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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섬 |
큰 개창 |
포제동산 |
집근개 |
우중모루 |
▲ 한섬
한은 크다는 뜻이므로 큰 섬을 뜻함
▲ 큰개창
1979년 부터 겨울이 되면 가파도 사람들이 모슬포로 왕래하려면 북풍이 많이 불고 파도가 세어서 가파도를 출발하여 송악산을 북풍의지로 삼아 송악산 앞 바다로 서쪽으로 바람의지 삼아 오다가 파도가 매우 세어서 머리뿌리 코지를 못지나서 큰개창에다 하선하여 모슬포로 오고가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에 큰개창이라 일컫고 있다.
▲ 포제동산
대정읍 하모1리 통일교회 앞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오육십년전까지는 매년 마을 사람들이 농포 제관을 선정해서 삼일간 입제시키고 갖은 정성으로 제를 거행했는데 이 동산을 포제 동산이라 한다.
▲ 집근개(深浦)
하모리에 있으며 집근개는 집은개, 집조개의 변천을 거친 것으로 집근은 깊은의 와음이다. 이것은 해안까지 물이 깊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우중모루
모슬봉 서남쪽에 있는 마루인데 우중은 어원은 알 수 없다.
하모2리
대정읍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모슬봉이 자리하고 있는 유서깊은 마을입니다. 해안에 용천수가 풍부하여 일찍이 마을이 형성되어 왔습니다. 조선조 일제의 약탈에 분개하여 일본어민을 격퇴한 '오좌수행적비'가 신영물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융기관 등이 밀집하여 대정읍 상권과 교통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마을입니다.
마을약사
. 약 500여년 전 15세기 말엽에 설동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고부 이씨(古阜李氏)가 처음 이주하여 왔다는 설이 있다.
. 해안 용천수가 있어 식수가 풍부한 '논물거리'에 처음 취락이 형성된 후 차차 동쪽으로 마을세가 확장되었다.
. 옛날 당(堂)이 있어 무당은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 찾아와 빌었다는 데서 동명을 『당밭』이라 부르고 있으며 현재 '당전동(堂田洞)'이라 부르고 있다.
. 자연마을로는 상동, 당전동, 영수동이 있다.
지명유래
그신태물 |
비석거리 |
▲ 그신태물
하모 2리 해안 신영물 남쪽에 있는 샘물인데 밤에 그신태라는 유령이 나타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신태는 제주도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유령의 한가지로서 여자가 빨래하는 형상으로도 나타나고, 상체는 보이나 하체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형상으로도 나타난다고 한다.
▲ 비석거리
많은 비석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舞水물(무수물·무시물)
이 지형이 마치 어떤 아이들이 춤추는 것 같다는 데서 [무수물]이라고 부른다.
▲ 당전동(堂田洞. 당밭)
옛날 당이 있어 무당은 물론 동네사람들 까지 찾아와 빌었다는 데서 동명(洞名)이 [당밭]이라 불리웠는데 후에 한자표기에 의해 [당전동(堂田洞)]이라 부른다.
▲ 神靈水(신영물)
설촌 당시 한 풍수가 지나다가 이 못(池)에 이르러 물을 한모금 떠 마시고서 "물맛이 참 좋아서 마치 신령수(神靈水) 같다"고 한데서 이 못을 [신영물]이라 부른다. 이 신영물에는 오좌수 행적비가 있다.
오좌수행적비 |
왼쪽이 신영물이다. |
오좌수행적비 (五座首行蹟碑 )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일본 어선이 제주도 연근해에 나타나 불법적으로 제주 어업을 침탈하기 시작하였다. 고종24년(1887) 8월에는 가파도에 가막(假幕)을 지어 일본 어선 6척이 주둔하였다. 이들은 주로 모슬포에 내박하여 민가의 돼지와 닭 또는 부녀자들을 약탈하여 갔다. 더구나 가파도에는 식수 사정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모슬포항 부근에 있는 신영물을 주로 이용하곤 하였다. 신영물은 모슬포 주민이 거의 이용하여 식수뿐 아니라 빨래도 하는 곳으로 부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일본 어민들은 물을 길어간다는 핑계로 부녀자들을 능욕하곤 하였다.
