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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3권 / 신도비(神道碑)
가선대부 전주부윤 전주진병마절제사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충의 정공의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嘉善大夫全州府尹全州鎭兵馬節制使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總府都總管忠毅鄭公神道碑銘 幷序]
현종(顯宗) 6년(1665) 12월 무인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신(臣) 태화(太和)가 아뢰기를, “왜노 청정(淸正)이 북방에 들어와 성곽을 도륙하고 불태울 때와, 소하강(蘇下江) 동북쪽의 말갈(靺鞨)이 날랜 기마를 몰아 무산(茂山)ㆍ부령(富寧) 땅 깊숙이 들어와 짓밟았을 때, 병마평사 신 문부(文孚)가 몸소 의병을 거느리고 청정을 토벌하여 6진 밖에서 적군의 기를 뽑았으며, 백탑(白㙮) 아래에서 적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위엄으로 말갈을 복종시켜 변경을 온전히 하였고 오랑캐의 기운을 꺾어 빛나는 공훈을 세웠으니, 만력 이래의 선무 공신(宣武功臣)인 여러 장수들 중에는 있지 않은 바입니다. 인조께서 반정을 하셨을 때 원수(元帥) 천거에 들었으나 남의 무고를 입고 하옥되었고, 또 지은 영사시(詠史詩)로 죄에 걸려 옥중에서 죽었으니 신이 속으로 슬프게 여깁니다.
왜노 행장이 관서지방으로 들어왔을 때, 신종황제가 대장군 이여송(李如松)에게 명하시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왜노를 평양성(平壤城) 아래에서 쳐부수게 했습니다. 그러나 북방 산천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이 신종황제가 구원할 수 없었고, 대장군이 방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문부는 일개 평사(評事)로서 병사 6천 명을 모집하여 힘껏 싸워 왜노를 몰아내고 북방 22주를 회복하였건만, 큰 공로도 봉작(封爵)을 얻지 못하고 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결국 부당한 법령 앞에 죽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생각건대 마땅히 유사에게 명하시어 정문부에게 작위를 주어 북방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심이 옳을 듯합니다.”하니, 상이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도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總府都總管)을 추증하였다.
공의 성은 정씨(鄭氏)요, 자는 자허(子虗)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젊어서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에 보임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가 되었다. 만력(萬曆) 20년(1592)에 평수길(平秀吉)이 반란을 일으켜 6월에 청정(淸正)이 북방으로 들어왔다.
회령부 아전 국경인(鞠敬仁)이 왕자 임해군(臨海君) 진(珒), 순화군(順和君) 및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영(李瑛) 등을 잡아 군중에 가두었다가 임민(林珉)을 시켜 청정에게 바치었다. 며칠이 지나 국경인의 숙부 국세필(鞠世弼)이 경성(鏡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정말수(鄭末秀)가 명천(明川)에서 반란을 일으켜 청정의 앞잡이가 되어 북방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절도사 한극성(韓克誠)ㆍ우후(虞候) 이범(李範) 등을 잡아 청정을 맞이하니 6진(六鎭)으로부터 함관령(咸關嶺)에 이르기까지 1000여 리가 모두 왜노의 수중에 들어갔다.
공이 발분하여 은밀히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ㆍ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彥) 등과 더불어 경성에 들어가 북방을 회복하기를 도모하였는데 사람들이 국세필을 두려워하여 모두 흩어져서 다시 모을 수가 없었다.
공이 포기하고 떠나서 떨어진 옷을 입고 동냥을 하며 부령(富寧)의 정암산(靖巖山) 속으로 들어가 나물을 캐어먹었다. 한참 있다가 용성(龍城)에 이르러 무격(巫覡) 한인간(韓仁侃)의 집에 의탁하였다. 한인간이 자세히 쳐다보며 말하기를, “그대는 병마평사가 아니십니까?” 하고서 마침내 후하게 대우하였다.
8월 중에 공이 포의(布衣) 최배천(崔配天)ㆍ지달원(池達源) 두 사람과 더불어 혹은 지고 혹은 끌고 하며 샛길을 따라 남쪽으로 무계(武谿)에 이르렀다. 무계의 처사 이붕수(李鵬壽)가 공의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맞이하여 그 집으로 갔다.
한 달이 지나 공이 바다에 배를 띄워 동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하니 이붕수가 개연히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왜적 토벌을 건의하고자 하여 장수 노릇을 할 수 있는 열사(烈士)를 은밀히 구하였으나 아직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공이 찾아왔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 북방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하였다.
인하여 공을 머물게 하고 의병을 불러 모았다. 경성(鏡城)의 장사(壯士) 강문우(姜文佑),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이 선봉이 되기를 원하였다. 서 충숙공(徐忠肅公) 성(渻)이 공의 소문을 듣고 또한 귀부하였다. 이붕수가 몸소 군량을 지고 샛길로 길주(吉州)로 달려가 왜노 군중의 허실을 엿보았다.
그때 청정이 안변(安邊)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국세필과 더불어 염탐하는 일이 끊어지지 않았다. 공이 근심하여 이에 강문우로 하여금 기병 몇을 거느리고 도중에서 맞아 모두 죽이도록 하니, 마침내 염탐하는 일이 끊어졌다. 정현룡 등이 공에게 호칭을 세우기를 권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았는데, 이붕수가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한 연후에야 허락하였다.
무리가 마침내 공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정현룡ㆍ오응태를 차장으로 삼았다. 공이 스스로 연소하다고 하여 지위를 낮게 정하여 정현룡에게 양보하니 정현룡이 감당할 수 없다고 굳이 사양하였고, 여러 장사들도 또한 공이 일을 맡기를 권하였다.
마침 말갈이 소하강(蘇下江)으로부터 훈융(訓戎)ㆍ아산(阿山)ㆍ무이(撫夷)ㆍ조산(造山) 네 진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공이 이 때문에 군사 동맹을 주장하여 즉시 국세필에게 사자를 보내어 힘을 합하여 방어하자고 회유하였다. 9월에 공이 어랑리(漁郞里)로부터 유정(柳亭)에 이르러, 또 사자를 보내어 국세필과 부중(府中)에서 모이기를 청하자 국세필이 군대를 성대하게 거느리고 기다렸다.
