척 재미있어 보이더라.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너만은 야구하지 말라며 말리셨는데 계속 하고 싶다고 했더니 어느 날 아버지께서 테스트를 하자고 하시더라. 아버지는 태권도계 원로이신데 운동을 하셨던 분이니까 운동신경이 얼마나 되는지 테스트해보자는 것이었다. 공을 한번 던져 보라고 하셔서 던졌는데 그때도 내 공이 좀 빠른 편이었다. 던지는 걸 보시곤 야구해도 되겠다 생각하셨는지 그때부터 허락해 주셨다.
중, 고등학교를 모두 인천에서 다녔다.
인천 동산중학교와 동산고등학교를 나왔다. 중3 때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다 동산고 2학년 때인가 봉황기와 황금사자기대회에서 결승전까지 모든 경기를 나 혼자 던지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 한양대로 진학했는데
그땐 한양대에 야구부가 있는지도 몰랐다. 고려대나 연세대 또는 동국대 정도만 알고 있었다. 고1 때인가 원래부터 좋지 않던 무릎에 탈이 났다. 한양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됐는데 한양대 코치와 감독이라는 분이 찾아와서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가더라. 게다가 수술을 했는데 돈도 받지 않고. 2학년이 되니까 한양대가 연습경기를 하러 동산고로 오기도 했다. 그때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는데 졸업반이 되니까 한양대에서 나를 보내달라고 요청을 해왔다.
당시 연세대 진학이나 프로팀 진출설이 나돌았는데
이중등록 파문으로 곤욕을 치르지 않았나. 동산고 감독님은 인하대에다 도장을 찍고, 나는 한양대에 간다고 도장을 찍고.(웃음) 나 때문에 무슨 조항까지 만들 정도로 떠들썩했다. 이중등록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태평양에서 5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당시 5천만 원이면 꽤 큰 금액이었는데 왜 계약하지 않았나.
그때만 해도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행세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돈은 필요없다. 무조건 대학에 간다’고 생각했다.
한양대 진학 후 ‘제2의 선동열’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LA 다저스에 한국인 최초로 스카우트될 뻔 했는데
대학 입학 후 잘 먹으니까 살도 찌고 힘도 붙었다. 그러다 대학 2학년 때인 1989년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뽑혔다. 그해 7월 미국에서 개최된 한미야구선수권대회에서 내가 잘 던졌다. 마침 그 대회가 미국 전역으로 중계됐는데 대회를 마친 뒤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무척 많더라. 이 대회를 계기로 다저스와 밀워키 브루어스를 포함한 4개 팀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다저스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나왔고 그때 ‘박찬호 할아버지(토미 라소다 전 LA 다저스 감독)’를 처음 봤다. 그러나 학교의 만류로 가지 못했다. 만약 갔다면 한국인 메이저리그 도전사의 첫번째 케이스가 됐을 것이다(1994년 1월 한양대 1학년인 박찬호가 LA 다저스로 진출했다).
한양대 졸업반인 1991년 말 LA 다저스에 입단하려 하지 않았나.
그때 다저스 구단 관계자가 나와 계약을 하려고 서울 하얏트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잠시 긴 한숨을 내쉬다가) 검찰에 붙들려 갔다. 내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기회가 눈 앞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병역기피 혐의였다.
병역기피 혐의 내용을 검찰에 알린 사람이 태평양 관계자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었고 나도 어느 정도 확인을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모두 지난 일인 것을. 태평양에 입단하고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팔꿈치 인대가 끊어져서 2년을 쉬어야 했다. 재활을 거쳐 프로 3년 째에 비로소 8승을 거뒀다.
1994,95년 각각 8승을 거뒀지만 평균자책점은 3점대였다. 당신이 현대에서 투구에 눈을 뜬 것이 아니라 태평양 때 팀전력이 뒤를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태평양은 다른 팀 2군 정도의 실력이었다. 태평양이 좋은 성적을 낸다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유는 있었다. 일단 선수단 분위기가 조금만 뒤지고 있어도 ‘오늘은 졌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선수단 지원도 좋지 않았다. 가령 선수단 회식을 고기집에서 하면 고기를 먹다가 중간에 젓가락을 놓기 일쑤였다. 어느 정도 먹으면 프런트가 알아서 고기를 끊는 거다.(웃음)
현대 유니콘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6년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했다. 현대의 구단 인수 뒤 바뀐 점은
유니폼부터 시작해 뭐든 최고로 해줬다. 회식 분위기도 달랐다. 선수단 회식을 하는데 태평양에 있던 분들이 현대 프런트로 고스란히 오다보니까 이분들이 옛날 생각을 하셨는지 고기를 먹다 중단시켰다. 그런데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선수들이 고기를 안 먹고 가만히 있으니까 그 당시 단장님(현 김용휘 사장)이 “왜들 고기 안 먹고 있느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이제 고기 그만 먹으라는데요”라고 했더니 단장님이 주무를 불러 엄청 화를 냈다. “선수들이 먹고 싶다고 할 때까지 먹이라”고 하셨는데 그날 고깃집에 있는 고기가 모두 바닥났다.