이에 하모리 거주자 李晩松·李興福·金成萬·鄭宗武·金成鎰 등 5인이 나서서 청장년을 이끌고 '돈지' 해안도로에서 일본 어민과 격전이 벌였다. 이 싸움으로 이만송은 목이 잘려 죽었고, 마을 하인 중의 한 사람은 팔이 잘렸으며, 김성일은 손가락이 잘렸다. 그러자 관에서는 이들의 용기를 포상하여 각기 좌수(座首)의 직을 주었으며 하인에게는 錢 30냥을 주었다. 한편 심현택 목사는 이 사건을 조정에 급히 보고하였는데 조정에서는 통리교섭통상아문(統理交涉通商衙門)으로 하여금 일본공사에게 항의하도록 조치하였다.
현재 신영물에는 이들 5인의 행적을 기리는 비가 1995년 모슬포청년회의소 이름으로 세워졌다.(남제주군의 문화유적 142쪽)
운진항 또는 모슬포 남항
운진항의 또 다른 모습
모슬포 남항은 주민들이 운진항으로 부르는 국가 어항이다. 모슬포 남항의 배후부지 매립공사가 2009년 마무리되었고 2012년까지 제주 서남부권의 핵심 해양관광지로 탈바꿈한다. 국토 최남단 섬인 마라도와 가파도를 다니는 여객선 부두로 활용하고 배후부지에 잔디광장을 비롯해 해양소년단 수련장, 해수 풀장, 전통 배 체험장 등을 설치한다. 항구 내에는 요트 관광객들을 위한 요트전용 계류시설도 마련한다고 한다.
하모해수욕장
하모해수욕장은 관광객들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분위기가 한적하며 모래결이 곱고 물이 얕으며 백사장 위로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모슬포 읍내에서 남쪽으로 3㎞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다른 해수욕장과는 달리 사람들의 손때가 덜 묻은 곳으로 한적한 시간을 보내기에 적당한 곳이고 인근에 숙박업소와 음식점 및 민박업소가 있어 여름철 바캉스뿐만이 아니라 사계절 가족휴양지로서 손색이 없는 곳입니다.
소나무 밭이 해안을 따라 들어서 있어 시원한 그늘과 해수욕을 즐길 수 있으며 야영에도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고 주변경관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가파도와 마라도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으며 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드는 연인들이 많습니다.
모슬포 항구에서 동쪽으로 1km 위치,
▷ 제주시 → 모슬포행 서부관광도로 시외버스 → 하모해수욕장(50분소요)
▷ 서귀포시 → 서회선 직행버스 → 모슬포 하모해수욕장(40분소요)
송악산에서 바라 본 풍경들...
하모리 육군제1훈련소 軍藝隊 터
대정읍 하모리 1046번지 목조 2
대정읍 하모리 1046번지 목조 2층 건물은 적산가옥으로서 4·3사건 당시 육군특무부대가 주둔해 있었고, 그 후 육군제1훈련소 군예대가 이곳에서 창설되었으며 '제1훈련소歌 '간부교육대歌' 등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대각선 모습 |
좌측 모습 |
당시 軍藝隊는 훈련소 전속악단이었으며 그 모체는 서라벌악단이었다. 유호, 박시춘, 황금심, 신카나리아, 주선태, 구봉서 등 기라성 같은 연예인이 동참하고 있었다. 그 때 비록 군가는 아니지만 '삼다도소식'(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황금심 노래)이 1951년말 모슬포 바다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이재수의 난
1901년(고종 5년) 4월, 제주도에서 이재수(李在秀)가 주도한 민란이다.