공이 휘하 100여 기를 이끌고 말을 달려 부중으로 들어가 이해(利害)를 가지고 반복하여 비유하여 타이르니, 국세필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에 친속을 시켜 공의 곁에 거처하게 하고 그 기미의 변화를 살폈다. 사람들 중에 공에게 국세필을 죽이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으니 세필이 듣고서 매우 두려워하였다.
공이 밤중에 사람들을 물리치고 세필과 더불어 부중(府中)의 일을 말하였는데 의심하는 기색이 없으니 세필이 매우 기뻐하였다. 얼마 있다가 왜노 90여 명이 밤중에 성 아래로 접근하자 공이 장사들에게 명하여 쳐서 참살하게 하였다. 이에 세필이 그 아들과 더불어 왜노 장수를 사로잡으니 공이 그 공을 기록하여 아뢰었다. 세필이 더욱 기뻐하여 이에 스스로 안심하였다.
공이 또 부중의 반란군을 사면하고, 일찍이 자신을 쏜 자를 비장(禆將)으로 삼으니 6진의 병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휘하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얼마 안 있어 회령의 유생 오윤적(吳允廸)이 공의 의기를 좇아 부학(府學)에서 말하기를, “국경인(鞠敬仁)은 참수해야 합니다.” 하였다.
부중의 의사 신세준(申世俊)이 이에 뿔나팔을 부니 사졸들이 모두 모였다. 유생 윤립(尹岦) 등 6명이 사졸들에게 영을 내려 국경인 및 그 수양아들 최인수(崔鱗水) 등을 참수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명천의 사민(士民) 200명이 함께 정말수를 쳤으나 패배하여 부중으로 흩어져 들어왔다.
의사 김천년(金千年)이 정말수와 그 무리 장응호(張應豪) 등을 생포하였다. 이로부터 남북이 통로를 얻게 되어 징집된 병사가 점점 이르렀다. 이튿날 공이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세필 등 13명을 포박하고 모두 참수하여 그 군대에 돌렸다.
이에 위엄과 명성이 북방에 진동하니 여러 진영의 장사(壯士)로서 모집에 응한 자들이 6000명에 이르렀다. 공이 여러 장수들과 출사를 의논하니 현룡이 이르기를, “왜노가 지금 한창 강성하니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경성을 지켜 그 틈을 엿보아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공이 분발하여 이르기를, “내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서일 뿐이다. 지금 성 하나를 지키면서 나가 싸우려 하지 않으니, 규문의 여자가 하는 일을 본받으려 하는가?”하였다. 이에 군대를 3위(衛)로 나누어 영강역(永康驛)을 나가 몇 리를 갔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고하기를, “왜노의 군사가 많으니 공이 더불어 싸우면 반드시 불리할 것입니다. 마땅히 성을 지켜서 스스로 보전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너는 왜노가 우리 군대를 저지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하고서 즉시 그 머리를 베어 깃대 위에 걸었다. 명천(明川)에 이르러 방원(防垣)의 병마만호(兵馬萬戶) 한인제(韓仁濟)를 복병장으로 삼았다. 또 종사(從事) 원충서(元忠恕)에게 명령하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길주 북쪽 30리 되는 곳에 진을 치고 왜노와 해정(海汀)에서 싸우게 하여, 그 선봉장 2명을 베니 왜노가 달아났다.
원충서가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장평(長平)에 이르렀을 때, 왜노 직정(直正)이 장군 도관(都關)ㆍ여문(汝文)과 더불어 대군을 이끌고 죽기를 각오하고 맞붙어 싸웠다. 강문우와 원충서가 좌우로 나누어서 기병을 놓아 돌진하고 인제의 복병이 또 앞을 막았으며 시도(廝徒)와 우졸(郵卒)도 용맹을 떨치지 않음이 없었으니, 직정이 말에서 내려 마침내 걸으며 싸웠다.
신시(申時)에서부터 술시(戌時)까지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우박처럼 모여드니, 왜노가 힘이 다하여 비로소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강문우와 원충서가 모두 말을 채찍질하여 앞뒤로 끼고 달려 가파른 언덕으로 올라가니 직정의 군사들이 흩어져 마침내 북쪽으로 달아났다. 문우가 추격하여 장덕산(長德山)에 이르러, 도관ㆍ여문도 화살을 10여 군데 맞고 달아나자 복병이 사방에서 나와 크게 무찔렀다.
그 괴수 5명을 죽이고 825급을 참수하였으며 그 나머지 무리로 산으로 도망해 들어간 자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화살을 맞고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전투마 118필을 획득하였고 또 정기(旌旗), 창과 방패, 갑옷도 매우 많이 얻었다.
11월에 3위(三衛)가 군사를 합하여 길주(吉州)를 포위하였는데, 왜노가 굳게 지켜서 공략할 수가 없었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대가 급하게 공격하면 사상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먼저 영동(嶺東)의 책(柵)을 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책중(柵中)이 평정되면 길주의 형세는 고립되어 구원이 끊어질 것이니, 내가 그것을 취하기는 조롱 속의 새와 같을 것이다.” 하였다.
즉시 군대를 이동시켜 쌍개포(雙介浦)에 이르러 직정을 만나, 3위의 정예 기병이 발분하여 그를 쳐서 마침내 왜노를 압해정(壓海亭) 아래에서 쳐부수었다. 100여 급을 참수하였고 시체가 15리에 어지러이 널렸다. 공이 또 길주로 나아가 포위하였다. 이튿날 격문을 만들어 성중으로 쏘아 보내니 왜노가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
12월에 공이 비로소 국세필을 참수한 공으로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되었다.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공의 공로를 시기하여, 이에 이문(移文)을 해서 공을 대장(大將)에서 해면(解免)하니 현룡이 그를 대신하였다. 마침 절도사가 공으로 하여금 6진을 순행하여 말갈을 회유하게 하였다.
공이 휘하 50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군현에 가서 죄 있는 자는 벌주고 공 있는 자는 표창하였으며 어루만지고 방어하며 싸우고 지킴이 능히 그 방법을 얻었으므로, 말갈이 두려워하고 존경하여 저들끼리 서로 경계하고 타일러서 그들이 잡아간 인구를 모두 돌려보냈다.
