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생졸년] 1547년(명종 2)~1634년(인조 12)
▲덴리(天理)대학이 소장 중인 오리(梧里) 이원익의 영정.
▲오리 이원익 선생 영정 / 크기 966 x 1990
▲작자 미상, 〈이원익초상〉, 1604, 비단에 채색, 167 × 89㎝, 보물 제1435호, 충현박물관.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된 이원익의 초
상이다. 대체로 17세기 초 공신상의 전형을 보이지만, 유난히 높게 표현된 관모 때문에 제작 시기 판정에 이견이 있다. 사진 충현박물관 제공.
■이원익(李元翼)
조선 중기에,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한성부 출신.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李礻+多)의 4세손이며,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기수(靑杞守) 이표(李彪)이다.
아버지는 함천성(咸川正) 이억재(李億載)이며, 어머니는 감찰 정치(鄭錙)의 딸이다. 강서(姜緖). 조충남(趙忠男) 등과 교유하였다. 키가 작아 키작은 재상으로 널리 불렸다. 1547년(명종 2)에 태어나 1634년(인조 12)에 사망했다.
1574년(선조 7) 황해도 도사가 되어 병정을 정비했고, 1587년 안주목사로서 기민 구휼과 민생 안정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나자 명장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탈환했고 1595년에는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일했다.
광해군 재위기에 왕에게 올린 직언이 수용되지 않자 병을 이유로 낙향했다. 인조반정 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청빈했고 인조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았다.