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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응경(裵應褧)
[본관] 성주(星州)
[문과] 선조(宣祖) 9년(15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6위(09/34)
[생원] 선조(宣祖) 6년(157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生員) 3등(三等) 18위(48/100)
[생졸년] 1544년(중종 39)~1602년(선조 35) / 향년 58세
[거주지] 성주(星州)
조선시대 순천부사, 나주목사, 대구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회보(晦甫), 호는 안촌(安村). 증 제용감정(贈濟用監正) 배윤문(裵潤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형조참의 배유(裵裕)이고, 아버지는 배무원(裵茂元)이며, 어머니는 서산정씨(瑞山鄭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정희장(鄭希章)의 딸이다. 정구(鄭逑)와 교유하였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576년(선조 9)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랑을 거쳐 청도군수로 재직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항하여 싸웠다. 군사 1,000명을 모아 ‘야격군(野擊軍)’이라 하고 박경전(朴慶傳)을 대장(代將)으로 삼아 왜적 수백 명을 포획하였다. 이때의 전공으로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1595년(선조 28) 순천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의 천거로 나주목사가 되어 금산을 수비하였다.
이때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요청으로 후퇴하는 적의 퇴로를 막아 분쇄하려 하였다. 그러나 감사 황신(黃愼)의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우찬성 심희수(沈喜壽)와 부마(駙馬) 서경주(徐景霌) 등의 상소로 곧 석방되었다. 1601년(선조 34) 대구부사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였다.
그 뒤 영천(榮川)에 머물며 김륵(金玏)·김우옹(金宇顒)과『반야심경(般若心經)』을 강론하는 등, 제현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일찍이 유성룡과도 교유하였는데, 배응경의 박학함에 유성룡이 탄복하였다 한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안촌집(安村集)』이 있다.
자료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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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조 학사집(鶴沙集)
증 예조참판 행 나주목사 안촌 배공 행장(贈禮曹參判行羅州牧使安村裵公行狀)
고조(高祖) 배혜(裵惠)는 중직대부(中直大夫) 북청도호부사(北靑都護府使)이고, 부인 숙인(淑人) 성씨(成氏)는 관향이 창녕이다.
증조(曾祖) 배윤문(裵潤文)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추증되고, 부인 숙인 나씨(羅氏)는 관향이 수성(壽城)이다.
조부(祖父) 배유(裵裕)는 통정대부 형조 참의에 추증되고, 부인 김씨는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고 관향이 의성이다.
부친(父親) 배무선(裵茂先)은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되고, 선비(先妣) 이씨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고 관향이 흥양(興陽)이고, 후비(後妣) 정씨(鄭氏)는 정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제릉 참봉(齊陵參奉) 정희장(鄭希章)의 딸로 관향이 서산(瑞山)이다.
공은 이름이 응경(應褧)이고, 자가 여현(汝顯)이었다가 회보(晦甫)로 고쳤다. 배씨(裵氏)는 관향이 경주이다. 중간에 성주 남산리(南山里) 안촌(安村)으로 이거하였기 때문에 안촌(安村)이라 자호(自號)하였고,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영천 망동(望洞)으로 이주하였다.
공은 가정(嘉靖,명 세종 연호) 갑진년(甲辰年, 1544, 중종 39) 2월 3일에 태어났다. 9살 때 부친을 잃어 모부인(母夫人)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과 함께 수업을 받았다. 하루는 스승이 ‘바둑〔棊〕’으로 시를 지으라고 명하자 공이 곧바로 “이기려 이기려고 두 사람이 이기려 하네.〔欲勝欲勝兩欲勝〕”라 하였고, 한강이 “이기려 이기려고 비책을 내네.〔欲勝欲勝秘計生〕”라 하였다.
스승이 둘 다 기이하게 여겼다. 11세 때 한강과 함께 관문(官門)에 나아가 강할 적에 공은 잘 외웠으나 한강이 잘 외지 못하자 사또가 상벌을 내리려고 하였다.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정모는 문의(文義)를 탐구하느라 독송(讀誦)할 겨를이 없었으니 시험해 보십시오.”라고 하였다. 과연 그러하자 사또는 정구 선생이 학문에 정밀함을 가상히 여기고 공의 영민함을 칭찬하였다.
16세에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고, 만력(萬曆,명 신종 연호) 임신년(壬申年, 1572, 선조 5)에 향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계유년(癸酉年, 1573, 선조 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병자년(丙子年, 1576, 선조 9)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권지(權知)에 제수되었다. 8년 동안 외직에 있으면서 두 번 교수(敎授)가 되었다. 장차 예문관에 천거되었으나 마침 개인적으로 원한을 품고 공을 미워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끝내 중단되었다.
