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태 목사 취임식 권면의 말
조원태 목사의 취임식에서 권면의 말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는 주저했다 1.
목사 취임식에서 권면의 말이란 거의 무의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한다 해도
대체로 그것은 마이동풍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마다 제 나름의 신학과 목회관이 있다.
취임식에 아무리 장광설을 한 대도
그것은 무의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원태 목사의 경우는 좀 다르다.
권면의 말이 필요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달포정도 이 믿음장로교회에 와서 섬기는 동안
선임 목사는 물론이요
온 교회가 그렇게 좋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설교나 기도나
교인들을 돌보는데 그렇게 만족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목회를 잘하시는데 무슨 권면이 필요할 것인가?
그의 경력을 보아도 부족한 곳이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나와 조목사는 어딘가 서로 기가 통하는 것이 있다고 느껴저서
성서를 통한 나의 선교관이
그에게 도음이 될 수 있으리라고 느껴저서
성서를 통해서 내가 깨달은 제자직에 관해서 간단히 이야기 해 보기로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다 예수님의 제자이다.
특히 목회자는 그렇다.
성서에서 제자란
스승이 사시고 가르치신대로 사는 자들이다.
그 예수님의 선교의 핵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님은 어떻게 그것을 이룩하셨는가?
으리는 이것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이 선교의 핵은
“뜻이 하늘에서 이룩된 대로 땅 위에서도 이룩되게 하는 것”이다.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뜻을 이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일에 충성을 다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서를 통하여 세 곳에 이것이 명확히 표현이 되어있다.,
첫째로 떠돌이 아부라함에게 주신 야훼 하느님의 약속이다.
둘째로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따 하늘에 나타난 춘군천사들의 노래다.
셋째로 성서 제일 마지막 장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노래다.
부평초와도 같이 떠돌이가 된 아부라함에게
야훼는 세 가지 약속을 주셨다.
첫째로
발 부칠 곳이 없게 된 아브라함에게 야훼 하느님은
삶의 터전이 되는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사람이란 누구나 물질적인 삶의터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떠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에 별 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서로 사랑과 인정으로 물질을 나누어 인정어리게 사는 무리들이
하늘에 별처럼, 땅에 모래처럼 많게 되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런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떠돌이로 상징이 되는 각 가지 비극이란
탐욕과 힘의 철학에 사로잡흰 민족들 사이의 투쟁이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인류적인 평화를 이룩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역사 경륜의 지향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시작이 될 것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그가 태어났을 때 천군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의 사랑을 받은 자들에게 푱화."
이 때까지는 약육강식의 참극 때문에 하느님게 욕이 돌아갔으나
앞으로는 예수님이 열어주신 생명의 길 때문에
하느님에게는 영과,
땅 위의 인류에게는 평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계시록 제 마지막 장에 있는 새 하늘 새 땅의 이야기는
하늘 위에서 이룩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땅위에 이룩될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이 된 이 새 도성의 그림이 그것을 말해 준다.
이 도성에 하느님이 친히 임재하시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씽서 주실 것이란다.
그 곳에는 죽음도, 슬픔고 울부짖음도 공통도 없을 것이란다.
그가 나날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곳에는 성전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그 곳에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보좌에서 흐르는 생명강이 그 도성 한 가운데에 늠름히 흐르고
그 죄우에는 철마다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서 있어
아무도 먹을 것에 염려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동산에는
만국 백성들이 손에 손을 잡고 거닐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역사 경륜의 지향점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하느님의 역사를 주시해야 한다.
이 낙원으로 가는 길에
갈릴래아 청년 예수님이 앞장을 서셨다.
이제 우리는
그가 삶과 말씀으로 깨우쳐 주신 그 길을 가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명확히 깨닫지 못하고는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 평화로운 낙원에 들어갈 수도 없고
이웃을 그 곳으로 인도할 수도 없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셨는가?
첫째로 그는 아파하셨다.
청지적으로 억압과 수탈을 당하고
종교적으로 죄인취급을 받아
제도 사회에세 완전이 밀려난
처참한 갈릴래아의 떠돌이들을 보면서
그는 그지없이 아파하셨다.
하느님의 심정을 체 받은 그는
어려서부터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악랄한 참극을 보면서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시면서
30 년이라는 기나 긴 세월을 지내셨다.
그리면서 삶을 처참하게 하는 악이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무엇이 이 세상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지를.
끊임없이 물으셨다.
그리고 평화로운 새 내일을 창출하는 길을 깨우쳐 달라고
야훼 하느님에게 호소를 했다
이렇게 갈구하는 그의 영이
아버지와도 같은 하느님의 영과 기화를 했다.
그렇게 해서 첫째로 발견한 것이 악의 정체다.
그것을 우리는
그가 받은 세 가지 시험에서 명확히 본다.
그 첫째는
물건이 많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물질주의다.
모두가 많이 소유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끝간데를 모르는 탐욕을 조장한다.
그 탐욕은 약육 강식을 초래한다.
