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정보는 캄보디아 정보 전문 연구공동체인 '크메르의 세계'(크세)가 선정한 것으로서, 본 카페 정회원들로 구성된 <2011년 캄보디아 10대 뉴스 선정위원회>의 편집회의를 거쳐 정리된 것입니다. '크세'가 선정하는 <캄보디아 10대 뉴스>는 인권과 민주주의 같은 인류의 보편적 상식에 가치를 부여하며, '한국'이나 '한국인' 같은 협소한 개념을 탈피하여 '국제인'의 관점에서 하나의 국가를 관찰한다는 편집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크세] |
DAUM 카페 '크메르의 세계' 선정
2011년 캄보디아 10대 뉴스
1. 태국-캄보디아의 대규모 무력충돌
캄보디아와 태국은 2011년 상반기 전체를 전쟁의 위기와 교전사태로 보냈다. 2008년 7월 '유네스코'(UNESCO)가 양국 국경에 위치한 '쁘레아위히어 사원'(Preah Vihear temple)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이래, 이 사원을 둘러싼 우발적 무력충돌은 산발적으로 발생해왔다. 하지만 금년에 발생한 충돌은 사상 최대의 규모로서 2월과 4월에 유혈을 동반한 대규모 교전사태가 이어졌고, 쁘레아위히어 사원 주변의 '분쟁구역'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 100 km 이상 떨어진 '또 다른 사원군'에서도 대규모로 확전되는 등 수개월에 걸친 장기적 대치상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금년 중(7월3일)에 태국에서 총선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어떤 면에서는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 태국의 보수 왕당파인 반-탁신 세력은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총리가 이끄는 보수 성향의 '민주당'이 재집권하길 바랬다. 하지만 '레드셔츠'(UDD) 운동으로 대변되는 친-탁신계 세력의 대중성을 능가할만한 동력을 필요로 했다. 태국 군부는 2010년 가을의 정기 인사이동에서,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육군사령관 등 '골수 왕당파 장교들'을 군 수뇌부의 전면으로 배치하면서, 다가올 상황에 대한 준비태세를 마친 상태였다. 국경분쟁이 격화된다는 것은 민족주의 감정의 고조를 의미한다. 그 경우 태국의 보수층은 더욱 결집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국내 민주화를 이슈로 하는 친-탁신파의 운신에는 제한을 가할 수 있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태국의 보수파에게 있어서, 캄보디아와의 영토분쟁은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좋은 일이었다. 더구나 캄보디아는 국방비 면에서 태국(연간 약 50억 달러)의 20분의 1 정도(약 2억 달러) 규모에다 공군력과 해군력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전황을 통제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면서, '정치적 쇼'로서 다루기엔 더 없이 만만한 상대이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 2~3년간의 산발적 교전을 통해, 캄보디아 군대의 이미지는 과대포장된 상태였으므로, 태국 군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효과적인 선전수단이 될 수도 있는 상태였다.
반면 캄보디아 훈센(Hun Sen) 총리의 입장에서는, 2011년의 시점에서 태국과 분쟁이 격화되는 것은 그다지 흔쾌한 일은 아니었다. 2010년 4~5월에 약 70일에 걸친 '레드셔츠들의 대규모 시위상황'이 발생하자, 태국 군부는 이 상황에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훈센은 이 틈을 잘 활용하여 '군사적 무용담'을 연출하고, 그 이면에서는 야당의 역량을 약화시키고 휘하의 군대를 더욱 강화시키는 등 자신의 권력기반 강화에서 충분한 성과를 거두고 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태국 측의 움직임이 피해나갈 수 없는 것이란 점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이라면, 이것을 다시금 '정치적 쇼'로서 이용하는 것이었다. 훈센은 그간 물밑에서 진행해오던 권력의 세대교체 작업을, 태국과의 분쟁을 통해 수면 위로 끌어냈다. 그는 이미 연초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시켰던 미 육사 출신의 장남 훈 마넷(Hun Manet)을 대-태국 전선의 선봉장으로 내세우면서, 대대적인 대국민 홍보활동도 병행했다. 이제 전선의 상황이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될 수만 있다면, 훈센 일가 역시 이 군사적 충돌에서 정치적 성과를 톡톡히 거둘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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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선으로 급파되는 캄보디아 군 특수부대 소속 장갑차들의 모습. |
2010년 연말의 태국-캄보디아 관계는 화해 무드에 들어가 있었다. 11월 말에는 '수교 60주년 기념 양국 연예인 합동콘서트'가 펼쳐졌고, 12월에는 '캄보디아-태국 무비자 협정'도 발효됐다. 이러한 상황은 태국 극우파 '옐로셔츠'(PAD) 운동의 활동가와 집권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등 7명이 캄-태 국경의 한적한 마을에서 국경선 획정 상황을 조사하던 중, 캄보디아 당국에 의해 '불법 영토침입 혐의로 체포'되면서 긴장 국면으로 돌아섰다. 태국의 보수파들은 다시금 반-캄보디아 시위에 나섰다. 캄보디아는 이후 국회의원 등을 모두 석방했지만, 과격파 옐로셔츠 지도자인 변호사 1명과 그 여비서는 간첩 혐의까지 적용하여 장기 징역형을 선고했다. 1월 말, 태국의 아피싯 총리는 보수층 시위대의 압력으로 캄보디아가 쁘레아위히어 사원 주위의 분쟁구역에 설치한 '영토선언 현판의 철거를 요구'했다. 이에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태국의 상황이 만만치 않음을 직감하고 신속하게 양보하면서, 무려 두 차례나 '국경 비문을 철거하고 공개리에 자진 파괴'까지 하는 굴욕에 가까운 성의를 내보였다. 하지만 태국이 또 다시 캄보디아의 '국기게양을 문제'로 삼으면서, 훈센으로서도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제 태국 군은 국경에서 '훈련을 명분으로 한 무력시위'를 펼쳤고, 캄보디아도 '병력과 화력을 급파'하면서 군사적 대치 국면이 시작됐다.