을유년(乙酉年, 1585, 선조 18)에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이어서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겸 기사관(記事官)에 배수되었다. 병술년(丙戌年, 1586, 선조 19) 겨울에 황해 도사 겸 기주관(記注官)에 임명되었는데, 마침 관찰사가 교체되어 일도(一道)의 장부와 문서가 구름처럼 쌓였으나 공은 여유 있게 재결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588, 선조 21)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을 때에 어떤 늙은 아전이 스스로 말하기를 ‘족녀(族女) 중에 궁에 들어간 이가 있소. 이전에 낭관(郎官)이 나에게 사적으로 뇌물을 준 사람에게 번번이 상을 내린 일이 있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노하며 “대궐 안에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 말하고 마침내 늙은 아전에게 장(杖)을 치자 여러 아전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판서 이양원(李陽元)이 듣고서 경탄하며 말하기를 “이 일은 본조(本曹병조)에서 본받아야 할 뿐 아니라 조정에서 표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을에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황해도의 여러 고을을 순시하니, 공의 위엄과 명성이 크게 알려졌다.
겨울에 다시 황해도를 암행(暗行)하라는 명을 받들어 가서, 한 고을의 수령을 내쳤는데, 수령은 곧 공과 이웃에서 잘 지내던 사람이었다. 기축년(己丑年, 1589, 선조 22)에 한성부 서윤(庶尹)이 되었으나 외직을 청하여 서천 군수(舒川郡守)가 되었다. 경인년(庚寅年, 1590, 선조 23)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고, 신묘년(辛卯年, 1591, 선조 24) 겨울 청도 군수(淸道郡守)에 임명되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에 왜구가 승승장구하여 여러 고을들이 차례로 함락되자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한 고을의 수령은 한 고을을 지키는 책임이 있으니, 어찌 감히 목숨을 바치지 않겠는가?”라 하고 모친과 처자를 두 동생에게 맡기고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쌓아 성을 수리하여 청도를 지켰다.
마침 절도사가 공을포망장(捕亡將)으로 삼자 말을 달려 밀양무흘역(無屹驛)으로 가서 도망병을 참수하여 조리돌렸다. 얼마 뒤 밀양성이 함락되어 끝내 임소로 돌아오니 성에 머물던 군졸들이 이미 흩어지고 무기가 흩어지고 사라져 빈 성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하여 인근 고을의 원병을 청하자 순사는 공이 빈 성을 지키기가 어려울까 염려하여 급히 인근 고을에 원병을 보내도록 하고, 또한 공에게 성 밖에 진을 치고 상황에 따라 대응하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왜적들이 이르자 공이 바야흐로 서문 밖에 진을 치고대장(代將)에게 왜적의 선봉을 화살을 쏴서 죽이게 하였다.
왜적들이 조금 물러났으나 조금 있다가 적이 아군이 외롭고 약하며 외부의 원군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여 아군이 대부분 전사하였다. 물러나 향인촌(向仁村)에 진을 치고, 다시 순사에게 보고하여 원병을 청하자 순사가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정예병을 이끌고 막하로 오도록 하였으니 대개 적의 예봉을 피하게 한 것이었다.
공이 순사를 뵙고 목숨을 바치더라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아뢰고서 다시 임소로 돌아와 수천의 병사들을 모집하였고, 그 가운데 용력이 뛰어난 자들을 뽑아 별도로 한 부대로 만들고 야격군(夜擊軍)이라 불렀다. 한편으로는 순사 및 안집사(安集使)에게 보고하여 화약과 총통(銃筒)을 받고 또한 영덕(盈德)ㆍ영해(寧海) 등의 지역에서 화살대〔箭竹〕를 취하고, 한편으로는 병사(兵使)의 분부에 따라능장(稜杖)을 많이 만들고, 창칼 등의 기물은 아군이 왜적의 진영에서 획득한 것을 수습하여 사용하니 무기가 마침내 대강 완비되었다. 그리고 글을 지어 경내의 사자(士子)들을 효유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백성은 세 분 덕택에 살아가니 똑같이 그분들을 섬겨야 한다. 군사부(君師父)의 원수와는 한 하늘을 이고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 고을은 길가에 위치하여 탕패(蕩敗)가 극심하니 많은 집이 잿더미가 되고 수많은 해골들이 드러나 있어 자식이 아버지를 지키지 못하고 지아비가 아내를 지키지 못하였으며, 향교의 제기(祭器)와 제복(祭服)이 똥거름 속에 뒤섞임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고 임금께서 용만(龍灣의주)에 머무신 지 이제 몇 날 몇 달이 되었는가? 그런데 아직 한 사람도 주먹을 불끈 쥐고 창을 휘둘러 군사부(君師父)의 치욕을 설욕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아아! 충의가 격분하는 곳에는 기운이 반드시 따른다. 게다가 사자(士子) 가운데 어찌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자가 없겠는가?
