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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8. 5. 26. 19:19
■ 좌의정 화곡 이공 묘갈명
(左議政 華谷 李公 墓碣銘)
[생졸년] 1620년(광해군 12)~1673년(현종 14)
명곡 최석정 찬(明谷 崔錫鼎 撰)
목능(穆陵: 宣祖의 능 이름이니 능으로 그 임금을 칭한다)이 왕위에 있을 재 명신이 있으니 벽오 이공(碧梧李公)이다.
이름은 시발(時發)이고 벼슬은 형조판서(刑曹判書)셨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신부인(申夫人)을 재취(再娶)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이조판서(吏曹判書) 경휘(慶徽)와 좌의정(左議政) 경억(慶億)이다.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의 세 조정을 섬기어 세상에서 어진 공경(公卿)이라고 칭했다.
의정공(議政公)의 자는 석이(錫爾)고 호는 화곡(華谷)이다. 태창(泰昌>명나라 광종의 연호) 경신(庚申,1620)년에 탄생했다.
칠(七)세에 부친께서 도라 가셨다. 신부인(申夫人)이 현철하고 글을 통하여 몸소 스승이 되어 주야로 가르치고 독려하였다.
장성함에 문장이 성취 되였다. 숭정(崇禎) 갑신(甲申,1644)년의 정시(庭試)에 장원(壯元)하고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랑(郎)과 사서(司書). 정언(正言)을 역임 했다.
효종(孝宗)이 특별히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제수하여 계단을 밟지 않고 특용한 것이다.
사람들이 다 영화로 여겼다. 여러 번 옥당(玉堂)과 춘방(春坊>世子侍講院)에 들어가서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승배(陞拜) 했다.
현종 즉위년에 승지(承旨)로 대사성(大司成)에 옮기고 또 대간(大諫)으로부터 부제학(副提學)으로 옮겼다. 다음에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제수되었다. 다음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서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고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승진하여 호조(戶曹). 예조(禮曹).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삼사(三. 四)차나 역임 하였다.
전후에 걸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세 번 배수(拜受)하고 비변(備邊). 선혜(宣惠).제조(提調)를 겸직했다. 임자(壬子)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하고 조금있다.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였다.
오십사(五十四)세로 세상을 돌아가시니 상감(上監) 께서 슬퍼하여 조회를 철폐>휴뮤)하고 조문(弔問). 제전(祭典). 부의(賻儀). 거마(車馬)를 내리고 관(官)에서 최빈(衰殯)과 장사(葬事)를 갖추 도록하고 녹봉(祿俸)을 3년 까지 주도록 명했다.
처음에 진천(鎭川)에 장사 지냈다가 십년 뒤 갑자(甲子,1684년)에 청안(淸安: 오늘날 세종시 금남면 영대리 584-2) 어느산 신향 언덕 신좌(申坐)에 이장(移葬)하고 배위(配位)와 합폄(合窆=合葬)· 했다.
공은 사람됨이 외유내강하고 수염이 아름답고 신체와 용모가 청수(淸水)하였다. 남하고 같이하매 화락하였으나 일찍이 기색(氣色)을 잃은 적이 없고 남의 잘못을 궁극적으로 배척하지 안했다.
그러나 말이 간략하고 침중하여 악의로 대하지 않고 엄숙했다. 그 조정에 있으매 마음 갖기나 의논을 항상 평화를 주장 하였으되 시비와 사정에 이르러서는 지키는 바가 확실했다. 벼슬에 임하여 일을 처리함에 헌법(憲法)과 명령 지키기를 오직 삼가고 대체를 잡어 까다롭지 않으나 일에 나아가서는 반드시 규모가 있어 영구에 법이 되었다.
집에 있으매 청염하고 효우 하여 사람이 못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자연에 가깝고 가식하는 것이 없었다. 중씨(仲氏)와 더불어 동시에 현달하여 사림(士林)에 영수(領袖)가 되었다. 이때에 사대부(士大夫)들이 심각히 행검(行檢)을 가다듬어 의론이 바람일 듯하였다.
공의 형제는 평온하고 진실하여 과격한 행실하기를 부끄러워했다. 아는 자가 마음으로 흠복(欽服)하였다. 효종(孝宗) 초기에 정언((正言-正六品)이 되어 봉사(封事: 밀봉하여 직접 군주에게 바치는 의견서)로 여러 천(千)가지 말을 올리어 뜻을 세우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하늘의 경계를 삼가며 인심(人心)을 단결하고 군정(軍政)을 수비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조공 익(趙公 翼)이 스승을 변무(辨誣: 사리를 따져서 옳고 그름을 가리고 억울함을 밝히는 것)한 것이요.
편벽(便辟: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아첨함. 또는 그런 사람) 됨이 아니라는 것을 호소했다. 위에서 우대하여 비답(批答: 국왕이 내린 답서) 했다. 정의현감(旌義縣監=제주도의 남쪽에 있는 현) 안집(安緝)이 제주목사(濟州牧使) 김수익(金壽益)으로 더불어 서로 미워했다.
집(緝)은 무인(武人)이다. 상사가 재물을 낚는다하며 힐책하며 겸손치 않았다. 감사(監司=관찰사)가 소장(所長)으로 주달(奏達=임금에게 아뢰다)하여 특명으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핵실(覈實=어떤 일이나 사건 따위의 실제 상황을 자세히 살펴봄)하라 하여 공(公)이 명령을 받들고 나아가 그 곡직(曲直=사리의 맞음과 틀림)을 절충하여 돌아와 주달했다.
상(上=임금을 말함)의 생각에는 공이 문무(文武)로써 좌우할 것이라 했더니 주달함이 명확하여 용서함이 없음을 보고 크게 가상하여 김수익(金壽益)의 죄상 감정하기를 공(公)의 말과 같이했다.
또 어사로 영남(嶺南)에 군정(軍政)을 안찰(按察=조사하여 살핌)하고 추쇄(推刷=빚을 모두 받아들이던 일)로 영남(嶺南)을 가고 암행(暗行)으로 경기(京畿)를 염탐함에 모두 임금의 뜻에 알맞게 했다.
대사헌(大司憲) 조공 석윤(趙公 錫胤=호는 樂亭, 白川사람)이 죄 없이 파직되었다. 공이 논쟁을 벌리 였더니 상(上)이 크게 성내어 말씀이 지극히 엄위하여 경성(鏡城=함경북도 중앙에 있는 지명)에 귀양 보냈다.
해를 넘기어 석방했다. 수년 만에 정언(正言=司諫院의 正六品)으로 연대(筵對=임금이 경연에서 신하들과 면대함)함에 임금이 공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 하고 얼굴 빛이 온화하며 말씀하되 제주도(濟州島)에 어사(御使)로 있을 적에 심히 공정함으로 내가 너를 가상히 여기는 것이다.
지난번에 견책(譴責)한 것은 나의 사색(辭色=말과 얼굴빛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너무 급한 것임으로 내가 나의 과실을 뉘우치는 바이니 네가 전에 일을 중지하지 말고 더욱 장래를 힘쓰라고 부탁하고 경연(經筵=正三品衙門)에 신하를 돌아보며 말씀하되 이 아무개의 아버지가 누궁니고? 물었다
대답하되 선묘 조(宣廟朝)의 명신 이시발(李時發)의 아들이라 했다. 이보다 먼저 중씨(仲氏=춘전 이경휘를 말함)가 옥당(玉堂=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왕에게 학문적 자문을 하던 관청)으로써 일을 의논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러 금고(禁錮)로 해를 경과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서용하게 되니 특이한 은수(恩數=임금이 베푸는 은전의 정도)였다. 그 후에 공이 정충증(怔忡症=까닭없이 불안해 지는 증세)으로 오랫동안 휴가 했다.
어의(御醫)에게 명하여 진찰케 하고 약제와 반찬을 하사하고 또 중씨(仲氏)에게 묻되 아우의 병이 근래에 어떠한고? 물었다.
지난번에 남으로 바다를 넘고 북으로 변방에 귀양가서 병에 근원이 나로 말미암아 발생했다 하시며 전후에 걸치어 은총으로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왕지(王旨)를 응하여 여섯 가지 조목조목 진달(進達)하고 인하여 공주(公主)의 재택(財宅)이 화려함을 논하여 말이 심히 간절하였다. 옛적 임금이 몸으로 어려움을 이행하여 어름을 안고 불을 잡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러한데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임금이 가상하여 공주의 재택(財宅) 五十간을 회철하라 명했다. 현종(顯宗=조선 18대왕)이 즉위 후 처음 조회에서 영상(領相) 정태화(鄭太和,호는 陽坡, 東萊人)에게 물었다. 이 아무개 형제가 누가 나은가? 하니 대답하기를 난형난제(難兄難弟)라 아뢰었다.