2월4일 '첫번째 대규모 교전'이 발생하여 민간인을 포함한 사망자들이 발생하면서 전투는 3박4일 동안 지속됐다. 당황한 캄보디아는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까지 요청'하면서, 이 사안을 외교적으로 국제화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양측은 선전전과 심리전을 계속하며 병력도 대규모로 증강했다. 태국 군은 분쟁지역 뿐만 아니라 캄-태 국경 전반에 걸쳐 군사적 배치의 징후를 보였다. 훈센은 '자신의 경호부대'와 '주요 특수부대들'까지 모두 충돌지역에 투입한 상태에서, 거의 무방비 상태인 서부 국경 등을 방어하기 위해 심지어는 '경찰관까지 차출'하는 등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야만 했다. 수 개월에 걸친 교전과 대치 기간 중, 태국 군이 '거의 전면전에 준한 군사적 배치'를 했다는 보고가 2차례나 입수되기도 했다. '유엔 안보리는 문제를 아세안에 떠넘기기'했고, '아세안은 무기력한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관찰자의 관점에서 보면, 태국은 이 긴장국면을 적극적으로 완화시킬 의사가 전혀 없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고, 이들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전투를 확전시킬지에 대해 예측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훈센은 상황의 진행에 초초해 하면서도, 장남 훈 마넷의 정치적 부상 작업만큼은 철저히 진행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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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Bangkok Post) 4월25일, 태국 부리람(Buri Ram) 도, 반꾸웟(Ban Kruat) 군, 반꼭 까차이(Ban Kok Krachai) 인근 도로에서 태국 육군의 스팅어리 경전차들이 국경의 분쟁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
4월22일, 따모안톰 사원군에서 '2번째 대규모 교전'이 발생했다. 전선의 지휘관들 사이에 휴전 합의와 파기가 반복되면서, 이 전투는 열흘 이상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태국 군은 '화학탄을 사용'했는데, 그들은 캄보디아가 '인간방패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태국 육군사령관은 '정부 명령만 있으면 캄보디아와 전면전 하겠다'고 공언했고, 국제 언론들은 '양국이 전면전의 벼랑끝에 섰다'고 보도했다. 세심한 관찰자라면, 이제 전면전 후의 동남아 정세에 대해 고려할만한 단계로까지 상황이 치달았다. 미국과 아세안 각국 등 국제사회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여 양측의 자제를 촉구했다. 하지만, G20 의장국이던 한국은 아시아권의 주요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침묵했다. 다급해진 캄보디아는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양국은 이후 전선에서는 '심리전'을 벌이고, 국제적으로는 외교적 경쟁을 펼쳐나갔다.
7월3일, 태국의 총선에서 '친-탁신계 야당이 압승'했고,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전 총리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 총리 정부가 탄생했다. 그와 동시에, 양국의 군사적 대치상황은 언제 그랬냐는듯 모든 것이 해소되어 버렸다. 훈센은 잉락 총리의 승리에 몹시 기뻐하면서, '태국과 캄보디아 관계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 들었다'고 선언했다. 7월18일,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양국 군대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려, 이러한 국면에 형식적 완결성까지 부여했다. 9월15일 '잉락 총리의 캄보디아 방문'에 이어, 9월17일에는 '탁신 전 총리가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9월24일에는 태국의 새로운 집권당 국회의원들과 캄보디아 관리들의 친선 축구시합이 열렸다. 이 경기에서 훈센 총리는 '무려 4골이나 득점'하는 기염을 토한 후, "양국간의 악몽의 시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동남아시아의 역내 질서를 심각히 위협했던 이 거대한 사태가, 너무도 희극적으로 마무리되는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7월18일에 있었던 국제사법재판소의 명령은 최종적인 조치가 아니다. 그것은 캄보디아가 '1962년의 판결'을 보다 상세히 해석해달라고 제소한 데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일단 양측이 군대를 철수시키고 결정을 기다리라는 명령이었다. 1962년의 판결은 '쁘레아위히어 사원' 자체는 캄보디아에 속한다고 결정한 것이었고(이 부분은 태국도 인정), 사원 주위의 4.6 ㎢ 면적의 지역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의 분쟁의 씨앗이 된 것이다. 태국은 10월21일에, 이 영토분쟁에 대한 자국의 입장을 담은 900여쪽 분량의 보고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출했다. 이에 법원은 캄보디아에 대해서도 해명 보고서 제출을 요구한 상태이다. 이 사태의 향후 추이는 이 재판의 결과에 따라 변화될 것이다.
