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마리 염소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 히브리서 2:17
중동지방의 밝은 햇살 아래 흠 없는 염소 두 마리가 대제사장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제비를 뽑아 제사장은 인간의 죄를 대신할 속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염소 한 마리를 제단으로 천천히 끌고 갔습니다. 염소의 피는 속죄소에 뿌려지고 그 염소는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속죄 염소로 불리우는 다른 염소는 또 하나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제사장은 염소의 이마에 두 손으로 안수하고 이스라엘의 죄를 자백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염소를 사막으로 데리고 가서 풀어놓습니다. 그 염소가 헤매다가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사라져 버린 것이 됩니다. 죄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그 염소는 대속물이 되었습니다.
이 두 마리의 염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하실 일을 보여준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죄의 희생 제물로 생명을 바친 우뚝 선 제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속죄 염소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 곧 그들의 죄를 없애는 것은 예수님이 몸으로 완수하셨습니다. 그가 대속물이 되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예수님과 일체가 되므로 우리들의 죄는 완전히 씻기었습니다.
염소 두 마리는 두 가지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희생과 대속입니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서 우리들의 죄값을 완전히 지불하셨을 때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죄로 가득한 의지할 데 없는 우리들을 흠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완전히 씻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위대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은 그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의 형벌의 자리를 대신하셨다.
** 후회 없는 삶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 히브리서 12:5
어느 여인이 실수로 집안의 가보인 보석들을 내어주어 10센트에 팔렸습니다. 이 일은 그녀가 어느 결혼식에 끼고 가려고 보석들을 은행의 안전 금고에서 찾은 후에 생겼습니다. 그녀가 결혼식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은행문을 닫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여인은 보석들을 오래된 면도곽 안에 넣고는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중고품 세일을 위해 물건을 수집하는 친구에게 그 면도곽을 주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그 여인에게 갑자기 아차하며 생각났을 때에는 그 보석들은 이미 누군가에게 10센트에 팔려버린 후였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그녀의 아픔은 에서의 아픔과 비슷합니다. 에서는 큰 가치가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을 갑자기 깨닫는 뼈아픈 경험을 해본 사람입니다 (창 25:29-34). 그의 잘못된 결정과 그로 인한 슬픔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받는 징계를 너무 슬퍼하면 하나님의 훈계하시는 손길 (5절)의 은혜를 잃게 된다고 히브리서 12장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손길은 값진 보석을 그냥 내어 주는 것보다 훨씬 큰 손실입니다.우리는 이러한 불필요한 손실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교훈을 배우고 (11절), 용기를 보이고 (12-13절), 우리의 영적 생명력을 새롭게 (14절)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손길에 응답하면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진실인 것을 알면서 불순종하고 떠났다면 하나님께 엎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고 아직도 당신을 위해 역사하십니다.
죄를 대면한 후에야 죄를 뒤로 할 수 있다.
** 일출의 소망
“안식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 마가복음 16:2
만일 어느 날 밤, 다음날 아침에 해가 다시 뜨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잠자리에 들면 어떨까 생각해 보십시오. 추위와 끝없는 암흑과 지구를 서서히 덮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손길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햇빛이 없기 때문에 식물과 꽃들은 시들고, 나무들은 죽고, 모든 생명체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태양은 매일 떠오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 따스하고 생명을 주는 빛이 지구를 가득히 비춥니다. 매일 오는 일몰의 “죽음”에 이어서 다음날 일출의 “부활”이 오고, 그때마다 우리의 소망은 새로워집니다. 죄와 암흑의 긴 밤은 영원한 천국의 낮에게 굴복한다는 것을 매일 아침 태양의 햇살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아침해가 뜨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우리들의 부활의 확실함입니다. 어두운 죽음의 밤이 주님에게 다가왔고, 주님의 생명 없는 육신은 무덤에 눕혀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 안에 우리 자신들의 생명의 부활의 약속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2).