재정적인 지원 말고 다른 변화는 없었나.
정신적인 변화가 컸다. 현대로 바뀐 이후 정신교육을 많이 받았다. 특히 삼성전에 나서는 정신자세에 대한 교육을 강도높게 받았다. “다른 팀한테 다 지더라도 절대 삼성한테는 지지 마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실제로 삼성한테 이기면 구단에서 보너스도 주고 하니까 선수들 사이에 ‘이기면 이렇게 지원해 주는구나’ 하는 의식이 생겼다. 정말 죽기 살기로 싸웠다. 지금도 삼성에게만은 성적이 좋지 않은가.
김재박 감독과 4번의 우승을 일궈냈다. 각별한 사이일 텐데
일년에 몇 마디 듣는 게 하늘에 별따기인 분이다.(웃음) 그래도 감독님이 나와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편이다. 언젠가 감독님께서 인터뷰를 하셨던 모양인데 그때 질문이 "만일 당신이 야구선수로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선수가 되고 싶은가"하는 거였다고 한다. 그 질문에 감독님이 "정민태와 심정수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고 하셨단다. 감독님이 그만큼 인정해 준다는 건 선수로서 무척 기쁜 일이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한명 더 있다. 김시진 투수코치다.
김코치님은 선수들에게 "이렇게 던져라 저렇게 던져라"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웬만하면 간섭도 안 한다. 대신 선수들이 잘 할 수 있게끔 동기부여만 해주신다. 가르쳐야 할 선수는 2군에 있다. 1군에 있는 선수들은 어느 정도 던질 줄 아니까 조언과 동기부여만 해주면 된다. 그런 점에서 김코치님은 완벽한 투수코치다. 항상 선수들을 즐겁게 해주시는 분이기도 하다. 선수와 코치간의 불필요한 선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엄격할 때 엄격하고 받아줄 때 받아주고, 그것을 아주 적당하게 적용하는 분이라는 생각이다.
1998년 첫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소감이 남달랐을 것 같다.
그때 펑펑 울었다. 당시에는 인천 야구팬들이 정말 열광적이었다. 내가 야구장 밖에 나가면 인천팬들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부탁했다. “제발 해태한테만은 지지마라” “죽기 전에 딱 한번만 우승 장면을 보게 해 달라” 그러다 막상 내 손으로 우승하게 되니까 감정이 복받쳐서 눈물이 나는데(잠시 눈시울을 붉히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이다.
그런데 현대가 인천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고지를 옮겼다. 당신도 비난의 화살을 맞았는데
수원에서 경기하다 인천에라도 갈라치면 늘 눈에 띄는 건 ‘배신자 정민태’라는 플래카드였다. 인천팬들께서 내 욕을 엄청 많이 했다. ‘네가 나서서 구단의 결정을 온 몸으로 막아야 했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선수가 구단에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인천에 남게 될 상황은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선수단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민태는 새치가 많다. “염색은 투구에 필요한 동체시력 보호에 좋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컸을 텐데
그렇게 인천을 떠났을 때 그냥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인천도 부산처럼 열정적인 팬이 상당히 많다. 게다가 나는 인천이 고향이다. 야구인생을 인천에서 마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고향을 버리고 싶었겠는가. “우리가 이 성적을 인천에서 냈으면 얼마나 많은 관중이 모였을까” 하고 선수들끼리 그런 말도 많이 했다. 이제 다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아쉽고 슬프다.
이제 일본 시절 이야기를 하자. 2000년에 일본으로 진출한다고 했는데 못 갔다.
요미우리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한 건 2000년 전부터였다. 제대로 됐다면 2000년에 갔을 것이다. 그때 팀도 우승시켰고 구단도 승낙했다. 그런데 막판에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막아서 가지 못했다.