지금 천병(天兵명군(明軍))이 이미 장단(長湍)에 이르렀고, 우리 성상께서도 몸소 군대를 이끌고 뒤따라 많은 병사들의 의기를 감발(感發)하게 하고 있다. 원컨대 여러 군자들과 함께 창의를 약속하여 차라리 검 끝에 찔린 고기가 될지언정 군사부의 원수를 차마 잊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담대한 기백으로도 많은 적들의 예봉을 꺾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온 고을이 분격하였고, 또 먼 곳에서부터 와서 모여든 사람들도 있었다.
공이 그들 가운데 뛰어난 자들을 가려 뽑고박경전(朴慶傳)을 대장(代將)으로 삼았으며, 안집사(安集使)가 또 군관박경신(朴慶新)을 보내어 그를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요해처에 나눠 주둔하면서 왜적의 형세를 염탐하여 그들의 해이한 틈을 타서 공격하였다. 그래서 왜적의 진영에서는 간혹 화들짝 놀라면서 “야격군이 쳐들어왔나?”라고 하였다.
왜장(倭將) 중에 감사(監司)라고 자칭하는 자가 병사들을 이끌고 자인(慈仁)으로 향하자 공이 말하기를 “자인과 우리 고을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이다. 지금 그곳의 창고 속에는 또 쌓아둔 곡식이 많으니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 하고, 본현(本縣자인)의 도장(都將)최문병(崔文炳)에게 병사를 보내어 힘을 합쳐 방어하도록 하였으나 최문병이 도망쳤다.
그러자 또 본군〔청도군〕의 영장(領將) 정광필(鄭光弼)을 보내니, 힘껏 싸운 지 3일 만에 적들이 물러갔다. 이로부터 군대의 사기가 더욱 성하여 전후로 잡아서 참수한 왜적의 수급이 200여 급에 이르렀다. 당시에 대구와 밀양 등 예닐곱 고을들이 적에게 함락되었지만 본군만은 잿더미만 남은 가운데에서도 다시 성을 온전하게 하였으니, 청도군 동쪽은 이에 힘입어 보전되었고 피난 갔던 사민(士民)들이 모두 돌아왔다.
공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는 부서를 설치하고, 백성들에게 밭을 갈고 종자를 심게 하니 백성들이 부모라고 불렀다. 대개 여러 진영에 오가는 공문서는 반드시 왜적의 수중을 출입하였으나 오감에 막힘이 없었다. 비록 이웃 고을들의 형편일지라도 모두 낱낱이 탐문하여 보고하니 여러 진영이 모두 믿고 의지하여 간혹 군량과 무기를 차출하여 달라고 요청하더라도 곧바로 마련해주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전승의 공적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휘하의 사람들에게 돌리고 자신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장박경신(朴慶新)이 공에 앞서승질(陞秩)하여 밀양부사가 되었고, 공에게는 다만 군기시 정(軍器寺正)의 자급(資級)을 주고, 공에게 이어서 청도군의 일을 살펴보게 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593, 선조 26)에모친상을 당하고 을미년(乙未年, 1595, 선조 28)에 상을 마친 뒤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충청 도사(忠淸都事)로 전직되었다. 공이 도성에 들어가기도 전에 감사의 장계로 인해 조정에서 숙배(肅拜)하는 예를 생략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공이 마침내 대궐 아래로 나아가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신은 신묘년(辛卯年, 1591, 선조 24) 겨울 청도 군수에 임명되어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에 왜구가 침략하는 변고를 만나 2년 동안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의 소굴에서 아홉 번 죽었다 열 번 살아나서 마음과 힘이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임금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계사년(癸巳年, 1593, 선조 26)에 모친의 상에 달려갔습니다.
금년[1595, 선조 28] 7월에 이미 27개월의 복을 마쳤으나 호조 정랑에 임명한다는 명이 7월 19일에 갑작스레 내려졌다가 충청 도사에 임명한다는 명이 8월 7일에 이어서 내려졌습니다. 신이 명을 듣고 바로 길에 올라 도성에 들어왔는데 큰 난리를 겪은 나머지라 성곽은 의연하나 저자와 조정〔市朝〕이 변하고 종묘사직은 터만 남았습니다.