다음에 해 뜨는 것과 그 햇살이 아침 하늘을 밝히는 것을 볼 때에 당신의 마음을 소망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그것은 당신 자신의 확실한 부활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참 소망 가지고 그날을 기리며 주 다시 오실 때 기쁘게 맞으리 - 찬송가 26장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들의 부활을 보증한다.
** 편안한 잠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 시편 4:8
“당신의 남은 인생은 밤을 어떻게 쉬느냐에 달려있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잠드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 잠 못 이루는 소년은 자기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사람들의 느낌을 표현했습니다. “내 몸은 누워 있는데 마음은 계속 일어나 앉아 있어요!”
당신도 근심으로 잠들지 못한다면 주님에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을 풀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간구한 다음 당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맡기십시오. 다윗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 4:8)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지켜주신다는 것을 알 때에 깊은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한 할머니는 세계 2차 대전중 사람들에게 신경쇠약 증세를 일으킬 정도로 계속되는 폭격 속에서도 놀랍도록 평안하게 잘 견디어 냈습니다. 그런 공포와 위험 가운데에서도 평온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할머니는 대답했습니다. “매일 밤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항상 지켜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편안하게 잡니다. 사실 하나님과 내가 둘이 다 깨어 있을 필요는 없지요!”
그렇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아버지가 당신을 살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안다면 잠을 그냥 자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잠들기 전 당신의 모든 걱정 내려 놓으세요.
조용히 기도하는 팔 위에 당신의 무거운 짐과 걱정을 내어 놓으세요.
하나님께서 잠들지 않으시니 우리는 평안히 잠들 수 있다.
** 당신은 용서를 잘 하십니까?
“서로 인자하게 하며…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에베소서 4:32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숙도를 재보는 것이 가능할까요? 물론 어떤 사람이 하는 기도의 길이나 그 내용으로 영적 성숙도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공중기도를 할 때에도 “듣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듣고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것도 영성을 알아보는 데 절대적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자기가 인정받기 위해서나 죄책감을 덜기 위한 방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가장 확실한 테스트는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과연 어려운 일일까요? 그러나 예수님을 본받아 살 때에는 어떻습니까? 그분을 더욱 닮아 갈수록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가 쉬워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많이 용서해 주셨는가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도 남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엡 4:32).
영국의 목사이며 복음전도자 죤 웨슬리(1703-1791)가 제임스 오글도프 장군과 여행을 하는데 장군이 부하 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 부하가 장군에게 와서 공손하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장군은 “나는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야!”라고 거칠게 대답했습니다. 웨슬리는 장군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습니다. “그러면 장군님, 장군님은 절대로 죄 짓지 않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자신이 남들을 용서하는 것 만큼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시기를 원합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고 하루 하루를 더 행복하게 해주는 작은 방법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용서”라는 한 단어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 때에는 당신이 받은 수많은 용서를 기억하라.
** 주님의 얼굴을 보는 자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마 11:29
덴마크의 조각가 버텔 토왈슨은 예수님의 동상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첫 단계로 그는 아주 부드러운 점토로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든 점토의 모형이 마르고 굳는 동안 작업실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다로부터 밤새 짙은 안개가 밀려와 그 습기로 인해 빚어 놓은 모형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다음날 돌아왔을 때 그는 걸작품이 될 모형이 망가져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축사를 하시는 모양으로 위로 높이 들렸던 예수님의 두 팔이 이제는 우리를 오라고 하시는 듯 앞으로 뻗어 있었습니다. 하늘을 향했던 예수님의 얼굴도 이제는 땅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되었고 얼굴의 일부분은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그 모형을 보던 토왈슨은 갑자기 이것이 궁극적으로 동상의 완성된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에게서 이러한 탄성이 나왔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면 먼저 자신을 낮추고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고 그를 더욱 따르고자 할수록 그의 온유와 겸손을 더 닮기 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요! 우리 중에 진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마 11:29)”은 흔하지 않습니다.