일본 진출이 좌절된 뒤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억울함 때문이었다. 이상훈(은퇴)이나 이종범(현 KIA 타이거즈)은 국내에서 5년만 뛰고도 일본에 진출했지만 나는 7년을 뛰고도 가지 못한다니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봐도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지나치게 운이 따르지 않는 것 같아 절망적이었다.
결국 200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이적료는 5억 5천만 엔(약 55억 원), 계약금 1억 5천만 엔(약 15억 원)에 연봉 1억 3천만 엔(약 13억 원)이었다.
그때 주니치 드래건즈하고 오릭스 블루웨이브, 요미우리 자이언츠 세 팀에서 관심을 보였다. 지금도 내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원해서 간 것으로 오해를 하시는 분이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니.
사실 선수에게 떨어지는 몫은 세 팀 모두 비슷했다. 다만 구단에게 돌아가는 이적료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물론 이왕 일본행을 선택한다면 최고의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가자는 마음도 있었지만 나만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찌됐든 고(故)정몽헌 회장님이 승낙해 주셔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본에 갈 수 있었다.
당시 요미우리에는 한국선수가 2명(조성민, 정민철)이나 있었다.
그때 요미우리에 있던 5명의 외국인선수 중에 한국선수가 3명이었다. 1군은 5명 가운데 3명만 뛸 수 있었고. 그래서 ‘한국선수끼리 주전경쟁을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바꿔서 생각하면 한국선수 3명 모두 1군에서 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다가 (조)성민이는 아파서 쉬고 있어 실질적인 한국선수는 (정)민철이와 나, 2명인 상황이었다.
일본 진출 첫해 부진했다. 감독과의 불화 때문이었나.
첫해 감독이 나가시마 시게오였고 이듬해는 현재 사령탑이기도 한 하라 다쓰노리였다. 사실 나가시마감독은 일본야구영웅이라는 점 때문에 감독으로 있던 분이었다. 자기팀 선수 이름도 잘 모르더라.(웃음) 하라감독은 참 사람이 좋다. 외국인선수들이 외로움이라도 탈까 봐 농담도 하고 말도 많이 걸어주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였던 가토리 요시타카가 문제였다. 당시 가토리코치가 투수운영에 관해서는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가토리코치는 나를 보자마자 “네가 한국 최고의 투수라고 하는데 얼마나 콧대가 센지 두고 보자”라고 하더라. 왜 그가 나를 경계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 진출 준비가 부족하지는 않았나.
그렇지 않다. 일본에 가기 전 선동열 삼성 감독(1996~99년 주니치 드래건즈)을 만나 조언을 들었다. 선감독님이 그러시더라. “무조건 참고 그쪽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라”고. 그래서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가토리코치가 미국출신 선수들한테는 한마디도 뭐라 하지 않으면서 유독 한국선수들한테만 필요 이상의 주문을 하는 거다. 심지어 앞에서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불화의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입단 첫해 실패하고 죽어라 연습만 했다. 이듬해 스프링캠프가 시작되는데 가토리코치가 2군에서 시작하라고 하더라. 아무 소리 안하고 2군 캠프에서 훈련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1군 캠프로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막상 가니까 배팅볼을 던지라고 하더라. 상대가 누구였는지 아는가?
글쎄.
고등학교 선수들이었다.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참았다. 던지고 나니까 다시 2군으로 내려가라고 하더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토리코치가 나더러 하루는 등판 준비를 하라고 했다. 상대가 어느 팀인가 했더니 삼성 라이온즈였다. 삼성이 일본에 왔으니까 그 경기에 나가서 던지라는 거였다. 아무리 얻어 맞아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마음껏 던지라는데(잠시 침묵하다가) 내가 그랬다. “다른 2군팀도 좋으니까 거기 나가서 던지겠다. 그래야 나도 일본야구를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묵살됐다.
삼성과의 연습경기에 나가라. 무슨 뜻이었을까.
가토리코치는 삼성을 비롯한 한국프로야구 관계자들과 친했다. 전날 밤 삼성 코칭스태프와 술자리를 한 모양이더라. 거기서 가토리코치가 삼성 코치들한테 “정민태 이 녀석, 콧대 좀 납작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단다.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겠는가. 나중에 삼성 코치 가운데 한 분이 그 이야기를 해주더라. 그러면서 “네가 어떻게 처신했기에 가토리가 너를 박살내달라고 하느냐”고 묻는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 ‘아, 여기서는 더 이상 야구할 수 없겠구나.’