상(上)이 말씀하시기를 선왕(先王)이 경억(慶億)은 크게 쓰일 것이라 칭했다하고 이로부터 예우가 날로 융성했다.
그리고 변방(邊方)을 안찰함에 일의 처리가 공정하고 부지런하였다.
항상 박한 풍속을 돈독히 하고 탐하는 관리를 추방시키고 적폐(積弊=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를 버리고 군사 일을 수비함으로써 요점으로 삼았다. 호서(湖西=충청도’를 달리 이르는 말)에 있을 적에 사천(私賤=남의 하인)으로 양민(良民=보통사람) 한테 장가들어서 낳은 소생이 아비의 역사를 따르는 것이 그릇된 풍속에 나왔다하여 이제부터 남자는 아비를 따르고 여자는 어머를 따라서 법령으로 제정했다.
경기감영(京畿監營=경기 관찰사가 집무 한는 관아/오늘날 서울 종로구 평동 164 적십자병원 자리) 봉급에 여액을 판출하여 관사(館舍)를 건축하여 여섯 곳의 역(驛)에 마부를 거처하게하고 곡식 백(百)여석을 염출하여 거두고 방출할 때는 잉여분(剩餘分)을 취하여 관내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고마(雇馬=시골 관아에서 민간으로부터 세내어 징발하던 말)법을 창작하여 체부에 정한 임금(賃金)을 지급하니 역로(驛路)에서 편리하다 칭하여 지금까지 준행했다. 경조 윤(京兆 尹=조선시대 한성부의 으뜸 벼슬)이 되었을 때, 호적법이 소홀(疏忽=예사롭게 여겨서 정성이나 조심하는 마음이 부족함)하고 그릇됨이 많아서 옛 제도를 밝히기를 권하여 루적(漏積)한 사람은 엄벌했다.
스리고 형사(刑事)를 다룰 적에 한결 같이 밝고 삼가는데 있고 청탁을 받지 안했다. 그 후 이조(吏曹)에 있을 때는 요행을 억제하고 품위를 밝히고 침체함을 이르켜 세우되 더욱 동궁관아(東宮官衙=태자가 있는 궁궐) 일에 치중하여 항상 선발에 가의(加意=특별히 마음을 더 씀)하고 수령 방백(守領方伯)의 외직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사람들이 감히 삿 적으로 구하지 못하게 하고 친구 사귀기를 독 실히 하여 마음에 허여한 사람이 있으면 모두가 좋아하고 미워한다하여 취하고 버리지 않았다.
서판서 필원(徐 判書 必遠)과 김 참판 시진(金 參判 始振)이 시대와의 나가는 길이 달라서 사람을 따라 행동하지 않음으로 당국에 빈척(擯斥=싫어서 물리쳐 멀리함)이 되었다. 여러 이름 있는 선비들이 일찍이 친밀한 이도 점차 성글고 끊어졌으나 홀로 공의 형제가 서로 변함없이 보전하여 시종 여일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대부(士大夫)들이 더욱 어질게 느꼈다, 아! 당론(黨論=東人.西人.老論.小論의 부당한 議論)이 성함으로부터 친구의 도리가 더욱 투박하여 서로 영예로 격동하고 서로 권력으로 불러 평생에 서로 흠모하고 서로 추대하여 골육형제(骨肉兄弟)와 같이 사생동거(死生同居) 한다고 하든 사람들도 한 말만 합하지 않으면 팽개치기를 질병과 같이하고 심한사람은 서로 배척하기를 구수(仇讐=자신 또는 자신의 가정이나 나라 따위에 해를 끼치어 원한이 사무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나 집단)와 같이 하였다.
공의 형제에 비하면 어떠할까? 관찰사 김징(金澄)이 그런 일을 규탄하기를 좋아해서 원망이 많았고 간관(諫官)에 탄핵한 바가 되었다.
그 사람이 연회(宴會)에 수요(需要=잔치에 소요되는 물자)를 칭탁(稱託=핑계를 댐)하고 재물을 탐했다하여 장차 횡령(橫領)죄를 적용하려했다.
공이 의금부에 있어 핵실(覈實=어떤 일이나 사건 따위의 실제 상황을 자세히 살펴봄)하여 다스릴 무렵에 어버이께 헌수(獻壽) 하려다가 죄를 당함이 성세(聖世=어진 임금이 다스려 태평한 시대)의 일이 아니라고 하여 과오를 봐서 어짊을 알 것 「관과지인(觀過知仁) 이라는 古語」이라 하여 평탄하게 주달하였다가 행신(倖臣=임금의 총애를 받아 권리가 좋은 신하) 허적(許積)에 지적한 바가 되어 체포되고 삭직 까지 되었다.
공이 마음에 간직하지 않았다. 마음속 행실이 순독하여 어머니를 섬김에 지물(志物)에 봉양이 겸비하여 지극했다. 중씨와 같이 조석으로 좌우에 모시여 공사와 빈객이 아니면 곁을 떠나지 않고 록 봉을 쓰고 줌을 사적으로 않고 질병이 계시면 근심을 다하고 상사(喪事)에 대하여는 예절의 어김이 없었다.
중씨와 동거함에 화락하고 세상을 돌아갔을 때는 슬퍼하기를 심히 하여 매양 생각에 눈물 흘리고 소득이 있으면 반듯이 나누어 제사를 궐하게 하지 않았다. 평거에 집안 식구의 살림을 묻지 않으며 담장과 가옥을 수축하지 않고 의복이 한사(寒士=가난하거나 권력 없는 선비)와 같았다.
세상 번화한 일에 담담하여 좋아하는 바가 없었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이미 영귀(靈龜) 함에도 오히려 날로 중용(中庸)과 주자서(朱子書)를 취하여 외우기를 게을리 하지 안했다.
만년에 휴퇴할 뜻이 있어 노강(鷺江-오늘날 서울의 노량진의 옛 이름) 남쪽에 터전을 마련하여 몸을 마칠 계획을 하려다가 직위와 예우(禮遇=임금이 내린 다우를 말함)가 더욱 무거움으로 인하여 미쳐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공이 늘 세상에 만뢰(挽誄=만장 또는 祭文)와 비갈에 과대 칭찬이 많음을 병폐로 여기었다. 질병이 극심함에 여러 아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내 직위가 경재상(卿宰相)에 이르렀으나 공업이 가히 기록할만한 것이 없으니 만사(輓詞,輓章)를 구하지 말고 시호(諡號)를 청하지 말며 묘비를 세우지 말고 장사(葬事)와 제사(祭祀)는 간소하게 치러서 내 뜻을 따르라 하였다.
아! 여기에서 가희 공을 보겠다.
부인은 해평윤씨(海平尹氏)로 현상(賢相) 두수(斗壽)의 증손이고 감찰(監察) 원지(元之)의 따님이다. 부덕(婦德)이 구비하여 시어머니를 섬기고 남편을 섬김에 그 도리를 다하고 동서(同婿)를 대우함에 말이 없고 자녀를 가르침에 법도가 있으며 비복(婢僕=계집종과 사내종)을 대함에 인자하고 자혜로워 한세상 부녀의 사범(師範)이 되었다.
아들이 셋이요. 사위가 둘인데 모두 문보(文譜=문과 급제자들에 관한 인명록)에 올랐다. 장자 인숙(寅熽)은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요. 차자 인병(寅炳)은 알성시에 장원으로 형과 함께 문과에 오르고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그쳤다.
다음 인엽(寅燁)은 지금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바야흐로 국정에 참여하였다. 둘의 사위는 정승(政丞) 최석정(崔錫鼎)과 지평(持平) 홍만적(洪萬迪)이다. 교리가 이들 셋이니 항곤(恒坤). 형곤(衡坤). 화곤(華坤)이요. 딸은 한사람이다.
관찰이 아들 둘인데 서곤(瑞坤). 운곤(運坤)이요. 딸은 둘이다. 판서가 아들 셋인데 하곤(夏坤)은 진사(進士)요. 한곤(漢坤)과 명곤(明坤)이요. 딸이 하나이다. 최 씨 부인은 아들이 하나이니 창대(昌大)가 지금 광주부윤(廣州府尹)이요. 딸이 둘이다.