공이 술과 음식을 갖추어 그 추장 200명을 불러서 먹이며 따뜻한 말로 타이르니, 선춘(先春)ㆍ운두(雲頭) 이남에서부터 동건(童巾)ㆍ다온(多溫)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족들이 감히 다시는 변경의 해가 되지 않았다. 윤탁연이 공을 대장에서 면직시키고부터 인심이 불만을 품어 6000명의 장사들이 많이 흩어져 가버리자, 탁연이 비로소 두려워하여 다시 공을 대장으로 삼았다.
이듬해 정월에 공이 홀로 말을 달려 길주에 이르니, 6000명의 장사들이 공이 오는 것을 보고 용기백배하였으며 흩어져 가버린 자들도 모두 돌아와 모였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이 공에게 와서 말하기를, “왜노가 군중에 멋대로 돌아다니니 원컨대 공이 군대를 나누어서 치소서.” 하였다.
공이 정예병 300명을 선발하여 4부대로 나누어 성 밖에 매복시키고, 단천의 군대로 하여금 싸움을 걸어 거짓으로 패한 척 달아나게 하였다. 왜노가 추격하여 고개 아래에 이르자 4부대가 한꺼번에 나와서 달려 치니, 왜노가 패하여 달아나면서 공포(空砲)를 당겨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공이 힘을 다해 싸우면서 혹은 그 앞을 막고 혹은 그 뒤를 잘라서 60급을 참수하였다.
5일 있다가 청정이 군사 2만 명을 통솔하여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직정과 더불어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올라갔다. 공이 굳센 기병 600명을 이끌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며 이르기를, “내가 국가를 위하여 싸우다 죽지 않는다면 충신이 아니다.”라고 하니 장사들이 그를 따라 감히 적을 두려워하여 물러나는 자가 없었다.
온종일 60리를 옮겨 다니며 싸우다 백탑교(白㙮郊)에 이르러 날쌘 기병으로 곧바로 왜노를 쳐서 크게 무찌르니,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으며 화살을 맞고 죽은 자가 1000명이나 되었다. 왜노가 시체를 싣고 성 안으로 들어가 불을 놓아 태웠다. 밤에 청정이 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밥 지을 겨를도 없었다. 이에 북방이 비로소 깨끗하게 맑아졌다.
공이 최배천(崔配天)을 보내어 첩서(捷書)를 올리니 선조께서 눈물을 흘리며 최배천에게 조산대부(朝散大夫)를 더해주었다. 윤탁연이 화를 내어 공의 과실을 모아 죄상을 열거하여 논하였으니 이 때문에 공은 등용되지 못하였다. 3월에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제수되었다가 온성(穩城)으로 개수되었으며 길주목(吉州牧)으로 옮겼다. 얼마 후에 왕의 부름을 받아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부사(副使)로 천자에게 조회하러 갔다가 이듬해 사행이 돌아왔다. 북방 사람들이 상소하여 공을 칭송하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리고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總府副總管), 병조분사 참판(兵曹分司參判)에 임명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소탈하며 조심스럽고 과묵하였다. 음주를 즐겼는데 대취하면 땀이 주르르 흘러서 빈객들이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인조가 즉위하자 원수(元帥)로 천거되었는데 공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가 장차 화(禍)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모친의 연로함을 들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하기를 청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는데, 2년도 안되어 무고를 입고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죄가 없으므로 석방이 되려고 하는데, 공을 미워하는 자가 영사시(詠史詩)를 얻어 그것으로 그를 중상(中傷)하였다.
처음에 광해군 때 공이 시를 지어 초 회왕(楚懷王)을 슬퍼하였으니 대개 그 뜻은, ‘회왕이 한번 무관(武關)에 들어가자 백성들의 희망이 끊어졌는데, 그 자손이 또 무엇 때문에 회왕이라 일컫는가?’라는 것이었다. 후에 최내길(崔來吉)이 그 시를 보고서 마침내 세상에 전하였다.
공이 이로 말미암아 죄에 걸려 고문을 받아 천계 4년(1624, 인조2) 11월 기사일에 옥중에서 돌아가셨으니 누린 햇수가 60년이었다. 이듬해 모월 모일에 모부 모리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숙종 때(1713, 숙종 39) 시호를 내려 충의(忠毅)라고 하였다. 7세조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이 강헌대왕(康獻大王 태조(太祖))을 섬겨 충근(忠勤)함으로써 소문이 났다.
증중조(曾仲祖) 정희량(鄭希良)은 관직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이르렀으나 거짓으로 강에 빠져 그 끝마친 바를 알지 못한다. 부친 정신(鄭愼)은 모부의 부사로서 모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의 배필 모현의 모씨는 모관 모의 딸이며, 아들 몇 명이 있으니 모공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42년이 되어 병마평사 이공(李公) 단하(端夏)가 의론하기를, “북방은 윤공(尹公) 관(瓘)이 처음으로 9성(九城)을 설치하고서부터 317년 후에 군현이 몽고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김공(金公) 종서(宗瑞)가 그 땅을 회복하여 마침내 6진(六鎭)을 설치하였다.