그래도 가토리코치가 1군으로 올린 적이 있지 않은가.
가토리코치가 2군 투수들은 평균자책점 성적순으로 1군으로 올리겠다고 일본언론에 말을 했다. 그때 내가 가장 평균자책점이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날 올린 거다. 물론 선발은 아니고 중간계투요원이었다. 일주일을 대기하면서 5차례 경기에 나가 4번 성공하고 딱 1번 실패했는데 그걸 문제 삼아 바로 2군으로 내려가라고 지시하더라. 그것도 경기가 끝나고 조용히 불러 말하는 것도 아니고 마운드에서 딱 얻어맞고 내려오자마자 바로 2군으로 내려가라고 하는데.
그정도의 부당한 대우라면 나가시마감독은 몰라도 하라감독은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한번은 하라감독의 호출을 받았다. “정상, 미안하다. 지금 야수 1명이 다쳐서 2군에서 1명을 올려야 한다. 네가 2군에 내려가 보름만 참고 기다려 주면 반드시 부르겠다”고 하길래 “괜찮습니다. 내려가겠습니다”하고는 2군에 내려갔다. 그런데 한달을 넘겼는데도 부르지 않는 거다. 그때 나를 통역하던 친구가 1군에 갔다 우연히 하라감독을 만났는데 “정상, 요즘 뭐하고 있나? 정상이 2군에 내려간 지 얼마나 됐지”하고 묻더란다. 통역이 한달이 지났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가토리코치를 불러서는 “당신은 뭐하는 사람인데 내려간 지 한달이 지난 선수를 부르지 않았는가”하면서 호통을 쳤단다. 다음 날 바로 1군으로 올라갔다.
센트럴리그의 다른 팀이나 퍼시픽리그로 이적할 수 있지 않았나.
당시에 일본 해설자 원로들이 나를 보면 불쌍하다고 그랬다. 왜 요미우리에 와서 고생하냐고. 오릭스에서 뛰던 (구)대성이도 도쿄로 경기하러 오면 “형, 트레이드 시켜달라고 그래. 퍼시픽리그로 와서 던지면 편하게 던질 수 있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 말을 듣지 않더라.
결국 계약기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2년 만에 돌아왔다.
이대로 가면 야구인생이 끝날 것 같아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더니 요미우리에서 위약금을 내라고 했다. 내가 “그럼 남은 1년 열심히 뛰겠다”고 했더니 또 입장을 바꿨다. 나는 그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요미우리는 내가 마운드 위에서 조용히 사라지길 바라는 듯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좋다. 가토리코치가 한국의 코치들을 만나서 했던 말을 비롯해서 그동안의 모든 것을 언론에 밝히겠다.” 요미우리가 자신들의 이미지를 생각했는지 다시 위약금 내라는 소리를 하지 않더라. 대신 앞으로 2,3년 동안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하기에 바로 사인해 주고 돌아섰다.
성적(27경기 2승1패, 평균자책점 6.28)만 보면 일본 진출은 실패로 끝난 셈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실패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있었던 기간도 역시 내 야구인생의 한 부분이었고 거기서 실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기 때문이다. 중간계투를 그곳에서 안 했으면 어디서 해봤겠는가. 무명 투수들의 고통을 경험한 것도 소중했다.
요미우리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이승엽을 보면 느낌이 각별할 것 같다.
이승엽이 요미우리로 간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가토리코치도 떠났고 (이승엽이)참 잘하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한국프로야구에 대한 인식도 변하고 한국선수들을 무시했던 시각도 어느 정도 바뀌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2003년 다시 현대로 돌아왔다. 환영보다는 비난이 더 많았는데
그랬다. 구단에서도 내가 과연 과거의 성적을 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고. 그때 좌절하기 보다는 ‘그래,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성적을 내자. 팬이나 구단에 내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자’ 이런 다짐을 했다.
우려의 시각이 있었지만 그 해 최고의 성적을 내면서 현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사실 낯선 선수들이 많아 타자들을 파악하는 게 힘들었다. 하루 종일 자료화면을 보면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기록원에게 “이 선수 어떻게 칩니까”라고 일일이 물어보면서 마운드에 올랐다.
앞으로도 42살까지는 투구하고 싶다는 그. 이제는 야구만을 위해 투구할 생각이다. |
가장 두려운 타자는 오해와 편견
당신을 가리켜 국내용 투수라는 평가가 있다. 국제 대회에서 부진했다는 뜻인데
글쎄, 아마추어 때는 잘했던 기억이 많다. 프로에 와서도 국제대회에서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3년 삿포로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만 다소 부진했던 것 같다. 부상이 이유였다.