홍씨부인은 아들 셋인데 중구(重九)와 중오(中五). 중일(中一)이요. 딸은 네 사람이다. 나 석정(錫鼎)이 이찍 공(公)의 가문에 장가들어 심심한 대우를 받았다. 고을 섬긴 제가 십여년(十餘年)이다.
나아가 그의 행실과 업적을 보고 들어옴에 그의 연거(燕居=한가함) 함을 보아 비록 아는 바는 없으나 또한 그의 몇몇 일을 대강 들을 수 있는데 화하(변화)되 거의 흘러버리지 않고 담박(泊然=욕심이 없고 마음이 평정한 모습)하되 싫정내지 않는 어른이다.
형제가 좋은 이름을 같이하여 울연(蔚然=감정이나 생각 따위가 흥성함)히 밝은 시대에 명신이 되었으니 「송경문(宋景文)=宋나라 송기宋祁)의 시호」. 「한충숙(韓忠肅) 형제에 비하면 우열과 상하를 논하기는 쉽지 않으나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면 자못 아는 말이 아니다.
아! 시경(詩經)에 숭고(崧高). 강한(江漢) 두 편에 어진 신하를 기를 적에 반드시 주선왕(周宣王=주나라 11대왕)의 덕에 근본 했으니 이것이 어찌 공(公)만이 어질뿐이겠는가!?
또한 선왕(先王)에 성덕(盛德=크고 훌륭한 덕)을 보겠도다. 옛 말 에 이르기를 그럼으로 그 시대를 의논한다 하였다. 나 석정(錫鼎)이 이에 거듭 감상(感想)이 있는 것이다.
공(公)은 경주(慶州) 사람이다. 원조(遠祖=먼 조상)에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이 덕업과 문장으로 고려 말에 현달하니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 칭하였다. 오대조(五代祖)의 이름은 원(黿)이고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박취금 팽년(朴醉金 彭年)의 외손(外孫)이다. 점필재(佔畢齋)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문행(文行)이 나타났으며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화를 당했다. 어머니 신부인(申夫人)은 즉 중조 조(中宗朝) 때의 명상(名相) 문경공 용개(文景公 用漑)의 후손(後孫)이다.
아버지는 승지(承旨) 응구(應榘)이니 성 문간공(成 文簡公=成渾,1535~1598)의 수제자(首弟子)이다. 기국(器局)과 행의(行誼)가 시대에 인중(人中)되었다. 옛적에 남추강 효온(南秋江 孝溫)이 일찍이 재사당(再思堂)의 어짐을 칭찬하여 말했다.
본가와 외가 두 집의 미(美)가 한사람에 모았다 하니 나도 꽁(公)의 형제에게 또한 이러는 것이다. 명(銘)에 이르되
아! 충익공(忠翼公)은 목릉(穆陵=조선 제14대왕 선조를 말함)에 이름난 경상(卿相)일세.
두 어진 아들이 있어 그 이름이 크도다.
온온한 우리 고(公)은 간솔함을 행하고 곧게 살았네.
공정. 청렴. 민첩. 자혜롭고 결백과 청명으로 지켰도다.
세 조정에 벼슬을 역임하여 나라에 줄기가 되었네.
붕당(朋黨)에 따르지 않고 권력에 기울지 않앗도다.
벗들은 그의 신의를 따르고 백성은 그의 공평함을 칭송햇네.
임금이 말씀하되 숙(叔)씨와 중(仲)씨가 누가 중하고 경한가 하니
영상이 말하되
아! 아우라기도 어렵고 형이 라기도 어렵습니다.
화하되 능히 조수하고 귀하되 교만하지 않았도다.
직위는 재상에 이르렀으니 아름답게 훌륭한 명망이 잇네.
후손에게 끼쳐줌에 또한 남은 경사가 있도다.
묘소가 길지를 만나니 영세(永世)에 편안 하도다.
묘문(墓文)에 넘친 말이 없으니 공경히 평생 사를 지었을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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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議政府左議政華谷李公墓碣銘
明谷 崔錫鼎 撰
穆陵在宥。有名臣曰碧梧李公諱時發。官刑曹判書。諡忠翼。繼娶申夫人生二子。吏曹判書諱慶徽。左議政諱慶億。歷事 仁孝顯三朝。世稱賢公卿。議政公字錫爾。號華谷。以泰昌庚申生。七歲而孤。申夫人賢而通文史。身自爲師。日夜敎督。及長。詞華蔚然。崇禎甲申。擢庭試壯元。歷拜禮兵郞,司書,正言。 孝宗特除弘文修撰。不階薦錄。人以爲華。累入玉堂春坊。以政府舍人。陞拜忠淸道觀察使。 顯宗初。以承旨移大司成。又自大諫移副學。特授漢城右尹。歷畿伯,都憲,參銓。陞判刑曹。歷戶禮工判書,三四宰。前後凡三拜冢宰。兼備邊宣惠槐院提調。壬子。進拜右議政。俄陞左相。年五十有四卒。 上震悼輟朝。弔祭賻賵。官庀殯窆如禮。命給祿終三年。初葬鎭川。後十年甲子。遷葬于淸安茅山辛向原。夫人祔焉。公爲人內剛而外溫。美鬚髥。神淸貌癯。與人和樂。未嘗有失色。不窮斥人過。然言辭簡重。不惡而嚴。其立朝處心持論。常主於平允。至是非邪正。所守確然。當官莅事。守憲令惟謹。存大體不苛。嬈然所在。必有規爲。可爲永久法。居家潔廉孝友。有人所不及者。然咸近自然。不假修飾。與仲氏同時顯用。爲士林領袖。當是時。士大夫多刻厲名行。言議風生。而公兄弟恬平眞素。恥爲矯激之行。識者心服。 孝宗初爲正言。上封事累千言。請立志勤學。謹天戒結人心修軍政。因訟趙公翼爲賢師卞誣。非出於偏係。 上優答。旌義縣監安緝。與濟州牧使金壽翼交惡。緝武人也。謂上官漁貨。爭詰不遜。道臣狀聞。特遣御史按覈。公承命往。衷其枉直而歸奏。始 上意公以文武。有所左右。得奏明核無縱舍。大嘉之。勘壽翼等罪如公言。又以御史按察嶺南軍政。以推刷往嶺南。以暗行廉問畿甸。皆稱旨。大司憲趙公錫胤以非罪特罷。公爭之。 上大怒。辭旨極嚴。命栫棘鏡城。踰年放還。居數年。以正言筵對。 上召公使前。玉色溫然曰。耽羅按事甚公正。予用爾嘉。往時嚴譴。是予聲色太遽。予悔予過。爾其無懲前事。益勉方來。顧謂筵臣曰。李某之父爲誰。大臣對曰。是 宣廟朝名臣李時發之子也。先是仲氏以玉堂論事忤旨。