불초한 소신이 또한 욕되게도 지난날 조정에서 벼슬을 했던지라 아득히 당시의 일을 생각해보니 응당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돌이켜보니 미천한 신의 자취로는 스스로 망극한 지위를 따를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대궐 아래에서 배알하여 신의 가슴 가득한 정성을 풀고자 하였으나 숙배를 생략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갑자기 신의 소원이 막히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대궐을 바라보며 장차 나아가려다가 주저하고, 스스로 만 번 죽어야하는데도 살아남은 몸을 한탄하며 임금을 가까이서 뵐 명분이 없습니다. 신은 나이가 이미 예순에 가깝고 묵은 병이 극심하고 근력이 이미 다하여, 다른 날에 다시 도성에 들어오는 것은 기필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눈물이 먼저 흐릅니다. 엎드려 숙배를 생략하라는 명을 거두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비답하기를 “지금 상소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대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또한 이미 도성에 왔으니 마땅히 속히 사은숙배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어서 본도〔충청도〕의 순무 어사(巡撫御史)를 겸직하도록 명하고 공에게 군정(軍情)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공이 임소에 도착한 지 겨우 몇 달이 지나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에 왜적을 토벌한 공적으로 비로소 통정대부에 올랐다. 유장(儒將)의 천거와 상신(相臣)의 천거로 순천 부사(順天府使)가 되었는데 조정에 와서 숙배하는 것을 생략하고 부임하였다. 다스림이 한결같이 법전을 준수하자 순천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옥천서원(玉川書院)에 나아가 경내의 사자(士子)들을 모아서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어 매달 2번 강학하였다. 당시에는 학교가 폐이(廢弛)해진 상태라 인근 고을에서 소문을 듣고 기뻐하며 와서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 강학을 권면하는 여가에 장사(將士)들을 모아 날마다 돌아가며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성적에 따라 상벌을 시행하였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상공(相公)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순천부(順天府)에 이르러 공에게 말하기를 “순천부의 다스림은 응당 여러 고을의 본보기가 된다. 지금부터 인근 고을 수령들 가운데 만약 불법을 저지른 자들이 있으면 원한을 사는 것을 헤아리지 말고 들은 대로 보고토록 하라.”라고 하자, 여러 고을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에 병으로 체직되자 사민(士民)들이체부(體府)와 순영(巡營)에 글을 올려 유임을 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함께 비석을 세워 경모의 마음을 담았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때 나주(羅州)에 결원이 생겼다. 임금이 나주는 관방(關防)의 중요한 곳인데도 적임자를 뽑지 못하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이 영상이 되어 공을 천거하였다.
임금이 순천 부사의 해유(解由)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교하자 서애가 아뢰기를 “이 사람이 아니면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꼭 해유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라 하여 마침내 공을 나주 목사에 임명하였다. 공은 미리 금성산성(錦城山城)을 수리하여 왜적을 방어하였다.
가을에 한산도(閑山島)에서 아군이 패하고 감사 황신(黃愼)이 먼저 담양성(潭陽城)에 불을 지르고 퇴각하자, 금성산성의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무너져 달아났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외로운 성을 지키며 떠나지 않았다. 마침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격문으로 공을 불러 함께 일하자고 요청하여 공이 어길 수 없었다.
그러다가 끝내 황신의 무고하는 장계로 잡혀가게 되자,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와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가 “공은 평소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사람으로 일컬어지니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극언을 하여 풀려나서 영천으로 돌아와 한가로이 지낸 것이 대개 6년이었다.
경자년(庚子年, 1600, 선조 33)에《퇴도선생문집(退陶先生文集)》의 간역(刊役)이 비로소 끝나자 백암(柏巖) 김륵(金玏)과 함께 도산서원(陶山書院)에 가서 고성제(告成祭)에 참여하고, 이어서 백암과 함께 청량산(淸涼山)에 들어가 며칠 동안 두루 탐방하고 돌아왔다. 겨울에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에 갔다가 부호군(副護軍)에 배수되었으나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리고 곧장 귀향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 선조 34)에 대구 부사(大丘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대구부가 감사의 감영이 되었다. 임인년(壬寅年, 1602, 선조 35)에관압사(管押使)에 배수되어 대궐로 갔으나 이질이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판서 황진(黃璡)이 공에게 병으로 면직을 청하는 글을 올리라고 권하자 공은 “국록을 먹는 자는 응당 국사(國事)에 죽어야 하니, 저는 비록 숭례문(崇禮門) 밖에서 죽더라도 유감이 없습니다.”라 말하고 와병 중에도 행장을 꾸렸다. 예조에서 사실대로 아뢰어 체직되었다.
