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3(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9-15)
스위스의 어느 마을에 조용한 숲이 있었습니다. 이 숲에는 산속의 틈새에서 흘러 나오는 샘물이 있었고, 이 샘물은 조그만 호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호수는 이 마을의 수원지였고, 이 호수를 관리하는 노인이 한 분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시 의회에서 고용하였고, 아주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정기적으로 호수 주변을 돌며, 나뭇잎들과 나뭇가지들을 정리했고 물의 흐름을 막아 호수를 흐리게 하는 침전물들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깨끗한 호수로 인해 그 마을은 점차 사람들의 좋은 휴식처로 알려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을을 찾게 되었습니다. 호수에는 우아한 백조가 떠다녔고, 깨끗한 물레방아들이 계속 돌았습니다. 농토는 비옥했고, 주변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게 그 노인은 오랫동안 호수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의 예산 담당 시의원이 자신이 잘 모르는 샘물지기 노인에게 월급이 지급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매일 호수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다니는 노인에게 월급이 지급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동료 의원들에게 그 노인에게 월급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그를 해고할 것을 결의 하였습니다. 모든 동료의원들이 찬성하였습니다.
노인이 호수를 지키는 일을 그만둔 후에도, 호수는 별 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1달여가 지나갔습니다. 가을이 되었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나무의 잔가지들도 부러져 호수로 떨어졌습니다. 그 것들이 호수의 물의 흐름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호수의 물빛이 약간 누르스름한 빛을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그 빛이 더욱 진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다음 주에는 끈적끈적한 막이 호수위에 생기기 시작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호수의 백조도 어느 샌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물레방아들도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 하더니, 결국은 서버리고 말았습니다. 관광객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 호수의 물을 식수원으로 삼던 마을 사람들에게 피부병이 생기고 질병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당황한 시의회는 특별회의를 소집하였고, 자신들이 얼마나 큰 실수를 하였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그 샘물지기 노인을 다시 고용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호수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기도문의 본문 내용 중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관련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 내용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우리들에 의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며”로 풀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원래부터 거룩함 그 자체이십니다. 누군가 그분을 거룩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란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분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해서 거룩성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 것은 우리의 삶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 그 것이 곧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부른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흔히 그 아들로 인해 칭찬의 소리를 듣거나 또는 욕을 먹기도 합니다. “저 아이가 아무개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착한 일을 하고 나서 “ 착하기도 하구나! 누구 아들이냐?” 라고 할 때는 칭찬의 말입니다. 그런 아들을 둔 아버지는 그 아들로 인해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남의 집 창문을 깨고 도망가다 잡혀 “ 누구 아들이냐?”라고 묻는다면 이는 아버지가 욕을 먹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로 인하여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광도 받으시고 그렇지 않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요셉이 자신이 영광을 받을 수 있을 때마다,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였고 그 것을 통하여 보디발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은 보디발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요셉이 바로 앞에서 꿈을 해몽 할 때에도, 그는 하나님이 바로에게 꿈을 내려주었다고 말씀 하시고, 그 꿈을 해석 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지만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불변이지만 아들인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하고, 영광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아들을 둔 부모님은 TV에서 환한 얼굴로 인터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받기 바쁩니다. 그러나 부대를 탈영하여 인질을 잡고 위협하는 아들을 설득하러 나온 부모님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남들의 얼굴을 제대로 못보고 안절부절합니다. 그 얼굴에 근심이 가득합니다. 금메달 딴 아들을 둔 부모님의 인격이 더 교양 있고, 탈영병 아들을 둔 부모님이 덜 인격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두 부모님의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냐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도 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국회의원들이 요사이 대선자금 문제로 감옥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 중에는 어느 신학대학교의 총장을 지내신 분도 계십니다. 이런 사건들이 신문에 날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또 어떤 운동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인터뷰를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바로 하나님이 우리 믿는 자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도 또는 부끄러움을 당하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 합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개망나니 같은 짓을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내일 예수님이 재림 한다고 하면, 어느 사람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거룩하게 생활 하려 합니까? 먼저 주일 성수를 잘하여 거룩하게 살려고 합니다. 주일 아침 예배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득이 주일날 어느 곳을 가야하기 때문에 주일 예배 시간을 지킬 수 없다면, 새벽예배라도 드리거나, 1부 예배를 드리고 떠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귀중히 여기고 그 시간에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지키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거룩하게 사는 것임은 맞습니다. 그러나 주일 저녁예배는 어떠합니까? 주일 저녁예배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천사들께 예배하는 것입니까? 주일 아침예배 참석 인원의 약 1/3만 나와 드리는 것이 한국 교회의 저녁 예배입니다. 주일 아침예배는 소중하고, 저녁 예배는 덜 소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일 저녁 예배만 해도 그 중요성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요성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중요성에서 말입니다. 주일 저녁 예배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안 나옵니다. TV 프로그램 때문에도 못나오고, 친구들과의 약속시간 때문에도 못나옵니다. 하다못해 저녁식사가 늦어서도 못나옵니다. 이런 것은 사실 못나오는 것이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안나오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예배를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구약에 보면 매일 제사를 드립니다. 월초에 제사를 드립니다. 10일마다 제사를 드립니다. 월 말에 제사를 드립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아침, 저녁으로 드립니다. 지금보다 결코 예배드리는 시간이 적지 않습니다. 그만치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좋아하십니다. 저는 지난 1학기에 학교 기숙사에 있으면서 제일 좋았던 일이 예배를 자주 드린 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드립니다. 11시에 낮 예배를 드립니다. 저녁에 기숙사에서 잠자기 전에 예배를 드립니다. 매일 세 번씩 예배를 드렸습니다.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예배하는 시간이 가장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시간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이웃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망나니였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사람이 변화되어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노인들을 공경하고, 어려운 이웃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적이 없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합니다. “ 저 사람 변했어. 예수 믿더니 너무나 달라졌어.” 이럴 때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들에 의하여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이유를 사도행전 2장 4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바로 믿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칭송을 받으니, 믿든 사람들의 수가 늘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담비는 가죽이 굉장히 비싼 동물인데, 사냥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담비가 사는 굴을 발견하고 그 주위에 오물을 흩어 놓으면, 담비는 자신의 몸이 더러워지는 것을 싫어하여 안절부절하다가 결국 잡힌다는 것입니다. 담비가 무슨 절개를 지키려고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우리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삶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곳에서 우리의 목숨을 버려 주님의 이름의 거룩성을 지켜야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옥중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분 주변의 많은 목사님들이 신사참배는 국가행사이지 종교행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신사참배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주기철 목사님은 주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멸시를 당하는 그 때, 자신의 목숨을 버려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처음 예화에서 샘물지기 노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별 의미 없는 노인 같았지만 그가 그의 일을 멈춘 뒤에야 모든 사람들이 그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한 샘물지기 노인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나라의 도덕을 세우고,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