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 하나
벌써 20년이 넘었구만. 김대중 정권 말기였으니. 김대중의 후계자가 이인제로 정해졌다는 소문이 파다할 때였지. 고교 주먹 출신 운동권 선배 (고)박○○이라는 사람이 징역쟁이 모임에서 노무현을 초청해서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자고 제안했어. 그래서 얼마 후 어떤 은행 강당에서 노무현 강연회를 갖게 되었지. 강연이 끝나고 뒤풀이에서 그가 외치는 거야. 이 바보를 대통령 한번 만들어봅시다. ‘노바보’라는 말이 창작되고 노사모를 구성하기로 했어. 그러고는 며칠 후 그 모임에서 정식으로 노무현을 민주당(이었던가?)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는 데 서명하자는 안건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지.
당시 노동계와 운동권은 임의 단체인 국민승리 21의 한계를 느끼고 정치단체인 민주노동당을 출범시킨 지 얼마 안 되던 때였거든. 정○○ 선배가 제일 열성적으로 노무현 추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어. 박○○ 선배는 말주변이 별로 없었거든. 나는 엄연히 민주노동당 후보가 있는데, 다른 당 후보로 누구를 추천하는 것은 좀 우습다는 의견을 말했어. 당시 대부분 회원이 민주노동당 당원이었거든. 박○○ 선배가 째려보더만. 그러자 박○○ 선배의 친형이자 ○○상고 선배인 박○○ 선배가 한쪽으로 나를 부르더니 내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고 조용히 말하더라고. “○○, 자네 전임교수 돼야 할 것 아닌가. 기회라는 게 자주 오는 거 아니네.” 암튼 그 선거에서 나는 차마 권영길을 찍을 수는 없었지만, 노무현을 열렬히 지지하지도 않았어.
우여곡절을 거쳐 노무현이 당선되고 정○○ 선배가 청와대 인사수석으로 갔어. 노무현이 박○○ 선배에게 청와대에 들어와 좀 도와달라고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어. 박○○선배가 극구 사양하고 대신 정○○ 선배를 추천했다더라고. 본인 자신 민청 출신인 정○○ 선배는 인사수석으로 있으면서 전국의 민청 출신들 취직시키는 것을 제1 임무로 삼았다고 해. 전국 민청 출신 중 딱 두 사람만 자리를 얻지 못했는데, 두 사람 모두 ○○ 출신인데, 한 사람은 (고)윤○○ 선배고 다른 한 사람은 김○○ 선배야. 정치적 소신이 좀 달라서 그랬겠지. 어찌 되었든 고생한 사람들에게 최소한 보상해 주는 것이 정의에 어긋난다고 할 수는 없겠지. 근데, 당시 ○○ 대기자로 있던 박○○ 선배도 높은 자리로 갈 거라는 소문이 돌더라고. 나는 당연히 그 양반이 사양할 줄 알았거든. 근데 결국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으로 가버리시더라고.
그 선배를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에 추천하고 선임한 이유를 듣고 좀 의아했어. 그 선배가 등산을 좋아했는데(나도 잘 알지), 그게 추천과 선임의 사유였다더구만. 등산을 많이 다녀서 전국 곳곳 명산을 안 다녀본 곳이 없다는 거야.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거지. 난 이게 뭐지 했어. 기자로 평생을 보낸 그 선배를 언론 관련 단체나 기관에 보내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이런 억지 인사는 정의로운 보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게 아닌가? 좀 있었더니 김○○이라는 후배는 ○○○○발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더라고. 대통령 직속 기구의 위원은 장관급이라고 하데? 나는 평소 그 후배가 상당한 능력이 있는 친구라고 생각해서 턱 없는 인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절차상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했지.
그 후로도 계속 들려오는 소식은 나를 우울하게 했어. 이러려고 그토록 노무현의 집권을 바랐던가? 의(義)와 이(利)가 뒤섞여 의인지 이인지 모를 상황은 계속되었지. 그러다가 행인지 불행인지 의는 없고 오직 이만 있다고 주장하는 사기꾼이 권력을 잡았지. 오히려 쉽고 간단해서 좋더라고. 마음껏 나쁜 놈이라고 욕하고 비난할 수 있었으니까. 근데 사람들에게는 의나 이나 거기서 거기였던 모양이야. 이밖에 없다는 놈이 가자 이번에는 아예 자신이 의라는 년이 나타났어. 악의 화신인 제 아비가 의라는 것을 평생 신조로 알고 살아온 년이 나타나서 내가 의의 딸이니 내 아빠를 반대하는 쪽은 악이고 불의라고 악을 써대는 거야. 이제 맘 푹 놓고 불리하더라도 의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어. 나는 정말 맘이 편해지더라고. 손익 따지지 않아도 됐으니까.
작금의 우리 상황은 어떨까. 각자 서 있는 처지와 보는 관점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래. 한쪽은 나쁜 놈이고 무능한 놈이라는 걸 분명히 알겠는데, 다른 한쪽이 의인지 이인지 아직도 헷갈려. 저번 대선이 패배로 끝나는 순간 지지자든 단순 투표자든 그에게 표를 준 모든 시민이 분노와 슬픔에 질식해 아무말 못하고 있을 때, 그만 홀로 주가가 오를 것이 예상되는 주식 구입에 열중했다는 보도를 보고 그가 추구하는 것이 의인지 이인지 분별이 안 되어 혼란스러웠어.
내가 변한 것일까? 그들이 변한 것일까? 나도 그들도 다 변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