병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8월 16일 지전(紙廛)집에서 임종하니 향년 59세였다. 아들 상익(尙益)이 운구를 모시고 영천으로 돌아와 12월 2일에 영천군 동면(東面) 15리쯤에 있는 구촌(丘村)의 태향(兌向) 산에 장사 지냈다. 병오년(丙午年, 1606, 선조 39)에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추록(追錄)하고 가선대부 예조 참판에 추증하고, 이어서 3대에 걸쳐 추증하니 남다른 예우이다.
아아! 공은 천품이 순수하여 화평하고 단아하며 공경하고 삼가며 뜻을 독실하게 하고 힘써 행하였다. 모부인을 봉양함에 효를 극진하게 하여 밤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들기를 기다렸다가 비로소 물러났고, 아침에는 반드시 잠이 깨기를 기다린 뒤에야 들어가 뵈었다.
침구를 깔고 개는 것을 반드시 몸소 하였는데 자제들이 대신하기를 청하여도 허락하지 않았다. 모부인이 일찍이복창증(腹脹症)을 앓자 약재는 반드시 몸소 달이고 옷은 허리띠도 풀지 않은 것이 3년이 지난 이후에야색우(色憂)를 마쳤다. 우애가 천성에서 나와 아우가 매우 가난한 것을 근심하여 사전(祀田)을 나누어 주었다.
둘째 아우는 성정이 엄정하여 말을 하면 반드시 따르고 서로 견주려고 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더욱 어렵게 여겼다. 족친(族親) 사이에 화목하여 돌아가신 모부인(母夫人)의 성을 쓰는 혈족 아이를 길에서 만나자 데리고 돌아와 양육하고 가르쳤는데, 마침내 성인이 될 때까지 하였다. 온화함으로 남들과 교제하며 능력이나 재능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불선(不善)한 이를 보면 용납하지 않아 이 때문에 행로(行路)가 평탄하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았다.
일찍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자제들에 대하여 사랑할 줄만 알지 가르칠 줄 모르는 것을 아파하여 공은 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일컬었던“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으면 먼저 자기의 입이 더러워진다.”라는 말로 자제들을 경계하였다.
둘째 아들인 도사공(都事公배상익)이 일찍이 임수사(林水寺)에서 글을 읽자 공이편지를 보내 경계하기를 ‘늘 생각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바르게 앉아 단정히 두 손을 마주잡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라.’라는 등의 말로 힘쓰라고 하였고, 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이 바야흐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쓰고 있으니 네가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다.”라고 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 선조 34) 도성에 있으면서 또글을 보내어《소학(小學)》을 때때로 익히는 방편을 권면하였으니 공이 자제를 가르치는 방도를 상상할 만하다. 평상시 거처할 때에 항상 각건(脚巾)을 차자 집안사람들이 지나치게 구속하는 것을 괴로워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비록 자질구레한 예절이지만 또한 마음을 가다듬는 하나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새벽에 일어나서 반드시 세수를 하고 공경히 가묘(家廟)를 배알하였고, 제사를 지낼 때엔 목욕재계하고 빈객들을 맞이하지 않았으며, 매번고로(孤露)의 신세를 통탄하여 생일날에 술을 올리되 풍악 연주를 허락하지 않아서 친족들이 이 때문에 감동하였다.
남을 조문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치재(致齋)하고 조문한 뒤에는 사람들과 함께 잔치에서 즐기지 않았으니, 공의 풍류가 독실하고 후덕함이 이와 같았다. 영천의 수령이 일찍이 ‘관아에서 거애(擧哀)해서는 안 되느냐?’는 조문(條文)으로 묻자 공이 “자리를 만들어 곡을 하고, 초혼(招魂)이 가까우면 관아는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인지라 사사로운 자리에서 마음을 가라앉혀 슬픔을 바치는 장소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답하니, 사람들이 공이 예문(禮文)의 깊은 뜻을 얻었다고 여겼다.
서애 유성룡 선생이 일찍이 공과 사인(舍人)홍종록(洪宗祿)을 불러천지가 원회(元會)하는 수(數)를 계산하게 하였는데, 간간이 의심나는 곳이 많았지만 공만은 하나하나가 정통하였다. 서애(西厓)가 보고 감탄하며 “이 하나의 경우를 미루어보면 공의 독실한 공부를 볼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 앞서 수를 계산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공의 재주가 어찌 글을 꾸미는 데에만 그쳤겠으며, 공의 학문이 어찌 기억하고 암송하는 데에만 그쳤겠는가?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도 모친 봉양을 급선무로 삼았기 때문에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을 원하였는데, 상공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힘써 말려도 듣지 않았다.