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하시어 교만함과 이기심이 사라지게 하여 주옵소서!
멸시와 미움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노여워하지 않고 다만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는 교만없는 온유함을 주소서.
주님께 겸손을 구할 수는 있으나 자신이 겸손하게 되었다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 잃어야 얻는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 마 10:39
도미노 게임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어렸을 때에는 이것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인기있는 오락이었습니다. 얼마전 한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 어린 손자와 할아버지가 그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의 소년 시절을 기억하면서 추억이 물결처럼 밀려 왔습니다.
도미노 게임에서 특이한 점은 잃어야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기려면 자기가 갖고 있는 도미노 패들을 잃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먼저 자기 도미노를 모두 잃는 사람이 승자가 됩니다. 얻으려면 주어야 하고, 이기려면 잃어야 합니다. 곧, 다 없어져야만 일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득점이 많은 사람이 이기는 야구나 테니스나 다른 여러 경기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도미노에 있어서는 먼저 다 잃는 사람이 승자가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법칙은 “최대한 다 갖는 것” 입니다. 영적인 사람의 법칙은 “최대한 다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우리가 내어 준 것만이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가 어떤 인물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창고에 쌓아 둔 씨앗은 곰팡이가 나고 썩지만, 땅에 “버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로 불어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게 됩니다 (요 12:24).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본이십니다.
주여, 오직 주님의 방법으로 날 빚으소서.
날 사랑하시는 주님 계획대로 매일 매일 인도하소서.
주께서 필요하시면 취하시고, 주께서 주시고자 하시면 주시옵소서.
나의 생명 주의 것이니 쓰시옵소서, 채워주소서.
인생은 테니스 경기와 같다.
당신은 서브를(섬김을) 잘 하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
** 주님 안에서 잠잠히
여러분은 기도할 때에 여러분의 전 존재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되, 완전한 자기 포기와 믿음으로 맡기십시오. 여러분이 그 분의 임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거기서 조용히 머무십시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여러분은 단지 평화 가운데 머무는 것이라는 이 간단한 사실을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외적 감각에 의해 주로 기인하는 많은 격정적 행동들이나 외적 의무, 봉사 같은 일들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아무런 방해 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샨탈 부인이 당시에 주님의 종이라 불리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합니다. "저는 하나님 안에 동화되고 평온하게 된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후에 두려움에게 길을 내어주자, 내 자신이 무가치하고, 이러한 상태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분의 뜻에 의해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제가 고요한 평온함의 자세로 저의 내면을 유지하면 할수록, 모든 것에서 더욱 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결코 저 자신을 보지 않고 다만 눈을 감은 채, 사랑하는 분께 기대어, 그가 인도하시는 길을 보거나 알려고 애쓰지 않고 걸어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저의 생각들을 그 어떤 것에도 고정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 어떤 간청도 드리지 않고, 진실로 조용히 물러가 그 분 안에서 잠잠함만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영성깊은 그리스도인 / 마이클 몰리노스
** 쾌락과 기쁨의 차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요 15:11
세상은 “잠시의 쾌락”만을 줄 수 있지만 (히 11:25), 주 예수께서는 충만하고 영원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요 15:11). 쾌락은 환경에 따라 좌우되지만 기쁨은 내적인 것이어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쾌락은 항상 변하지만 기쁨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적인 즐거움 뒤에는 흔히 우울함이 따릅니다. 그러나 참된 기쁨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근거가 있습니다 (히 13:8).
쾌락을 계속 유지하려면 우리는 쾌락을 주는 것들을 끝없이 찾아 다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쾌락이란 사람의 손에 영원히 붙들려 있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이와 반대입니다. 기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입니다.