당신의 부상 투혼이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부진했는데 1999년부터 허벅지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올림픽에서도 계속 몸이 좋지 않았지만 당시 투수 가운데 고참급이라 부상을 참고 던져야만 했다. 그러다 다음 시즌까지 부상에 시달려야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2003년 11월 5일 삿포로에서 벌어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대만전에서 4회까지 2실점했는데 이게 참 아쉽다. 열흘 전(10월 25일)이었나, 한국시리즈 SK와 7차전에서 허벅지에 테이핑한 상태로 완봉승을 거뒀다. 도저히 삿포로에 갈 몸이 아니었지만 김재박 감독(당시 대표팀 감독)이 “민태야, 네가 던지지 않으면 아마도 말이 많을 거다. 많이 안 던지게 해줄 테니까 조금만 참고 던져다오”라고 말씀하셔서 출전을 강행했다. 그때 이닝 도중에 타임을 걸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잠시 있다 나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왜 그런가 싶었겠지만 당시 나는 허벅지를 감싸고 있던 테이핑을 풀고 바늘로 피를 낸 다음에 다시 테이핑을 단단히 한 채 마운드에 올라갔다.
연봉 이야기를 해보자. 연봉협상 때마다 최고연봉을 받았다는 지적이 있다.
나를 둘러싼 오해 가운데 하나가 실력보다 자존심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자존심을 내세울 시간에 남보다 더 많은 공을 던지는데 집중해 왔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연봉 5억 원을 요구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내가 요구한 금액이 아니었다. 2002년 정민철이 한국으로 돌아올 때 4억 원인가를 받았다. 구단에서 판단할 때 내가 민철이보다 한수 위라고 생각해서 5억 원을 제시한 거였다.
2004년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고 연봉(7억 4천만 원)을 받았는데 이 역시 지나치게 몸값이 높다는 논란이 있었다.
2003년 5억 원에 연봉계약을 할 때 다음해 연봉은 5억+알파에서 시작하자는 옵션이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대개 연봉 외에 옵션이 있지 않은가. 다음해 연봉계약을 할 때 옵션과 연봉 5억 원을 합친 금액에서 출발한다는 뜻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이승엽이 6억 3천만 원을 받고 있었는데 내가 귀국한 뒤 팬들이 얼마나 욕을 많이 했는가. 구단에서 보기에 내게 6억 원이나 7억 원을 제시하면 여론이 좋지 않을 것 같으니까 플러스 알파를 제시한 거다. 그런데 난데없이 내가 10억 원을 요구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참, 할 말이 없더라. 이런 전후사정을 모르시는 팬들이 ‘저 녀석, 너무 돈만 밝힌다’라는 비난이 있었다.
더 많은 연봉을 받고자 하는 건 모든 선수의 희망사항이다. 당신 역시 같을 텐데.
때론 많은 연봉은 지탄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이 정도 연봉을 받기 위해 저 선수가 이만큼 노력을 했구나’하는 인정의 측면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내 경우 1992년 태평양에 입단해서부터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한몫을 하기도 했고. 팀을 위해서라면 허벅지가 너덜거려도, 어깨가 잘려나갈 만큼 아프고 숱한 비난이 쏟아져도 마운드에서 공을 놓지 않았다. 나도 다른 선수들과 같다. 내 땀과 눈물, 그리고 열정을 타당한 연봉으로 평가받고 싶을 뿐이었다.
당신은 고액연봉자임과 동시에 많은 선행을 해 왔다.
어렸을 때 무척 어렵게 살았다. 중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무너지면서 방 두 개짜리 사글세에서 줄곧 살았다. 정말 좋은 2층집에서 살다 그런 집으로 이사를 가니까 적응이 쉽지 않더라. 그때부터 돈 소중한지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의식이 생겼다. 부모님이 용돈을 주시면 한푼 안 쓰고 아꼈다가 그걸 다시 갖다 드리는 것이 일상이었다.(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내가 힘들고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잘 안다. 능력이 되면 이웃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아내 역시 같은 생각이라 평안한 마음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소중한 결정구, 가족
1994년 결혼을 했다. 사연이 많았다고 들었다.