錮且經歲。至是始命甄敍。異數也。其後公患怔忡。在告久。命御醫診視。賜藥劑珍膳。又問仲氏曰。爾弟病近比何如。往者南踰海北竄塞。病源祟此。由予致之。其前後寵遇如此。嘗應旨條陳六事。仍論主第宏麗。言甚剴切。有曰古之人君。躬履艱難。有抱氷握火之志者。必不留心於此。 上嘉納。命撤主第五十間。 顯宗初朝而問領相鄭太和曰。李某兄弟孰優。對以難兄難弟。 上曰。 先王稱慶億可大用。自是眷遇日隆。其按藩。聽斷公勤。恒以敦薄俗戢貪吏祛積弊修武備爲要。在湖西。以私賤娶良所生從父役。出於俗謬。請自今男從父女從母。定爲絜令。在畿營。斥俸餘搆舍。以館六驛夫馬。捐穀百餘石。斂散取贏。以濟其乏。創雇馬法。以資遞立。驛路稱便。行之至今。其爲京兆。以版籍多疏謬。請申明舊制。漏籍者嚴其律。其理刑獄。一出於明愼。不受請托。其秉銓。抑僥倖。淸品流振淹滯。尤致意 東宮僚屬。常加遴選。愼擇外官。牧伯之職。人不敢私求。篤於交友。苟心所與。不以衆好惡爲取舍。徐判書必遠,金參判始振。與時詭趨不能隨人俯仰。爲當路所擯。諸名流所嘗親密。浸以疏絶。獨公兄弟相保母變。卒與之終始。由是學士大夫益賢之。噫。自黨議益盛。朋友道益偸薄。相激以名。相招以權。生平相慕悅相推重。謂若骨肉兄弟然。以死生相爲者。一言不相入。棄之若厲。甚至相排擊若寇讎。此其視公兄弟。爲何如也。金觀察澄以喜彈射多怨。爲諫官所劾。謂其托宴需饕貨。將致贓律。公以知義禁按治。以爲壽親而獲罪。非 聖世事。引觀過知仁平奏之。爲倖相積所詆。被逮削職。公不以爲意。內行純篤。事大夫人。志物兼至。與仲氏朝夕左右。非公事賓客。不去側。祿俸餽遺無敢私。侍疾致憂。居喪無違禮。與仲氏同居。盡湛和之樂。及沒哀甚。每念出涕。有得必分。毋乏其祀。平居不問家人產業。不修垣屋。被服如寒士。於世味紛華。泊然無所好。好讀書。旣貴。猶日取中庸朱子書。誦數不怠。晩年有退休志。卜築鷺江之南。爲終焉計。因位遇益重。未及遂而遽歿。公每病世之挽誄碑碣多溢美。疾甚。謂諸子曰。吾致位卿相。而無功業可紀。愼勿求挽詞。毋請諡。毋樹墓碑。葬祭簡而毋豐。以明吾志。嗚呼。此可以觀公矣。夫人海平尹氏。賢相斗壽之曾孫。監察元之之女。婦德甚備。事姑事君子。盡其道。處妯娌無間言。訓子女有法。御婢僕。嚴而惠。爲一世婦女師範。子男三人。子壻二人。俱籍文譜。長寅熽弘文校理。次寅炳謁聖狀元。與兄同榜。官止觀察。次寅燁今爲兵曹判書。方柄用。二壻議政崔錫鼎持平洪萬迪。校理三男。恒坤,衡坤,嵩坤。女一人。觀察二男。瑞坤,運坤。女二人。判書三男。夏坤進士狀元。漢坤,明坤。女一人。崔氏婦一男昌大。今廣州府尹。女二人。洪氏婦三男。重九,重五,重一。女四人。錫鼎早贅公門。辱視遇甚。得事公十年餘矣。出而觀其行業。入而覵其閒燕。雖無所識知。亦可謂粗得其一二。庶幾乎和而不流。淡而不厭者焉。仲季並美。蔚爲煕代名臣。其比宋景文,韓忠肅兄弟。未易軒輊。謂古今人不相及。殆非知言也。嗚呼。崧高江漢。必本諸周宣之德。則此奚獨公之賢哉。亦有以覩夫 先王之盛。傳曰。是以論其世也。錫鼎於是重有感焉。公慶州人。遠祖文忠公諱齊賢。以德業文章。顯于麗季。世稱益齋先生。五代祖諱黿。號再思。朴醉琴彭年之外孫。遊沾畢齋門。文行著稱。被戊午史禍。申夫人。卽 中宗朝名相文景公用漑之後。考承旨應榘。成文簡高弟。以器識行義。見重於時。昔南秋江孝溫嘗稱再思之賢曰。內外兩家之美。鍾於一人。不佞於公兄弟亦云。銘曰。
猗嗟忠翼。 穆陵名卿。有二子賢。遹大厥聲。溫溫我公。行簡居貞。公廉敏惠。持以潔淸。歷職 三朝。爲國榦楨。弗朋以隨。弗權以傾。友服其信。民誦其平。 王曰叔仲。孰斯重輕。相君曰都。難弟難兄。和而能守。貴而不盈。位極三事。休有令名。詒我後人。又食其贏。宅兆云吉。氷世攸寧。墓詞無溢。秪述平生<끝>
명곡집 > 明谷集卷之二十四 / 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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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議政李公墓碑銘 壬午冬。此下碑銘。並同
西溪 李得胤 撰
公諱慶億。字錫爾。姓李氏。號華谷。其先慶州人。新羅初。有謁平者。爲六部大人。其後有金書者。仕高麗爲中原守。高麗之末。瑱爲臨海君。生文忠公齊賢。家益大。在本朝則平安觀察使尹仁。生昌平縣令公麟。取朴彭年女。有八子。黿居第三。號再思堂。師金宗直。及其禍。官終禮郞。是公五代祖。高祖渤。曾祖憬胤。俱以家難不仕。祖諱大建。進士。少游太學。推爲館中顏子。早沒。父刑曹判書贈領議政諱時發。才望重一世。母貞敬夫人高靈申氏。承旨應榘女。以光海庚申九月二十二日丙申生公。生有異夢。老人來授之以名。七歲。失怙。申夫人日夜提誨。公兄弟皆穎秀聰悟。業日進。仁祖二十二年甲申。庭試狀元。授典籍改禮曹佐郞。昭顯初喪。儀文多缺。考據裁節。輕重合宜。坐他事罷。明年。敍兵曹佐郞。轉正郞。出宰扶安。廉白簡嚴。民樂其治。三年棄歸。縣人追思立碑。己丑冬。敍禮曹正郞。庚寅。改司書。參修仁祖實錄。移拜正言。孝宗初元。上疏言事。略曰。治先立志。或安久弊。不能自振。或惑衆論。莫適所從。或始銳而不終。皆由志不立。殿下求治太急。事或無漸。禍釁旁生。遂以爲守常。可以無事。因循玩愒。此志不誠也。堅定聖志。確守不撓。以先王之治。爲必可法。使遠近曉然。則將見在廷策勵。各盡其心而萬事理矣。又曰。言路開塞。興喪係焉。卽阼之初。危言正論。日陳於前。近日含默成風。再求言。中外寂然。可不懼哉。答批優褒。辛卯。除直講。還正言。七月。濟州牧使金壽翼與旌義縣監安緝相失。上以濟海外絶區。將擇一御史按得其實。公受命按覈。緝武人。廉謹。憤壽翼縱妄漁貨。至按劍庭詰。公具其狀。還以聞上初意壽翼官貴。使者或爲之左右。及得公所言狀。嘉歎不已。罪壽翼等。皆如公言其啓陳事宜。多所罷行公。由是受知於上。公之在耽羅。詢民疾苦。會耋老宴公堂。布朝廷德意島民久不識王人。及見公儀度閑雅。簡而得體。皆歡忻抃躍。頌之至今。上謁陵。天未曉而炬火熄。橋圮馬蹶。大司憲趙錫胤。勘京畿觀察兪㯙罪。止奪告身。上怒。特罷錫胤。時又命衛駕勿用精抄軍。兵曹判書朴遾面得旨不行。後乃歸罪於吏。吏受訊將死。公爲正言。論錫胤議律失輕。非故用意。朴遾親承敎而諉諸吏。吏枉受刑。請無罷錫胤而問遾罪。上怒益甚。故先褫公職。諸承旨入對請收還。上益怒。安置公鏡城。刻日至配。令驛聞。人皆惴惴。公夷然就路。離京十八日而至配。大臣臺閣。多爭之。故未一月。量移洪川。明年春。放還。秋。敍兵曹正郞。不就。