쾌락은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지만 기쁨은 자기 희생에서 출발합니다. 자기 만족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공허하게 됩니다. 오늘 한 잔 분량의 쾌락으로 즐거울 수가 있다면 다음 날은 한 통 분량의 짜릿한 흥분이 있어야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 내어 주는 것에 기초를 둡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초점을 두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모두 채워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더 큰 만족을 얻게 됩니다.
오직 주님의 것을 구할 때에만 떠나지 않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면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풍성하고 변치않는 기쁨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항상 첫째로 놓을 때 기쁨이 이어진다.
** 일어나 다시 시작하라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편 37:24
당신은 오늘 낙담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제의 일로 낙심하고 계십니까?
방심하다가 죄에 굴복하여 넘어진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넘어지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넘어진 채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죄에 넘어진 다음 일어서지 않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온전히 회복되어야 만족을 찾습니다. 죄는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죄를 짓습니다.
요한 사도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일 1:8). 그러나 여기에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라”(2:1-2).
당신의 실패를 인정하십시오. 실패를 걱정하지 말고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가 죄와 계속 싸워야 할 것을 아시고 우리가 매일 깨끗해질 수 있는 길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매일의 시작을 새롭게 하십시오. 주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지하게 될 때에 당신은 승리하는 삶이 진정 무엇인지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죄로 넘어졌을 때에도 겸손히 고백하고 돌아서서 당신을 따라갈 때에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성공이란 실패한 것보다 한번 더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폭풍 속의 평안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 시편 37:5
심한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조그만 여객선 하나가 거센 파도 속에서 위태롭게 마구 흔들렸습니다. 가구와 여러가지 움직일 수 있는 물건들은 다 묶어서 고정시켜 놓았고, 승객들은 안전을 위해 모두 자기 침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승객들이 이제 이 배는 파선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침내 살아날 희망이 있는지를 알아보겠다고 작정한 승객 한 사람이 이 배의 선장을 만나보려고 나갔습니다. 벽과 난간을 붙잡아 가며 파도가 후려치는 갑판으로 나가 사다리를 타고 조타실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보니 배가 육지에 거의 가까와 가고 있으며 들쭉날쭉한 바위들 사이를 지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장은 앞에 보이는 잔잔하고 안전한 만에 배를 대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사나운 강풍과 파도소리 때문에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선장은 걱정하는 이 승객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안심을 한 이 남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걱정들 마시오. 모든 일이 잘 되어 갑니다. 선장의 얼굴을 보았는데, 웃음을 띄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폭풍으로 심한 타격을 받을 때 절망감에 자신을 내어주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권자이며 선장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갈 길을 그 분에게 의탁하면 (시 37:5), 혼란 속에서도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폭풍에서 인도해 내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나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위로를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이 항상 가까이 계신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폭풍이 내 영혼을 괴롭게 하여도“내 딸아, 아들아, 두려워 말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주위에 있는 폭풍을 잠잠케 하실 수도 있지만 당신 속에 있는 폭풍을 잠잠케 하실 때가 더 많다.
**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0:26
미국 독립전쟁 중에 어느 하사관이 부대 건물을 보수하는 일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무로 된 무거운 대들보를 올려놓기 위하여 자기 수하의 병사들에게 고함치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이 대들보를 제자리에 들어 올려 놓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남자가 서서는 지휘자에게 왜 병사들을 돕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임금님과 같은 거드름을 피우며 “네, 저는 병장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은 “당신이 병장이군요. 내가 몰라 보았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자를 벗고 허리 굽혀 절을 하면서 “병장님, 양해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낯선 사람은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병사들과 함께 애써 무거운 들보를 들어 올렸습니다. 일이 끝난 후에 그는 돌아서서 말했습니다.
“병장님, 이와 같은 일이 또 생겨 사람 손이 모자라게 되면 사령관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제가 와서 두 번째로 도와 드리지요.”
