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성녀 안젤라 메리치(1470/1474-1540년)는
일찍이 이웃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특별히 청소년들의 기도와 신앙을 지도하는 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는 뜻을 같이하는 12명의 동정녀들과 함께
소녀들의 교육에 투신하는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고
초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가톨릭 여성 교육을 표방한
첫 수도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수도회는 성녀 우르술라의 이름을 따서
‘우르술라회’라 불린다.
이 수도회는 왜 성녀 우르술라의 이름을 땄을까?
중세 때부터 교회에 전해내려 오는,
다분히 혼란스럽지만
꽤나 인기 있던
이야기 모음집이 있다.
교회의 전설이라 할수있는 ‘황금 설화집’(Golden Legend,
‘황금 성인전’
또는 ‘황금 전설’이라고도 불린다)인데,
13세기에 이탈리아의 한 수도자가 엮은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성녀 우르술라 이야기도 있다.
중세 때에 영국의 한 왕에게
우르술라라는 딸이 있었다.
왕은 이교도 왕과 우르술라를 혼인시키기로 약속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우르술라는 깜짝 놀랐다.
일찍이 하느님 앞에서 동정을 서약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우르술라가 아버지를 찾아갔다.
결혼하기에 앞서 한 가지 청이 있는데
꼭 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왕은 선뜻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겠다며 승낙했다.
우르술라는 친한 친구들 10명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르술라는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친구 한 사람당 1천 명씩 수행할 처녀들을 모아서
함께 가고자 한다고 말이다.
왕은 한참을 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의아하게 여겼으나,
결국에는 승낙했다.
이내 1만1천 명의 처녀들을 구하기 위해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마침내 1만1천여 명의 처녀들이 10척의 배에 오르자,
우르술라는 작별을 고했다.
영국을 떠난 우르술라 일행은 3년 동안 여행을 했다.
독일의 쾰른, 스위스의 바젤, 이탈리아 등이다.
성녀 우르술라가 이끄는 1만 1000명의 처녀들은
로마에서 교황 치리아쿠스를 만났다.
교황은 주님의 천사로부터 이들과 함께
순교하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교황은 일행 중
세례 받지 않은 모든 이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교황청을 아메토라는 사람에게 맡기고
처녀들의 순례길에 합류하여 독일 쾰른으로 향했다.
교황청을 비웠기 때문에 치리아쿠스는
이후 교황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한편 1만 1000명의 처녀들이 쾰른에 도착하니
도시는 당시 야만족인 훈족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이 무렵 로마제국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
제국의 방위선이 곳곳에서 뚫리는 상황이었다.
이들 훈족은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상을 저지르는
포악한 종족이었는데
1만 1000명의 처녀 일행을 보고는
마치 늑대가 양을 잡아먹듯이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우르술라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는데,
아름다운 우르술라를 본 훈족의 왕자는
성녀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하자 화살을 쏘아 성녀의 목숨마저 앗아갔다.
마침내 우르술라는
하느님께 약속한 동정서원을 지키고 순교한 것이다.
따라서 일행은 모두 순교하였다.
그 시절에 1만1천여 명의 동정녀들이
함께 여행을 떠났다든지
그들이 한꺼번에 순교했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데는
그럴 만한 곡절이 있었다.
이야기는 고대 로마의
묘비 하나를 발견한 데서 시작된다.
이 묘비에는 우르술라라는 순교자를 포함한
11M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XIMV).
문제는 바로 이 구절 가운데 M이란 글자에서 비롯되었다.
M은 라틴어로 ‘순교자’(martyr)를 가리키기도 하고
‘1000’(mille)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묘비를 발견한 수도자는
이 글자를 1000으로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11명의 동정 순교자’(11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대신에
‘11000명의 동정녀’(11 Millia Virgines)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편 성녀 우르술라는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교회의 전례력과 성인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뒤
교회가 전례를 개혁하고 전례력도 손질했다.
그리하여 1969년에
생애나 행적이 확실하지 않은 성인들
200여 위를 정리했다.
이때 10월21일에 축일을 지내며 기억하던
성녀 우르술라도
제외된 성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교육 사도직을 수행하는 우르술라회는
여전히 성녀의 이름을 딴 명칭으로 활동 중이다.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아마도 성녀 우르술라에게서
어떤 관련성을 느꼈거나
또는 공감대를 이루었을 것이다.
안젤라 메리치는 ‘황금 설화집’이 소개된 지
250년쯤 지난 시대에 살았기에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알았을 것이다.
성녀 우르술라가 10명의 동정녀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 일이며,
동행한 1만1천 명의 동정녀들을 가르쳐서
모두가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도록 설득한 일을
속속들이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안젤라 메리치 자신은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고
이 수도회를 통해서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성녀 우르술라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천주교부산교구 "오늘의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