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흘린 눈물은 예레미야애가에 완전히 스며져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한국전쟁보다 훨씬 더 비참했다.
전쟁 후 파괴되고 불질러 떠난 자리에 남아있는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은
지독한 굶주림에 죽어갔다.
길거리에 혼미한 영혼들 특별히 어린 아이들에게는 가난이라고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난이라 함은 웬지 버틸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가난하지만 살수는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폐허더미 위의 어린 아이들은 끌려간 부모를 부르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남겨진 노인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양식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장면들은 민족이 회복될 때의 약속의 상황, 곧 예루살렘 거리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노는 행복한 때와 뚜렷이 대조를 이루어져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만든다.
이를 바라본 예레미야의 눈은 눈물로 충혈되고 내장이 끓어 올라 아무 말을 할 힘도 없어졌다.
우리가 경험한 가난은 상대적인 가난이었다.
남들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상대적인 가난은 언제나 슬펐다.
쌀밥을 먹고 싶고, 고무신을 그만 신었으면 좋겠다는 그래도 살만한 가난은 우리에게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가난에 신음하는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그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의무 혹은 사명일 것이다.
이미 그 일들을 한국의 교회는 실천하고 있고 우리도 실천해야 한다.
나눔은 하나님의 손길이다.
누군가를 도울때 우리는 에너지를 느끼고 만족감, 자신감, 평온이 생긴다.
[누구나 사랑할 수는 있지만 주는것 없이 진정으로 사랑을 할 수는 없다]
이현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