난리를 만났을 때에 나라에 몸을 바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기 때문에 모친을 하직하고 전장으로 나갔다. 관찰사가 자신의 막하에 머물 것을 권하였지만 따르지 않았고, 백면서생으로 큰 난리를 맞아서도 좌절하거나 꺾이지 않고 마침내 오합지졸들을 규합하여 개미 떼처럼 밀려오는 적들을 막아내었고, 맨주먹을 휘두르고 흰 칼날을 무릅쓰며 죽기를 맹세하고 뒤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청도(淸道) 한 고을이 우뚝이 강좌(江左)의 한 보장(保障)이 될 수 있었다.
아아! 장렬하구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공은 청도에 있을 때엔 모친상을 당하여 뜻을 펼쳐 큰 공을 이루지 못하였고, 나주에 있을 때엔 무고를 입어 이순신과 함께 세상에 없는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운명인가 보다. 하늘이 인재를 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처음에는 군현에 머물고 마지막에는 산림에 은거하였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서천 군수에서 체직되어 돌아와서는 날마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등 여러 공들과 함께 산수에서 노닐며 간혹《심경(心經)》등의 책을 토론하면서 한가로운 가운데서의 일상 사업으로 삼았고, 나주 목사에서 체직되어 돌아와서는 날마다 백암 김륵 등 여러 공들과 함께 아름다운 산수 사이를 배회하였고, 간혹 횡당(黌堂학교)에서 문회(文會)를 열고 경서(經書)를 통독하며 부지런히 하여 피곤함도 잊었다. 오늘날에 공의 남은 운치를 상상하면 저절로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면서 공경하게 된다.
공은 시(詩)에 대해 애당초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시가 충담(冲澹)하여 운치가 있다.
청량산을 유람하며 지은 시에
“맑은 시내 다 건너자 굽이굽이 다리 있고, / 渡盡淸溪曲曲橋
청산 속에서 걸으며 소요하네. / 靑山影裏步逍遙
왕자교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는데, / 王子仙蹤尋不見
달 밝을 때 어디에서 퉁소를 부는가? / 月明何處好吹簫 ”
와 승려에게 준 시에
“청량산을 5월에 3일간 유람할 때, / 淸凉五月遊三日
선학봉 정상에선 비가 옷에 가득했네. / 仙鶴峯頭雨滿衣
오늘밤 선사 만나 형승을 말하자니, / 今夜逢師談勝狀
맘과 넋이 갑자기 구름 따라 날아가네. / 心魂斗覺逐雲飛 ”
라 하였는데, 한강은 ‘속세를 벗어난 생각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지은 시문 및《임진천토록(壬辰天討錄)》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선배(先配) 합천 이씨(陜川李氏)는 사과(司果) 이춘년(李春年)의 딸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장녀는 참봉 정우개(鄭友凱)에게 시집갔고, 차남배인지(裵紉芷)는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을 지내고 사헌부 감찰에 추증되었다. 차녀들은 사인(士人) 나용(羅瑢)ㆍ전신헌(全愼憲)에게 시집갔다.
후배(後配) 옥천 전씨(沃川全氏)는 인의(引儀) 전해(全海)의 딸로 정부인에 추봉(追封)되었다. 숙행(淑行)이 있어정 부인(鄭夫人)을 정성으로 섬기고 지아비의 일가를 대함에 도리를 다하였다. 공은 형제들과 의복을 함께 나눠 입어 옷이 해지더라도 유감이 없었기에 정 부인이 가상하게 여기고 감읍(感泣)함에 이르렀다.
공보다 48년〔1650, 효종 1〕 뒤에 돌아가시자 망동(望洞)의 집 앞 몇 리쯤에 있는 태향(兌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은 인란(紉蘭)인데 뒤에 상익(尙益)으로 이름을 고쳤다. 병진년(丙辰年, 1616, 광해군 8)에 생원과 진사에 모두 합격하였고, 갑자년(甲子年, 1624, 인조 2)에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전라 도사(全羅都事)에 이르렀다. 재주와 명망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참봉 정우개(鄭友凱)는 지아(之雅)ㆍ이아(以雅) 두 아들을 두었고, 세 딸은 이봉일(李奉一)ㆍ박선(朴璿)ㆍ정륭(鄭隆)에게 시집갔다. 감찰에 추증된 인지(紉芷)는 첨지중추부사 김담로(金聃老)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후사가 없어서 도사공의 둘째 아들 유장(幼章)을 후사로 삼았다.
사인 나용(羅瑢)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이현(以賢)이고 차남은 이준(以俊)으로 병술년(丙戌年, 1646, 인조 24)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에 선보(選補)되었다. 사인 전신헌(全愼憲)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박정윤(朴廷尹)에게 시집갔다. 도사공은 참의 김용(金涌)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두었다.