김공이 처음 6진을 설치하고서부터 161년 후에 군현이 왜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나, 정공 문부가 그 땅을 회복하였다. 이 세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힘썼으므로, 예법상 마땅히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북방의 사람들이 공의 사당을 무계(武谿)에 세웠으니, 숙종께서 이름을 내려 창렬(彰烈)이라고 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정씨 가문이 현달하기로는 / 鄭氏顯聞
정도공에서부터 비롯되었으니 / 自貞度始
멀리 7세에 이르러 / 遙遙七世
공이 그 복을 이어받았도다 / 公承其祉
처음에 평사를 제수 받아 / 初授評事
북방의 원수를 보좌하니 / 以佐朔帥
변방의 선비들이 / 荒服之士
예물을 가지고 모여들었도다 / 罔不執贄
섬오랑캐 극렬히 날뛰고 / 島夷孔熾
북방 오랑캐도 위태롭게 하는데 / 而狄又棘
세 악인이 나라 안에서 반하여 / 三孽內奰
호랑이의 손발이 되었다 / 爲虎羽翼
아득한 북방 영토가 / 芒芒北門
왜노들에게 함락되었으니 / 淪于漆齒
측근 신하가 도적을 키운 것이 / 屛臣養寇
또한 크나큰 수치로다 / 亦孔之耻
공이 의로운 군대를 이끌고 / 公提義師
무계에서 떨쳐 일어나니 / 奮自武谿
네 명의 지사가 용맹스럽게 / 四士蹻蹻
더불어 고비를 따랐도다 / 與從鼓鼙
인의 갑옷에 예의 투구 쓰고 / 仁介禮冑
충성 신의를 깃발 삼아 / 忠信爲旌
원수 백성을 죽이고 / 旣戮讎民
마침내 성벽을 굳건히 하였도다 / 遂敦雉城
저 장평의 적을 쓸어버리고 / 輮彼長平
그 6천 명의 군대가 / 其旅六千
백탑교에 이르러 / 至于白㙮
하늘의 토벌을 오로지 하였도다 / 天討是專
이에 야인들을 쳐서 / 乃拊山戎
온화한 얼굴로 달래니 / 以輯以柔
오랑캐들이 복종하여 / 氊裘率從
모두 임금님 은덕을 칭송하였도다 / 咸頌王休
북방이 평정된 것은 / 朔方載定
누구의 공이던가 / 伊誰之功
아 너희 측근 신하가 / 咨汝屛臣
도리어 충신을 헐뜯었도다 / 乃反訾忠
아름다운 시호가 빛나 / 有赫嘉謚
그 잘못이 바루어졌으니 / 其屈斯直
의로운 명성을 길이 밝히고자 / 永昭義問
돌에다 새기노라 / 以刻于石
<끝>
[註解]
[주01] 가선대부 …… 정공 :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의병장인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이다.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해주,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588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한성부 참군이 되었다. 홍문관 수찬 등을 거쳐 1591년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진을 순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회령(會寧)의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
한 김귀영(金貴榮)과 황정욱(黃廷彧) 등을 잡아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투항하자 의병을 조직하여, 국경인과 국세
필(鞠世弼)을 참수하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다. 후에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함경북도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부령의 청암사
(靑巖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농포집》이 있다.
[주02] 대광보국숭록대부 …… 태화(太和)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태화(鄭太和, 1602~1673)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춘(囿春),
호는 양파(陽坡), 시호는 익헌(翼憲)에서 뒤에 충익(忠翼)으로 바뀌었다. 1628년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도원수 김자점이 도주하자 패잔병을 모아 항전하여 수많은 적을 사살한 공으로 비변사가 천거한 유장(儒將) 4
명 중 한명으로 뽑히고, 집의(執義)가 되었다. 1649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효종, 현종 때 20여 년간 영의정을 다섯 차례
지냈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양파유고》와 《양파연기(陽坡年紀)》가 있다.
[주03] 청정(淸正) : 가등청정(加藤淸正, 1562~1611)으로, 풍신수길(豊臣秀吉)과 덕천가강(德川家康)을 도와 일본 전국(戰國)의 통일
에 공을 세운 무장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선봉장으로 침략하였다.
[주04] 소하강(蘇下江) : 만주 북방에 있는 강으로 백두산의 북쪽에 있다.
[주05] 말갈(靺鞨) : 여진족을 가리킨다.
[주06] 무산(茂山)ㆍ부령(富寧) : 함경북도의 지명이다.
[주07] 선무 공신(宣武功臣) :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거나, 명나라에 병량 주청 사신(兵糧奏請使臣)으로 가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칭호
를 말한다.
[주08] 지은 영사시(詠史詩) : 〈초회왕(楚懷王)〉을 말한다. 《농포집》 권1에 수록된 7언절구 〈영사(詠史)〉 4수 중 초 회왕을 읊은 2수이
다. 이 시는 인조반정 5년 전인 광해군 10년(1618), 54세 때 창원 부사 시절에 지은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나라 땅에
구의산이 있거늘, 회왕은 어찌하여 장의를 믿었던가?
상오 6백 리는 끝내 할양받지 못하였으니, 상수는 덧없이 흘러 그 슬픔 끝이 없구나.〔楚地靑山有九疑, 懷王何事信張儀? 商於六
百終難割, 湘水空流不盡悲.〕”, “초나라에 세 집만 남아 있어도 진나라는 망한다는 남공의 그 말이 꼭 맞지는 않도다.
한번 무관에 들어가자 백성 희망 끊겼는데, 잔약한 후손은 무슨 일로 또 회왕이 되었나?〔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 一入
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이 시는 초나라의 회왕이 진나라의 땅을 떼어주겠다는 장의의 계략에 속은 것과, 진나라 소양왕
(昭襄王)의 계략에 속아 무관에 갔다가 억류되어 그곳에서 죽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것이다.
후에 회왕의 후손인 웅심(熊心)이 항우에 의해 초 회왕으로 옹립되었다가 살해당했으니 이가 바로 의제(義帝)이다.
[주09] 병마평사(兵馬評事) : 정6품 서반 외관직으로 보통 평사(評事)라고 약칭한다. 문신을 임명하는 관직으로서 병마절도사의 참모로
장부ㆍ서류ㆍ군기(軍機)ㆍ고과(考課) 등의 업무를 관장하며 병마절도사의 유고시에 그 임무를 대행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사(文士)를 파견하여 무신 수령과 절제사, 만호 등 군사지휘관이 많은 양계지역에서 무신을 견제하고 무신 수령
과 각급 군사지휘관을 규찰하게 하는 데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함경북도와 평안도에 두었다.
[주10] 국경인(鞠敬仁) : ?~1592. 조선 중기의 반란자로, 본시 전주에 살다가 죄를 지어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회령부의 아전으로 들
어가 재산을 모았으나, 조정에 대해서 원한이 많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함경도로 침입하여 회령 가
까이에 이르자 경성부의 아전으로 있던 숙부 국세필(鞠世弼), 명천 아전 정말수(鄭末守)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
켰다.