이제 태국 극우파 지도자인 위라 솜꽘낏(Veera Somkwamkid) 변호사와 그 여비서만이 아직도 수감 상태로 남아, 이 사태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곧 구속 1주년을 맞이하는 위라 씨에 대해 아직도 석방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지만, 최근 관절염으로 인해 프놈펜의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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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국 대홍수에 묻혀버린 캄보디아의 홍수 피해
올해 태국과 베트남 중부 등 인도차이나 지역에서는, 9월경부터 지속적인 폭우가 내리면서 홍수가 발생했다. 특히 메콩 강(Mekong River) 하류에 위치한 캄보디아는 메콩 강의 수위가 지속적으로 높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10여년 만에 최악의 홍수 피해를 입었다. 메콩 강 유역에 인접한 동북부 지방들과 떤레삽(Tonle Sap) 수계(水界)에 입접한 지역들의 피해가 컸다. 떤레삽 호수 인근의 관광지 시엠립(Siem Reap)에서는 고립된 관광객들은 '헬기로 구출'하는 일도 있었고, 수계 중심부에 위치한 껌뽕 톰(Kampong Thom) 도에서는 고속도로의 연약한 포장을 보호하기 위해 대형차량 통행금지 조치까지 내려졌다. 그리고 메콩 강 유역에 위치한 껌뽕 짬(Kampong Cham) 도와 수도권 인근의 껀달(Kandal) 도 등지에서는 장기적인 침수로 농경지 등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캄보디아 정부는 전체 논의 10% 정도인 22만 헥타아르 면적이 침수되고, 25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했다. 특히 도로와 교량 같은 기반시설들이 수많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음으로써, 장기적인 복구를 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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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밧덤벙(Battambang) 시 외곽의 따뽄(Tapon) 마을에서, 한 남성이 한조각 남은 마른 땅에 고립된 채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
하지만 캄보디아의 홍수는 이웃의 보다 부유한 국가인 태국에서 50년만의 최악의 홍수가 발생하면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했고, 그에 따라 원조와 구호의 손길도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캄보디아의 경우, 특히 인구가 듬성듬성한 오지들이 많아서, 고립된 사람들에 대한 현황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 게다가 농민들이 자신의 농사를 통해 농한기의 식생활을 해결하는 비율이 높아, 건기로 접어들면서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많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을 비롯한 각국들과 국제기구 등이 지원을 했지만, 구호단체들은 향후 수개월 동안에 상황이 더 악화되는 주민들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홍수에서는 가난한 국가인 미얀마가 캄보디아로 '구호품을 공군기로 공수'하는 이례적인 모습도 보였다. 그런가 하면, 훈센 총리 부인인 분 라니(Bun Rany) '캄보디아 적십자사'(CRC) 총재가 이재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하는 행사장에서, 정부에 비판적인 '미국의 공영방송을 맹비난'하는 정치성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 홍수로 캄보디아 정부는 전통적으로 국가 최대의 축제인 '연례 물축제'(본옴뚝)를 '취소키로 결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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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패와의 전쟁과 훈센 권력의 응축
작년(2010) 3월에 국회에서 오랜 기간을 끌어왔던 '부패방지법이 졸속심의 후 통과'되었고, 6월에는 그 실행기관인 '부패방지단'(ACU)이 출범했지만, 많은 이들은 캄보디아 정부의 부패 척결에 대한 의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작년 12월에 불법감금 및 착취 혐의로 '지방법원 검사를 구속'하면서 '부패와의 전쟁'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고위급 인사들의 구속은 거의 드문 편이었다. 훈센 총리는 금년 1월 장남 훈 마넷의 육군소장 진급과 더불어 새로운 세대들을 전진배치하는 가운데, 부패 척결의 움직임에도 속도를 높였다. 연초부터 마약단속의 최고위 책임자를 비롯하여 지방 경찰청장 등이 구속됐고, 토지사기 등에 연루된 장성들도 구속됐다.
하지만 일련의 구속은 2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구속된 인사들이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 내에서 훈센 총리 직계 파벌보다는 방계 파벌들에 집중됐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마약 문제와 관련된 부패사건들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것이다. 특히 태국과의 국경분쟁이 완화된 후 8월부터 시작된 단속에서는, 훈센 총리와 함께 집권당 내의 양대 거목으로 여겨진 찌어 심(Chea Sim) 상원의장의 측근들이 대거 구속당했다. 이 사건은 '부패와의 전쟁'이 집권세력 내의 정치적 숙청작업이 아닌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주요 계파의 수장들에게로는 그 화살이 돌아가진 않았다. 또한 마약 문제는 오래 전부터 캄보디아에 불명예를 안겨주던 문제여서 언젠가는 처리해야할 과제였다. 하지만 국가 마약단속국(NACD) 의장인 께끔연 부총리는 최근 국회에서 행한 발언에서, 캄보디아에서 마약의 생산과 유통, 소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진: Phnom Penh Post / May Titthara) 국가마약단속국 사무총장이었던 모엑 다라 중장이 11월에 있었던 첫 공판에서, 헌병 및 교도관과 함께 '번띠어이 미언쩌이 도 지방법원'으로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공직자 재산신고' 내역의 비공개 등 <부패방지법> 자체의 결함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고, '부패방지위원회'나 '부패방지단'이 전적으로 여권 인사들로만 구성된다는 한계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와 훈센 총리가 일정 정도 부패와의 전쟁을 계속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크메르의 세계'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캄보디아의 부패시장이 성장을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부패를 하려는 인적 자원은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캄보디아 경제의 현저한 성장 없이는, 집권층 내부에 만연한 부패를 하는 데도 상호 경쟁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따라서 훈센의 입장에서는 부패 수요자(권력층)의 수를 다소 줄이면서, 동시에 2012년 지방선거와 2013년 총선거를 앞두고 대국민 홍보의 수단으로도 사용해야만 한다. 또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정부패 문제가 외국인 투자자 유치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로 부각되어, 경제성장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점도 더욱 더 긴급한 현안이다.
