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니련선하원 원문보기 글쓴이: 니련선하
| ||||||
|
자신의 무명번뇌는 왜 잡지 못하냐
선, 진실하고 소박한 일상 속 존재
송나라 때 선사인 석두자회(石頭自回)는 출가 전 직업이 돌을 깨고 다듬는 석공(石工)이었다. 그는 출가 전부터 문자를 알지 못해 사람들이 <법화경>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 따라 외웠다. 석두는 대수원정(大隨元靜, 1065~1135) 문하에 출가하였지만 몇 년간 허드렛일을 하였다. 마침 절에 불사가 있어 석두는 출가 전 직업을 살려 돌 깨는 일을 하면서 손에 정과 망치를 놓지 않고 일하면서 <법화경>을 독송하였다.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수원정 선사가 어느 날, 석두에게 말했다.
“오늘 돌 부딪치는 소리, 내일도 돌 부딪치는 소리 속에서 생사生死가 오고간다.
그대는 무엇을 쪼개고 다듬고 있는가?”
석두는 선사의 말 한마디에 망치와 정을 내려놓고, 스승에게 예를 올리며 깨달음을 구하였다. 대수원정은 석두에게 조주감파 화두를 주며 참구하라고 하였다. 다음 날부터 석두는 돌을 쪼개면서 잠시도 멈추지 않고 면밀히 화두를 참구했다. 어느 날 그는 단단한 돌이 쪼개지지 않아 힘껏 망치를 내리쳤는데, 돌과 망치가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어 나왔다. 그 순간 석두는 불꽃을 바라보며 크게 깨달았다.
석두의 경우를 보면, 깨달음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길이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 53선지식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직업을 보면 정작 수행자는 몇 되지 않는다.
의사.뱃사공.유녀 등 다양한 직업의 종사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각각의 위치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들이었다.
대승불교 정신은 바로 꼭 출가자만이 해탈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나 삶속에서
불도의 길을 구현할 수 있음을 드러낸 사상이다.
곧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듯이 보리(菩提)는 일상의 삶속에 있다는 것이다.
석두자회처럼 출가 전 독특한 직업의 선사가 또 있다. 바로 당나라 때의 석공혜장(石鞏慧藏)인데, 그는 사냥꾼 출신이다. 그는 출가 전 직업 때문인지 승려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석공혜장은 마조도일(709~788)의 제자이다. 어느 날, 그는 사슴 무리를 쫓다가 마조를 만났다. 마조가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사냥꾼이라면 활을 잘 쏘겠군.”
“예, 잘 쏩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화살 한 대로 몇 마리를 잡는가?”
“화살 하나로 한 마리를 잡습니다.”
“그대는 화살을 쏠 줄 모르는군. 나는 화살 하나로 떼거리를 잡는다.”
“저들도 생명이 있건만,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떼거리로 잡으십니까?”
“그대가 그런 것은 잘 알면서 왜 자신은 잡지 못하는가?”
어리석은 짐승은 잡으면서 왜 자신의 무명번뇌는 왜 잡지 못하느냐는 마조의 일침이 담겨 있다. 마조의 한 마디에 혜장은 바로 화살을 꺾고 마주 문하에 출가하였다. 사냥꾼 출신이었던 혜장은 항상 활과 화살을 가까이 두고, 사람들에게도 “이 화살을 보라!”고 외치며 교화 방편으로 삼았다.
석두와 석공 선사를 통해 누구나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일과 직업에서 선(禪)의 실제가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명하고 일상적인가!! 이렇게 선은 바로 삶의 진실함, 소박한 일상 속에 존재하건만 우리는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 멀다고 인식하는 데는 바로 자신의 삶속에 가까이 있건만 지레 자신을 낮추어 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행(行)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신문2909호/2013년5월1일자
첫댓글 선은 바로 삶의 진실함, 소박한 일상 속에 존재하건만 우리는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 멀다고 인식하는 데는 바로 자신의 삶속에 가까이 있건만 지레 자신을 낮추어 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행(行)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상속에서....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