병장은 벼락 맞은 사람처럼 놀랐습니다. 자기에게 말하는 사람은 바로 워싱턴 장군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것으로 그 사람의 위대함을 측정합니다. 주 예수께서 그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영광을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려고”(마 20:28) 오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크게 보이려면 섬겨야 합니다!
가서 열심히 일하라, 가진 것을 다 쓰고, 자신을 내어주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라.
이것이 주인이 가신 길이니 종이 또한 따를 길이 아닌가?
진정한 위대함은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가 아니라 섬김으로써 얻어진다.
** 무명의 용사들
“너는 뉘게 속하였으며 어디로서냐” - 사무엘상 30:13
성경에는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서 우리는 적의 군대가 퇴각할 때 그 중에서 낙오된 한 젊은이를 다윗의 병사들이 발견하는 것을 봅니다. 그 애굽인 종의 이름은 없으나 다윗의 가족을 구출하는데 도움이 되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자기의 점심인 보리떡과 물고기를 내어 놓아 예수님께서 크게 늘리어 수천 명을 먹이게 하셨던 한 어린 소년과 (요 6:9),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타고 들어가셨던 나귀 새끼의 주인과 (눅 19:33),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에 식사하셨던 집의 주인(22:11)을 생각해 봅니다. 또한 바울의 목숨을 살린 한 청년이 있습니다 (행 23:16-22).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남들에게서 아무런 칭찬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실하게 기도하며, 희생적으로 헌신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내하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어머니들이 말없이 자기들의 가족을 보살피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동료들과 이웃에게 용기를 내어 예수를 증거합니다. 그들이 지금 이땅에서는 이름이 없고 칭찬이 돌아가지 않을지라도 천국에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입니다 (마 19:30).
남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내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상급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힘쓰십시오.
그분은 당신이 신실하면 어느 날 상급을 받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유명한 것보다 신실한 것이 낫다.
** 존속들을 살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 시편 145:20
처음으로 기차 여행을 하는 한 여자 아이가 기차로 강을 몇 개나 건너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강물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고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기차가 강에 가까이 갈 때마다 다리가 있어서 안전하게 건너갈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 개의 강과 냇물을 안전하게 건너자 아이는 안도의 숨을 쉬며 자리에 편히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걱정하지 않을래요. 누가 우리를 위해서 다리를 다 만들어 놓았네요!”
우리가 깊은 시련의 강물과 슬픔의 시내를 만나게 될 때에도 하나님이 그 은혜 안에서 “우리를 위해 언제나 다리를 마련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이나 걱정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잘 알 수는 없으나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위하여 필요한 것을 주시며 어려운 곳을 지나 우리를 건너편으로 데려다 주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필요함을 채워주실지 알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형편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시편기자처럼 외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리로다”(시 145:17, 20).
우리는 닥쳐올 일을 걱정하지 말고 주님이 우리를 보살피시기 위해 옆에 계신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지금 나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고 시력도 매우 약하지만 무슨 일이 생겨도 하나님만 믿고
모든 것을 맡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에는 또한 필요한 것도 주신다.
** 이슬 방울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호세아 14:5
어느 여름날 아침이었습니다. 아침 햇살이 우리집 정원에 쏟아져 내렸습니다. 전날 저녁에는 뜨거운 열기와 가뭄 때문에 어린 옥수수의 잎사귀들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는 이삭들이 싱싱하고 반듯하며 잎마다 반짝이는 이슬 방울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밤 사이 차가워진 공기가 습기를 이슬 방울로 만들어 시든 채소들이 다시 싱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것이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실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에 이슬과 같으리니”(호 1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위축되고 근심의 무거운 짐으로 눌리거나 죄책감을 지니고 다닐 때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이슬과 같이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마치 이슬이 고요한 밤중에 내려 식물을 촉촉이 적셔주듯,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와 능력을 주는 신선한 이슬은 우리가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조용한 시간 중에 나타납니다.