유화(幼華)는 재주는 있었으나 아직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유장은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의 난리 뒤에 과거를 보려 하지 않고 독서로 낙을 삼았다. 세 딸 중 장녀는 조수이(趙壽頤)에게 시집갔는데, 조수이는 힘써 배우고 글을 익혔으나 병자년의 난리를 겪고는 과거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차녀들은 정시원(丁時遠)과 김시망(金時望)에게 시집갔다. 안팎의 증손 자녀 약간이 있다. 측실(側室)의 딸은 무과에 급제한 김수백(金壽柏)에게 시집가서 자녀 및 손자를 두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49년이나 되었는데도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는 것은 아마도 도사공이 일찍 죽어 경황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의 손자 유화와 유장 등이 선친의 뜻을 좇아 장차 당대 문장가의 비문을 구하여 영원히 전해지길 도모하였으니 가문의 전통을 잘 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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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배무선(裵茂先):
《안촌집》에는 무원(茂元)으로 되어 있다.
[주02] 성균관 권지(權知):
《안촌집》에는 성균관 정자(正字)로 되어있다.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들을 승문원ㆍ성균관ㆍ교서관 3관에 분속시켜 배치하였다.
문과 급제자들을 박사(博士) 3명이 채점하고 이것을 다시 승문원의 도제조가 검토하여 점수를 확정해서, 3점은 승문원, 2점은 성균
관, 1점은 교서관에 분속시켜 배치하고, 이를 이조에서 왕에게 보고한 뒤 각각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배우게 하였다.
이때 점수를 얻지 못해 분관하지 못한 사람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데, 이들을 ‘미분관인(未分館人)’이라고 했으며, 갑과 급제자 세
명은 권지의 과정 없이 수석은 종6품, 차석과 삼석은 정7품으로 곧바로 서용되었다.
[주03] 이양원(李陽元):
1526~159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이다. 1555년(명종 10)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ㆍ호조 참의ㆍ경
기도 관찰사ㆍ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이양원은 1588년(선조 21) 3월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주04] 포망장(捕亡將):
도망자를 잡아들이는 장수를 말한다.
[주05] 무흘역(無屹驛):
현재의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미진리 대천마을 일원에 있었다.
[주06] 대장(代將):
남의 책임을 대신하여 출전한 장수를 말한다.
[주07] 능장(稜杖):
밤에 순찰을 돌 때 쓰는 기구로, 즉 야경꾼의 방망이라고 할 수 있다. 유사시에는 군인들의 무기로 제작ㆍ사용되기도 하였다.
[주08] 백성은 …… 한다:
《국어(國語)》〈진어(晉語)〉에 “백성은 세 분 덕분에 살아가니, 똑같이 그분들을 섬겨야 한다. 아버지는 낳아 주셨고, 스승은 가르
쳐 주셨고, 임금은 먹여 주셨기 때문이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라는 말이 있다.
[주09] 박경전(朴慶傳):
1553~1623.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효백(孝伯), 호는 제우당(悌友堂)ㆍ이모당(二慕堂)이다. 임진왜란 때 청도(淸道)에서 창의
(倡義)하여 밀양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곽재우(郭再祐)와 권응수(權應銖)의 양쪽 진영을 내왕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주10] 박경신(朴慶新):
1560~1626.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중길(仲吉), 호는 한천(寒泉)ㆍ삼곡(三谷)이다. 임진왜란 때 청도 조전장(淸道助戰將)으로
참전하여 순변사 이일(李鎰)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해주 목사ㆍ밀양 부사ㆍ형조 참의ㆍ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주11] 최문병(崔文炳):
?~1599.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일장(日章), 호는 성재(省齋)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장산에서 적의 침입을 격퇴하고 두곡
ㆍ선암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영천에서 화공으로 적을 섬멸했다.
[주12] 박경신(朴慶新):
《안촌집》에는 박경전(朴慶傳)으로 되어 있다.
[주13] 승질(陞秩):
조선 시대에 정3품 이상의 관계(官階)에 오르던 일로 승자(陞資)라고도 한다.
[주14] 모친상:
원문에는 부친상[外艱]으로 되어 있으나,《안촌집》에는 ‘모친상[內艱]’으로 되어 있다. 판각의 오류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15] 옥천서원(玉川書院):
무오사화로 전라도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죽은 김굉필(金宏弼)의 학덕을 기려 1564년(명종 19)에 세운 서원이다. 순천 부사 이정
(李楨)이 1564년 처음 창건하여 경현당이라 하였고, 이듬해 김굉필의 신위를 모실 사당을 지으면서 옥천정사(玉川精舍)라 하였다.