이재수의 난은 제주교안(濟州敎案), 신축교란(辛丑敎難), 1901년 제주항쟁, 성교란(聖敎亂) 등 각각이 처한 위치에 따라 이처럼 다양하게 이름을 붙인다.
전제군주체제의 강화를 꾀하던 대한제국은 황실재정을 채우기 위하여 내장원에서 봉세관(중앙에서 파견된 세금 징수 관리) 강봉헌을 1900년 제주도에 내려 보냈다. 그는 공유지에 대한 무리한 징세를 하였고, 심지어 어장․그물․소나무․목초지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겼다. 더구나 그는 지금까지 징세를 담당하던 지방관․향임세력들을 배제하고 독점적으로 징세를 함으로써 토착세력과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천주교는 대원군 시대만 해도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1886년 한불수호조약과 1896년 교민조약 이후로는 선교의 자유를 얻어 공세적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신부는 “국왕처럼 대우하라”는 의미의 ‘여아대(如我待)’라는 왕의 신표를 직접 수여받아 지니고 있었다. 완전한 치외법권 이상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1)
제주 지역에서도 1901년 인구의 2.5%가 천주교 신자가 되는 성장을 보이는데 이는 관리와 동등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며, 죄를 지어도 성당에 들어가면 잡지 못하는 등의 특권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거 입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정재가 이재수 역을 맡았다. |
민란의 섬... |
양적 팽창에 주력한 천주교의 선교 활동은 곧 문제점을 양산하게 되었는데, 천주교 신부들은 천주교인들의 불법 행위를 보호해 주었으며 지방 행정까지 간섭하였다. 천주교인들은 사사로이 형벌을 가하거나, 옥문을 부수고 옥에 갇힌 천주교인을 탈출시켰으며, 이미 매매한 토지를 다시 파는 등의 불법을 저질러도 면책을 받는 등 법적·경제적으로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도들과 봉세관(封稅官)이 결탁하여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면서 천주교인과 비천주교인들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1899년 두 명의 선교사가 파견됨으로써 전교하기 시작한 제주의 천주교는 프랑스의 힘을 배경으로 교세를 키워갔다. 이 과정에서 마을의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리는 등 무리한 포교가 이루어져 자주 주민들과 충돌하였다. 그러다 1901년 2월 정의군 하효리의 오신락 노인이 교당에 끌려가 죽은 사건이 터지면서 주민들의 천주교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 더구나 일부 교인들이 봉세관 강봉헌의 중간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하였다.
1901년 4월 9일 강우백(姜遇伯)을 중심으로 대정군민들은 소장을 올려 천주교도들과 봉세관의 폐단과 수탈의 시정을 호소하였고, 4월 12일에는 정의군에서도 이러한 호소가 있었다. 한편 대정군수 채구석(蔡龜錫)과 향장 오대현(吳大鉉) 등은 천주교인들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대정군 상무사(商務社)가 조직되어 교인들과 사사로운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4월 29일 천주교인들이 상무사원인 송희수를 구타하는 등 천주교인들과 상무사원들 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는데, 천주교도 김병헌은 천주교인 50여 명을 데리고 와서 옥문을 부수어 천주교인을 빼내고 상무사원을 잡아감으로써 사건이 격화되었다. 상무사2)는 대정군 인접 지역에서 민회를 개최하여 천주교인들의 교폐와 봉세관의 세폐를 성토하고 제주읍성으로 가서 등소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소장에는 오대현3)과 강우백을 장두(狀頭)로 하였다.