당시 유대나라가 그랬다.
갈릴래아에서 이룩된 참극을 보라.
갈릴래아는 유대나라의 곡창이다.
그러나 그 농터에서 뼈빠지게 일하느 농민들은
모두 소작인이 아니면 날품팔이었다.
그들이 생산하는 곡식은 거이다
도시에 사는 지주들의 창고를 채운다.
많은 것이 문제 해결이 아니다.
문제는 서로 나누는 인정이 없는 것이다.
사랑으로 서로 나누라는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이 문제다.
두 번째 시험은
힘의 철학에 복종을 하면
이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독차지한 것이라는 사탄의 속삭임이다.
세상의 모든 영웅 호걸들은 다 이 시험에 넘어갔었다.
다윗 왕을 위시한 유대나라의 왕들도 다 이 시험에 넘었깠었다.
예수님은 이것을 꿰뚫러 보셨다.
그래서 그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시었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칵로 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시험은
성전 꼭때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천사를 보내어
발이 돌에 부디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따르는 종교를 통해 오는 시험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자시의 용망대을 위해 사옹하라는 시험이다.
사실 종교를 통한 시험처럼 이기기 힘든 것이 없다.
이것은 유대교 뿐만 아니라
현실 교회에서도 너무나 자주 보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이것 역시 단호히 거부하셨다.
대 사제들이나 유법주의자들의 죄악성을
너무나 명확하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영과 통한 그는
하느님이 이 역사 안에서 이룩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깨달았다.
그것은 물질이란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물질 때문에 걱정하는 자가 없는 공동체를 이룩하라는 것이다.
힘이란 남을 누르고 수탈하는데 사용할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서 약자들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인정공동체를 이룩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을 안다고 교만해 져서
정죄하는 일에 열중하는 자들을 질책하면서
서로 용서하라고 타이르셨다.
일곱 번식 이른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돌아온 탕자를 용서한 아버지처럼
서로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그는 개척하는 선교의 길에 나서시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새 내일 창출의 도상에 나서시었다.
그의 선교의 표어는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목전에 이르렀다."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세 가지의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이다.
모두가 가는 그 넓은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누고 섬기고 용서하는
찾는 자가 적은 좁은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선교를 어떻게 이룩하셨는가?
우리 목회자들은 "설교"를 우선시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접근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목자없는 양과도 같이 유리방황하는 무리들에게 내러가시어
굶주린 자들과 식탁을 같이 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최책감에 시달린 자들에게 사죄를 선포하시고
열등의식으로 병든 자들에게
"너희들이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깝다"고 선언을 하셨다.
그리고 그의 사랑의 품에서 이룩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보시면서
"너희들 사이에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었다" 고 선포를 하셨다.
이와같은 그의 사랑의 선교가 놀라운 기적을 이룩했다.
열등의식과 죄책감
원한과 질투로 뒤범벅이 되었던 그들이
에스겔 골짜기에 정병처럼
늠늠하고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이다.
시기 질투가 아니라 감사와 감격에 찬 새 내일의 역군이 된 것이다.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이룩되는 것을 보시면서 비로소
예수님은 입을 열어 진리를 깨우치셨다.
물질이란 사랑으로 나누는 것이라고.
부자 청년처럼 물질을 독점하여 창고에 가두어두면
참된 삶의 기쁨과 보람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느님과 돈을 더불어 섬길 수가 없다고.
예수님이 왕좌에 앉으실 때
그의 좌우편에 앉겠다고 시기 질투하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하셨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백성들을 억누룬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아니된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내려가서
형제의 발을 씼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
그리고 그는 허리에 수건을 두루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씼으셨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타락한 유대교를 질책을 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속에는 냄새나는 탐욕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성의를 입고 거룩한 척하는 자들이란 음부에 떨어질 것이라고.
그들이 엄수하는 안식일 법, 성결법등도 무시하셨다.
사람이 중요한 것이 사람이지
그들이 만든 법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선언을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상종하지 않는 죄인들, 이방인들을 오히려 더 중시 하셨다.
그들이 악한 세대의 희생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거룩하다고 여기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채찍을 들고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추방하시면서
"만민이 기도하는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질책을 하셨다.
이렇게 외치자
거룩하다고 자처하는 무리들은 그의 삶과 말에 반박을 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맛보게 된 떠돌이들에게는
그의 말씀이 그렇게 진리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예수님의 말씀은 새롭고 권위가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말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감탄을 하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속삭이는 듯이 말씀을 하셨다.
"중요한 것은 새 마음이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선한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속에 탐욕과 권세욕이 가득차 있으면 악한 열매가 맺힐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의 이름까지 오용하면서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려 한다."
중요한 것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새 마음이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 선민아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다가 비참한 종말을 마지하게 되었고
그를 받아드린 세리외 죄인들,
그리고 천대받은 사마리아 사람들고 이방인들은
새로운 생명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들,
특히 목회자가 되려는 자들은
이 예수님 선교의 비결을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