순천 부사 김계(金啓)가 1568년(선조 1) 상소하여 옥천서원이라 사액을 받았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8년 유림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주16] 체부(體府):
체찰부(體察府)의 준말로, 조선 시대 체찰사(體察使)가 군무를 보던 곳이다.
[주17] 해유(解由):
관원이 교체될 때 후임자에게 회계ㆍ물품 출납 등에 대한 사무를 인계하고 호조에 보고하여 책임을 면하는 일을 말한다.
[주18] 금성산성(錦城山城):
전라남도 나주시에 있는 석성(石城)이다.
[주19] 황신(黃愼):
1560~1617.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1588년(선조 21) 알성 문과에 급제
하여 병조 좌랑ㆍ전라도 관찰사ㆍ호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추포집(秋浦集)》.《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등이
전한다.
[주20] 관압사(管押使):
조선 시대 중국에 파견하던 사신의 하나로, 주로 여진(女眞)이나 왜(倭)에 사로잡혀 갔다가 우리나라로 도망쳐 온 중국 사람을 요동
(遼東)으로 데리고 가는 일과 중국의 요청에 의해서 보냈던 종마(種馬) 등을 압송하는 일들을 담당하였다.
[주21] 지전(紙廛):
조선 시대 육의전의 하나로 종이를 팔던 시전(市廛)이다. 다른 육의전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시전에서 제외되는 등의 변화를 거쳤던
것에 비하여 지전은 변동 없이 국역 부담 및 과세 부담을 계속하였다.
[주22] 복창증(腹脹症):
배가 더부룩하면서 부어오르는 병이다.
[주23] 색우(色憂):
자식이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함을 이른다.《예기(禮記)》에 문왕이 세자로 있을 적에 “왕계(王季)가 편치 않을 때가 있어 내시가
문왕에게 고하면 문왕은 얼굴에 근심하는 기색을 띠고 걸음을 똑바로 걷지 못하였다.[其有不安節, 則內豎以告文王, 文王色憂, 行
不能正履.]”라고 하였다. 왕계는 문왕의 아버지이다.
[주24] 피를 …… 더러워진다:
이 말은 본래 고어(古語)에서 나온 것인데,《명심보감(明心寶鑑)》〈정기편(正己篇)〉에도 실려 있다.
[주25] 편지:
《안촌집》권3에〈기난아독서임수사서(寄蘭兒讀書林水寺書)〉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26] 글:
《안촌집》권2의〈직궐중기난아(直闕中寄蘭兒)〉를 가리킨다.
[주27] 고로(孤露):
부모가 세상을 떠나 안 계신 것에 대한 슬픔을 말한다. 여기서는 부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말한다.
[주28] 홍종록(洪宗祿):
1546~1593.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연길(延吉), 호는 유촌(柳村)이다. 1572년(선조 5)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ㆍ병조 정랑
ㆍ이조 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도체찰사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각 진영의 연락과 군수 공급의 일을 맡았다.
[주29] 천지가 원회(元會)하는 수(數):
소옹(邵雍)의 ‘원회운세설(元會運世說)’을 말한다. 소옹은 1원(元)은 12회(會), 1회는 30운(運), 1운은 12세(世), 1세는 30년
(年)이니, 1원은 30×12×30×12 즉 12만 9천 6백 년으로, 이것이 바로 천지가 생성 소멸하는 1주기라고 하였다.
[주30] 맑은 …… 부는가:
《안촌집》권1〈나부동구음이절(羅浮洞口吟二絶)〉중 제1수이다.
[주31] 청량산을 …… 날아가네〔淸凉五月遊三日, 仙鶴峯頭雨滿衣. 今夜逢師談勝狀, 心魂斗覺逐雲飛.〕:
《안촌집》권1〈증청량산승성지이절(贈淸涼山僧聖智二絶)〉중 제1수이다.
[주32] 임진천토록(壬辰天討錄):
임진왜란 때에 왜적을 토벌한 일을 적은 책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주33] 배인지(裵紉芷):
1564~1597. 본관은 성주, 성주 안촌에서 태어났다. 배상익과 이춘년의 딸 합천 이씨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에 청도 군수인 부친
을 따라 청도에서 왜적을 토벌한 공로로 1593년 군자감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1604년(선조 37)에 선무 원종공신에 추록되고, 1606년(선조 39)에 사헌부 감찰에 추증되었다.〈증선교랑사헌부감찰행군자감직
장배공묘갈명병서(贈宣敎郞司憲府監察行軍資監直長裵公墓碣銘幷序)〉(《학사집》 권7) 참조.
[주34] 정 부인(鄭夫人):
배응경의 모친 서산 정씨(瑞山鄭氏)를 말한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권영락 (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