봉세관 강봉헌은 천주교도들의 도움으로 서울로 피신하였다. 봉기한 민란군은 제주목사 김창수(金昌洙)에게서 조세 폐단과 교폐를 정부에 보고하여 혁파할 것을 약속받자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은 이교도에 대한 성전을 선포하고 교인 1,000여 명을 소집, 제주목 무기고에서 총기를 꺼내어 무장하였다. 무장한 천주교인들은 농민들에게 발포하였고 오대현 등 여섯 명을 체포하였다. 이로 인해 조세 수취 구조에 대한 반봉건적 운동은 무력 투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정현에서는 동진과 서진 두 곳의 민군이 구성되었으며, 강우백과 이재수가 각각 대장을 맡아 조총과 죽창으로 무장하고 3군에 통문하여 봉기를 촉구하였다. 5월 17일 제주읍성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민군 수만 명이 가세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의 선제공격으로 농민 18명이 살해되자 민란군 측은 일본인에게 총 50자루를 구하여 전력을 증강하였다.
민란군이 무장함에 따라 프랑스 신부는 프랑스 군함의 급파를 요청하였고 시간을 벌기 위해 5월 23일 오대현 등 23명을 풀어 주며 강화 중재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5월 25일 제주읍성 내 백성들까지 민란군에 합세하여 봉기함에 따라 천주교도 측이 패배하였고 입성한 민란군은 천주교인 250여 명을 살해하였다.
5월 31일 프랑스 군함 두 척과 270여 명의 프랑스 해군이 입항하였다. 6월 2일 정부군 100여 명과 궁내부 고문관, 미국인 W. F. Sands가 급파되었고 일본 군함도 출동하였다. 정부는 프랑스 군함 철수를 주선하고 민란군에게 선 해산 후 민폐 혁파를 조건으로 해산을 종용하였다. 이에 따라 동진대장 오대현과 제주목사 정부군 대장 사이에는 화해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봉세관이었던 강봉헌이 대정군수로 부임한 데 이어 6월 9일 다시 입항한 프랑스 군함의 무력시위에 농민들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 사이 민란군 지도부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갈등이 노출되고 있었다. 온건파였던 오대현의 동진은 합법적 등소로 정부와 협상하고자 하였고, 강경파였던 이재수의 서진은 민폐 혁파와 천주교도 처단, 봉기민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조건을 요구하였다. 이에 정부군 대장 윤철규가 이재수와의 면담에서 요구 조건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하며 제주읍성으로 입성하기를 요구하였다. 6월 11일 약속대로 민란군이 입성하였으나 정부군은 민란군 지도자 40여 명을 그 자리에서 체포하고 민란군을 강제 해산시켰다.
1901년 6월 17일 세폐 혁파에 관한 17조항이 관철되었고 7월 2일 12조의 교민화의 약정이 체결됨에 따라 교폐 문제에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7월 18일 이재수·오대현·강우백 등 40여 명의 민란군 지도자들은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영사재판으로 10월 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또한 프랑스 정부에서 배상금을 요구함에 따라 제주도민에게 총 6,315원의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이에 1904년 6월 제주도민 1인당 15전 6리씩 각출하여 배상하였다. 더불어 프랑스 측의 요구로 황사평을 천주교도들의 묘지로 정하였다.
1) 이영권, 2005,『새로 쓰는 제주사』, 휴머니스트, p.274
2) 상무사(商務社) : 한말 보부상을 거느려 다스리던 기관. 1883년(고종 20)에 군국아문 관할하에 혜상공국(惠商公局)이 설치되면서 보상과 부상은 단일 조직으로 통합되었다. 1885년에는 내무부로 소속을 옮기면서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했다. 이때 부상을 좌단(左團)으로, 보상을 우단(右團)으로 나누고, 역원(役員)은 상리국에 통합해 일원화시켰다. 1894년 부상과 보상은 농상아문 소속으로 바뀌고 1897년 황국중앙총상회로 다시 소속이 바뀌었다가 황국협회로 이관되었다. 1899년(광무 3) 상무사로 이관되어 육의전과 통합되었는데 이때 부상은 상무사좌사로, 보상은 상무사우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3) 오대현(吳大鉉) : 일명 오을길(吳乙吉)이며 본관은 군위, 출생지는 중문면 예래리이다. 대정 유림의 좌수로서 채구석 및 송희수(宋希洙) 등과 함께 상무사를 결성할 때 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상무사는 1899년에 발족된 전국 보부상(褓負商) 단체로서 황국협회에 속했으나, 제주의 경우는 지방관과 지방유지로 구성되었다. 1901년 신축교란 때 강우백 및 이재수 등과 더불어 상무사 회원들은 반서교(反西敎)운동을 전개하고 제주성까지 공략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봉기 때 오대현은 서진장두, 2차 봉기시에는 동진장이 되었다.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제주출신 소설가 현기영의 「변방에 우짓는 새」를 각색한 영화 「이재수의 난」이 '아부오름‘에서 촬영되었다.