이때 근왕병(勤王兵) 모집 차 이곳에 와 있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및 그들을 호종하였던 대신 김귀영(金貴榮)
과 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부자 등을 적진에 넘겼다. 이에 청정으로부터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에 임명되어 회령을
통치하며 횡포를 자행하다가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격문을 받은 회령 유생 신세준(申世俊)과 오윤적(吳允迪)의 유인
에 떨어져 붙잡혀 참살되었다. 근왕병은 왕을 측근에서 호위하는 병사이다.
[주11] 임해군(臨海君) 진(珒) : 이진(李珒, 1574~1609)으로, 선조의 첫째 서자이나 성질이 난폭하여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근왕병을 모집하러 가서 함경도 회령(會寧)에서 국경인에 의해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협상을 통해
이듬해 풀려났다.
1608년 일부 대신들과 명나라에서 왕으로 즉위시킬 것을 주장하자 광해군에 의해 영창대군(永昌大君), 김제남(金悌男)과 함께 역
모죄로 몰려 강화의 교동으로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인조 등극으로 복작신원(復爵伸寃)되었고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주12] 순화군(順和君) : ?~1607. 선조의 아들로 순빈(順嬪) 김씨 소생이다. 난폭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민폐를 많이 끼쳐 백
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국경인에 의해 왜군에 넘겨졌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사람을 많이 죽이고 불법을 많이 저질러 양사의 탄핵을
받아 군호를 박탈당하였으나 사후에 복구되었다.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주13] 정말수(鄭末秀) : 명천(明川)의 절의 노비였다.
[주14] 우후(虞候) : 조선 시대 각 도의 절도사(節度使)에 소속된 관직으로 남병사(南兵使)를 제외한 전임(專任)절도사 밑에 두었다. 각
도의 주장(主將)인 절도사의 막료로서 주장을 보필하므로 아장(亞將)이라고도 한다. 절도사를 도와 군기(軍機)에 참여하고 군령을
전달하며 군사를 지휘하는 외에 절도사를 대신해 군사 훈련이나 무기ㆍ군장 점검을 위해 도내를 순행하였다. 남병사는 함경남도 병
마절도사이다.
[주15] 용성(龍城) : 함경북도 경성(鏡城)의 옛 이름이다.
[주16] 최배천(崔配天) : 자는 중립(仲立)이며 본관이 강릉(江陵)이다. 판관(判官)에 증직되었으며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주17] 지달원(池達源) : 자는 사진(士進)이며 본관이 충주(忠州)이다. 벼슬은 참봉(參奉)이었는데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다.
본부(本府)의 유생(儒生)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1일 기사에 의하면, 정문부가 국경인의 난 때 제자들의 비호로 빠져나
와 경성의 해변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지달원의 집에 오래 숨어있었다고 하였다.
[주18] 무계(武谿) : 함경북도 경성(鏡城)에 있는 지명이다.
[주19] 이붕수(李鵬壽) :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중항(仲恒)이다. 정문부의 별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길주 장평(長
坪), 쌍포(雙浦)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1593년(선조26) 1월 함경북도 단천(端川)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병이 후퇴하자 이를 추
격하여 옥탑평(玉塔坪)에서 싸우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1665년(현종6) 함경도 관찰사 민정중(閔鼎重)이 임진왜란 때에 충절을 다한 이 지방 인물들에 대하여 포상할 것을 건의하여
1666년 사헌부 지평(持平)에 추증되고, 경성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
[주20] 강문우(姜文佑) : 자는 여익(汝翼)이며 본관이 진주(晉州)이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이며 1558년(명종13)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만호(萬戶)를 거쳐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지냈다.
[주21] 정현룡(鄭見龍) : 1547~1600. 자는 운경(雲卿),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593년(선조26) 종성 부사로서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ㆍ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과 함께 길주(吉州)에 머무르고 있던 왜적을 토벌하여 잡았으며, 곧바로 영
동(嶺東)으로 이동한 뒤 2백여 명의 왜병을 쫓아내었다. 1594년에는 육진(六鎭)을 침범한 오랑캐를 진압하여 상을 받았다. 1595
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재임 중에 사망하였다.
[주22] 서 충숙공(徐忠肅公) 성(渻) : 서성(徐渻, 1558~1631)으로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이다. 이이(李
珥)ㆍ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1586년(선조19)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 좌랑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으로 함경북도에 이르러 두 왕자와 황정욱 등이 포로가 되자 혼자 탈출했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1613년(광해군5)의 계축옥사
때 단양에 유배되었고 11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였고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했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
향되었다. 저서로 《약봉집(藥峯集)》이 있다.
[주23] 훈융(訓戎) …… 조산(造山) : 함경북도 북변 두만강 가에 있는 진(鎭)이다.
[주24] 어랑리(漁郞里) : 경성부(鏡城府)의 남쪽 백 리 되는 곳에 있다. 어란리(禦亂里)라고도 하며, 이 마을에 팔경대(八景臺)가 있고 팔
경대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무계호(茂溪湖)가 있는데, 이곳이 임진왜란 때 의사(義士) 이붕수(李鵬壽)가 평사(評事) 정문부(鄭
文孚)를 맞이하여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호숫가에 창렬사(彰烈祠)가 있어 정문부 등을 배향하였다. 《藥泉集 卷28 北關十景圖
記》
[주25] 부학(府學) : 부(府)의 학교이다. 부는 여기서 경성부를 말한다.
[주26] 명천(明川) : 함경북도 남동부에 있는 지명으로 길주의 북쪽이다.
[주27] 방원(防垣) : 두만강 가에 있는 진(鎭)이다.
[주28] 장평(長平) : 함경남도 영흥(永興)이다.
[주29] 시도(廝徒) : 천한 일을 하는 일꾼을 말한다.
[주30] 우졸(郵卒) : 역에 소속된 하인으로, 역졸(驛卒)과 같다.
[주31] 영동(嶺東) : 여기서는 마천령(磨天嶺)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주32] 압해정(壓海亭) : 함경북도 남부 길주의 바닷가에 있다.
[주33] 윤탁연(尹卓然) : 1538~159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시호는 헌민(憲敏)
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13)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알성 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다.
