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룡사지 비가 손상된 석재들 사이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라시대 우물터

금동 장육(5m) 석가여래 삼존상과 10대 제자상이 있던 금당터

금동 장육(5m) 석가여래 삼존상이 있던 자리

금동 장육(5m) 석가여래 삼존상과 10대 제자상의 대좌

금당은 진평왕 5년(584)에 세웠는데 훗날 솔거가 그린 노송 금당 벽화에 날아가던 새가 앉으려다가
금당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고 전해진다

금당터에서 바라본 목탑터
황룡사 9층 목탑은 한변의 길이가 22m이고 바닥면적은 150평이라고 한다

9층 목탑을 세운 백제인 아비지 기념비

9층 목탑의 중심부인 심초석과 주춧돌
중심부의 심초석은 435X300Cm 의 크기이며 두께는 128Cm, 30톤에 달하는 화강암이다
심초석 안에 마련된 사리공은 외곽에 두줄의 홈을 돌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였으며 그 안에서
금동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중문터에서 바라본 목탑터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이 나라의 왕이 여자이기 때문에 주변의 나라들이 업신 여기므로
주변의 아홉나라를 제압한다는 의미에서 9층 목탑을 세울것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했다 (643)

통도사 경내 어디에서도 바라보고 예배할 수 있도록 남쪽 산에 배치되어 있는 오층석탑으로
황룡사 목탑 심초석에서 나온 불사리 7과중 2과를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이운하여 봉안하였다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보물201호) 북쪽면에는 9층과 7층 목탑이 새겨져 있다
신라인들이 황룡사 9층 목탑과 같은 형태의 목탑을 바위에 새긴것으로 추정한다

황룡사 모형 (경주박물관 미술관)
1층은 일본을 제압하고, 2층은 중화를, 3층은 오월을, 4층은 탁라를, 5층은 응유를, 6층은 말갈을
7층은 거란을, 8층은 여진을, 9층은 예맥을 제압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치미(경주박물관 미술관)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고 재앙과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금당 용마루 위에 설치했던 치미로
높이 182Cm나 되어 한번에 굽지 못하고 아래, 위 둘로 나누어 만들어 끈으로 묶어 사용했던 구멍이 있다

치미에는 손으로 쿡쿡 눌러 만든 웃는 모습의 남자(턱에 수염있음)와 여자의 얼굴이 있다

경문왕13년(873) 탑을 재건할때 목탑 사리함에 넣은 찰주본기 (경주박물관 미술관)
목탑이 높아 여러 차례 벼락을 맞았고 지진등으로 기울어져 다섯차례나 수리하거나 재건하였다는
사실이 이 찰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목탑 심초석에서 나온 백자 항아리 (경주박물관 미술관)

9층 목탑 심초석 안에서 나온 동경(銅鏡)으로 왼쪽부터 사방신이 조각된 사신경, 일광문경, 무문경이 있다

황룡사터에서 나온 8세기 귀면와 (경주박물관 미술관)

황룡사 건물 배치도로 동서288m, 남북281m 총면적 2만여평으로 동양에서 최대의 사찰이였다
진흥왕 14년(553)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4대왕(진흥,진지,진평,선덕여왕)
93년간 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완성한(646) 절로 황룡이 나타난 절이라고 황룡사 라고 불렀다
진흥왕 35년(574) 금동 장육(5m) 석가여래 삼존상을 완성하였으며
선덕여왕 14년(646) 백제 기술자 아비지가 9층 목탑을 세웠다
목탑의 높이는 80m(아파트 25층)나 되며 9층으로 세워 신라 주변의
아홉 나라를 제압 한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성덕대왕 신종의 4배 되는 종과, 솔거가 그렸다는 금당벽화가 있었다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군의 침입으로 사찰이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원효스님이 출가했던 사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