아내와 연애를 하는데 돈이 없어서 2,3년 후에나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때 장인어른 되실 분을 만났다. 딱 한마디만 물어보시더라. 내 딸을 진실로 사랑하느냐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니까 장인어른께서 “그럼 앞으로 딴 건 신경쓰지 말게나” 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그래서 결혼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2년간 부상에 시달리며 성적도 못 내고 있었다. 미래도 알 수 없었다. 연봉을 받아도 본가에 보태드리던 때라 돈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를 믿어준 장인어른과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야구계 일부에서는 당신을 이기적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내가 처음으로 집을 산 게 1998년이다. 대출 8천만 원을 받아 인천 계산동에 1억 4천만 원짜리 아파트를 샀다. 그랬기 때문에 딴 데 정신을 쓸 겨를이 없었다. 누구에게 밥 사주고 술 사줄 정신이 없었다. 격려금이라도 나오면 집에 갖다 주기 바빴다. 진짜 연봉 몇 억원 받을 때까지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다 보니까 주변에서 나를 가리켜 "정민태, 저 친구는 자기밖에 모른다"는 소리가 들려오더라. 정말 당시 나는 마운드 위에서 전쟁을 치렀고 생활에서도 전쟁을 치르듯 살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다. 지금은 약간 여유가 있으니까 남한테 베풀기도 하고, 후배들 챙길 줄도 알지만. 그런데 요즘은 연봉도 많이 깎이고 아이들도 커가니까 더 아끼면서도 더 많이 베풀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큰 아들(선호,11)이 야구선수라는데
이제 시작한 지 얼마 안됐다. 야구를 하리라곤 꿈도 안 꿨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야구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라. 처음에는 겁을 줬다. 게다가 아이가 다니는 학동초등학교가 운동량이 무척 많다. 못 버틸 줄 알았는데 그걸 다 참고 견디더라. 막내가 한다고 했으면 절대 안 시켰다.(웃음) 현재는 투수로 뛰고 있다.
당대 최고의 현역투수를 아버지로 둔 리틀야구 투수면 야구부 감독이 무척 난감할 텐데
가끔 한번씩 학교에 들르는데 감독과 투구라든지 야구에 대한 여러 의견을 나눈다. 그런데 나와 감독이 서로 생각하는 점이 다른 게 있지 않겠는가. 그럴 때 감독이 내 의견을 상당히 존중해 줘 요즘은 지도법이 많이 바뀌고 있다.
학부모들한테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
간혹 자기 아들 좀 우리집에 데려가서 일주일만 봐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운동 끝나면 피곤해서 우리집 아이들이 캐치볼 하자고 해도 그걸 못 들어주는 판에 다른 집 아이들 봐 줄 정신이 어디 있겠나.(웃음)
현대, 인천 그리고 꿈
야구를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게 있다면
팬이다. 현재 우리팀은 연고지팬이 없다. 그게 가장 아쉽다. 내 나름대로 팬을 한명이라도 더 잡으려고 사비를 털어 팬서비스도 하고 호텔을 잡아 팬미팅도 가졌지만 어디 그런다고 우리팀 팬이 늘겠는가. 희로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팬이야말로 구단과 선수에겐 가장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한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일단 42살까지 현역으로 뛰고 싶다. 그 후는 분명 지도자가 될 거다. 가능성 있는 어린 선수들을 그동안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조련해서 그 선수들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다. 프로나 아마추어 어느 쪽도 가리지 않는다. 내 경험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고 싶다.
당신에게 야구란 어떤 존재인가.
야구는 내 첫번째 인생이다. 두 번째 인생은 팬과 가족이다. 야구가 없었다면 정말 힘들게 살았을 것이다. 야구가 나를 저버려도 내가 야구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현대에 대한 감정이 가족처럼 느껴진다. 은퇴도 현대에서 할 예정인가.
현대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내색하지 않고 선수들을 먼저 챙겨주는 구단이다. 작년 수술을 마쳤을 때도 성적에 크게 연연하지 말고 야구를 더 오래하라고 격려해 준 구단이기도 하다. 내겐 현대가 또 다른 은인이다. 하지만 인천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나는 언제나 인천야구인이라는 생각을 해왔으니까.
2007년 FA가 된다면 SK 유니폼도 고려하고 있단 뜻인가.
현역으로 SK로 못 간다 해도 인천으로는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한번은 고향을 위해서 일할 때가 오리라 믿는다. 인천 출신 감독이나 코치도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른 팀들은 그런 경우가 많은데 유독 인천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늘 아쉬운 마음이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글러브를 내려놓을 땅이 인천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