1668년 수찬으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임했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북쪽으로 가던 도중
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함경도에 피난하였던 임해군과 순화군이 적의 포로가 되자 왕명으로 함경도 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
고 방어할 계획을 세우던 중 객사하였다.
159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칠계군(漆溪君)에 봉해졌다. 함흥의 창의사에 제향되
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계사일기(癸巳日記)》가 있다.
[주34] 선춘(先春) : 선춘령(先春嶺)으로,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다. 고려 때 윤관(尹瓘)이 토지를 확장하여 여기까지 와서 공험진(公嶮
鎭)에 성을 쌓고 드디어 비석을 영(嶺) 위에 세우고, ‘고려의 국경’이라고 새겼다. 비석의 사면에 모두 글씨가 있었는데 모두 오랑캐
들이 지워버렸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咸鏡道 會寧都護府》
[주35] 운두(雲頭) : 압록강 유역에 있는 운두위(雲頭衛)를 말한다.
[주36] 동건(童巾) : 두만강 유역으로 함경북도 종성(鍾城)이다.
[주37] 다온(多溫) : 두만강 유역으로 함경북도 온성(穩城)이다. 여진족이 들어와 살면서 명칭을 다온평(多溫平)이라 하였다. 세종 때 진
을 설치하였다.
[주38] 강찬(姜燦) : 1557~1603. 자는 덕휘(德輝), 호는 동곽(東郭), 본관은 금천(衿川)으로 고려 시대 문하시중을 지낸 강감찬(姜邯
贊)의 후손이다. 김장생(金長生)의 아버지 김계휘(金繼輝)에게 수학하였고 김장생, 민인백(閔仁伯) 등과 교유하였다.
l582년(선조15)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임진왜란으로 두 왕자가 포로가 되자 의병을 모아 싸우는 한
편, 행재소(行在所)에 결사대를 파견하여 회령사태를 보고했다. 1605년(선조38) 왜적을 토벌한 논공행상에서 선무종훈(宣武從
勳)에 추록되었다. 봉산(鳳山)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주39] 조산대부(朝散大夫) : 조선 시대 종사품(從四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주40] 광해군이 …… 돌아왔다 : 광해군 2년(1610), 46세 때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주41] 광해군 …… 슬퍼하였으니 : 〈초회왕(楚懷王)〉을 말한다. 《농포집》 권1에 수록된 7언절구 〈영사(詠史)〉 4수 중 초 회왕을 읊은 2
수이다. 이 시는 인조반정 5년 전인 광해군 10년(1618), 54세 때 창원 부사 시절에 지은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나라 땅에 구의산이 있거늘, 회왕은 어찌하여 장의를 믿었던가? 상오 6백 리는 끝내 할양받지 못하였으니, 상수는 덧없이 흘러
그 슬픔 끝이 없구나.〔楚地靑山有九疑, 懷王何事信張儀? 商於六百終難割, 湘水空流不盡悲.〕”, “초나라에 세 집만 남아 있어
도 진나라는 망한다는 남공의 그 말이 꼭 맞지는 않도다.
한번 무관에 들어가자 백성 희망 끊겼는데, 잔약한 후손은 무슨 일로 또 회왕이 되었나?〔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 一入
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이 시는 초나라의 회왕이 진나라의 땅을 떼어주겠다는 장의의 계략에 속은 것과, 진나라 소양왕
(昭襄王)의 계략에 속아 무관에 갔다가 억류되어 그곳에서 죽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것이다. 후에 회왕의 후손인 웅심(熊心)이
항우에 의해 초 회왕으로 옹립되었다가 살해당했으니 이가 바로 의제(義帝)이다.
[주42] 최내길(崔來吉) : 1583~1649. 자는 자대(子大), 호는 이재(頤齋)이다.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 공신(靖社功臣) 3등이 되고
예조 참의에 올랐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왕을 호종하고 완천군(完川君)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
했고 도총관을 지냈다.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공조 판서에 이르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최명길의 형이며, 정문부의 장남인 정대
영(鄭大榮)과 동서간이다.
[주43] 모부 모리의 언덕 : 경기도 양주(楊州) 송산(松山)의 선영에 장사를 지냈다. 현재는 의정부시 용현동에 속한다.
[주44]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 : 정역(鄭易, ?~1425)으로, 자는 순지(順之), 호는 백정(栢亭)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판예의사사(判禮儀司事) 정윤규(鄭允珪)이며, 어머니는 대사성 설문우(薛文遇)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장인이다.
1383년(우왕9)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411년(태종11)에 한성 부윤으로 정조부사
(正朝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대사헌이 되었다. 충청도 관찰사, 예조ㆍ형조의 판서, 대제학, 호조 판서를 역임하
였다. 그는 사림의 중망(重望)으로 4조(朝)를 섬기는 데 한결같았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주45] 정희량(鄭希良) : 1469~? 조선 중기의 문신ㆍ시인으로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1495년(연산군1) 증광시(增廣試) 병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이듬해 김전
(金詮)ㆍ신용개(申用漑)ㆍ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하였다.
1498년 선무랑ㆍ행예문관봉교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때 사초 문제로 탄핵을 받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
로 장형을 받고 의주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나 어머니가 죽자 고양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다가, 산책을 나간 뒤 다시 돌아
오지 않았다. 저서로 《허암집》이 있다.
[주46] 이공(李公) 단하(端夏) : 이단하(李端夏, 1625~1689)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계주(季周), 호는 외재(畏齋)ㆍ송간(松磵)이
다. 이식(李植)의 아들이며, 1662년(현종3)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북평사(北評事) 등을 거쳐 1668년 교리로 경서교정청(經書
校正廳)의 교정관이 되었다.
1681년(숙종7) 홍문관 제학이 되어 《현종개수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84년 예조 판서가 되어 《사창절목(社倉節目)》ㆍ
《선묘보감(宣廟寶鑑)》을 찬진(撰進)하였으며, 1687년 좌의정이 되어 병으로 사직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저서에 《외재집》
이 있다.
[주47] 공이 …… 의론하기를 : 《현종실록》 7년(1666) 5월 23일 기사에, 정문부를 우찬성에 추증하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차등 있게
추증한 내용이 나와 있다. 수찬 이단하가 상소하여 정문부의 억울함과 그 충절을 밝히었다. 앞서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정문
부 등을 포상하고 추증할 것을 계청한 바가 있었다.