公嘗自言數月中南登漢挐。北臨長白。人生壯觀。無出於此。癸巳春復拜兵曹正郞。冬爲御史。按察嶺南一路軍政。時上方勵志修攘。郡邑惕息。公寬裕不苛。唯糾其不勤事不如法者。甲午。復命稱旨。復爲兵曹正郞。改司書正言。一日召見。玉色溫然曰。耽羅按事公正。予實嘉之。往時聲色太遽。予悔予過。益勉方來。以補不逮。因問父爲誰。大臣對曰。宣祖朝名臣李時發。時公兄春田公論事忤旨。經歲處散。特命甄敍。因奬諭諄諄。是日入侍諸臣。無不改容。夏。應旨論事。請勤學正心。求賢詰戎。立紀綱。破朋黨。又戒奢侈。言甚剴切。上爲立撤主第五十間。冬。特授弘交修撰。臺官以格外爭。不從。屢辭乃就。人皆爲華。公素羸多病。一日。上問春田公弟病近復如何。因賜以御藥曰。速待瘳入侍。乙未秋。又爲嶺南推刷御史。疾甚褫還。拜修撰。丙申。廉察畿甸。爲直講,兵曹正郞,校理,獻納,副校理。冬。擢東萊府使。疾復作。未行而改。御醫就視。疾藥取內局。恩數之隆如此。還玉堂。兼弼善。丁酉。轉副應敎。遷舍人。超授忠淸觀察使。言舊例。公私奴婢。父良母賤。從母。母良父賤。從父。用是賤隷日蕃而良民日縮。請自今男從父女從母以均之。如公議。定爲法。疾劇乞解。宰相難之。上曰。李慶億必不欺君。蓋知遇之盛。群臣莫及也。戊戌冬。爲同副承旨。褫爲刑曹參議。己亥。還承旨。五月。孝宗昇遐。顯宗宅恤。周旋近密。裨益弘多。歷大司成,大司諫,禮曹參議。辛丑。改工曹。遭內艱。癸卯。制除。拜兵曹參議。改承旨,大司諫,副提學。甲辰。又爲大諫,副學。疏規關失嘉納。已而。爲吏曹參議。乙巳。歷大諫,大成。爲都承旨。猶階通政。爲罕有。褫爲戶曹參議。兼承文副提調。改大諫。前後參議六曹。長薇垣玉堂成均。不盡記。冬。擢漢城右尹。謂版圖有國之重。戶籍法廢。民口不見實數。請申明舊制。嚴漏籍之法。無問貴賤。悉徙邊。從之。命公草定科條。始明年丙午。著爲令。夏。改大諫。兼備局有司。以前勞進階。兼同知義禁。改大司憲,刑曹參判。出觀察京畿。所管六郵集京城待事而舊無邸。寄食坊曲。公私俱病。捐奇羨買隙地以處。出穀百餘石。令郵官遞掌斂散取贏。濟其困乏。又立雇馬法。諸驛稱便。丁未。入爲都憲。遷吏曹參判。特授刑曹判書。訟獄疑滯。剖斷無留。而用法平反。積案遂空。移大司憲。先此。義州人越境。北使來討府尹當死。而又責大臣待罪館下。右相許積。密勸上自當上詣館北向叩頭。終以罰金論。府尹得不死。聞者駭憤。兩司合辭。幷劾三公。於是竄諸言者。公入臺以爲列大臣。使君上親當僇辱。固無以逃其責。但兩相方在館下。不暇入對。事出右相。乃幷及三公。不可獨論許積。請正罪。還收諸諫流竄。正言安塾。反劾公輕改重論。上黜塾。特拜公都承旨。力辭得褫。戊申。歷憲長,宗伯,左右參贊,判戶曹。精核要會。務加節省。宂費大減。秋拜吏曹判書兼知經筵。冬。使燕歸橐。散諸從役行。李蕭然。人服其淸。己酉春。還長秋官。移宗伯。春田公捐館。公代秉銓。司諫趙聖輔銜春田公抑已。無所逞憾。捃拾微過劾公。公出江上。懇辭不獲。遂入謝又辭益力。竟解銓。拜參贊。庚戌。兼右賓客,知義禁。金澄觀察全羅。盛賓樂壽其親。諫官金錫胄劾其侈濫。澄在臺閣。刺擧不避。前後所論五十餘人。至是而群憾蝟起。謂有大贜。逮澄下獄。按驗無實。論者持之益急。遂覆按。拘繫官吏。窮詰百端。時吳始壽實代澄素有怨。銖金尺布。計會捏合。文致其罪。公以次官當讞。諸怨家蜚謀搖撼。公不爲動曰。藉令澄事有濫觴。因壽親抵罪。已非孝理所宜。況再三覆按。終無汚迹乎。遂勘以那移官物奪告身。首相積尤恨於澄。詆公私護贜吏。公乞免。積上箚指爲玩法。公以是坐罷。俄就理奪職。澄竟謫海西。冬。特敍爲工曹判書。辛亥春。改宗伯兼賓客。屢辭不許。時冊世子。公勉就。冊禮成。復出江舍。申前懇。會疾。御醫診視。賜內藥。褫爲判尹兼知經筵,義禁。力辭不獲。秋。乃起視事。壬子。歷都憲參贊。夏。復長銓。進拜右議政。坐府未滿月而感疾。祈免前後皆不獲命。明年夏。進左議政。明惠公主當下嫁孟萬澤。旣涓吉。遽卒。上意憐之。欲無停萬澤所賜爵。成其爲夫婦。公言嫁殤非禮。事遂寢。公疾久沈痼。二十餘告而後乃去位。七月晦。竟卒。自有疾。醫問不絶。續賜內劑珍膳。言聞上震悼。輟朝弔祭如禮。官庀喪。祿終三年。十一月十一日。權祔鎭川先壟。後十年甲子五月三日。遷窆于淸安茅山負乙之原。其改葬也。地部又致所須。皆爲異數。公眉宇秀朗。美鬚髥。儀度溫雅而擧止端重。平居簡言辭。不妄喜怒。當官治事。存大體。略苛細。其立於朝。則執心公正。持論和平。事無詭。隨言不苟同。尤審乎邪正而晢於是非。素守確然。無所撓奪。與春田公爲善類領袖。顯宗嘗問鄭太和。公兄弟孰優。對曰。難兄難弟。上曰。先王每稱李慶億可大用。由是眷注日隆。公常言受累朝殊遇。無絲毫補報。唯以盡瘁爲期。其爲冢宰。屛請託抑僥倖。甄品流振淹滯。愼擇牧守。搜訪才行。疏名量用。仕塗爲淸。敦於友道。不以衆好惡爲取舍。少與徐必遠,金始振善。二公與世抹摋。訾謗紛然。平生知舊。疏棄者多。獨公兄弟。相與如初。人以爲難事。大夫人誠孝備至。兄弟旣貴顯。朝夕侍傍。非公事賓客。未嘗去左右。婉愉取悅。不異嬰兒。及大夫人屬疾經歲。公兄弟日夜不解帶。藥物膳飮必親。旣喪。執禮不懈。衰經不去體。與春田公篤愛。居則同臥起行止出處。相與爲知己。仲公先卒。則居閒處獨。悲念不已。祿賜必分其家。撫諸姪如子。諸姪之事公如父。家故淸素。苞苴不入於門。泊然若寒士。蓋其出則著忠侃之節。入則敦孝友之行。奉公恪謹。律身修潔。皆人所不及。晩年。兄弟迭秉銓衡。常懼盈滿。卜築樊塘。種樹疏圃。爲休退計。卒不果。疾革。欲還舊第。終于正寢。病深不得行。屬諸子勿請諡勿樹石神道。葬祭無豐侈。嘗有擧南藥泉語者曰。惟精也。故能成天下之務。公曰。惟淡可以成天下之務。又謂所親曰。凡人之於爵祿也。其來固宜無心。其去亦宜無心。於此二者。可以得公之所存。有詩文疏箚數卷藏于家。夫人海平尹氏。監察元之之女。婦德甚備。子姓蕃衆。擧三男二女。男寅熽校理。寅炳參議。寅燁參判。女適左議政崔錫鼎,縣監洪萬迪。寅熽三男。恒坤,衡坤,嵩坤。一女適尹顯敎。側室一男。寅炳二男。瑞坤,徵坤。二女壻。金文澤,宋必煥。寅燁三男。夏坤,漢坤,明坤。一女幼。崔一男昌大修撰。女二人。洪二男。重九,重五。女五人。世堂自幼識公。非他人比。公之使燕。又備下价。周旋有素。今於爲公墓道之銘。不敢以不文辭。謹據狀敍次事行始終。系之以銘。銘曰。
鳳獜龍龜。瑞異祥奇。其生有爲。叶靈昭治。豈常介鱗。毛羽比同。人亦宜然。我見於公。蜚英盛代。振華明時。難弟難兄。吹塤吹篪。按事海邦。始結上知。宣布德意。島民歡馳。憲兵三相。湖南之事。觸威犯怒。不顧顚躓。曁曁數公。與時相背。人棄我與。終卒靡悔。勢利奔趨。獨堅素守。洪濤震蕩。中流砥柱。世道交喪。至于今日。達識遐觀。興思嗟咄。我銘載石。垂之萬億。誰其來者。不昧斯刻。<끝>