최초로 구속됐던 검사에게는 '징역 19년형이 선고'됐다. 또한 마약단속 과정에서 마약상들을 풀어준 경찰 간부들에게는 징역 4~5년형이 언도됐다. 하지만 이러한 재판들의 과정에서 충분한 정보나 철저한 조사가 행해진다는 징후가 많지는 않다. 더구나 사법부의 태도 역시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최근 대형 토지사기 및 공문서 위조를 저지른 훈센 총리의 사촌 여동생에게, '궐석재판을 통해 징역 2년6개월형을 선고'했지만, 구속영장을 발부하지 않아 자유의 몸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간의 '부패와의 전쟁'에서 한해를 결산하는 시점에 선고된 이 사건은, 캄보디아의 부패척결 작업이 지닌 본성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옴 옌띠엥 부패방지단장은 최근 발언을 통해, "부패 신고가 너무 많아서 일손이 딸린다"고 고백했다. '국제투명성기구'는 12월1일에 '2011년 세계 부패인식지수(CPI)'를 발표했다. 캄보디아는 세계 163위에 랭크되면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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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토지분규와 세계은행의 원조보류 조치
지난 몇년 간 캄보디아의 토지분규는 이 사회가 직면한 주요한 현안들 중 하나였다. 캄보디아는 오랜 내전으로 인해 토지소유권 제도의 안정성이 부족한 사회였다. 특히 1975~1979년 사이에 집권했던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기에는, 사유재산의 철저한 부정으로 인해 토지등기 문서 대부분이 소실되기도 했다. 캄보디아의 토지소유권 제도는 <2001년 개정 토지법>이 마련되고 난 후에야 형식적인 틀을 갖추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캄보디아 경제가 높은 성장률을 보이면서 부동산 가치가 급상승했고, 토지분규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권력이 있거나 연줄이 좋은 개인이나 기업들은 정부로부터 양허권(장기 독점사용권) 형식으로 토지이용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해당 지역 공동체가 전통적으로 이용하던 부락 공동의 관습적 토지사용권을 하루 아침에 대체해나가기도 했다. 주민들은 반발했다. 하지만 경찰과 군대를 앞세워 때로는 폭력을 동반한 강제철거 앞에서, 전국적으로 수만 명이 정든 땅과 생계의 터전을 잃었다. 또한 위조된 등기문서를 이용하여 개인적 차원에서 부동산을 강탈하는 사례들도 많이 존재했다. 철거민들은 상경 후 총리에게 읍소를 하던 형태에서, 최근에는 '폭동에 가까운 과격한 저항'을 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촬영) Pha Lina / Phnom Pen Post
2011년에도 토지분쟁은 여전히 전국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특히 설탕과 천연고무 등 농산물 가격이 국제적으로 인상되면서, 양허권을 획득한 기업과 지역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 구조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금년에 가장 주목을 받은 사건은 프놈펜 도심의 벙꺽호수(Boeung Kak lake) 주변에서 발생한 토지분규였다. 벙꺽호수 개발사업은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 소속 상원의원인 라오 멩 킨(Lao Meng Khin) 회장 소유의 '슈카쿠 사'(Shukaku Inc.)와 중국 기업과 합작 개발 중인 대규모 도심개발 사업이다. 이 계획은 도심의 범람원이었던 이 호수를 매립하여 금융, 상업, 주거 복합단지로 개발하는 것이다.