[주48] 윤공(尹公) 관(瓘) : 고려의 문신인 윤관(尹瓘, ?~1111)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이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102년에 지공거를 맡았고 이어서 재추(宰樞)의 반열에 올랐다. 중요한 업적은 숙종 대 후반에서 예종 대 초반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것이다. 이후 여진족이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며 애걸하자 조정의 결정으로 9성을 여진에게 돌려
주고 철수하였다. 예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주49] 김공(金公) 종서(宗瑞) : 조선 전기의 문신인 김종서(金宗瑞, 1383~1453)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
齋)이다. 1405년(태종5)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했다.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六鎭)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1449년 8월 달달〔達達 ; Tatar〕 야선(也先)이 침입해 요동 지방이 소란해지자 그에 대처하기 위해 평안도 도절제사로 파견되었
다. 수양대군의 걸림돌이 되어 계유정난 때 살해되었다. 1746년(영조22)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주50] 숙종께서 …… 하였다 : 숙종은 현종의 오류인 듯하다. 《현종실록》 8년(1667) 6월 14일 기사에, “경성부(鏡城府)에 있는 정문부
의 사당에 창렬이라고 사액하였다.”라고 하였다.
[주51] 세 악인 : 회령부 아전 국경인(鞠敬仁)과 그 숙부인 경성부 아전 국세필(鞠世弼), 명천 아전 정말수(鄭末守)를 가리킨다.
[주52] 고비(鼓鼙) : 군중에서 사용하는 큰 북과 작은 북을 말한다. 비는 마상고(馬上鼓)로서 기병이 말을 탄 채 치는 북을 말한다. 전쟁터
에 나가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주-D053] 원수 백성 : 국경인과 그 무리를 가리킨다. <끝>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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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嘉善大夫全州府尹,全州鎭兵馬節制使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總府都總管。忠毅鄭公神道碑銘。幷序
顯廟六年十二月戊寅。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臣太和。言倭奴淸正入北方。屠燒城郭。蘇下江東北靺鞨。勒輕騎。深輮茂山富寧地。兵馬評事臣文孚。躬將義師。討淸正搴旗六鎭之外。踐血白㙮之下。威服靺鞨以全邊境。挫蠻夷之氣。建震耀之勳。萬曆以來。宣武諸將之所未有也。靖社時。預元帥薦。而被人誣告下吏。又坐所爲詠史詩。死於獄中。臣竊悲之。倭奴行長。入西方。神宗皇帝命大將軍李如松。率師五萬。擊倭奴平壤城下。惟北方山川隔遠。此神宗皇帝之所不得救。而大將軍之所不能禦也。然文孚以一評事。募兵六千。能力戰。斥逐倭奴。復北方二十二州。而大功未獲封爵。乃以非罪竟死於刀筆之前。豈不痛哉。臣以爲宜命有司。贈文孚爵。以慰北人之心。上乃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總府都總管。公姓鄭氏。字子虗。海州人也。少擧甲科。補漢城府參軍。出爲咸鏡北道兵馬評事。萬曆二十年。平秀吉叛。六月。淸正入北方。會寧府吏鞠敬仁執王子臨海君珒,順和君𤣰及南道兵馬節度使李瑛等。幽之軍中。使林珉。獻于淸正。旣數日。敬仁叔父世弼。以鏡城叛。末秀以明川叛。爲淸正爪牙。北方大亂。縛節度使韓克誠,虞候李範等。以迎淸正。自六鎭至咸關嶺千餘里。皆屬倭奴。公發憤。潛與慶源府使吳應台,慶興府使羅廷彥等。入鏡城。謀復北方。衆畏世弼。皆分散。不可復集。公棄去。弊衣行乞。入富寧靖巖山中。菜食久之。至龍城。依巫覡韓仁侃家。仁侃熟視曰。子豈非兵馬評事邪。遂厚遇之。八月中。公與布衣崔配天,池達源二人者。或負或携。從間道。南抵武谿。武谿處士李鵬壽見公容貌。大說之。迎至其家。居一月。公欲浮海下東南。鵬壽慨然爲公語曰。吾欲建義討倭奴。陰求烈士之可爲將者。而未得其人也。今公來臨。是上天佑我北方也。因留公招集義旅。鏡城壯士姜文佑,鍾城府使鄭見龍。願爲前行。徐忠肅公渻。聞公之風。亦歸之。鵬壽身自負軍糧。間走吉州。覘倭奴軍中虗實。時淸正屯于安邊。與世弼使諜不絶。