친구 중 한 사람은 Denver에 산다.
Denver를 구경하시려면 상단중앙에 있는 배경음악은 꺼주세요~!
첫댓글 아마도 제주에서 관광지로서 가장 별볼일 없는 곳이리라. 오죽했으면 중학교때 체육 선생님이 모슬포는 바람이 너무 쎄어서 축구보다는 야구를 육성해야 한다고 했을 까. 그 체육 선생님의 꼬임(?) 에 빠져 중 3 여름에 수영을 시작했는 데, 그때 연습하던 곳이 항구식당 앞 선착장. 그해 여름, 똥덩어리가 떠다니던 그 물에서 호남이,상훈이 다 같이 가뿐 숨을 몰아 쉬던 때가 생각나네. 시인의 싯귀처럼 "창밖의 비바람과 함께 할" 벗들이 모슬포에 많지 않아, 나는 아마도 덴버에서 말년을 보내야 될듯 하다. 한 20년 살아 보니, 내 취향에 100% 맞는 곳이다. 축.농.골.야.테., 이 다섯 벗과 함께.
운진항에서 닦은 수영실력덜이었군!ㅎㅎ
그 똥떵어리 중에는 호남이네 것도 있음직 허다마는...
취향에 맞는 동네 살아점시믄 그게 최고 행복이다!
난 매일 제주가는 꿈을 그려본다.
이게 꿈으로만 끝날런지는 모르겠다.
우선 순위에서 골이 3번으로 올라 갔는 디, 골이 골아픈 친구더군. 좀 처럼 실력이 늘지를 않아 운동에 대한 자존심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래도 호남, 영철이를 비롯한 골프 치는 친구들 긴장들 해라. 언젠가 덴버 골프의 매서움을 보여 주겄다.
호남이는 수술 직후에는 씩씩허게 말도 잘 해라마는,
며칠 전 전화해봤더니
목소리에 힘이 없고
잘 먹지를 못하는 것 같더라.
수술후 몸조리를 잘 해야될 것 같더군.
태길아, 건강하고 즐거운 나날 되기를 바란다.
이게 무신 소리, 힘이 없다니. 천하의 심호남이 기운이 없어? 내가 미국에서 빡빡기며 배운 것 하나, 세상 모든 일은 생각대로 이루어 진다는 사실. 방정맞은 생각버리고 항상 좋은 일만 생각해라.
호남아! 사람이 살다보면 좋을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있음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프고 힘들 때 일수록 마음을 비우고 낮은 자세로 겸손되게 하늘에 계신 분에게 의지하고 기도를 드리면 쾌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루 빨리 회복하여 기쁜마음으로 만나자!!!
호남아, 하모리 정기 받앙 속히 쾌차하길 바란다. 힘! 하면 호남인데, 힘이 빠지면 데크라~~당췌 안된다. 힘내라 힘!!!
김영철회장님 문병을 못가니 기회대면 쥬스라도 한병 보냅시다,순철이 한태라도 시켜서,아니시면 제주가실기회가 있다면 그때라도 회비에서 공재하고 맛있는거 하나사주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