서계집 > 西溪先生集卷之十二 / 碑銘 五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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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谷李相國行狀 - 崔錫鼎
公諱慶億。字錫爾。自號華谷。慶州人。始祖謁平。新羅祖王赫居世佐命大臣。是六部大人之一也。世爲名族。至諱金書。當麗祖之世。娶金溥王女。官三韓功臣中原太守。至諱瑱。檢校政丞。封臨海君。是生文忠公諱齊賢。用文章德業。爲高麗名相。世稱益齋先生。入我朝。有諱尹仁。平安道觀察使。生諱公麟。昌平縣令。娶朴醉琴彭年女。擧丈夫子八人。第三曰黿。禮曹佐郞。號再思堂。與金先生宏弼遊金佔畢宗直之門。罹甲子士禍。逮中廟中興。贈承政院都承旨。是爲公之五代祖也。高祖諱渤。贈承政院左承旨。曾祖諱憬胤。贈吏曹參判。兩世遘家難不仕。祖諱大建。成均進士。端雅好學。弱冠遊太學。人目之以館中顏子。不幸早世。贈議政府左贊成。崔簡易岦銘其墓道。考諱時發。號碧梧。才望重一世。文科判書。累贈議政府領議政。妣貞敬夫人高靈申氏。承旨應榘之女。擧二男一女。公其季也。以萬曆庚申九月二十二日丙申生。碧梧公方以贊畫使鎭西關。是夜夢。一皤然老人來告云生貴子。其以二字錫名。卽公之諱也。碧梧公書報夫人曰。疇昔之夢甚非常。生男也。宜以是名。使來而門弧已設。公生而穎秀超邁。先公鍾愛甚。七歲。先公捐館。大夫人慟不欲生者數矣。顧公與仲氏在髫齔未自立。大夫人撫而歎曰。吾捐吾生以從逝者。則誰與衛諸孤而俾有成也。於是節哀思屛組紝。精專其志。日夜以提誨公兄弟爲事。公聰悟異凡。不勤程督。而有日就之效。十歲。與仲氏出就外傳。學業大進。十七。遭丙子之難。避兵流落六七年。甲申九月。中別試初試。未及殿試。遂擢庭試狀元。仲氏公又登別試。長弟唱第以榮大夫人。時人莫不嘖嘖艶稱。以爲稀世事。例授成均館典籍。移禮曹佐郞。時昭顯世子新喪。公以該郞。斟酌禮文。動中規則。其時卿相皆歎奇之。未久。觸孝廟潛邸導辟坐罷。經年乃敍。除兵曹佐郞。陞正郞。丙戌冬。爲養得扶安縣。縣邊海。素稱饒物產。公律身廉白。治以簡嚴。居三年。焯有聲績。適與方伯不相協。投印而歸。民爲勒碑追思。己丑冬。敍復禮曹正郞。庚寅。移授侍講院司書。參修仁廟實錄。俄拜司諫院正言。時孝廟新卽位。公上封事條陳十餘事。略曰。竊惟治道有本而莫先於立志。夫志者萬事之根柢也。自古及今。未有志不先定而能成其事者。歷觀古昔人君。孰不願治。然而或安於積久之弊而不能自振。或惑於衆多之論而莫適所從。或始銳而不克于終。此皆由於志不立也。伏覩殿下毓德春宮。四方延頸。正位乾極。萬民拭目。渙發辭令。無非惠恤之音。引接儒臣。日講義理之學。亦嘗於筵中敎之曰。當以三代爲準。當是時。群下之望殿下。亦不在三代下矣。惟其求治太急。事或無漸。人心動搖。禍釁旁生。聖意遂沮。不復自勵。以爲專守常規。可以無事。喜怒任私。好惡靡常。致令君子無所恃而罔盡其忠。小人有所窺而欲售其奸。因循玩愒。大小悠悠。曾未閱歲。氣象頓變。此無他。莫非殿下有爲之志不誠故也。昔秦孝公見擯會盟。因思振作。遂得衛鞅。與謀國事。變革舊章。一國譁然。猶且斷然行之。竟伯西戎。以千乘之國。致一時富強之業。其所樹立如此。今殿下以聰明睿智之資。守祖宗丕基。思復三代。而其可不堅定聖志乎。臣願殿下確守有爲之志。終始不撓。惟以聖人之訓爲必當從。先王之治爲必可法。必期致世。如三代之隆。規模條理。默定於睿算之中。使遠邇臣民。曉然知聖意所向。則天生一世才。自足了一世事。將見在廷策勵。巖穴畢臻。各盡其心。大小率職而萬事理矣。又曰。言路之開塞。國家之興喪係焉。自古聽諫之主。不獨爲來天下之善。亦所以通上下之志也。殿下卽阼之初。上自朝紳。下至草茅。危言正論。日陳於前。間或有狂妄之說。而言路則可謂開矣。夫何近日以來。含默成風。再下求言之敎。中外寂然。如使朝無闕遺則已。世不唐虞。安得至斯。人知殿下之志。在於虛文而無實用。故皆以爲上疏陳忠。都是空談。是殿下失信於萬。民也。可不懼哉。又曰。館學儒生。尊事先儒。請擧盛典。不卽允許。實出於聖意之愼重。而搆虛詬辱之徒。亦且包容。不斥其非。以致國是靡定。擧一世章甫莫知趨向。至於領府事趙翼之前後申辨。只出於痛師門之受誣。何嘗有偏係之私。而殿下累示厭薄之色。使白首老臣不安於朝。何殿下待大臣。反不如辱賢之悖士乎。又曰。臣願殿下存心精一之學。涵養本源之地。應物接事之際。猛加省察。絶去將迎。廓然大公。推誠御下。使言路洞開。是非歸正。以致上下交孚之吉。又曰。嗚呼。國家當變故積衰之餘。水旱荐臻。乾文示警。民生有倒懸之急。國家如綴旒之危。卽今天命人心去就離合之機。惟在於殿下之一念。可不思所以上弭皇天之怒。下慰兆民之望乎。爲國之道。最忌委靡苟安循常。初若無事。及其危亡猝至。匡救無策。臣每觀晉魏趙宋之季。君無桀紂之暴。臣無亂惡之罪。而日就不振。竟蹈慘禍。未嘗不痛惜以爲後世人主之一大鑑也。誠願殿下勿以架漏牽補。姑爲目前之計。及是時。修明政事。固結人心。以爲祈天永命之圖。上優旨褒答。辛卯。除成均館直講。復拜正言。其七月。以按覈御史。承命濟州。時濟州牧使金壽翼與判官安緝相失。遂馳啓請罪。上以濟是海外絶區。要得公忠剛介之士。按其寶狀以處之。朝議咸曰。無如李某賢。遂命公。公聞命卽行。至則窮覈事原委。通判武人也而廉謹。憤壽翼縱妾漁貨。至於按劍庭詰。而枉多在府伯。公不以剛柔爲吐茹。執彼此曲直衷裁之。仍詢訪民瘔苦。會耋老觴于公堂。宣布朝廷德意。蓋自金淸陰尙憲奉使耽羅之後。島民始見王人。而公儀度簡而能禮。施措誠而得體。人皆仰望。欽歎歡欣。抃躍頌說。久而不衰云。十月復命。初上或慮其以文武爲左右。及覽公奏狀。指次明詳。靡所縱入。按事無絲毫盭。於是上大加稱賞。論金壽翼等罪。一依公所奏。又令廟堂採施所陳人瘼事宜。多所罷行。公之受知孝廟。蓋由於此。先是上幸陵寢。中途炬熄。橋梁又圮拆。致御乘蹶。上驚怒。命憲府奏當京畿監司兪㯙罪。時趙樂靜錫胤長憲府。勘以公罪。止奪告身。上以擬律太輕。特罷趙錫胤。又上命兵曹。勿用精抄軍。充行幸衛士。兵曹判書朴遾實面承王旨。不果奉行。事覺。乃歸罪吏胥。曹吏受刑訊將死。公時爲正言。論此兩事曰。憲府奏當太輕。雖有其失。必不爲兪㯙用意。低昂其間。且先王實錄垂完。不合附諸新手。勿用精抄軍事。朴遾親承上敎。而未及傳宣。及其生事也。推諉吏胥。該吏不敢首實。枉受嚴刑。朴遾可拿問。而錫胤之罷可還。趙公以兼帶大提學。方修仁廟實錄故公云然。