公患之。乃令文佑。從數騎。邀於道中。盡殺之。使諜遂絶。見龍等勸公立號。公不肯。鵬壽流涕固請之。然後乃許。衆遂推公爲大將。見龍,應台爲次將。公自以年少位卑。讓於見龍。見龍固辭不敢當。諸將士亦願隷公。會靺鞨。自蘇下江。襲訓戎,阿山,撫夷,造山四鎭。殺掠人民。公由是主義旅盟。卽遣使于世弼。諭以戮力禦邊境。九月。公自漁郞里。次于柳亭。又遣使請與世弼會府中。世弼盛兵以待之。公引麾下百餘騎。馳入府中。以利害反復譬曉。世弼畏服。不敢動。乃使親屬。居公旁。察其機變。人有勸公誅世弼者。世弼聞之。乃大懼。公夜屛人。與世弼語府中事。不色疑。世弼甚喜。已而。倭奴九十餘。夜薄城下。公命將士擊斬之。於是世弼。與其子。禽倭奴將。公錄其功。申聞之。世弼益喜。乃自安。公又赦府中叛兵。嘗射己者。爲禆將。六鎭戎士。皆感激願屬麾下。居未幾。會寧諸生吳允廸服公之義。言於府學曰。敬仁可斬。府中義士申世俊。乃吹角。士卒皆會。諸生尹岦等六人。勒令士卒。斬敬仁及其義兒崔鱗水等。冬十月。明川士民二百人。共討末秀。敗績潰府中。義士金千年生擒末秀。及其黨張應豪等。自是南北得通道。徵兵稍至。明日。公建大將旗。登南門樓。縛世弼等十三人。皆斬之。以徇其軍。於是威聲震北方。列鎭壯士應募者。至六千人。公與諸將。議出師。見龍曰。倭奴方銳不可敵。宜保鏡城。以伺其釁。公奮曰。文孚本興義兵。爲國耳。今守一城。不出戰。欲效閨門女子爲邪。乃分其兵爲三衛。出永康驛。行數里。有人走告曰。倭奴軍盛。公與戰必不利也。宜城守以自保。公怒曰。汝爲倭奴沮吾軍邪。立斬其首。懸旗上。次于明川。以防垣兵馬萬戶韓仁濟。爲伏兵將。又令從事元忠恕。率精兵屯吉州北三十里。與倭奴戰于海汀。斬其帥先登二人。倭奴遁去。忠恕乘勝追擊之。至長平。倭奴直正與將軍都關汝文。引大兵敢死搏戰。文佑忠恕分左右。縱騎突進。仁濟伏兵又迭前。廝徒郵卒。無不鼓勇。直正下馬遂步闘。自申至戌。四面流矢如雹集。倭奴力屈。始升高。文佑,忠恕皆怒馬先後夾馳。上峻阪。直正軍潰。遂北走。文佑追至長德山。都關汝文亦中矢十餘而遁。伏兵四出。大破之。殺其巨魁五人。斬首八百二十五級。其餘衆亡入山者。輒縱火而燒殺之。中矢墜崖而死者。不可勝數。奪戰馬一百十八匹。又得旌旗戈戟鎧甲甚多。十一月。三衛合兵。圍吉州。倭奴堅守不可拔。公以爲吾兵驟攻。死傷必多。不如先擊嶺東柵。柵中旣平。則吉州勢孤援絶。吾取之如籠中鳥耳。卽移兵至雙介浦。遇直正。三衛精騎奮擊之。遂破倭奴於壓海亭下。斬百餘級。僵尸縱橫十五里。公又進圍吉州。明日。爲檄射城中。倭奴恐懼。皆遁去。十二月。公以始斬世弼功。特加通政。觀察使尹卓然忌公之功。乃移文免公大將。見龍代之。會節度使令公廵行六鎭中。以綏靺鞨。公率麾下五十人。北行郡縣。誅有罪。旌有功。拊禦戰守。能得其方。靺鞨畏愛。私相戒諭。悉還其所掠人口。公具酒食。招其酋長二百人以饋之。溫言開告。繇先春,雲頭以南。至童巾,多溫諸族。不敢復爲邊境害。自卓然免公大將。人心不平。六千壯士多散去。卓然始懼。乃復以公爲大將。明年正月。公單騎馳至吉州。六千壯士。見公來。勇氣百倍。散去者亦皆還集。端川郡守姜燦造公語曰。倭奴橫行郡中。願公分兵以擊之。公選精兵三百人。爲四隊。伏於城外。使端軍挑戰陽北。倭奴追之抵嶺下。四隊並出馳擊之。倭奴敗走。提空礮發。皆不中。公力戰。或遮其前。或斷其後。斬六十級。居五日。淸正勒兵二萬人。踰摩天嶺。與直正合衆北上。公引勁騎六百人。策馬而進曰。吾爲國家不戰死。非忠臣也。將士從之。莫敢有畏敵而退者。終日轉闘六十里。至白㙮郊。以輕騎。直搗倭奴。大破之。流血盈野。中矢死者以千數。倭奴載尸入城中。縱火燒之。夜淸正棄城南遁。不暇炊食。於是。北方始廓淸。公遣配天上捷書。宣廟流涕。加配天朝散大夫。卓然恚。積公過失。列狀論之。故公不得見用矣。三月。授永興府使。改穩城。遷吉州牧。已而。召拜掌隷院判決事。光海卽位。以副使。朝天子。明年。使還。北方人上疏頌功。陞嘉善。進五衛都總府副總管兵曹分司參判。皆不就。公爲人剛簡謹默喜飮酒。大醉淋漓。賓客不得見其面也。仁廟卽位。被元帥薦。公歎曰。吾將不免矣。乃以母老。求終養。出尹全州。不二年。被人誣告。逮繫獄。無罪當釋。嫉公者得詠史詩以中之。始光海時。公爲詩。傷楚懷王。盖其意曰。懷王一入武關。民望已絶。則其孫又何以稱懷王也。後崔來吉見其詩。遂傳於世。公由是坐。被考問。以天啓四年十一月己巳。卒于獄中。享年六十。以明年某月某日。葬某府某里之原。肅廟時。謚曰忠毅。七世祖貞度公易。事康獻。以忠勤聞。曾仲祖希良。官至藝文館檢閱。佯沈江。不知所終。皇考諱愼。某府府使贈某曹參判。公之配曰某縣某氏。某官某之女也。有子幾人。曰某公。旣卒之四十二年。兵馬評事李公端夏議。北方自尹公瓘。初置九城。後三百十七年。郡縣入于蒙古。金公宗瑞復其地。遂置六鎭。自金公初置六鎭。後一百六十一年。郡縣入于倭奴。鄭公文孚復其地。此三人以勞定國。法宜祀。於是北人立公之廟於武谿。肅廟賜名曰彰烈。銘曰。
鄭氏顯聞。自貞度始。遙遙七世。公承其祉。初授評事。以佐朔帥。荒服之士。罔不執贄。島夷孔熾。而狄又棘。三孽內奰。
爲虎羽翼。芒芒北門。淪于漆齒。屛臣養寇。亦孔之耻。公提義師。奮自武谿。四士蹻蹻。與從鼓鼙。仁介禮冑。忠信爲旌。
旣戮讎民。遂敦雉城。輮彼長平。其旅六千。至于白㙮。天討是專。乃拊山戎。以輯以柔。氊裘率從。咸頌王休。朔方載定。
伊誰之功。咨汝屛臣。乃反訾忠。有赫嘉謚。其屈斯直。永昭義問。以刻于石。<끝>
江漢集卷之十三 / 神道碑
▲정문부장군 신도비
▲정문부장군 북관대첩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