어찌하여 이렇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약하고, 시들고, 무기력할까요?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며 매일 하나님과 홀로 만나는 시간을 내는 데에 게을리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이슬 방울로 원기를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함을 흠뻑 들이키십시오.
의심이나 두려움의 여지를 남겨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순수하며 진리입니다.
또한 신선하고 시원하고 깨끗합니다.
영혼이 새 힘 얻으려면 주님 말씀의 샘에 와 마시십시오.
** 말로 할 것인가 행동으로 할 것인가?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 사도행전 22:15
한 재능 있는 젊은 그리스도인 화가가 의지할 곳 없이 폭풍우 속에 있는 한 여인과 아이를 그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크게 감명을 느끼며 붓과 화구를 내려놓고는 “나는 버려진 사람들을 그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찾아 나설 것이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곧 도시의 빈민가에서 일하면서 사역을 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젊은 영국의 화가는 바로 우간다와 아프리카 동부지역에서 20년간 선교사로 섬긴 알프레드 로버트 터커(1849-1914)입니다.
우리는 선교나 전도에 대해 언제나 말만 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현재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호레이스 부쉬넬 목사(1802-1876)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헌금이나 선교하는 일에서 빼 드리겠습니다. 곧, 세상은 구원을 잃지 않았으니 구세주도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 선교사들이 우리 조상 때에 우리에게 오지 않았었다면 하면서 우리는 괜히 믿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 가인과 같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묻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에 대하여 나중에 하나님과 계산할 것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45) 라는 마지막 심판의 형벌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영혼이 죄로 인해 비참한 길에 떨어지는 것을 주여, 나를 도와 볼 수 있게 하소서.
방황하는 그들이 돌아오도록 사랑하고 기도하고 찾아가도록 나를 도우소서.
주님이 가라고 말씀하시면 우리가 어찌 못 간다 말할 수 있을까?
** 주님을 닮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로마서 8:29
하나님의 관심사는 단지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하여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롬 8:29)과 같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온 천국을 그와 꼭 닮은 사람들로 채우시기로 작정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압니다 (요일 3:2). 그러나 주님을 닮아 가는 과정은 지금 이 세상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는 말씀의 “모든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것은 시험과 시련, 징계와 정화,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고난을 포함합니다. 주님을 닮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만 하는데 그것은 희생과 고난의 길입니다 (히 2:10).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기꺼이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과 갈보리 언덕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고난과 거부를 기꺼이 견디어야 합니다 (요 15:18-21).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길은 또한 우리를 빈 무덤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팔에까지 이어집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또한 주님의 부활을 함께 나눌 것이라고 바울사도는 말했습니다 (롬 6:5). 그리고 “만일 우리가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딤후 2:12)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사용하시어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십니다.
구주와 함께 매일 동행하며
그의 말씀을 틀림없는 안내자로 믿을 때
참으로 주님 닮기까지 성숙하게 되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주님을 닮아 가는 길은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이다.
** 십자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갈라디아서 6:14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수백년 전까지 십자가는 고문과 사형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었습니다. 예를 들어 주전 519년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Ⅰ세는 바벨론에서 정치범 3천명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후에 로마는 로마시민이 아닌 사람들과 노예들을 처형할 때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것으로 (벧전 2:24) 십자가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에서 구하시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골 1:20-21).
바울사도는 이런 십자가의 깊은 뜻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만족과 자부심을 가질 만한 많은 일들을 해 왔습니다 (고후 11:16-12:13). 그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6:14)라고 썼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알 때에 우리는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 가장 큰 것입니다!
부활하신 구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를 믿는 믿음으로 겸손히 나아오라고 초대합니다. 구주되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사실을 믿으면 우리가 완전한 용서를 받게 됩니다.
찬송가를 지은 호라티우스 보나가 “할렐루야 십자가여!”라고 외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십자가 밑에 둘러 서서 우리 위해 산 제물 되신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살아계신 왕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십자가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진 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