於是天威大震。批旨極嚴。因下敎政院曰。正言李某。爲先遞差。諸承旨登對請還收。上益怒。謂諸承旨曰。兪撤事。予亦非謂其故犯其罪也。身爲道臣。不能檢飭。至於炬絶橋斷。令君擧狼狽。論其罪罰。何爭公私字乎。今者李某敢請還收趙錫胤。而大提學亦請勿出其代。其意果安在哉。朴遾至請拿問。此亦可怪也。上又曰。罷職薄罰。李某何敢汲汲救解乎。若少有尊朝廷之意。不得乃爾。且實錄。乃萬世公論。李某何敢以錫胤爲宜專任。又下敎曰。侮君弄法之徒。非人臣所可容護。而前正言李某敢以罷職薄罰爲過。至請還收。鷹鸇之逐鳥雀。固如是乎。人臣之道。可謂掃地矣。此是護黨之習。不可不嚴治杜截。李某其安置北邊。以重國法。以肅王綱。仍督責禁府曰。李某定配單子。何其不卽入啓耶。又敎曰。李某到配。若不及定限日子。押去羅將。難免重究。其嚴飭以送。又召致羅將差備門。問程途。刻期限二十二日到配。又令本道驛聞到配日子。王府以鏡城擬配所。命卽日發送。時季冬天寒。大雨雪以風。不敢頃刻滯留。威怒之震疊。行遣之嚴急。卽位後未嘗有也。人皆惴惴危慄。公夷然就路。離京十八日。到配所。道臣卽狀聞。大臣及臺臣爭之。強命量移于洪川。公到鏡城僅二十餘日矣。其明年二月。始疏釋。時仲氏春田公方宰湖南之高山。大夫人在其官所。遂自洪川。往覲大夫人高山。仍僑住益山邑村。取其覲省之便。秋。蒙敍除兵曹正郞。不就。冬。仲氏公內遷弘文館校理。癸巳春。公亦還京第。公屬從耽羅還。旋有北關之行。居恒自言數月之內。南登漢拏。北臨長白。男兒壯觀。無出余右。復拜兵曹正郞。冬。以按察御史。往嶺南。察一路軍政。時上方勵志於修攘。申明科條。鍊卒伍繕器械。少有疏虞。輒以重律繩之。守宰聞繡衣將命。莫不相顧惕息。公按行列邑。顓尙寬裕。不事苛嬈。使戎務無闕。服習有方。其善敹不勤。坐作不如法者。紏擧無所避。甲午竣事還。稱旨。拜正言,司書,兵曹正郞。一日上召公賜對。玉色溫然。仍敎曰。爾曾奉使耽羅。按事甚得公正。予實嘉之。往時嚴譴。是予聲色太遽。予悔予過。爾無懲。益勉方來。以補不逮。仍問于筵臣。李某之父誰也。左相元斗杓對曰。是宣廟朝名臣李時發之子也。時仲氏在經幄。論事忤旨。命銓曹勿付職。且經歲矣。特命甄敍。以示眷遇之意。奬諭諄諄。是日入侍諸臣。無不灑然改容。夏。復拜正言。因水災應旨上封事。請上勤學正心。求賢詰戎。立紀綱破朋黨。疏末又陳奢侈成風。主第宏麗。其言明剴痛切。上覽疏嘉歎。賜以優批。立命撤去主第五十間。其冬。特旨拜弘文館修撰。臺臣以不階薦錄。事出格外爭之。上答曰。近來弘錄極混雜。闒茸居多。全無圈點簡選意。爾等何必駭視君上之命。而獨歸重以弘錄爲名者乎。良可歎也。未數日。臺啓旋停。公屢辭不獲。出謝恩命。先是公名入於本館錄。及至都堂會圈。有忌之者。少一點不得與。物論稱惜。至是膺聖簡。人皆以爲華。一日上於經席。招問仲氏公曰。爾弟之病。近復如何。怔忡尙爾否。仍命賜御藥。又敎曰。使速瘳而入侍焉。乙未秋。又以推刷御史。往嶺南巡歷未半。疾甚遞還。復拜修撰。丙申。又以暗行御史。廉察畿甸。自成均直講,兵曹正郞。移弘文校理。又自獻納。移副校理。冬。擢拜東萊府使。舊痾復作。大臣陳病難赴任狀。卽許遞。仍命御醫就私第視疾。藥物取給於內局。蓋異數也。復入玉堂。兼弼善。丁酉。以副校理。陞副應敎。遷議政府舍人。秋。又擢拜忠淸道觀察使。其治以敦薄俗戢貪吏爲要。國俗私奴婢從其母爲賤奴。娶良妻則又從其父屬賤。用是私賤日蕃而良民日縮。識者病之。公狀陳其弊。請男從父役。女從母役。俾公私俱便。又請先試一道。推行於八路上令廟堂覆啓允之。有營將病不任事。公馳啓請遞。廟議疑其圖免不許。上曰。李某盡心國事。必不循私。竟遞之。公瓜期已迫。舊患復谻。申狀乞還。上亦令備局覆啓。廟議難其遞。上又曰。李某必不欺君。特命遞還。其和遇之盛。群臣莫能及也。戊戌冬。拜承政院同副承旨。遞授刑曹參議。己亥。復爲承旨。夏五月。孝廟禮陟。顯宗卽位。當宅恤之初。周旋近密。裨益弘多。時同春宋公浚吉爲國子祭酒。誘掖多士。輪日講學。於是大司成缺。博選時望。朝議屬于公。遂拜大司成。移大司諫,禮曹參議。辛丑。爲工曹參議。夏遭大夫人憂。癸卯制除。拜兵曹參議。移承旨,大司諫,副提學。甲辰。又自大諫移副學。時上答群臣疏章。多失平語。至有侮君蔑視之敎。公疏言此乖聖人中和之發。又非明君使臣以禮之道。上嘉納。遞爲吏曹參議。乙巳。又歷大司諫,大司成。爲都承旨。世以階通政知申事爲極選。遞授戶曹參議。兼承文副提調。又拜大諫。前後歷六曹參議。長諫院,玉堂,國子不盡記。冬。擢拜漢城府右尹。我國戶籍法。久廢無其實。公以爲版圖有國所重。而今八路民戶人丁。不知實數。何以爲國。不可不申明舊制。遂筵白請講行。特嚴漏籍之律。毋問貴賤輒徙邊不少貸。上命公草定科條。自丙午式年爲始。著爲絜令。夏。移拜大諫。兼備邊司有司堂上。又以知申時嘗藥勞。賞加一階。兼同知義禁。又拜司憲府大司憲刑曹參判。兼司譯提調。出爲京畿觀察使數月。銓曹啓請拜副學。以北使將至。道臣不可遷。相臣白仍之。其治類湖西。畿有六郵。恒輳集京師而素無邸。各竄閭巷間寄食借宿。爲弊不貲。公捐營俸奇羨。買隙地構舍。以館各驛夫馬。又斥給營穀百餘石。使郵官遞掌斂散。取贏餘以濟其饑乏。其後又刱雇馬法。驛遞皆稱便。至今賴焉。丁未。入爲都憲。遷吏曹參判。亡何特拜刑曹判書。曹多疑訟滯獄。積久未決。公輒櫛爬辨析。積案遂空。用法務平反。移長憲府。先是北使來。以邊民越境採蔘。歸罪灣尹。事將不測。且責大臣。使待罪館所。右相許積獨請對密勸上自當。於是上詣館所。北向叩首。終以罰金論。聞者莫不駭憤。於是兩司合辭擧劾。而以獨論積。爲有黨目之嫌。遂並及三公。上命竄諸諫臣。公以爲泛論則身爲大臣。使君父親當僇辱。領左相亦不得逃責。第其兩相方待罪館門外。靡暇入對。又不知密勸事。獨右相可劾。今乃並論三公。欲掩黨目之嫌。是豈論事允當之體乎。及是公以憲長連啓。而去領左兩相。只論積。仍請還收諸諫臣流竄者。正言安塾以輕改重論反劾公。上下嚴旨。遞安塾職。黜補耽羅屬縣。特拜公都承旨。公情勢難安。控辭甚力。上諒其意。許遞。戊申。又歷大司憲,禮曹判書,議政府左右參贊。拜戶曹判書。戶曹掌金穀。費煩而務劇。公精核要會。務加節省。未數月。宂費大減。經用不匱。秋。進拜大冢宰。兼知經筵承文院觀象監宣惠廳掌苑署提調。冬。差冬至使赴燕。諸所得橐中藏。盡分諸一行官役。及其歸也。行李蕭然。人皆服其淸操。己酉三月復命。拜刑曹判書。移禮曹判書。其六月。仲氏公以冢宰捐館。公代仲氏。復秉銓。時司諫趙聖輔摭公赴燕時觀燈事劾之。先是仲氏在銓。惡聖輔附離形勢。躁競無檢。抑不用。以此深嗛之。至是專逞私憾。人莫不非之。而上亦竟不允。公旣被劾。卽出江上。連章懇辭不獲。遂入謝。又出城辭益力。得遞拜參贊。庚戌。