개발사는 이미 지난 몇년 동안 호수 주변의 빈민가에 대해, 강제철거나 회유 등의 방법으로 문제를 조금씩 해결(?)해오고 있었다. 극히 형식적인 액수의 보상만 받은 채, 이미 철거된 사람들만 도 약 3천 가구 15,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금년부터 '본격적인 매립공사'가 진행되면서, 이 분규는 그 마지막 국면에 진입했다. 남아 있는 1천 가구 정도의 주민들이 거의 매일 같이 시위를 하거나 청원을 벌이는 등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용역업체 직원들이 '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례도 보고됐고, 캄보디아 철거민의 인권지킴이 루온 소왓(Loun Sovath) 스님에 대한 구속 위협이나 불교종단에 의한 '사찰출입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NGO들은 국제 원조제공처들에게 캄보디아에 대한 압력 행사를 요구했다. 이에 세계은행(World Bank, 월드뱅크)의 로버트 졸릭(Robert Zoellick) 총재는 3월에 캄보디아의 강제철거에 '우려를 표명'했고, 8월에는 철거민 대책을 요구하며 '차관대출 중지를 선언'했다. 결국, 훈센 총리는 벙꺽 주민들에게 인근 지역의 '대체토지를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이들이 기뻐했고 이로써 문제가 끝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개발업자와 당국의 꼼수는 계속됐다. 새로운 대체용지의 소유권 등기 작업이 지연되는 사이, 벙꺽호수 주변의 마을들은 이러저러한 핑계로 하나씩 보상대상지역에서 빠졌고, 때로는 '폭력을 동반한 부분적 철거작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최근에도 보상대상에서 제외된 '한 여성이 자살'했고, 또 다른 주민들은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프놈펜 광역시청은 12월10일 '벙꺽 주민 259가구에게 토지등기를 발급'하며 새로운 희망을 던졌다. 하지만 나머지 주민들에 대한 해결책은 아직도 불분명한 상태로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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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크메르루즈 국제법원 파동과 '제002호' 사건 재판의 시작
유엔(UN)이 재정을 지원하여 지난 2005년에 최초로 설치된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국제법정'(ECCC)은 현재까지 1억 5,000만 달러의 예산을 사용했지만, 상당히 느린 진행을 보이고 있다. 작년에는 그 '제001호' 사건의 본심재판(2심이자 공개재판)을 개최하여, '크메르루주' 정권 당시 '뚜올슬렝 교도소'(Tuol Sleng prison: S-21 보안감옥) 소장을 지낸 깡 껙 이우(Kaing Guek Eav) 피고인에 대해 징역 30년형을 선고했다.
금년의 ECCC는 당시의 군 지휘관 등을 추가로 기소할 '제003호' 및 '제004호' 사건을 계속해서 다뤄야 할지를 놓고 논란에 휩싸였다. 훈센 총리를 비롯한 캄보디아 정부는 이미 '제002호' 사건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기소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언한 상태이다. 또한 모든 부서마다 내국인 직원과 국제사회 임명 직원을 함께 배치하는 ECCC 조직 구조 상, 캄보디아 정부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특히 내국인 직원들을 통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국제재판소는 신뢰성의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영국 출신의 앤드류 케일리(Andrew Cayley) 공동검사(기소 전담)가 '제003호' 및 '제004호' 사건을 조기에 종결하려는 공동수사판사들(수사 전담)과 날카로운 대립을 보였다. 결국, 이 파동은 공동수사판사들 중 독일 출신의 지그프리트 블룬크(Siegfried Blunk) 판사가 '정치적 압력을 거론하며 사임'하면서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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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FP/Mark Peters) 법정에 앉아 있는 누온 찌어 피고인. |
이후, '제002호' 사건의 본심재판이 11월 말부터 시작됐다. 이 사건의 피고인들은 크메르루주 정권 최고위 지도자들 중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4인을 대상으로 한다. 여기에는 '브라더 넘버 투'란 별명으로 유명한 누온 찌어(Nuon Chea),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이엥 사리(Ieng Sary), 국가주석을 지낸 키우 삼판(Khieu Samphan), 이엥 사리의 부인이자 사회부장관을 지낸 이엥 티릿(Ieng Thirith)이 포함된다. 이 중 이엥 티릿은 치매 증세를 보여 재판대상에서 제외됐고, '최종적인 석방 결정을 기다리는 상태'이다. 또한 이엥 사리 피고인은 '더 이상의 진술 거부'를 선언하기도 했다.
'제002호' 사건은 당시 정권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ECCC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사건이다. 이엥 티릿 피고인을 제외한 3인에 대한 공판은 11월 말부터 시작됐지만, 작년의 깡 껙 이우 피고인 재판과는 사뭇 다른 양상과 무게감을 보여주고 있다. 젊은 시절을 인도차이나 공산당 운동으로 보낸 이들 피고인들은, 자신들의 집권기에 발생한 일에 대해 강력히 항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누온 찌어 피고인은 당시의 비극이 '베트남의 탓'이라면서, '우리는 애국자들이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재판을 방청한 당시의 생존자 한사람은 "지난 몇년 간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들었던 이야기는 '크메르루주'가 좋은 일만 했다는 것뿐"이었다며 실망감을 표하기도 했다.
'제002호' 사건의 본심이 시작되면서 '악마의 변호사'로 유명한 자크 베르제스(Jacques Verges) 변호사가 키우 삼판 피고인의 변호인으로 모습을 나타내 화제가 되었다. 또한 7월달에는 '한국인 판사 1명'이 예비법정(1심) 판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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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말레이시아 내 캄보디아인 가정부 인권유린 파동
말레이시아는 전체 노동력의 21%인 200만명 정도를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 최대 인력공급 국가는 언어, 종교적 장벽이 덜한 인도네시아이다. 2009년, 인도네시아는 자국인 가정부들을 말레이시아로 송출하는 일을 금지시켰다. 말레이시아로 간 가정부들에 대한 인권유린과 학대 사례들이 보고되면서, 사회 문제로 대두하자 고심 끝에 내린 조치였다. 그러자 말레이시아의 가정들은 '가정부 부족으로 심각한 고통'을 받았고, 자연스레 캄보디아 가정부들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이후 약 3~4만명 정도의 캄보디아 가정부들이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캄보디아 가정부들에 대한 인권유린과 학대 사례들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특히 2011년에 그 정점을 이루면서 강간, 폭행, 감금, 살인(2011년에만 최소 9건), 임금채불 등 다양한 사례들이 보고됐다. 캄보디아 출신 가정부들은 기본적으로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소통에서 말레이계 문화권과는 장벽이 존재한다. 또한 인력송출 회사들은 연령 미달의 어린 여성들을 채용하거나 출국 전에 충분한 연수와 훈련을 제공하지 않는 등의 문제점도 노출했다.
(사진: Phnom Penh Post) 말레이시아로 떠나는 캄보디아 가정부들이, 인력송출 회사 직원의 인솔 하에 '프놈펜 국제공항'에 모여 있다.
캄보디아의 저명 여성인권 운동가이자 야당 국회의원인 무 소쿠(Mu Sochua) 여사는 이 문제를 끈질기게 여론화시키면서, 가정부 송출 금지를 주장했다.
하지만 인력송출 업체들은 대부분 권력층과 연줄이 있거나, 아니면 권력층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 많아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캄보디아 국내 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에서도 인력송출 산업은 정치적 배경이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어서, 피해 여성들에 대한 구제책이나 장기적인 대책 역시 미미한 상태이다.
무 소쿠 여사 및 NGO들과 언론 매체들의 노력으로 논란은 확산됐다. 결국 훈센 총리는 10월에 공식적으로 '가정부 인력송출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서류절차가 완료된 경우에 한해" '송출을 계속'할 여지를 남겨두어 문제는 잔존하고 있다. 또한 일부 가정부들은 계속해서 일하기를 원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무 소쿠 의원은 금년에만 2차례나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현지 인권단체 및 야당 의원들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그녀는 '말레이시아 당국을 비판'하면서, 인력송출 재개를 위한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또한, 말레이시아 국내 여론들도 가정부 부문 뿐만 아니라 전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보다 항구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들도 나타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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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의류공장 노동자들 집단기절 사태 빈발
섬유산업(의류+신발)은 관광, 농업, 건설 부문과 함께 캄보디아 경제의 4대 축 중 하나이고, 제조업 부문에서 거의 유일한 수출업종이다. 또한 이 산업은 30만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기도 하다.
예년과 달리, 유독 올해에 캄보디아 섬유공장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실신하는 사례가 다양하게 발생했다. 그 규모가 수백 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고, 사건 발생 공장들 역시 다양했다. 하지만 집단기절 사태의 원인에 대해선 아직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최초에는 공장에서 사용하는 살균제 같은 화학물질들이 원인일 것으로 추정됐지만, 그에 대한 분명한 인과관계는 드러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환기시설의 부족, 과도한 초과노동, 노동자들의 부실한 영양상태 등 열악한 노동환경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푸마'(Puma)와 같은 유명 브랜드 원청업체들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 다국적 기업들이 노동환경 개선 약속을 내놓기도 했다.
(사진: Phnom Penh Post) '훙와 섬유 공장' 노동자들이 '캄보디아-러시아 우호병원'에서 쓰러진 동료를 간호하고 있다.
캄보디아 섬유산업은 금년 11월 말까지 작년 동기 대비 '약 34%의 수출액 증가'를 보여 강력한 회복세를 보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예년보다 과도한 잔업을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정해보기도 한다.
캄보디아 노동계는 올해 최저임금으로 월 91달러를 요구했지만, 정부와 재계는 월 61달러로 합의했다. 또한 물가인상률도 5.5% 정도로 비교적 높은 상태이다. 따라서 이런 점을 고려하면, 대부분이 여성들인 캄보디아의 섬유 노동자들이 식생활에서 예년보다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국제노동기구'(ILO) 관계자 역시, 캄보디아 여공들이 고향의 가족들에게 송금하기 위해 종종 식사를 거르는 일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훈센 총리는 11월 말의 발표를 통해, 기업들에게 세제혜택 기간을 3년간 연장하는 대신 노동자들의 건강수당 명목으로 '월 5달러씩 추가 지급'토록 조치했다고 발표했다. 노동계에서는 "안 하는 것보다 낫다"면서 높은 평가를 하진 않았다. '크메르의 세계'는 이러한 훈센 총리의 결정이 2012년 지방선거와 2013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일종의 선심성 정책 성격이 강하다고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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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선거정국을 앞둔 야당의 국회등원 거부
훈센 총리와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은 '2008년 7월 총선거'에서 총 123석 중 90석의 의석을 획득하며 안정적 권력기반을 형성했다. 이후 2009년부터 야당과 비판자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유언비어 유포 혐의의 고소 고발이 이어졌다. 훈센 정권은 이런 방식으로 비판자들의 목소리들을 옥죄면서, 응축된 권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년(2010)에는 제1 야당 '삼랑시당'(SRP)의 삼 랑시(Sam Rainsy) 총재가 '베트남 국경의 임시 국경표식을 뽑아낸 일'을 문제 삼아 중형을 선고했고, 결국 삼 랑시 총재가 망명길에 오르면서 야당은 구심점 약화를 맛봐야만 했다.