兼世子右賓客,知義禁府事。時全羅監司金澄爲母設宴。金淸城錫胄以諫官劾澄宴需侈濫。請罷職。澄前在臺閣。刺擧不避權貴。前後所論凡五十餘人。於是群憾因之修郄。乃請拿問。査其宴需金帛。及査啓上。無侈濫可抵大罪。論者持金澄益急。謂前査多爽。又請更査。逮繫官吏。百端窮詰。至以銖銀尺布。搆成罪案。欲置贓律。時判義禁亦曾見彈於金澄。嫌不讞奏。上命次官議罪。公當其事。諸家蝟起蜚謀。設巧撼搖。無不至。公不爲動。乃與同僚相議曰。藉令金澄宴需有濫觴。因壽親抵罪。已非孝理所宜。況今再三覆按。終無汚跡。不可以贓律繩之。以其那移會簿物。從輕擬律。似合於觀過知仁之義。遂勘以奪告身。領相積亦嘗累爲澄所劾。於公會。大言斥公不避親嫌。私護贓吏。澄卽公中表兄弟。國法無相避。物論皆以爲不可以疏屬之故。創法外嫌避。公亦嘗慨然曰。安有孝理之下。爲親設宴而獲罪乎。況且乘時搆煽。必欲中傷。尤非淸朝美事。雖有中表戚誼。法無應避。畏衆怨而不當讞奏。非直也。遂擬以輕律。大爲積所詆。公陳疏乞免金吾。上答以溫批。積又上箚斥以玩法。語深峻。命罷公職。俄又就理奪告身。金澄謫海西。公出獄。僑居鷺江村舍。冬。特命敍復工曹判書。又拜禮判。兼世子賓客。累辭皆不許。時將行王世子冊禮。公入城過冊禮。又出江舍。申前懇乞解諸任。適患寒疾。遣御醫診視。賜內藥。遞爲漢城判尹。兼知經筵義禁。又帶槐院太僕宣惠瓦署提調。章疏頻繁。終不許副。秋。入城供職。壬子。爲都憲,參贊。夏復長銓曹。章累上。批旨隆厚。公乃出供仕未幾。進擢右議政。累辭始拜。公坐府纔廿餘日。感疾彌留。累引疾控免而不獲命。明年夏。進拜左議政。時明惠公主將嫁新安尉孟萬澤。有吉日而公主夭逝。上意憐之。欲仍存都尉爵秩。成之爲夫婦。公引邴原所論嫁殤非禮事。陳其不可。事遂寢。病涉夏沈痼。呈告二十餘度。始得遞。例判中樞。竟以癸丑七月晦。卒于皇華坊寓舍。春秋五十有四。自感疾。上屢遣醫診視。續賜內劑珍膳。及訃聞。上震悼輟朝三日。遣近臣致弔賜祭。官庀殯窆如禮。仍命給祿終三年。其十一月十一日。權厝于鎭川草坪先兆。其後十年甲子五月三日。永窆于淸安茅山辛向原。上聞其將改葬。命該曹優給葬需。終始隱卒之典。皆異數也。公性溫雅端重。言辭簡寡。體瘦勁。眉宇秀朗。美鬚髥。平居不妄喜怒。雖在僕隷。未嘗疾言呵叱。亦不窮斥過失。其當官理職。存大體務簡約。掃除一切煩苛。宅心公正。持論和平。事無詭隨而不至於激。言無苟同而不及於礉。當其權衡人物。黜陟賢不肖。一視其人。未嘗以黨目有所偏。愛惜人才。雖賤必收。至或是非邪正所在。直前無所諱。素守確然。不爲親故形勢所撓奪。一時儕友莫不斂袂而推重焉。與仲氏同時立朝。蔚爲善類領袖。自辛卯耽羅之役。奉使稱旨。受知孝廟。遭遇之盛。冠絶群僚。顯廟在宥之初。中朝而問首相鄭太和曰。李某兄弟孰爲優。鄭相對以難兄難弟。仍下敎曰。先王每稱李某可大用。自是眷注日隆。公常曰。吾受累朝殊遇。無絲毫補報。唯以盡瘁爲期。居官臨事。務盡其誠意。雖劇任繁務。未嘗毫有慢憚色。其爲冢宰也。每歎仕路淆雜。屛請托抑僥倖。淸品流振淹滯。愼擇牧守。籍記蔭吏。有聲績者。次第調敍。尤致意於初入仕。以爲生民休戚。係於守令。守令之賢不賢。實由初仕之得人。搜訪一時才行之士。疏名冊子。量能授職。春坊賓僚。加意愼簡。不以時勢輕重有所撓。牧伯人不敢私求。官方爲之一淸。敦於友道。不以衆好惡爲取舍。少與徐判書必遠金參判始振善。二公與世抹摋。訾謷者衆。親友多排根。而獨公兄弟交誼不少渝。人以爲難。公早孤。事大夫人。誠孝備至。旣壯。愉婉如童齔時。常與仲氏朝夕侍傍。非公事賓客。不暫時離側。致其融洩之樂。凡祿俸饋遺。悉以奉大夫人。有所用。必請焉。大夫人屬疾經歲。公曁仲氏。日夜不解冠帶。藥物膳飮。必親嘗視。或爲諧笑戲謔。取悅大夫人。無不至。及丁憂執喪。一遵禮節。衰絰不去體。未嘗離廬次。與仲氏迭往墓所。朝夕臨。風雨不廢。旣服闋。與仲氏恒同處。和怡湛翕。迥出常倫。盤羞有異味。輒相分。及仲氏沒。內除踰年。猶抱深戚。居閑處獨。涕泫然。悲念不已。每過仲氏門。必爲之慼然疚懷。勅前導毋爲呵辟聲。常時廩祿。得必分之。以恤其祀。撫養諸姪。勤勤訓誨。人不見與己子間。諸姪事公。亦如仲氏存也。孝友之行。人皆歎服。推之睦婣。亦盡其誠意。從母年老孀居。家甚貧。公事之甚謹。衣食必相周。從母有急。則取資如外儲然。家故淸素無產業。輒丐貸以供給。平居不問有無。苞苴不入門。餽遺稍過節。輒却不受。於紛華侈靡。泊然無所好。居處衣食若寒士。每戒諸子女斥奢從儉。以故一家諸子弟婦女。雖盛宴會。不敢服珠翠錦綺。雖素嗛公者。亦一口稱其淸儉。公雅恬於勢榮。視世之汲汲趨競者若浼。晩年名位隆盛。兄弟迭秉銓衡。恒以滿盈爲懼。與仲氏相對。輒相戒曰。不如早退。以免大戾。嘗卜築于鷺江之樊塘。種樹疏圃。以爲終焉計。顧天眷彌摯。位益重。不得便決退伏。而公遽沒矣。不佞嘗擧藥泉南相國語曰。惟精也。故能成天下之務。公聞而應之曰。惟淡可以成天下之務。斯言也嘿契道妙。非循襲前人語。又嘗敎不佞曰。凡人之於爵祿也。其來固宜無心。其去亦宜無心。可見其超然於得喪之際。而於此二者。亦可以得公之禖韻矣。公每哂世之挽誄碑碣。多溢美無實。疾革。屬諸子曰。吾受國厚恩。致位卿相。而無功業可紀。愼勿求挽詞。勿請諡。勿樹石神道。葬祭亦從簡約。毋豐侈。以徒悅人目爲也。又曰。若不考終于正寢。而皐復於寓館。未免爲遺恨。試舁我還舊第。俾以禮終。雖以疾甚不得行。而其不欲斯須違禮之意。可槩見矣。公文才天得。早登科第。雖不復治筆硏。以詞翰自居。而詩律淸緻。一時騷墨諸公。亦多推許。有詩文疏箚數卷藏于家。夫人海平尹氏。名相斗壽之曾孫。監察元之之女。祥順而莊重。衷和而外方。婦德甚備。事姑盡其誠。奉君子無違則。處妯娌無間言。訓子女有法。御婢僕嚴而惠。名家婦女。慕以爲法。晩年福德愈盛。子姓蕃衆。孝養備至。嘗從往長男杆城郡。二子同擢文科。設聞喜於官舍以娛之。季子以前任翰林同侍。榮觀赫然。歌詠播傳。一世人爭心艶而樂道云。少公一年生。享年七十有四。擧三男二女。男寅熽初筮蔭仕。至郡守。晩擢文科校理。寅炳魁文科。與其兄同榜。今爲弘文館應敎。寅燁亦文科。今爲黃海道觀察使。女適右議政崔錫鼎,司僕主簿洪萬迪。校理三男恒坤,衡坤,嵩坤。女一人。側男一人。應敎二男瑞坤,徵坤。二女適金文澤,宋必煥。觀察三男夏坤,漢坤,明坤。女一人。曰一男昌大修撰。女二人者。崔氏婦出也。二男重九,重五。女五人者。洪氏婦出也。錫鼎少而入甥館。深被覆露。今髮已種種矣。於公之平生。自謂粗得其一二。謹序次公官歷事始終。爲行狀。亦不敢曼辭以誣逝者云。<끝>
명곡집 > 明谷集卷之二十八 / 行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