앞서 살펴본 '부패와의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금년에는 훈센과 집권당의 칼날이 집권당 및 정부의 내부로 향했다. 하지만 태국과의 교전사태 와중에서도, 삼 랑시 총재의 '의원직 박탈'(3월15일)이라는 '확인사살'만은 잊지 않았다. 이렇게 약화된 야당은 태국과의 교전사태가 겹쳐지면서, 금년 상반기에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사진: RFA/Siv Channa) 삼 랑시 총재가 11월16일 화상중계를 통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내년 1월의 상원의원 선거(간접선거임) 및 중반의 지방의원 선거, 그리고 2013년 총선거가 다가오고, 금년 초부터 '아랍의 봄'이 진행되면서, 삼 랑시 총재와 야당은 새로운 동력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삼 랑시는 '아랍의 민주화 과정'을 공부한다며 7월에 '튀니지를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훈센 정권에 대한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매우 민감했다. 훈센은 여러 차례 캄보디아에서의 '피플파워 불가능론'을 주장하면서 야권과 국제 언론들을 비판해댔다. 그리고 결국엔 "나는 리비아의 카다피가 아니다"라는 선언적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9월에 있었던 '삼랑시당의 제5차 전당대회'는 강체철거와 베트남에 대한 영토 양보를 문제삼았고, 이 행사에는 삼 랑시 총재 역시 비디오 중계로 모습을 보이고 연설을 했다. 삼 랑시의 공격은 더욱 민감한 곳으로도 향했다. 그는 10월에 훈센 총리의 부인 분 라니 여사를 여배우 삐셋 삘리까(Piseth Pilika) 암살의 배후라면서 '프랑스 법원에 고발'했다. 또한, 얼마 후에는 '훈센 정권의 부정선거 수법 폭로'도 했다.
이후 <2012년 예산안> 심의를 앞두고, 삼 랑시 총재와 야당은 '훈센 정권의 외채 의존도를 비판'하면서, 10억 달러 이상의 외채가 포함된 <2012년 예산안> 심의 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훈센 총리는 '공개적인 맹비난'을 가하며 대응했다. 11월16일, 삼 랑시 총재는 또 다시 비디오 중계를 이용한 기자회견을 열어 훈센을 '재차 '카다피'에 비유'하면서, 야당의 국회 등원 거부와 의원직 사퇴를 통한 '헌법적 위기 조성'을 발표했다. <2012년 예산안>은 국회에서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하지만 캄보디아가 선거정국으로 이행하면서, 야당의 움직임도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캄보디아의 향후 선거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우려가 존재한다. '삼랑시당'은 '베트남인들이 조기에 대거 국적을 획득하고 유권자 등록'을 한 것과, 지방 당국이 '야당 간판만 설치를 금지'하는 등의 현상에 반발하고 있다. 또한 민간 선거 감시기구인 '캄보디아 자유공정선거 위원회'(Comfrel, 콤프렐)는 '언론과 방송의 정치적 편향성 심각하다'고 보고했다. 최근에 캄보디아를 방문한 수랴 수베디(Surya P. Subedi) 유엔 인권 캄보디아 특별보고관도 '선거 준비가 미흡'하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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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미국-캄보디아 군사협력 강화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미 국무부장관이 작년(2010) 7월 '동아시아 정상회담'(EAS)의 '외무장관 회의'에 참석하면서 선언한 말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키로 결정한 상태에서, 미국의 국제 전략적 중심축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특히 동아시아 지역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불과 1년 사이에 미국은 역내에서 '중국을 전방위로 압박하는 형세'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캄보디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미국과 캄보디아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특히 2009~2010년 사이에, 훈센 총리는 '중국의 딸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언행들을 보여줬다. 국제적으로는 여타 인접국가들의 이익에 반하면서까지 중국의 핵심적인 이익을 지지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국내에서는 중국의 '자비로움'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곤 했다. 게다가 2009년 12월에는 미국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구르 난민들을 중국으로 강제송환'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2010년 4월에 '약속했던 군용트럭 200대의 선적을 취소'하는 등 양국관계는 극도로 냉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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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hristopher Boitz/미 공군) 캄보디아 해군(해상보병=해병대) 요원(우측)이 통역의 도움을 받아 미 공군 요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11-8-8. |
훈센 총리의 친-중국적 태도가 크게 변하진 않았지만, 금년에 들어와 그는 이전만큼 '노골적인' 언행들을 하지는 않고 있다. 이와 더불어, 비록 규모가 작고 인도주의 구호나 대민지원의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미국과 캄보디아는 다양한 군사협력을 진행하면서 전례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2월에는 미 국방부의 더렉 미첼(Derek J. Mitchell) 아시아-태평양 담당 선임 부차관보, 8월초에는 제7함대 사령관 스콧 반 버스컥(Scott Van Buskirk) 해군 중장, 8월말에는 국방부 산하 '국방본부'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담당 수석인 리차드 심콕(Richard Simcock) 준장, 10월에는 로버트 셔(Robert Scher) 국방부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담당 부차관보 등 안보관련 고위 관리들이 연속으로 캄보디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미군과 캄보디아군의 합동 훈련은 거의 연중 계속되었고, 12월12일에도 미 해병대와 캄보디아 군 요원들이 7일간 일정으로 '합동훈련'을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 미 육사 출신으로 훈센 총리의 장남인 훈 마넷 중장과 미국 국방대학 출신인 3남 훈 마니(Hun Many) 대령이 중심이 되고 있을 것임은 충분히 추정가능한 일이다. 훈센 총리도 7월의 발언을 통해, 아들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미국 정부에 감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훈 마넷 중장은 태국과의 교전사태를 통해 정치적 두각을 보였지만, 그 이전부터 캄보디아 군의 정책적 방향을 결정할 중요한 보직을 맡고 있었다. 2009년에 일약 육군 준장으로 임관한 그는 국방부 대테러국장을 맡아 각급 특수부대들을 총괄하기 시작했다. 또한 지뢰부대들을 중심으로 참가하고 있는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과 관련하여, 훈 마넷의 인맥이 대미 연락창구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캄보디아의 특수부대들은 훈센 총리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병(私兵)의 성격이 크지만, "대-테러"를 명분으로 미국과의 다양한 공조를 할 때 참여가 가능한 성격의 군사력이라 할 수 있다.
(사진) 훈센 총리의 장남인 훈 마넷 중장의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1999년 졸업앨범 사진.
미국 역시 아시아권으로 복귀하면서, 캄보디아가 가진 전략적 중요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캄보디아의 '시하눅빌 항구'는 아시아권의 대동맥인 말라카 해협의 배후 항구로서 그 가치를 지닌다. 또한 캄보디아는 메콩 강 유역의 주요한 진출로이며, 태국과 베트남이라는 역내 강국들이 세력의 균형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아울러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또 하나의 교두보라는 점도 특히 중요한 측면이다.
미국의 최근 움직임 변화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를 통해 지원하던 기존의 교육과 문화적 원조도 대폭 증액해나가긴 했지만, 주로 군사적, 전략적 협력에 집중되었다. 이에 따라 캄보디아는 중국에 대해서는 경제적 협력을 추구하고 있고, 미국에 대해서는 군사 및 안보적 협력을 추구하는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은 9월 말에 안보 전략통이던 여성대사 캐롤 로들리(Carol Rodley)를 이임시키고, 국제 마약프로그램 및 정통적인 행정통인 윌리엄 E. 토드(William E. Todd)를 신임 대사 후보로 지명했다. 그는 의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내년 1월경에 부임할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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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베트남인들의 무덤이 되고 있는 캄보디아의 카지노들
베트남은 1978년 12월에 10만명 이상의 병력을 파병하여, 1979년 1월7일에 크메르루주 정권을 붕괴시킨 후 '위성정권'을 세웠다. 현재도 당시의 집권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므로, 베트남이 캄보디아에 대해 행사하는 정치적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은 최근 수년 동안에 경제적 진출에서도 상당한 가속도를 붙였다. 특히 2010년 1월 1일부로 '상호 30일간 무비자 방문을 허용'하면서, 베트남은 2년 연속 '캄보디아 방문객 수 1위 국가'로 부상했고, 금년에는 이미 50만명 이상이 캄보디아를 찾았다.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경제특구인 바웻(Bavet, 바벳)의 카지노 단지 외에도, 캄보디아 영내의 몇몇 국경지역들에 새로운 카지노들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캄보디아의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 물의를 일으키는 베트남인들이 증가했고, 베트남 남부지방에서는 커다란 사회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사진: TNN) 캄보디아에 감금되어 손가락을 잘린 19세 소년. 그는 베트남 경찰에 의해 구조됐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을 잃은 사람들에게 사채업자가 돈을 빌려준 후, 게임을 계속시키는 영업방식이다. 빌린 돈을 다 잃은 도박꾼은 감금 당한 채, 가족들이 몸값을 가져와야 풀려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개중에는 고교생들을 유인해 영업하는 사례도 있고, 가족들이 지불능력이 없거나 늦어질 경우 구타와 가혹행위를 가하기도 한다. 심할 경우엔 강제로 손가락을 절단하여 가족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최근에는 감금되어 있던 한 도박꾼이 구타를 피해 달아나려다 '호텔에서 추락사'하기도 했다.
바웻의 카지노 단지는 규모 면에서 여전히 영세하며, 주로 베트남인들을 대상으로 한 문제 많은 영업전략을 구사한다. 이곳의 일부 카지노는 '아시아의 관광 허브'를 외치며 영업을 시작했지만, 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서쪽 국경의 '뽀이뻿 카지노 특구'보다도 더욱 열악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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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캄보디아 10대 뉴스> 선정 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들도 후보군에 올라왔었다.
- 부산저축은행 사태와 캄코시티 파동
- NGO 관련 규제법안 입법 논란
- 캄보디아 국제결혼, 남성 나이 50세로 제한
- 앙코르맥주 홍보 걸들의 시위와 초과수당 지급
- 태국 군대의 캄보디아 벌목공 사살사건들
- 태국의 어선으로 인신매매된 캄보디아 남성들
- 활발해진 북한-캄보디아 관계
- 대만계 보이스피싱 조직의 대대적인 체포작전
- 영국이 2011년 캄보디아 투자 1위 국가로 부상
- 시하모니 국왕, 영국 왕실 결혼식 불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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